扶餘大鳥寺石造彌勒菩薩立像(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보물 제217호 시대 = 고려 높이 = 10m
扶餘 大鳥寺 圓通殿 木造菩薩坐像(부여 대조사 원통전 목조보살좌상) : 시도유형문화재 제205호 시대 = 조선
木造 菩薩坐像(목조보살좌상)
관세음보살께 예배하는 좌우보처인 남순동자와 용왕
황금새가 날아 내려와 미륵보살로 화현한 미륵도량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구교리 성흥산(聖興山) 자락의 대조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입니다.
대조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데 부여읍지(扶餘邑誌)에 의하면 인도에 가서 범본(梵本) 율장(律藏)을 가지고 돌아와서
백제 불교의 방향을 중흥시킨 겸익(謙益)이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사적기(寺蹟紀)를 참작하여 기록한 현판에 의하면 대조사는 527년(성왕 5년) 담혜(曇慧)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창건주에 대한 설은 다르지만 대조사는 6세기 초에 창건된 천년고찰입니다. 두 기록이 다른 까닭은 알 수 없으나 6세기 초에 건립된 것은 확인된다.
그후 고려 원종때 진전장로(陳田長老)가 중창하였고, 20세기에는 명부전, 종각, 미륵전을 각각 신축하였으며,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용화보전,
명부전, 산신각, 범종각, 요사채 등이 있는데 특히 대웅전 뒤에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보물 제 217호로 지정된 문화재입니다.
대조사의 창건은 백제 때의 고승 겸익(謙益)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大鳥寺彌勒實記[대조사미륵실기]>에 의하면 겸익이 인도국의 상가나대진사에서 5년간 수학하고 법문에 통달해서
아운장 5부 진문을 가져다가 72권의 역본을 만들어 흥륜사에 두었더니 어느 날 밤 꿈에 관세음보살께서 손에 광명주를 들고 나타나시어
불경 번역이 잘 되었다고 찬탄하시고, 갑자기 대조로 화(化)하여 날아가 임천 가림성에 앉는 듯하더니 사라진 순간 꿈을 깨신 겸익대사는
대조가 날아간 곳을 따라 가림성위에 도착하여 보니 대조는 간 곳이 없고 꿈에서 친견하신 관세음보살이 앉아 계시더니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앗!’ 하고 놀란 겸익대사는 꿈속에서 지른 자기 소리에 깜짝 놀라 잠이 깨었다.
‘꿈은 꿈이로되 신기한 꿈도 다 꾸었구나?’ 겸익대사는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모든 것은 꿈에 돌리고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노승은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같은 시각에 같은 꿈을 꾸는 것이었다.
겸익대사는 그제 서야 일이 예사가 아니요. 하늘이 뭔가를 계시하는 현몽임을 깨달았다. 겸익대사는 이 사실을 임천골의 성주에게 알렸다.
성주는 반신반의하면 산에 올라와 그 바위 앞에 다가서 봤다. 그러자 그 순간이었다.
큼직한 바위전체가 마치 황금덩어리인양 휘황찬란하게 빛나며 관세음보살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성주는 그만 그 자리에 엎드려 합장기도를 했다.
이 사실을 당시 백제의 서울이었던 웅진에서 전해들은 성왕은 적지 않게 감동했다.
그렇지 않아도 성왕은 장차 서울을 협소한 웅진으로부터 광활하고 산수의 미를 곁들인 소부리(지금의 부여)로 옮길 마음을 가졌던 터라,
그렇게 되면 성흥산성은 수도의 서남방 즉 중국대륙으로부터 침공하는 외적을 막는 가장 중요한 곳이 될 것이었다.
성왕은 이때부터 그 자리에 불력으로 국가안태와 소호를 비는 큰 절을 짓기로 마음 먹었다.
성왕은 많은 사공을 동원하여 드디어 성왕 5년 4월 초파일 석가여래의 탄신일을 기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절의 창건불사는 국영으로 규모가 큰 공사였으므로 애당초 십 년의 세월이 소요될 듯하였으나
성왕은 천도(백제의 수도)를 위해 공사를 앞당기려 많은 사람을 주야로 투입하였으나 일은 진척되지않아 서둘게 하였다.
그러자 어느 날 한 마리 황금빛 새가 날아와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를 부르니 사람들은 피곤을 잊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어느 날 한 마리 황금빛 새가 날아와 나뭇가지에 않아 노래를 부르니 신기하게도 공사현장은 대낮처럼 주위가 밝아지고
사람들은 피곤을 잊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밤일을 낮일과 아무 차이 없이 그리고 피로를 씻어주는 새소리를 들으며 열심히 일할 수가 있었으니
공사는 성왕 10년의 4월 초파일 석가탄신일에 준공을 볼 수가 있었다. 실로 공사 기간이 애당초 예측했던 10년의 절반 5년으로 단축되었던 것이다.
이날의 준공법회에는 성왕도 멀리 웅진에서 찾아와 참석하였다. 성대한 법회가 끝날 무렵이었다.
처음 황금빛의 큰새가 내려앉아 울었던 그 자리에 세워진 탑에서 한 마리의 큰새가 나래 치며 나타나더니 서쪽을 향하여 날아가는 것이었다.
이 신비스러운 일로 대조사란 이름을 짓게 된 이 절은 그로부터 백 수십 년간, 웅진으로부터 소부리로 천도한 백제수도를 지키는
성흥산성의 영장으로서 존속하였으며, 백제의 그 많은 성들이 18만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었을 때도
끝끝내 적병을 접근시키지 아니하였던 신술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미륵보살이 비치던 거암은 후세 고려시대에 이르러 기어이 웅대한 미륵보살 입불(彌勒菩薩 立佛)로 조각되었으니,
그 키가 자그마치 55척이요 둘레는 16척이나 되는 것이다.
논산의 은진 미륵이 약간 키가 크기는 하나 여러개의 바위(하나, 둘, 셋,)를 조각하여 합친 것이요,
대조사의 미륵은 하나의 대암으로 이룩된 것이 특징이다.
백제 망국의 설움은 여기에도 반영되어 대조사의 미륵은 오로지 묵묵부동으로 동녘을 바라보며
그 옛날 사라진 황금새가 다시 찾아오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사찰 이름을 큰 새가 찾아왔다 해서 대조사(大鳥寺)라 했다고 전해진다.
大鳥寺石塔(대조사석탑) : 문화재자료 제90호 시대 = 고려
처음 황금빛의 큰새가 내려앉아 울었던 그 자리에 세워진 탑에서 한 마리의 큰새가 나래 치며 나타나더니 서쪽을 향하여 날아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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