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 부처님의 향기

태백산 적멸보궁 정암사

백련암 2014. 4. 4. 19:45

 정암사는 강원도 정선군(旌善郡)의 깊숙한 산속에 자리한 고한읍(古汗邑) 고한리의 태백산(太白山) 기슭에 자리잡은 절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로, 속칭 갈래사(葛來寺)라고도 한다.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대국통(大國統)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唐)나라에서 사리(舍利)를 가지고 귀국, 창건하였다.

절의 입구에는 일주문(一柱門)이 있고,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선불장(選佛場)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수마노탑을 등에 진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다.
이 밖에도 종루가 있고, 선불장 앞에는 관음전(觀音殿)이 있고 자장각(慈花閣), 삼성각(三聖閣) 등이 있다.

적멸보궁은 자장법사가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모셔와 수마노탑에 봉안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수마노탑은 전란이 없고 날씨가 고르며, 나라가 복되고 백성이 편안하게 살기를 염원하는 뜻에서 세워졌다고 한다.

 

요사채

 

 육화정사(六和精舍)

 

 육화정사 현판 = 탄허대종사 글씨

 

 앞에는 육화정사(六和精舍)라 되어있고 뒤에는 선불0장(選佛0場)이라 쓰여있습니다.

 

가마솥 공양간

 

 입구에 있는 포대화상

 

정암사 안에서 밖을 향하여...

 

 일주문 현판 탄허스님의 글씨, 무오년 탄허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정암사 창건 설화◈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불교의 융성에 힘쓰던 자장율사는 28대 진덕여왕 때 대국통(大國統)의 자리에서 물러나 강릉에 수다사를 세우고

평온한 정신으로 살았다.

아마도 열반의 터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루는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내일 너를 대송정(大松汀)에서 보리라” 하였다.

놀라 깨어난 자장이 대송정에 이르니 문수보살이 나타나 “태백의 갈반지(葛磻地)에서 만나자” 하고 사라졌다.

그 말을 따라 태백산에 들어가 갈반지를 찾아 헤매던 자장은 큰 구렁이들이 나무 아래 서로 얽혀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갈반지라 여겨 ‘석남원’(石南院, 곧 정암사)을 지었다.

자장은 석남원에 머물며 문수보살이 나타나기를 몹시 기다렸다.

어느 날 다 떨어진 가사를 걸친 한 늙은이가 죽은 개를 삼태기에 싸 들고 와  “자장을 보러 왔다” 하였다.

스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귀에 거슬렸던 자장의 시중이 호통을 치니, 그 늙은이는 천연덕스럽게 “자장에게 전해라. 그래야 갈 것이다”라고만

대꾸했다. 문제는 언제나 이런 신화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자장은 이 말을 전해 들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시중을 시켜 늙은이를 쫓아버리게 했다.

그러자 그 늙은이는 “아상(我相,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거나 남을 업신여기는 교만한 마음)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으리오” 하고

탄식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곧 삼태기를 뒤집으니 죽은 강아지가 푸른 사자로 변하였다.

 

늙은이는 그 사자를 타고 빛을 뿌리며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바로 그 늙은이가 문수보살이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자장이 그 뒤를 곧바로 쫓았으나, 이미 문수보살은 떠나 가버린 뒤였다.

이후 자장은 몸을 남겨두고 떠나며 “석 달 뒤 다시 돌아오마. 몸뚱이를 태워버리지 말고 기다려라” 하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한 스님이 와서 오래도록 다비하지 않음을 크게 나무라고 자장의 몸뚱이를 태워버렸다.

석 달 뒤 자장이 돌아왔으나 이미 몸은 없어진 뒤였다. 자장은 “의탁할 몸이 없으니 끝이로구나! 어찌하겠는가?

나의 유골을 석혈(石穴)에 안치하라”는 부탁을 하고 사라져버렸다.

한편, 이전에 자장이 사북리의 산꼭대기에 불사리탑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울 때마다 계속 쓰러짐에,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눈 위로 뻗어 지금의 수마노탑, 적멸보궁, 사찰터에 멈추었으므로 그 자리에 탑과 법당과 본당을 짓고,

갈래사(葛來寺)라 하였다고도 전한다. 칡으로 인연이 이어진 절터라 그런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사적(史蹟)에 의하면 이 태백산 삼갈반지(三葛盤地)에 삼봉이 있으니 동은 천의봉, 남은 은탑봉, 북은 금탑봉이며 그 가운데 3탑이 있으니

첫째 금탑, 둘째 은탑, 셋째 마노탑 인데 금․은 두 탑은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마노탑만 나타나서 전한다고 한다.


이 탑을 세우며 탑의 기단부에 사리, 불지절, 불장주(佛掌珠), 염주 패엽경(貝葉經)을 봉안하였다 하며,

이 탑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시대 중국의 오대산에 들어가 수도하고 본국으로 귀국할 때(서기 643년) 서해용왕이 자장율사의 불도에 감화되어

용궁에 들어가서 용왕으로부터 수마노석을 받아 쌓아 올린 탑이라 한다.


 

 

정암사 안으로 부터 흘러나오는 계곡 상수도 수원지라고 한다. 열목어 서식지이기도 하고...

 

 

   

정선 정암사 열목어 서식지 (旌善 淨岩寺 熱目魚 棲息地)  : 천연기념물  제73호

 

열목어는 연어과에 속하며 20℃ 이하의 차가운 물에서 사는 민물고기이다. 몸의 바탕색은 황갈색이며 머리 · 몸통 · 등에는 자갈색의 무늬가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고 배쪽은 흰색에 가깝다.

알을 낳을 때는 온몸이 짙은 홍색으로 변하며, 등지느러미와 가슴지느러미 부분에는 무지개 빛의 광택을 내어 아름답다.

물 속에 사는 곤충이나 작은 물고기를 먹고 산다.

우리나라에서는 압록강, 두만강, 청천강, 대동강, 한강, 낙동강 상류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여름에는 하천에서 가장 상류의 시원한 곳에서 살고, 겨울에는 중류지역까지 내려와서 월동한다.

정암사의 열목어서식지는 세계에서 열목어가 살 수 있는 가장 남쪽지역이며,

숲이 잘 발달하여 열목어가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을 지닌 지역 가운데 하나이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정암사 이정표와  다리위에 탑신

 

 

 

자장율사가 당나라 산서성에 있는 청량산 운제사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세존의 정골사리와 치아, 불가사 패엽경을 전수하여

선덕여왕 12년에 귀국, 14년 乙巳年에 금탑, 은탑, 수마노탑을 쌓고 부처님의 사리와 유물을 봉안하였다.

적멸보궁 뒤 높은 곳에 세워진 수마노탑은 자장율사가 귀국할 때 서해용왕이 용궁으로 데리고 가서 준 마노석으로 탑을 쌓은 것이라 하여 수마노탑이라 한다. 금탑과 은탑은 후세의 많은 사람들이 귀한 보물에 탐심을 낼까 염려하여 영구히 보존키 위해 비장해두었다 한다. 적멸보궁이 모두 그러한 방식으로 비방한다.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신 곳이므로 불상을 모시지 않았으며 이러한 성지를 보궁이라 한다.”

 

원래는 사리가 이곳 다섯 곳에만 있었지만 지금은 비슬산 용연사와 금산사 세존사리탑등으로 진신사리탑이 늘어난 것은

임진왜란 때 왜병이 진신사리를 훔쳐갈까 하여 사명대사가 왜적을 물리치고 통도사의 진신사리를 나누어 모시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수마노는 광물 중 석영의 한 가지이다.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이 광물은 매우 아름다운 빛을 가지고 있으며 광택이 나는데 홍.흑.백의 세 종류가 있다.

도장이나 문방구 등의 장식품을 만드는데 씀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런 심상하지 않은 돌로 쌓은 탑이 수마노 탑이다.

정암사 수마노탑은 우리나라의 최고의 오지 중 한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탑은 전탑계 모전석탑(7층)으로 탑신부를 구성한 횡전재는 회록색의 석회암으로 크고 작은 모양의 직육면체를 질서 정연하게 쌓아올려

수법이 정교하며 표면은 잘 가공 되어 마치 벽돌을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1층 탑신은 밑면이 178cm로 15단을 쌓아 높이 103cm 방형(方形)을 만들었고, 1층 탑신 남쪽면 중앙에는 감형을 설치하였는데 화강석으로 외경 폭 65cm,

높이 70.5cm, 외경 폭 41cm, 높이 59cm의 틀을 짜서 판석으로 문짝을 세워 2짝의 문임을 나타내고 중심에 쇠 문고리를 부착하였다.

옥개는 전탑의 전통적 형식인 추녀의 폭이 좁으며, 전각에서 살짝 들린 듯 하고 각층 전각 끝에는 풍경이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옥개의 체감 현상도 탑신과 마찬가지로 크지 않아 부드러운 느낌을 주며, 옥개 받침은 1층 7단부터 시작하여 올라가면서

1단씩 줄여 7층에서는 1단이 되었고 윗면의 층단도 1층의 9단부터 시작하여 올라가면서 1단씩 줄여 7층에서 3단이 되었다.

추녀에는 풍경이 달려있고 상륜부에 화강석으로 만든 노반이 있고 그 위에 모전재 2기를 얹어 청동제 상륜을 받치고 있다.

이 탑에 대한 유래를 살펴보면 신라 사적기(史蹟記)에 선덕여왕 12년(서기 643년) 자장율사(慈裝律師)께서 정암사를 창건하고 7년 후에

수마노탑을 건립 하였다고 전하나 고려시대의 건립으로 추정된다.

재료는 모전석, 층수는 7층, 기단 6단, 탑신은 감실 문비음각으로 상륜부는 청동제로 되었다.

 

*이 탑을 세운 뒤 조선 숙종 39년에 취봉당자인과 일종스님이 주동하고 천밀스님이 화주(化主)하여 그해 5월에 수마노탑을 중수하였는데

8월 15일 낙뢰로 인해 탑이 파괴되었으므로 6년 후에 천밀(天密)스님이 다시 발원하고 시주를 걷어 5층탑으로 축조하였다.

*그 후 영조(英祖) 46년에 취암성우화상(翠岩性愚和尙)이 발원하여 은휴당시연과 단일당홍관이 협력하여 탑을 중수하고 찰우대를 조성하였고,

익년 5월에 낙성하였는데 원탑이 7층 동유장엄(銅鍮莊嚴)이 5층 풍경이 32구였다.
이 풍경은 바람만 슬쩍 불어도 맑은 소리가 공중에 가득 찼다. 백여년이 지난 광무황제 9년에 얼암서보화상(蘖癌西寶和尙)이 탑이 기우는 것을 보고

발원하고 백일기도를 하였더니 탑 우측 부근에서 한 무더기의 마노 보석을 발견 하였다고 한다.

그때 봉은사에서 화엄경판(華嚴經板)을 조각하고 해인사 대장경을 인출한 남호영기 대사와 협력하여 동년(서기 1872년) 5월에 준공했다.

천밀스님이 이 탑을 중수할 때 금․은 식기(食器)에 사리를 담아 봉안 하였던 것이 탑과 함께 파괴 되었으므로 그 속에서 염주 81교와 금주 5교 등을

걷어 1층 탑신에 안장하고 7층 탑으로 축조하였는데, 그 뒤에 49보령(寶鈴)이 하늘에 솟았는 듯 했다고 한다.

그 후 100여년이 지나 탑이 도괴 직전에 놓여 1972. 11. 8. 당시 문화공보부 문화재 관리국에서 국비 340만원을 들여 완전 해체 복원하였으나

광산개발이 본격화 되면서 지역의 특성상 지반이 침하되고 탑의 균열이 심화. 1996년 총사업비 1억 9천 6백만원을 들여

기단석 이상 전면을 해체 보수 및 탑 보호시설․진입로를 정비하였다.

정암사의 가장 높은 곳, 적멸궁 뒤쪽으로 급경사를 이룬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만든 대지 위에 서 있어 경내 또는 절 입구 등 어디에서도 쉽게 눈에 띈다.

 

 

서울로 올라오는 중에 스카이워크에 둘려 우리나라 지도를 보고왔습니다.

 

 

◈찾아가는 길

우리는 자가용으로 네비찍고 찾아갔지만 가서보니 기차가 다니더군요 기차로 갈 수있는 방법을 알리겠습니다.

청량리 역에서 중앙선을 승차한 뒤 = 고한역 하차 = 고한역에서 택시나 지역 시내버스이용하면 됩니다.

고한역에서 택시로 정암사까지 10분소요, 택시비= \1만원 정도

 

고한 터미널에서

고한 출발 = 오전 06시 40분,   오전 09시 50분,   오후 2시 10분,   오후 7시

 

정암사 도착 = 오전 06시 50분,   오전 10시,    오후 2시 20분,  오후 7시 1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