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갑사 관련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을 뿐 창건 연대와 창건주에 대해서는 분명한 언급이 없다.
다만 삼국시대 백제 침류왕 원년(384年)에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인도출신 승려 마라난타 존자는 중국 동진(東晋)을 거쳐 백제에 들어와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인물로, "삼국유사"에는 그가 백제에 들어오자
침류왕은 그를 궁궐로 영접하여 예를 갖추었고, 이듬해인 385년 지금의 경기도 광주 남한산 부근에 절을 짓고 열사람을 득도시켰다고 전한다.
그런데 불갑사에 전하는『영광군불갑사만세루 중수상량문』에는 마라난타가 남한산 부근에 절을 창건하기 전에 이미 불갑사를 창건하였다고 적고있다.
이는 당시의 지리적인 여건으로보아 상당한 가능성이 있는데, 당시 중국 동진에서 백제에 입국할 때는 절 인근의 법성포를 통해 출입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구전(口傳)에 따르면 불갑사가 서쪽을 향해(즉 법성포 방향) 배치된 것은 마라나타가 처음으로 도착한 곳이 서해안이므로 이를 기리는 마음에서
서향한 것이라 하며, 마라난타가 처음으로 도착한 법성포 역시 "법성(法聖 = 성스러운 존자)" 즉 마라난타를 지칭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뒷바침할만한 확실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아 재고의 여지가 있다.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
㉠ 소통(疏筒) ㉡ 가사함(袈裟函)
소통(疏筒) = 소통이란 불교법회의식 때 신도들이 발원할 내용을 적어서 낭독한 후 그 발원문ㅇ르 말아 넣어두는 통이다.
불갑사 소통은 문양의 투각기법이나 단청의 상태 등으로 보아 조선후기에 제작되었다.
수미단 모양의 대좌는 직사각형 기단부에 각 면마다 두 쌍씩의 안상이 조각된 하대가 마련되어 있다.
그 위 상대는 난간형으로 난간은 하엽(荷葉)과 연봉(蓮峯)으로 장식되어 있다.
가사함가사함(袈裟函) = 가사(袈裟)는 인도의 불교 복식인 가시야에서 나온 어원이다. 스님들이 기존의 복장에 덧데어 입는 종교복으로서
가사를 넣어 보관하는 목함(木函)은 가사함(袈裟函)으로서 그 기능을 갖추고 있다.
형태는 방형으로서 2단으로 구성되어졌는데 기단부에는 안상(眼象)을 갖추고 1단의 방형함에는 칠장석으로 목함(木函)의 외장을 꾸미고
그 위의 2단 방형함에도 같은 양식으로서 완형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별도의 가사함(袈裟函)은 유일하며 그 형태가 독특하다.
불감(佛龕)
불감은 호신불을 휴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서, 불갑사의 불감은 형태는 연(輦)을 들게 되는 손잡이가 없을 뿐 몸체와 옥개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연과 같다.
불감의 일반적인 형태는 감 중앙에 부처님을 모시고 양 옆을 여닫을 수 있도록 제작되는데 불갑사의 불감은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연(가마)의 형태를 취한 점이 독특하다. 화려하게 남아있는 칠보문양과 단청의 아름다움이 뛰어난 성보이다.
업경대(業鏡臺)
업경대는 불교 공예품의 하나로 사람이 죽어서 명부에 이르렀을 때 살아서의 죄업을 비춰준다는 거울이다.
재료는 주로 청동이나 나무로 제작된다. 불갑사의 목조 업경대는 암수 한 쌍으로 사자대좌위에 업경을 받치는 간주(竿柱)가 세워져있고,
그 위에 업경 부분과 화염문이 투각기법으로조각되어 올려져 있다.
사자의 묘사는 생동감있고 해학적인 모습으로 조각되어 사자라기보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와 유사하다.
불갑사의 업경대는 조각 수법이 뛰어나고 묘사가 해학적이면서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대좌까지 완전히 갖추고 있어 조선 후기 불교 목공에 작품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업경대(業鏡臺)
암수 한 쌍으로 사자대좌위에 업경을 받치는 간주(竿柱)가 세워져있다.
사자의 묘사는 생동감있고 해학적인 모습으로 조각되어 사자라기보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와 유사하다.
불연(佛輦) = 가마
시련의식용구(侍輦儀式用具)는 신앙의 대상인 불 · 보살과 구제를 받아야 될 영가(靈駕)등을 가마에 모시고 여러 가지 위의(위의)를 갖추어
법회장소까지 행렬을 지어 오는 의식에 필요한 용구(用具)들이다.
연(輦)은 이러한 시련의식구의 일종으로 절 문 밖까지 연을 메고 나가 신앙의 대상과 재(齋)를 받을 대상을 사찰도량으로 모셔오는 것이다.
형태는 임금이 사용하던 가마와 흡사해서 전체적으로 조그만 집 모양으로 생겼는데
앞뒤에서 네 사람이 가마채를 들거나 끈으로 매어서 운반하게 되어 있다.
고 법고(古 法鼓)
법고는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사물(四物)가운데 하나로 홍고(弘鼓), 또는 북이라고도 한다.
불갑사 대웅전에 놓여 있던 이 법고는 길이 85cm이며, 북통의 직경은 75cm이다.
북의 전면과 북통 가죽 부분에는 아무런 문양도 그려져 있지 않고, 북의 몸통은 하나의 통나무로 제작되었다.
나무 본래의 질감과 형태를 그대로 살려낸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 법고 이다.
광서 11년 을유년(1885년)의 법고 중수기가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동방 지국천왕(東方 持國天王)
광무 8年(1904年)에 조성된 사천왕탱화로서, 원래 천왕문 내부에 봉안되어 있었다.
수미산 중턱의 동쪽에 살며 동방을 수호하는 선신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중생을 안온케 한다는 안민(安民), 나라를 지킨다는
지국(持國)의 의미를 담고 있다 지물로는 7현의 비파를 들고 있는데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자고 왼손으로 연주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부처님의 정법을 받들어 삼악도를 없애고 삼선도를 조장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천왕이다.
북방 다문천왕(北方 多聞天王)
광무 8年(1904年)에 조성된 사천왕탱화로서, 원래 천왕문 내부에 봉안되어 있었다.
북방 다문천은 수미산 중턱의 북쪽에 살며 야차와 나찰을 권속으로 하여 북방을 수호하는 선신이다.
갑옷을 입은 무장의 형상을 하고 있다. 지물로는 오른손에 긴 보탑(寶塔)을 자고 있으며, 왼손에는 작은 보당(寶幢)을 올려놓고 있다.
항상부처님의 도량을 수호하여 설법을 듣고 재복부귀를 맡다 불법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남방 증장천왕(南方 增長天王)
광무 8年(1904年)에 조성된 사천왕탱화로서, 원래 천왕문 내부에 봉안되어 있었다.
증장천왕은 수미산 중턱 남쪽에 살며 항상 염부재(閻浮提)의 중생을 관찰하고 남방을 수호하는 선신이다.
왼발아래에 악귀를 밟고 있으며, 지물로는 오른손에 칼을 빼어들고 있는데 이것은 사악한 것을 단호히 제거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중생의 이익을 더욱 길고 넓게 증장시켜준다는 증장, 또는 증광의 의미를 지닌다.
칠성탱화(七星撑畵)
광서 18年(1892年)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당시 영광읍 주민들의 원력으로 조성된 불화이다.
본존인 치성광여래는 몸의 모공에서 큰 빛을 발하는 여래로서 재앙을 없애고 복을 구하며, 무병장수하고 자손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면서 신앙되었다.
질병을 퇴치한다는 면에서 약사여래의 사상과 비숫하고 좌우 협시보살도 약사여래의 경우처럼 일광 · 월광보살이다.
비단바탕에 진채로 그려졌으며 화면구성은 방형에 가까운 화폭으로, 치성광삼존을 중심에 배치하고
상단에는 동자, 중단에는 칠여래, 하단에는 칠원성군을 표현하였다.
능숙하고 힘있는 필선의 변화를 볼 수 있으며 세부적인 묘사력 등에서 화사(畵師)의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19세기 말 칠성탱이다.
철불좌상(鐵佛坐像)
고려초 10세기를 전후하여 철불상(鐵佛坐) 조성이 유행하였다.
그 후에도 철불 및 금동불상은 계속 조성되어져 오는 사찰(寺刹)의 중요한 성보(聖寶)이다.
고려 시대 양식의 철불좌상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갖추었으며, 상호는 둥근 형태로서 원만하며 눈매와 입술은 고졸한 미소를 띄고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서 의습의 획은 선명하다.
그 모습은 외소 하지만 단아한 자세, 고졸한 미소, 철불의 괴질감, 세련된 주물기법, 개금기법의 흔적 등이 표출된다.
철불좌상(鐵佛坐像)의 뒷면
영광 불갑사 대웅전 삼세불회도 (靈光 佛甲寺 大雄殿 三世佛會圖)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06호 시대 = 조선
삼세불은 조선후기에 크게 유행하여 신행되어진 불상으로 써 석가 · 약사 · 아미타여래의 삼존불로 이루어진다.
대웅전 삼세불탱화는 비단바탕에 채색된 장대한 불화이며 구도와 기법이 뛰어나 팔상전의(영산회상탱)과 함께 불회사의
대표적인 불화이다.
구도는 석가여래를 화면 중심에 크게 배치하고 그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를 모셨으며 한단부와 좌우측면에는
육광보살(문수 · 보현 · 관음 · 대세지 · 일광 · 월광보살)과 미륵 · 지장보살 등 팔보살이 등장하고,
네 모서리에는 사천왕을 각각 1구씩 배치하였다. 상단부에는 분신불(分身佛) 2구와 십대제자 및 천중(天衆) 2구를 표현하였다.
제작연대는 1762年 이전으로 추정된다.
영광 불갑사 대웅전 삼세불회도 (靈光 佛甲寺 大雄殿 三世佛會圖)
좌우측면에는 육광보살(문수 · 보현 · 관음 · 대세지 · 일광 · 월광보살)과 미륵 · 지장보살 등 팔보살이 등장하고,
네 모서리에는 사천왕을 각각 1구씩 배치하였다.
영광 불갑사 대웅전 삼세불회도는 비단에 채색을 하여 그린 불화로 석가・아미타・약사의 삼부처를 한 폭에 그린 그림이다.
제작 시기는 필선의 사용이나 구도, 대상의 의습처리, 표현기법, 색상, 문양의 회화적 수법과 불갑사의 불사기록 등으로 추정하여 볼 때
18세기 중엽경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삼세불회도 가운데 제작시기가 이른 작품으로서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글>
영광 불갑사 지장시왕도 (靈光 佛甲寺 地藏十王圖)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08호 시대 = 조선
영광 불갑사 지장시왕도는 지장을 본존으로 하여 도명존자, 무독귀왕, 시왕, 범천, 제석천, 사자, 판관, 사천왕 등을 배열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화기의 기록으로 1777년 영산회상도와 함께 제작되었다. 밝고 선명한 색조, 가늘고 섬세한 필법, 안정적이면서 원근감이 느껴지는 화면 구성,
다양한 모습의 시왕 및 권속들의 표현 등 우수한 회화적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또한 당시 조계산 선암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불화승 비현, 복찬, 쾌윤 등에 의하여 제작되었다.
하단의 부분적 손상이 있으나 전반적인 바탕화면과 색상의 보존상태가 좋고, 불화의 가치도 높다.
<문화재청 글>
비단 바탕에 진채로 그려졌으며 화면의 색상이 밝고 선명한 18세기 지장시왕탱화이다.
구도는 중앙의 지장보살과 좌우의 도명존자 무독귀왕을 위시한 명부신앙(冥付信仰) 체계에 등장되는 많은 상(像)들이 배치되어
화면이 꽉 찬 느낌이다. 지장보살의 모습은 성문비구형(聲聞比丘形)으로 오른발을 무릎위에 놓고 청색연화위에 반가좌 하고 있다.
상단에 그려진 욱보살은 지장보살을중심으로 왼쪽에는 문수 · 관음 · 미륵 보살, 오른쪽에는 보현 · 대세지 · 제화갈라보살을 모셨다.
건륭 42年(1777年)에 조성되었으며 당대 불화의 거장인 비현스님을 비롯한 복찬, 쾌윤 등 9명의 화사가 참여하였다.
<불갑사 글>
대웅전 용마루 보탑(寶塔)
대웅전 용마루 중앙에는 보탑형의 장식물이 얹혀져 있다. 양쪽의 용두(龍頭) 조각위에 탑형의 탑신과 사각 모임지붕의 보개 · 복발 · 보주
등으로 이루어져 점토로 구워낸 기와지붕 장엄이다.
양측면에는 "甲申 五月"과 盡○手 陟敏"이라는 명문이 있어 1764년 5월 척민이라는 와공에 의해 대웅전을 중수하면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각이 해학적이어서 민중에서 나타난 벽사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용의 얼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은 대웅전의 권위와 위상을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붕의 장식적인 장엄은 동남아시아와 중국남방의 사원에서 나타나는 양식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장엄이다.
영광 불갑사 팔상전 영산회상도 (靈光 佛甲寺 八相殿 靈山會上圖)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07호 시대 = 조선
영광 불갑사 팔상전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행한 설법광경을 도설한 것이다.
화기의 기록으로 제작자와 제작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작품으로 1777년에 비현 등 15인의 불화승에 의해 제작되었다.
영산회상도는 안정된 구도와 화면의 변화, 양록· 선홍· 양청과 같은 선명한 색조의 사용, 등장인물들의 상호의 표정묘사,
가늘고 섬세한 세필의 선묘 등 18세기 후반의 회화양식을 구사하고 있으며 회화적으로도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작품의 제작에 참여한 화승들은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까지 활동한 비현, 복찬, 쾌윤 등으로
이들은 조계산 선암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경상도 지역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여 작품활동을 하였던 불화승유파의 작가들이다.
보존 상태도 양호하고 회화작품으로서 예술적 가치도 클 뿐만 아니라 뛰어난 화승들의 작품으로 보존가치가 크다.
<문화재청 글>
영산회상불화(靈山會上佛畵)
영상회상불화는 석가모니불께서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불갑사 영산회상불화는 팔상전 후불탱화로 봉안되어 있었다.
구도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팔보살과 제석 · 범천 및 분신불 2구와 성문중, 사천왕 등을 정연하게 배치하였다.
이 불화는 문수 · 보현 · 관음보살의 자세와 지물표현, 사천왕의 지물과 수인 표현, 선묘(線猫)의 금니(金泥)표현 등에서
고려불화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안정된 구도와 뛰어난 색감이 돋보이는 걸작이다.
당대 이 지역 최고의 화사들인 비현, 복찬, 쾌윤 등 금어 3명과 편수 12명이 참여하여 조성(1777年)되었다.
<불갑사 글>
자수로 수 놓아진 불화도
자수로 수 놓아진 불화도<삼존상>
자수로 수 놓아진 불화도<산신도>
삼존상
영광 불갑사 동종 (靈光 佛甲寺 銅鐘)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11호 시대 = 조선
영광 불갑사 동종은 주종기에 따르면 ‘獅子山 鳳林寺 大鍾’으로 1702년(康熙四十一年壬午, 조선 숙종 28년)에 “金尙立子三 金水元 金成元 片手金成奉”에
의해 조성되었음 기록하였다. 불갑사의 동종은 주종기가 남아있어 제작연대와 제작 장인, 봉안처, 시주자가 확인되는 18세기 초의 종이다.
조선후기 동종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종장들의 내력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으로 주종연구에 중요한 작품이다.
<문화재청 글>
출처 = 문화재청
간다라 황금소탑(黃金小塔)
BC 2~3C세기 파키스탄의 간다라 지역에서 꽃 피운 불교조형예술은 수세기에 걸쳐 티벳, 미얀마, 태국, 중국, 한국 등
세계적으로 퍼져나갔으므로 간다라는 불상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간다라 불교미술의 소산인 "간다라 황금소탑"을 주지 만당스님의 인연원력으로 불갑사 수다라 성보박물관에 소장하게 되었다.
규모는 높이 7cm 안팍의 소형이지만 순금으로 제작되었으며 전형적인 간다라 스투파형 사리기(舍利器) 양식을 갖춘 AD 2세기경 작품으로서
그 외형적 조형미는 매우 아름답다.
원형 기단부, 복발 원통형 몸체부, 5륜형의 상륜부로 구성된다. 특히 △체부는 화려한 장식미가 있으며
내부가 공간에는 사리장치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어(木魚)
해탈교
"법성계"
탑원
간다라 지역 사원 유구 가운데 가장 잘 남아있는 "탁트히바히사원"의 주탑원을 본떠서 조성한 탑원으로, 마라난타존자의 출생지인
간다라 사원양식의 대표적이고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은 공간들은 가운데 중앙탑을 바라보며 승려가 수행하던 작은 굴입니다.
작은 공간들은 가운데 중앙탑을 바라보며 승려가 수행하던 작은 굴입니다.
부처님 상은 비닐로 덮여져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아마도 상사화 축제때는 풀어놓을 것 같다.
불갑산 호랑이 유래
불갑산에서 서식하는 호랑이를 1908년 2월 한 농부에 의해 잡힌것을 일본인 하라구찌가 "당시 논 50마지기 값에 해당하는 200원에" 사들여
동경 시마쓰제작소에서 표본 박제하여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기증 현재까지 보관 하고 있음
남한지역에서 잡힌 호랑이가 박제표본으로 보관되고 있는 호랑이는 이곳 불갑산 덫고개에서 잡힌 호랑이 하나밖에 없어
영광군에서는 포획 100주년 만에 귀향(살던 곳에 보관)시키고자 하는 차원에서 유달초등학교 관계자와 환경부 소속 국립생물 자원관(척추동물연구과)의
협조를 받아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자 모형으로 제작 설치하였다.
2009년 4. 30 영광군수
<팻말의 글>
일주문(一柱門) = 현판글씨가 없다.
일주문(一柱門)
자연상태의 원목을 그대로 사용된것임을 볼 수 있다. 국내산 느티나무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일주문(一柱門)의 기둥나무들의 모습
일주문(一柱門)
湖南第一佳景(호남제일가경), 海東第一伽藍(해동제일가람) = 앞
靈光獨曜逈脫根塵軆露眞常不拘文字 (영광독요형탈근진체로진상불구문자) = 뒤
眞性無染本自 圓成但離妄緣卽如如佛(진성무염본자 원성단이망연즉여여불)
수은 강항선생 상(睡隱 姜沆先生 像)
영광내산서원 (靈光內山書院) : 전라남도 기념물 제 28호 시대 = 조선
조선 중기 문신인 강항(1567∼1618)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강항은 공조좌랑과 형조좌랑에 있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활동하다가 왜적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일본에 있으면서 그 나라의 역사, 지리 등을 알아내어 고국으로 보내기도 하면서 일본에는 성리학을 전하였다.
선조 33년(1600) 귀국한 후 벼슬을 사양하고 독서와 후진양성에만 전념하였다.
이 서원은 인조 13년(1635)에 나라에서 ‘용계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고 숙종 28년(1702)에 고쳐 세웠다.
일제시대 때에도 고쳐 지었는데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쪽에 교육 공간을 마련하였고 뒤쪽에 제사 공간을 마련한 전학후묘의 배치이다.
교육 공간인 강당은 중앙에 마루를 두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뒤에 있는 내삼문을 지나면 강항의 위패를 모신 작은 규모의 사당이 있다. 왼쪽 산기슭에는 강항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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