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 = 心 산사 길없는길

화순 철감선사와 쌍봉사

백련암 2014. 10. 8. 14:42

신라 景文王(경문왕) 때 道允(도윤)이 창건하고 자신의 道號(도호)를 따 쌍봉사라 하고 九山禪門(구산선문)의 하나인

獅子山門(사자산문)의 기초를 닦았다.

 

쌍봉사는 통일신라시대인 839년 이전에 창건되어 혜철선사가 여름을 지냈고, 855년 경에 철감선사가 중국에서 귀국하여

종풍을 떨친 절로서, 지형이 절의 앞과 뒤에 산봉우리가 2개 즉, 쌍봉이 되므로 이에 쌍봉사라 칭하였다.

현재 쌍봉사에는 대웅전, 극락전과 새로 지은 요사채 그리고 국보 제 57호인 철감선사탑과 보물 제 170호인 철감선사탑비가 있다.

 

먼저 해탈문 앞에 서면 기둥사이 네모 칸 안에 대웅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정면 1칸에 3층 목탑형식을 한 독특한 집으로 1986년

말에 복원 할 때 1962년 대웅전 해체 수리 시 발견된 기록에 따라 새로 지었다.

  

대웅전 뒤 기다란 석축은 크기가 제각각인 돌덩이들을 반듯하게 쌓아 놓았는데 그 자연스러운 조화로움이 눈길을 끈다.

 

극락전 앞에는 건물을 가리다시피한 단풍나무 두 그루,  왼쪽에는 무성한 대밭이 있고  왼쪽 앞에 지장전이 있다.

지장전 안에 모셔진 지장삼존상과 시왕상 등은 얼굴표정이나 손가락, 옷주름 등 조각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일주문

 

王門(천왕문)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건물입니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의 종교에서 숭앙했던 신들의 왕이었으나,

부처님께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습니다.

사천왕들은 수미산 중턱의 동서남북 네 방향을 지키면서 불법을 수호한다고 합니다.

 

일주문을 지나 불이문(不二門)과의 중간 위치에 천왕문이 자리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지닌 일심(一心)이

구도자 앞을 가로막는 숱한 역경에 의하여 한 풀 꺾이게 됩니다.

이때 수미산 중턱에 자리한 사천왕은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청정도량(淸淨道場)을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엄숙하게 하여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며, 또한 심신이 지친 구도자의 마음속에 깃든 번뇌와 좌절을 없애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수미산 정상까지 오를 것을 독려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대개 좌우에 사천왕을 두 분씩 모시게 되고, 중앙은 출입통로가 되는데 오른편에 모셔진 사천왕 중에서

자신의 팔의 방향으로 왼쪽이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 오른쪽이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입니다.

또 왼편에 모셔진 사천왕 중에서 왼쪽이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 오른쪽이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입니다.

 

천왕문을 경내에서 바라 볼 때는 해탈문이라고 쓰여있다.

 

 

천왕문 벽화

 

천왕문 벽화의 금강역사들

입을 열고 있는 역사를 "아금강역사(金剛力士)"   입을 다물고 있는 역사를 "음금강역사(金剛力士)  청색"

사천왕을 모신 건물인 천왕문의 좌우에는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지키고 있습니다.

 

금강신(金剛神), 금강수(金剛手)라고도 하며 대승불교 신화 중에서 장차 붓다가 될 보살 가운데 하나이며, 아축불(阿閦佛)의 현현(現顯)이다.

산스크리트로는 "번갯불을 가지고 다니는 자" 를 의미하며 반신(半身)은 사람이고 반신은 뱀인 용신(龍神)을 보호하는 자로,

전설적으로 금강역사의 적이라고 알려진 매 모습을 한 가루다를 속이기 위하여 새의 모습으로 가장한다고 믿어지기도 한다.

비(雨)를 조절하는 용신(龍神)과 힌두교의 우신(雨神)인 인드라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가뭄이 들었을 때에는 금강역사에게 기원한다.

 

인드라와 마찬가지로 금강역사(金剛力士)도 번개를 가지고 있으며 감청색 또는 흰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금강역사(金剛力士)의 상(像)들은 흔이 아미타불(阿彌陀佛)

혹은 지혜의 보살은 문수보살(文殊菩薩), 연꽃을 가지고 있으며 자비심이 충만한 연화수보살(蓮華手普薩)과 함께 나타난다.

 

티베트에서 금강보살(金剛菩薩)은 악마와 싸우고 불교(佛敎)의 신비적인 가르침을 보호하기 위하여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대개 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 구실을 담당하는데 보통 사찰 문의 왼쪽에 밀적금강(密迹金剛),

오른쪽에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 서 있다.

 

밀적금강(密迹金剛)은 손에 금강저를 들고 항상 부처를 호위하는 야차신이다.

밀적(密迹),이란 붓다의 비밀스러운 사적을 들으려는 서원을 세웠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은 코끼리보다 100만 배힘이 세다,

 그러나 단순히 힘만 있는 신중(神衆)이 아니라 이들의 머리 뒤에는 커다란 원광이 있는데, 그것은 신성한 지혜가 깃들어 있음을 상징한다.

 

보통 입을 열고 있는 역사를 "아금강역사" 입을 다물고 있는 역사를 "음금강역사"라고 한다.

그의 자세로는 주먹을 쥐고 한 팔을 들어오리거나 한 손으로 칼을 잡고 있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석굴암 입구의 금강역사상이 유명하다.

 

 

천왕문 벽화

 

사천왕상들 = 서방, 북방을 수호하는 천왕

 

西方 廣目天王(서방 광목천왕)

※▶산스크리트어로 비루팍쉬이며 이를 한자로 바꾸어 넓을 廣과 눈 目자를 써서 광목천왕으로 불리고 있다.

크고 넓은 눈으로 서방국토를 바르게 지키고 중생을 도와주는 천왕이라는 뜻으로 용이나 열병을 앓게 하는

부단나, 나가를 부린다고 한다.

 

서방의 광목천왕은 수미산 중턱 서쪽에 살며서 많은 용을 권속으로 서방을 지키고 수호하는 선신이다.

갑옷을 입은 무장의 형상을 하고 있다.

 

지물로는 오른손에 龍(용)을 잡고 있으며, 왼손에는 불꽃(번개)를 들고 있다.

나쁜것을 물리치고 佛心(불심)을 일으키게하고 불법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한다.함

 

北方 多聞天王(북방 다문천왕) 

※▶천부의 부처가운데 가장높은 제석천의 직속 수하로 다른 사천왕을 이끄는 위치이기도 하기에 중국, 일본등지에서 독존으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어 있기도 하다. 다문이라는 이름대로 부처의 설법듣기를 즐긴다고 한다.

불상, 탱화에서 표현되는 다문천왕의 모습은 오른손에 보탑을 들고 삼차극을 든 무장의 형상이 보편적이다.

 

북방의 다문천은 수미산 중턱의 북쪽에 살며 야차나 나찰을 권속으로 하여 북방을 수호하는 선신이다.

갑옷을 입은 무장의 형상을 하고 있다.

지물로는 오른손에 긴 寶塔(보탑)을 잡고 있으며, 왼손에는 작은 寶幢(보당)을 올려놓고 있다.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수호하여 설법을 듣고 재복,부귀를 맡아 불법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사천왕상들 = 동방, 남방을 수호하는 천왕

 

東方 持國天王(동방 지국천왕)

※▶지국천왕은 산스크리트어로 국토를 지탱하는자 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수미산 동쪽 황금타에 있는 궁전에 머물며

동승신주를 다스린다고 알려져 있다.

지국천왕은 착한자에게 복을 악한 자에게 벌을 주며 팔부귀중 가운데 건달파와 필사차를 권속으로 두고 있다.

 

수미산 중턱의 동쪽에 살며 동방을 수호하는 선신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중생을 안온케 한다는 安民(안민),

나라를 지킨다는持國(지국)의 의미를 담고 있다.

지물로는 7현의 비파를 들고 있는데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왼손으로 연주하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부처님의 정법을 받들어 삼악도를 없애고 삼선도를 조장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천왕이다.

 

南方 增長天王(남방 증장천왕)

※▶수미산 중턱 남쪽 유리타에 있는 궁전에 머물면서 남섬부주를 다스리고 있으며 휘하에 위태천을 비롯한 8대 장군을 두고 있다.

자신의 위덕을 증가하여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증장천왕은 수미산 중턱 남쪽에 살며 항상 閻浮提(염부제)의 중생을 관찰하고 남방을 수호하는 선신이다.

왼발 아래에 악귀를 밟고 있으며

지물로는 오른손에 칼을 빼어들고 있는데, 이것은 사악한 것을 단호히 제거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중생의 이익을 더욱 길고 넓게 증장시켜준다는 증장, 또는 증광의 의미를 지닌다.

 

天王門(천왕문)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건물입니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의 종교에서 숭앙했던 신들의 왕이었으나,

부처님께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습니다.

사천왕들은 수미산 중턱의 동서남북 네 방향을 지키면서 불법을 수호한다고 합니다.

 

일주문을 지나 불이문(不二門)과의 중간 위치에 천왕문이 자리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지닌 일심(一心)이

구도자 앞을 가로막는 숱한 역경에 의하여 한 풀 꺾이게 됩니다.

이때 수미산 중턱에 자리한 사천왕은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청정도량(淸淨道場)을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엄숙하게 하여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며, 또한 심신이 지친 구도자의 마음속에 깃든 번뇌와 좌절을 없애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수미산 정상까지 오를 것을 독려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護聖殿(호성전)

 

쌍봉사 護聖殿(호성전)은 T자형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나라에 유일무이한 형태의 전각이다. 원래는 세조의 위패를 봉안한 건물로 짐작되나

현재는 쌍봉사 창건주 澈鑑(철감) 道允(도윤)선사와 중국의 趙州(조주) 從諶(종심)선사의 진영을 모시고 있다.

 

우리나라 절 가운데 최초로 조주선사진영을 모시고 있는 까닭은 두 선사의 깊은 인연 때문이다.

철감선사는 신라 현덕왕 17년(825년) 28세에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南泉(남천) 普願(보원)선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 때 조주선사를 만났던 것이다.

조주선사는 철감선사 보다 20년 연상의 師兄(사형)으로서 이미 남천선사에게 평상의 마음이 도다(平常心是道=평상심시도)는

말을 듣고 단박에 깨달음을 이룬 출중한 스님이었다.

뿐만아니라 조주선사는 훗날  사람들이 道를 물어오면 "차나 한잔 마시게"

"바리때를 씻게나(趙州洗鉢=조주세발) 등등 禪을 생활현장과 茶道(다도)로 끌어들였던바, 오늘날 까지도 중국인들에게 生活腺(생활선)을

제창한 古佛(고불) 이라고 칭송받고 있다.

 

철감선사는 조수선사와 스승인 남전선사 문하에서 함께 정진했던 시기는 825년부터 834년까지 10년 정도였으나 두 스님의 인연은 남달랐다.

철감선사 역시 중국으로 가기 전에 이미 華嚴學(화엄학)에 통달하여 남전선사와 조주선사의 기대와 신뢰가 컸기 때문이다.

남전선사가 철감선사에게 우리종(宗)의 法印(법인)이 東國(동국)으로 돌아가는 구나.'

 

            趙州 從諶 禪師 眞影(조주 종심선사 진영)                                                            澈鑑道允禪師眞影(철감도윤선사진영)

 

澈鑑道允禪師眞影(철감 도윤선사 진영)

 

趙州 從諶 禪師 眞影(조주 종심선사 진영)

 

 

大雄殿(대웅전)의 다양한 모습들

 

숙종 16년인 1690년에 대웅전을 중건하고 대웅전 석가삼존불과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다 한다.

대웅전은 여러 번 중수과저응 거쳐 6. 25 한국 전쟁 때 전쟁의 화마 속에서도  극락전과 대웅전은 잘 보전되어왔지만,

1984년 신도의 부주의로 소실되어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으며 복원공사는 문화재관리국이 그간  자료를 수집하여

1985년 착공하여 1986년에 준공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대웅전 평면이 방형인 3층 전각으로 사모지붕의 목조탑파형식을 지닌 희귀한 양식드로 되어 있으며

 

목조탑파 형식으로는 법주사의 팔상전과 쌍봉사의 대웅전이 국내 유일하게 존재하고 있다.

 

화마만 아니였다면 쌍봉사의 대웅전은 국보인 '철감선사탑(제57호)' 보다 더 유명하고 귀중한 보물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그날은 마침 삼월 삼짓날을 맞아 이 절의 신도들이 기도하면서 켜놓았던 촛불이 넘어지면서

당시 보물 제163호인 대웅전에 불이 붙는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극락전으로 번지는 불길을 막은 것은 사람이 아닌 극락전에 오르는 돌계단 양 옆에 서 있던 단풍나무들이였다고 한다.

이 佛心(불심)지극한 단풍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태워가면서 불길을 막아 극락전을 온전히 지켜낸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大雄殿(대웅전) 뒷면에 서면  바로 이 앞에 극락전이 있습니다.

 

 

大雄殿(대웅전) 측면

 

大雄殿(대웅전)

相輪(상륜)이나 擦柱(찰주)가 없어 탑이라고 보기는 힘드나 전체적인 형태가 3층목탑의 형식을 가지고 있어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목탑의 예로써 귀중하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 163호로 지정되었으나, 1984년 4월 3일 화재로 소실되어, 1984년 5월 30일 보물지정이 해제되었다.

복원공사는 문화재관리국이 그간 자료를 수집하여 1985년 8월 5일 착공하여 1986년 12월 30일 준공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종무소 =  이 건물뒤로 공양간이 있습니다.

 

템플스테이 할 때 여러가지 체험을 하는 곳

 

 

종무소와 공양간 그리고 요사채가 있는 건물  문이 너무 예쁩니다.

 

 

극락전 앞 단풍나무 두 그루 아직 단풍이 안들어 좀 아쉬웠다.

삼월 삼짓날을  이 절의 신도들이 기도하면서 켜놓았던 촛불이 넘어지면서 당시 보물 제163호인 대웅전에 불이 붙는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극락전으로 번지는 불길을 막은 것은 사람이 아닌 극락전에 오르는 돌계단 양 옆에 서 있던 단풍나무들이였다고 한다.

이 佛心(불심)지극한 단풍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태워가면서 불길을 막아 극락전을 온전히 지켜낸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철감선사의 탑비와 탑과 주변 전경

지장전을 돌아 대나무 숲의 운치 있는 길을 따라 약 100m 정도만 오르면 돌계단으로 되어 있은데 계단을 조금만 오르면 철갑선사와 만날 수 있다.

계당산 쌍봉사 = '쌍봉사철감선사탑(雙峰寺澈鑒禪師塔)(국보 제57호)-

계당산 쌍봉사 = 쌍봉사철감선사탑비(雙峰寺澈鑒禪師塔碑)(보물 제170호)-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和順 雙峯寺 澈鑒禪師塔碑)

귀부는 귀두가 용의 머리를 한 채로 여의주를 물고 있고 정수리에 뿔을 장식한 것 같은 돌기를 가지고 있으며, 목 부분에 주름 잡힌 듯한

겹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또한 대리석을 딛고 있는 네 발은 각각 발가락이 세개로 되어 있는데 살짝 들어서 내디디려는 오른쪽 앞발과

억센 발톱으로 땅을 찍어 끌어당기는 다른 발들이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수는 용 조각을 생략하고 구름무늬만 새겼으며 당대 석비 조각의 극치를 엿 볼 수 있는 작품이라 합니다.

비신은 일제 강점기에 잃어 버렸다고 전합니다.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和順 雙峯寺 澈鑒禪師塔碑) : 보물  제170호   시대 = 통일신라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和順 雙峯寺 澈鑒禪師塔) : 국보  제57호   시대 = 통일신라

상대석은 연화대와 8각의 탑신 받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모습이며 대부분 잘 남아 있으나

아수비게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진 상태입니다만, 그래도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이 부도는 균형 잡힌 몸매가 우리나라의 부도 가운데

첫 번째로 꼽힐 정도로 아름답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마치 나무에다 조각이라도 한 것처럼 자유자재로 조각한 수법이 돋보이며 세부적으로는 화려한 무늬를 표현하였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장중한 인상을 심어준다.

일제 강점기 때 사리장치를 노린 도굴꾼들에 의해 파괴된 채로 있다가 1957년에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높이 2.3m)

하대석은 시멘트로 보수된 지대석 위에 2단의 팔각형 굄을 두고, 그 위에 올려져 있다.

하대석 역시 2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장식이 유난히 화려해 보입니다.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和順 雙峯寺 澈鑒禪師塔) : 국보  제57호   시대 = 통일신라

 

쌍봉사(雙峰寺)에 세워져 있는 철감선사의 탑이다. 철감선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28세 때 중국 당나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문성왕 9년(847) 범일국사(梵日國師)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에 머무르면서 도를 닦았으며, 경문왕대에 이 곳 화순지역의 아름다운 산수에 이끌려 절을 짓게

되는데, ‘쌍봉’인 그의 호를 따서 ‘쌍봉사’라 이름하였다. 경문왕 8년(868) 71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모습이며, 대부분 잘 남아 있으나 아쉽게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진 상태이다.

탑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밑돌 · 가운데돌 · 윗돌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으며, 특히 밑돌과 윗돌의 장식이 눈에 띄게 화려하다.

2단으로 마련된 밑돌은 마치 여덟마리의 사자가 구름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앞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 흥미롭다.

윗돌 역시 2단으로 두어 아래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윗단에는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가 악기를 타는 모습을

도드라지게 새겨두었다.

사리가 모셔진 탑신(塔身)은 몸돌의 여덟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다 문짝모양, 사천왕상(四天王像), 비천상(飛天像) 등을

아름답게 조각해 두었다.

지붕돌에는 특히 최고조에 달한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어서,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되어 있으며, 처마에는 서까래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탑을 만든 시기는 선사가 입적한 해인 통일신라 경문왕 8년(868) 즈음일 것으로 추정된다.

조각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다듬은 석공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작품으로, 당시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청의 글>

 

부도는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모셔 놓은 일종의 무덤이다. 철감선사는 원성왕 14년(798년)에 출생하여 18세에 출가하였고

경문왕 8년(868년)쌍봉사에서 입적하였다.

쌍봉사 절안 북쪽에 있는 이 탑은 8각 원당형의 기본형을 잘 나타낸 부도다. 신라의 여러 부도 가운데 조각과 장식이 가장 화려한 최대의 걸작품이다.

특히 , 막새기와 안에 연꽃무늬를 새긴 솜씨는 조각공의 필생의 작업으로 신앙적 발원이 아니고서는 감히 근접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는 걸작이다.

이와 같이 목조건축의 의장까지 섬세하고 정교하게 조각되어 석조 건조물로서는 최고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건립연대는 신라 경문왕 8년(868년)으로 보인다.

<쌍봉사의 안내 글>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和順 雙峯寺 澈鑒禪師塔碑) : 보물  제170호   시대 = 통일신라

쌍봉사에 있는 철감선사 도윤의 탑비이다.

철감선사(798∼868)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헌덕왕 7년(825)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문성왕 9년(847)에 범일국사와 함께 돌아와

경문왕을 불법에 귀의하게 하기도 하였다. 71세의 나이로 쌍봉사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철감’이라 내리었다.

비는 비몸돌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네모난 바닥돌 위의 거북은 용의 머리를 하고 여의주를 문 채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특히 오른쪽 앞발을 살짝 올리고 있어 흥미롭다. 머릿돌은 용조각을 생략한 채 구름무늬만으로 채우고 있다.

통일신라 경문왕 8년(868)에 세워진 비로,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뛰어나며 특히 격렬한 거북받침돌의 조각들은 매우 훌륭한 경지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재청의 글>

 

현재 비신은 없고 귀부(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와 이수(비석 위에 용의 모양을 새긴 돌)만이 남아있다.

철감대사의 호는 쌍봉이고 속성은 박씨이며 황해도 봉산사람이다. 신라 원성왕 14년(798년)에 출생하여 경문왕 8년(868년)에 쌍봉사에서 입적하였다.

철감은 시호이며 탑의 이름은 증소라 하였다.

사각의 바닥돌 위에 거북은 용의 머리를 하고 여의주를 문 모습으로 사실성이 강하다. 거북등은 이중테두리의 6각형문을 선명하게 새겼다.

특히 앞 오른발의 세 개 발가락을 땅에서 들어올린 표현은 귀부의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이수는 용 조각을 생략하고 구름무늬만 새겼다. 당대 석비조각의 극치를 엿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비신은 일제 강점기에 잃어버렸다고 전한다.

<쌍봉사의 안내 글>

 

철감대사 탑과 비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너와 집의 쉼터가 있다.

 

 

(범종각)

 

범종 용뉴

 

雙峰寺 梵鐘(범종)

 

 

일주문 천정에 있는 용

 

雙峰獅子(쌍봉사자문)

 

雙峰獅子門(쌍봉사자문) 쌍봉사 일주문이다.

사찰에 들어가는데 처음 지나는 문이 일주문입니다. 일주문의 명칭은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여러 개의 산문 중에서 유독 일주문의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선 것은 세속의 번뇌로 흩어진 마음을 사찰에 들어섬으로써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적 의미, 즉 일심(一心)을 뜻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