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사찰 능사 오층 목탑(陵寺 五層木塔)
능사는 성왕의 명복을 빌기위한 백제 왕실의 사찰로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발굴된 유구의 규모와 동일하게 건물 사이 간격,
기둥과 기둥사이의 간격 등을 1 : 1로 재현하였다.
능사는 발굴조사 결과 중문 → 탑 → 금당 → 강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된 백제시대 대표적인 가람양식으로 확인되었다.
5층 목탑
능사(陵寺)는 백제 왕실의 대표적인 사찰로서 원래의 유적지는 백제문화단지에서 10여km 떨어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의 나성과 능산리고분군
(백제왕릉원) 사이에서 발굴된 유적을 1 : 1로 이곳에 재현하였다.
능사(陵寺)는 위덕왕이 아버지인 성왕을 위하여 지은 사찰로써 백제 최고의 유물로 평가되는 국보 제 287호인『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가
발굴되었으며 이 사찰이 지금으로 부터 1450여년 전인 567년에 건립되었음을 입증해주는 국보 제288호인『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
발굴된 사찰이다.
성왕(聖王, 523년~554년)은 지금의 공주인 웅진에서 이곳 부여인 사비로 천도(538년)를 한 왕으로써 관산성(지금의 옥천지방 일원) 전투에서
전사를 하게 됨에 따라 그의 아들인 창왕(위덕왕)이 이 능사를 짓게 된다.
이 곳 능사에서 발굴된 유적 중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은 이곳 5층 목탑 중앙기둥을 받치고 있는 심초석에서 발굴되었으며
그 명문(銘文)의 내용은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 위덕왕)에 의해 567년 만들어 졌으며, 성왕(聖王)의 따님이자 창왕(昌王)의
남매인 공주(公主)가 사리(舍利)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사지(百濟寺址)로서는 최초의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해 명확하게 밝혀진
유일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5층목탑은 높이가 38m에 이르는 건물로서 국내에서 최초로 재현된 백제시대 목탑으로써 지금의 현대적 장비 및 건축기술로도 복원에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지금부터 1450여 년 전에 아파트 13층 높이의 규모로 못하나 사용하지 않고 끼움과 맞춤 등
전통기법으로 건축된 점 등은 가히 불가사의라 할 정도의 뛰어난 건축술의 진가를 보여주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가장 꼭대기에 있는 상륜(相輪)은 그 몸체는 동(銅)으로 제작하고 그 표면은 중요무형문화재 제 113호인 칠장이 도금(鍍金)의 방법이
아닌 순금(純金)을 수작업으로 입힌 후 정제된 옻칠을 한 것으로 5층 목탑의 상징성을 가진다 할 수 있다.
이 곳 능사는 부왕(父王)을 위하여 아들인 위덕왕이 지은 왕실사찰로서 백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국보 287호인 백제금동대향로』와
함께 그 높이가 38m에 이르는 국내 최초로 재현된 백제『5층목탑』등 백제의 뛰어난 공예기술과 함께 건축기술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목조건물은 중요무형문화재 제 74호인 대목장(大木匠)이, 단청은 중요문화재 제 48호인 단청장(丹靑匠)이,
기와는 중요 무형무화재 제 121호인 번와장(翻瓦匠), 중요무형문화재 제 106호인 각자장(刻字匠), 상륜은 중요무형문화재 제 113호인 칠장(漆匠)이
참여하여 건축한 건물로 5층 목탑은 백제문화단지뿐만 아니라 백제건축의 상징으로서 랜드마크(Land Mark)라 할 수 있다.
백제시대의 궁궐 중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5층 목탑의 심주
능사 오층 목탑(陵寺 五層木塔)
비가 너무 쏟아지는 바람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대통문(大通門)과 오층 목탑(陵寺 五層木塔)
대통문(大通門) = 중문
"뜻이 크게 통한다."는 의미로『법화경(法華經)』의 의미를 담았으며 사찰의 출입문으로써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의 뜻이 바라는 바와 같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염원을 담았다.
입을 열고 있는 역사를 "아금강역사(金剛力士)"
금강역사(金剛力士)
입을 다물고 있는 역사를 "음금강역사(金剛力士)"
금강신(金剛神), 금강수(金剛手)라고도 하며 대승불교 신화 중에서 장차 붓다가 될 보살 가운데 하나이며, 아축불(阿閦佛)의 현현(現顯)이다.
산스크리트로는 "번갯불을 가지고 다니는 자" 를 의미하며 반신(半身)은 사람이고 반신은 뱀인 용신(龍神)을 보호하는 자로,
전설적으로 금강역사의 적이라고 알려진 매 모습을 한 가루다를 속이기 위하여 새의 모습으로 가장한다고 믿어지기도 한다.
비(雨)를 조절하는 용신(龍神)과 힌두교의 우신(雨神)인 인드라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가뭄이 들었을 때에는 금강역사에게 기원한다.
인드라와 마찬가지로 금강역사(金剛力士)도 번개를 가지고 있으며 감청색 또는 흰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금강역사(金剛力士)의 상(像)들은 흔이 아미타불(阿彌陀佛) 혹은 지혜의 보살은 문수보살(文殊菩薩),
연꽃을 가지고 있으며 자비심이 충만한 연화수보살(蓮華手普薩)과 함께 나타난다.
티베트에서 금강보살(金剛菩薩)은 악마와 싸우고 불교(佛敎)의 신비적인 가르침을 보호하기 위하여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대개 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 구실을 담당하는데 보통
사찰 문의 왼쪽에 밀적금강(密迹金剛), 오른쪽에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 서 있다.
*밀적금강(密迹金剛)은 손에 금강저를 들고 항상 부처를 호위하는 야차신이다.
밀적(密迹),이란 붓다의 비밀스러운 사적을 들으려는 서원을 세웠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은 코끼리보다 100만 배힘이 세다,
그러나 단순히 힘만 있는 신중(神衆)이 아니라 이들의 머리 뒤에는 커다란 원광이 있는데, 그것은 신성한 지혜가 깃들어 있음을 상징한다.
보통 입을 열고 있는 역사를 "아금강역사" 입을 다물고 있는 역사를 "음금강역사"라고 한다.
그의 자세로는 주먹을 쥐고 한 팔을 들어오리거나 한 손으로 칼을 잡고 있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석굴암 입구의 금강역사상이 유명하다.
능사의 대웅전(陵寺 大雄殿)
능사의 금당인 대웅전 삼존불(陵寺의 金堂인 大雄殿 三尊佛)
사찰에서 불상을 모시던 공간으로 외부는 중층이고 내부는 통층이다. 예불공간으로 사용하였으며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여래좌상(如來坐像)
통통한 얼굴에 긴장이 풀린 자연스러운 자세, 대좌 밑으로 부드럽게 늘어진 옷주름,
선정인 손모습은 부여 군수리 절터 출토 납석조여래좌상에서 보이는 백제불상의 특징이다.
보살입상(菩薩立像 좌측)
미소진 부드러운 얼굴 표정, 세 갈래로 갈라진 머리장식, 밑이 뾰족한 넓적한 목걸이,
어깨에 고정한 둥근 장식과 무릎부분에서 교차된 천의 그리고 시무외인 · 여원인의 손 모습이 특징이다.
6세기에 유행한 백제 보살상의 보편적인 특징으로 군수리 절터 출토 금동보살입상에서 볼 수 있다.
보살입상(菩薩立像 우측)
가슴 앞에서 두 손을 아래, 위로 하여 둥근 보주를 마주잡은 보살상으로 서산마애삼존불에서 볼 수 있다.
삼국 중에서는 백제에서만 보이는 특징이며 중국의 남조, 일본 비조시대에서도 제작되어 당시 문화의 유입 경오를 유추할 수 있다.
삼존상
여래좌상(如來坐像)
통통한 얼굴에 긴장이 풀린 자연스러운 자세, 대좌 밑으로 부드럽게 늘어진 옷주름,
선정인 손모습은 부여 군수리 절터 출토 납석조여래좌상에서 보이는 백제불상의 특징이다.
우측 보살입상(菩薩立像)
가슴 앞에서 두 손을 아래, 위로 하여 둥근 보주를 마주잡은 보살상으로 서산마애삼존불에서 볼 수 있다.
삼국 중에서는 백제에서만 보이는 특징이며 중국의 남조, 일본 비조시대에서도 제작되어 당시 문화의 유입 경오를 유추할 수 있다.
좌측 보살입상(菩薩立像)
미소진 부드러운 얼굴 표정, 세 갈래로 갈라진 머리장식, 밑이 뾰족한 넓적한 목걸이,
어깨에 고정한 둥근 장식과 무릎부분에서 교차된 천의 그리고 시무외인 · 여원인의 손 모습이 특징이다.
6세기에 유행한 백제 보살상의 보편적인 특징으로 군수리 절터 출토 금동보살입상에서 볼 수 있다.
흑백의 모습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의 향로 = 발견된 당시의 모습
삼국시대 백제 = 별칭 : 부여 능산리출토 백제금동대향로, 용봉봉래산향로 국보 제287호.
이 향로는 1993년 12월 12일 부여 능산리의 백제시대 고분군(古墳群)과 사비성(泗泌城)의 나성(羅城)터 중간에 위치한
백제유적 발굴 현장에서 백제시대의 다양한 유물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동체(胴體)를 연꽃봉오리로, 뚜껑은 산 모양으로 만들어 많은 물상(物象)을 등장시켰고 정상에 봉황을, 아래에는 용을 배치하였다.
이로 보아 이 향로는 불로장생하는 신선(神仙)이 용과 봉황과 같은 상상의 동물들과 어우러져 살고 있다는 해중(海中)의 박산(博山)
즉 신선세계(神仙世界)이자 별천지(別天地) · 이상향(理想鄕)을 닮게 만들었다는 전형적인 박산향로(博山香爐)임을 알 수 있다.
※박산이란 : 바다 위에 있는, 신선이 산다는 전설상의 산이다.
신선, 기이하게 생긴 짐승, 바닷물 등이 향로의 뚜껑에 조각되어 있고 몸체에는 구명이 많이 뚫어져 있으며 금 · 은으로 상감 세공한 것도 있다.
신선에 관한 전설을 내용으로 하는 형태와 무늬는 당시 도교가 성행했던 사실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후세의 도자기 중에는 박산향로의 양식을 본뜬 것이 많다.
능사 대웅전에 있는 백제 금동대향로 (百濟金銅大香爐) : 국보 제287호 시대 = 백제
금동 대향로의 세계
중국에 서역의 향품이 전해져서 전국시대 말기부터 악취를 없애고 부정을 쫓기 위해 향로를 만들었다.
백제 금동대향로의 기원을 중국에서 찾는 사람도 있는데, 이들에 의하면 백제 금동대향로는 한나라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아
백제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제작되었다고 한다.
중국에는 백제의 것과 같은 대형 향로가 없으며, 한나라 때와 같은 금동 제품이 남조에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남조시대 유물들 중 비록 실물은 아니지만 백제의 금동대향로와 비슷한 것이 확인되었다.
불교문화연구가들은 백제금동대향로가 불교의 연화화생설과 관련있다고 하는데,
불교의 이상향인 연화장의 세계는 비로자나불이 있는 광대하고 장엄한 이상세계를 말한다. 연화장 세계의 맨 아래에는 풍륜이 있고,
풍륜 위에는 향수해가 있어 그 향수해에 큰 연꽃이 핀 것을 연화장이라 하는 이상세계이다.
즉, 대향로를 받치고 있는 용은 향수해를 의미하고 연꽃잎 위의 세계가 이상세계라는 설명이다.
봉황을 고대 동북아에서 신성시해 온 천계(天界)로 보고, 5악사와 기러기를 백제의 5부로 보아 백제대향로에
고대 동북아의 전통사상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설도 있다.
◈금동 대향로의 구성
백제금동대향로는 전체 높이가 62.5cm이며 용 모양의 향로 받침, 연꽃이 새겨져 있는 향로의 몸체, 산악도가 솟아잇는 향로 뚜껑,
뚜껑 위의 봉황 장식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황과 향로 뚜껑은 하나의 주물로 제작되어 있어, 제작 과정에서 세 개의 주물틀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향로 본체의 가운데 테두리의 구름 문양 아래에는 연꽃이 핀 연못이 있고, 그 위인 뚜껑에는 봉우리가 세 개 있는 산들이 있다.
이 산에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사람, 신선으로 보이는 사람들, 호랑이, 사자, 원숭이, 멧돼지, 코끼리, 낙타 등 많은 동물들이 장식되어 있다.
또한 곳곳에 폭포, 나무, 불꽃 무늬, 귀면상 등이 있다.
제단 모양으로 꾸며진 정상에는 봉황이 날개를 펴고 춤추고 있고, 그 아래에는 5악사가 있는데 이들은 소, 피리, 비파, 북, 현금을 연주하고 있다.
그 주위의 다섯 봉우리에는 각가 기러기로 보이는 새가 봉황과 함께 춤추는 형상이 있다.
향로의 몸체에는 연꽃이 있는데 그 위에 갖가지 새와 물고기가 새겨져 있다. 또 한쪽에는 무예를 하는 인물도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발가락이 다섯 개 있는 용이 위의 연꽃을 물고 하늘로 날아가려는 듯 용틀임을 하고 있다.
♣♧♣
이 향로의 뚜껑에 박산은 5단(段)으로 되어 있다. 그 각단은 5봉우리로 구성되어 결과 큰 산은 25개이다.
이 큰 산의 각 단은 엇갈리게 배치되었고 또 큰 산과 연결되는 49봉우리도 있어 결과 산은 매우 중첩된 양상이 되었다.
이 산에는 최정상의 봉황을 비롯한 37마리의 상상의 동물과 악사(樂士) 5인을 비롯한 17인의 신선이 있다.
또 나무 6그루, 향연구멍(香煙穴) 12개, 산중턱을 가르며 난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입체적으로 돌출되어
낙하하고 있는 폭포 그리고 낚시터가 된 호수(湖水)도 있다.
이 향로 노신(爐身)을 감싸 장식한 연꽃도 뚜껑인 산의 5단과 일치시키려고 5단 연판(蓮瓣)으로 나타냈다.
이 연판에 2인의 신선과 25마리의 상상의 동물을 나타냈다.
이 동물들은 이곳이 물속과 물가 부위임에서인지 주로 물가에 사는 동물 또는 물고기를 비롯한 수중(水中) 동물로 구성되어 있다.
유려한 동작을 보여주는 이 향로의 용은 대좌의 역할을 한다. 가느다란 머리 위로 넓고 무거운 향로의 동체(胴體)를 짊어지고 있다.
용의 몸통, 꼬리, 수염, 머리카락 등은 연꽃이나 연꽃과 관련된 당초문으로 나타냈다. 몸통은 착지면으로 갈수록 그 면적이 확대되고 있다.
몸통 맨 바깥쪽에는 이 향로가 해중신산이고 용은 해중(海中) 동물임을 알리려는 듯 바다의 파도(波濤)도 나타냈다.
이 향로 정상에 있는 새는 맨 아래에 위치한 용(龍)과 대비되어 나타내진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신수인 봉황이다.
봉황은 박산(博山)에서 양(陽)을 대표하는 신수로서 그리고 음(陰)을 대표로 하는 맨 아래에 배치된 용과 대칭되어 맨 정상에 안치되었다.
봉황은 막 비상하려는 듯 날개와 꼬리를 거의 50도(度)가량으로 펼치고 있다.
봉황의 부리 밑에는 용을 비롯한 신수(神獸)의 입 언저리에 배치되던 여의주가 있다. 봉황은 절로 노래하고 절로 춤을 춘다고 하며
노래는 묘음(妙音) 또는 오음(五音)이라고 하는 것에서 보듯 예로부터 음악과 관련된 동물이다.
이 향로에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가 동반된 것, 다섯 원앙(鴛鴦)이 봉황을 응시하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백제 금동대향로 (百濟金銅大香爐) : 국보 제287호 시대 = 백제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높이 61.8㎝,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몸체는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킨다. 연잎의 표면에는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 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독립적 · 입체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작 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서부 속채 = 항로각(香爐閣)
국보 287호인 백제금동대향로의 제작과정을 재현한 공간이다. 이 건물내 수조(水槽)에서 발굴되었다.
향로각은 국보 제 287호인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가 발굴된 건물로써 이를 기리기 위하여 향로각(香爐閣)이라 하였다.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는 1993년 12월 12일 능산리사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발굴된 백제 최고의 걸작으로써 높이 61.8cm, 무게 11.8kg, 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 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도움ㄹ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건물내 수조(水槽)에서 발굴되었다.
목조건물은 중요무형문화재 제 74호인 대목장(大木匠)이, 단청은 중요문화재 제 48호인 단청장(丹靑匠)이,
기와는 중요 무형무화재 제 121호인 번와장(翻瓦匠), 중요무형문화재 제 106호인 각자장(刻字匠)이 참여하여 건축한 건물이다.
백제 금동대향로(百濟 金銅大香爐)
금동대향로는 능산리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발견되었다. 향로는 용모양의 하단과 몸체, 뚜껑 등 3부분이 주물로 제작되었다.
국보 제 287호로 높이 64cm, 무게 11.8kg, 이나 되는 대형 향로이다 중국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았지만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받침, 몸통, 뚜껑 등 3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연꽃무늬와 신선 등을 새겨 넣어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백제인의 이상적 세계를 반영한
걸작이다.
목조건물은 중요무형문화재 제 74호인 대목장(大木匠)이, 단청은 중요문화재 제 48호인 단청장(丹靑匠)이,
기와는 중요 무형무화재 제 121호인 번와장(翻瓦匠), 중요무형문화재 제 106호인 각자장(刻字匠)이 참여하여 건축한 건물이다.
목조건물은 중요무형문화재 제 74호인 대목장(大木匠)이, 단청은 중요문화재 제 48호인 단청장(丹靑匠)이,
기와는 중요 무형무화재 제 121호인 번와장(翻瓦匠), 중요무형문화재 제 106호인 각자장(刻字匠)이 참여하여 건축한 건물이다.
자효당(慈孝堂) = 강당(講堂)
대중에게 불법을 설법하던 공간으로 위덕왕의 성왕에 대한 효심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자효당은 사찰내에서 강당으로 사용되던 공간이다. 발굴된 유구에서도 지금과 같이 벽이 없이 트인 공간과 벽으로 둘러 쌓인 공간으로 구분되었다.
이는 강당(講堂)의 성격상 대중(대중)이 모이는 공간으로 계절의 특성에 맞게 건축되고 사용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곳 능사는 위덕왕(威德王)이 부왕(父王)인 성왕(聖王)을 위하여 지은 사찰로서 어버이에 대한 효심을 기리는 의미에서 자효당(慈孝堂)이라 하였다.
목조건물은 중요무형문화재 제 74호인 대목장(大木匠)이, 단청은 중요문화재 제 48호인 단청장(丹靑匠)이,
기와는 중요 무형무화재 제 121호인 번와장(翻瓦匠), 중요무형문화재 제 106호인 각자장(刻字匠)이 참여하여 건축한 건물이다.
부용각(芙蓉閣)
능사 동부속채로 새로운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를 염원하는"연화화생(蓮花化生)"의 의미를 담았다.
백제군의 행진하는 조각상!! 반대편 벽에는 금동대향로가 있다.
백제군의 행진하는 조각상!!
백제군의 행진하는 조각상!!
백제의 고분 = 고분공원
고분공원은 백제시대의 대표적 묘제를 보여주는 곳으로 사지시대의 대표적 고분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 복원된 고분은 부여지역에서 출토된 고분을 이전 · 복원한 것이다.
고분은 석실분으로서 사비시대 귀족계층의 무덤이며, 백제문화단지 화계조성부지에서 출토된 석실분 4기와
부여군 은산면 가중리에서 출토된 석실분 3기 등 모두 7기가 이전 · 복원 되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옛모습 = 사진전에서
정림사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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