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북도 = 나를 찾아서...

정림사지(定林寺址)와 백제문화단지 내 사비의 정문인 정양문(正陽門)

백련암 2014. 8. 5. 21:13

 

능사(陵寺)

능사(陵寺)는 문화재 지정명칭은 "능산리사지"이나 성왕의 원찰로서 왕릉의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능사로 칭하였다.

 

 

 석조여래좌상 (定林寺址 石造如來坐像)이 모셔져 있는 전각의 문고리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 국보  제9호   시대 = 백제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각각 다른 방향에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또 다른 방향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기단없이 오층석탑

 

 

오층석탑(국보 제 9호)과 석조여래좌상(보물 제 108호)와 남북으로 마주보고

한바탕 쏟아질 비구름

 

 

정림사지 정승

 

 

1. 명혜공주 태실비(明惠公主胎室碑) : 건립연대 = 조선 현종 11년(1670년)  

 

명혜공주(明惠公主 : ?~1673년)는 조선 제 18대 현종(재위 1659년~1674년)의 둘째 딸이다.     

태실비는 원래 충화면 가화리 용골 구태봉에 있었다고 전해지며 면사무소 앞에 이몰될어 있던 것을 2006년 현위치로 이건한 것이다.

방형의 비좌(碑座)위에 한 몸으로 이루어진 비몸과 머릿돌(離首)을 올린 상태로 비좌의 앞면과 옆면에 초화문을 새기고 윗면에는 단판의 연화문을 새겼다.

비몸의 앞면에는 "명혜공주 태실비(明惠公主胎室碑)" 이라 쓰고 뒷면에는 "강희 9년 3월 13일립(康熙九年三月十三日立)"

이라고 적혀 있어 조선 현종 11년(1670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2. 부여 임천 대교비(扶餘林川大橋碑) : 건립연대 = 1510년 ~ 1512년(조선 중종) 

임천면 만사리 논에 묻혀 있던 것을 만사리 마을로 이전한 것으로 마을에서는 오랫동안 어떤 이유에서 인지 개(犬)의 충절(忠節)을

기리는 비로 인식해왔다.

비는 마을 진입로 확포장 공사 과정에서 제보되어 조사결과 조선시대 임천에서 서천군 한산으로 이어지는 대로(大路) 상의 하천을

넘는 다리와 관련된 비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화강암재의 석재를 이용하여 비문을 새긴 면만 고르게 치석하였는데 현재는 윗부분의 좌우가 떨어져 나간 형태이다.

하단에는 원위치에서 옮겨와 다시 세우면서 "주인을 구한 충절의 표상 개(犬)비(碑)"라는 문구를 새겨 놓은 받침돌이 남아있다.

비문은 상하로 내용이 구분되는데 윗부분은 다리의 건립 경위와 과전, 그리고 건립연대 등을 8행으로 기록하였고

아래 부분은 다리의 건립 경위와 과정, 그리고 건립 연대 등을 8행으로 기록하였고 아래 부분은 다리 건립에 참여한 인물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체계화된 관리와 보존을 위해 2010년 현 위치인 정림사지박물관 야외 전시장으로 옮겨왔다.

 

 

그 옛날 정문과 매표소자리

 

 

옛날 출입문

 

 

 

 

   

 

 

백제문화단지로 들어서는 관문 비가 계속온다 날을 잘못잡은 것 같다.

 

 

제의 문(百濟門)

 

 

제의 문(百濟門)

 

제의 문(百濟門)

 

 

=연인=

백제문화단지 내로 들어가기 전에 오석의 조각전을 하고 있었다.

 

 

오석으로 삿갓을 쓴 나그네를 조각하여 놓았다. = 김삿갓

 

 

얘는 무엇일까요 물고기 갖기도하고 애벌레같기도 하지요 애벌래 같으면 환골탈퇴하려고...

 

 

도미부인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도미 처는 실존 인물이라 합니다. 세종편찬된 "삼강행실도" 열녀편에 제일 먼저 소개되었답니다.

 

도미는 백제 개로왕 때의 사람입니다. 비록 시골 소민이지만 의를 알며 그 아내는 아릅답고도 정조관념이 높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개로왕은 도미를 불러 "무릇 부인의 덕은 정조가 재일이라 하자만, 만약 어둡고 은밀한 곳에서 유혹하면 넘어가지 않을

여인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도미는 "사람의 맘은 알 수 없다지만 제 아내는 맘을 정조를 지킬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도미의 부인을 시험할 목적으로 도미를 궁안에 머물러 있게 하고 신하에게 왕의 옷을 입힌 뒤 말과 몸종을 딸려 도미의 집에 가게했습니다.

(그 전에 왕은 사람을 보내 도미의 아래에게 왕이 갈거라고 기벽을 보냈습니다.)

 

왕의 옷을 입고 도미의집에 도착한 신하가 도미의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오래전 부터 너의 미모에 대한 소문을 듣고 네 남편과 내기 장기를 두어 짐이 이겼다. 내일은 널 궁으로 데려가 궁인으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가짜 왕은 도미의 아내에게 가까이 다가서려 했습니다....

그러자 도미의 아내가 말하기를 "어라하께오서 망령된 말씀을 하실리가 없사온데 제가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청하건데 어라하께오서는 먼저 방에 들어가소서, 전 곧 옷을 갈아입고 어라하를 모시겠나이다." 하고 말한 뒤 물러 나와

미모의 하녀를 곱게 단장시켜 대신 가짜왕의 수청을 들게 하였습니다.

 

후에 왕이 속은 사실을 알고 격분, 도미를 불러 속인 죄를 물어 도미의 두 눈을 뽑은 뒤 강물에 띄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도미의 아내를 강간하려고 하자 도미의 아내는 "전 남편을 잃고 혼자입니다. 이제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라하를 거역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은 달거리로 몸이 더러우니 다음 날에 목욕을 하고 오겠나이다."

하고 말해 왕이 믿고 허락하였습니다.

 

도미의 아내는 그 길로 도망쳐서 남편이 버려진 강가에 도착해 땅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그 때 조각배 한 척이 떠내려 왔다.

부인은 그 배를 타고 어느 섬에 이르러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습니다.

거기서 도미부부는 풀뿌리로 연명하며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갔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옷과 먹을 것을 주어

구차스럽게 살면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사비궁(泗沘宮)

백제 역사문화의 절정을 이룬 사비시대 왕궁을 상징하기 위하여 사비궁을 궁궐의 명칭으로 사용하였으며 궁궐의 배치 형식 중 중앙부분이

치조(治朝)의 권역을 재현하였다.

 

正陽門(정양문)

 

정양문은 백제문화단지 사비성의 정문이다. 이 문을 정양문이라 한 것은 해가 가장 높이 떠 온 세상을 밝고 환하게 비추는 때로써 모든 기운이 

가장 완성한 때를  가르키는 정양(正陽)을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의 유래는 가장 강성했던 백제를 이루었던 근초고왕(近肖古王, 346年~375年)이 일본(倭=왜)의 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칠지도(七支刀)라고 하는 칼에 새겨진 명문에서 인용한 것이다.

 

칠지도(七支刀)에는 총 62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중 칠지도를 만든 시기에 대하여 "태화 4년 5월 16일 丙午(병오) 正陽(정양)에 100번

단련힌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는데 병해를 물리칠 수 있으며 편안히 候王(후왕)에게 나누어 "마땅하다."라는 기록에서

正陽(정양)이라는 단어를 인용하여 사비성의 관문으로 가장 남쪽에 있는 이 문의 상징성을 부각시켰다.

건물을 2층 규모로 입구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으며 백제 고유의 건축양식으로 기둥 상부에 45도로 경사진 부재가 건물을 웅장하게 해주는

하앙식 구조로써 목재 또한 끼우고 맞춤 의한  방법으로 조립된 전통기법으로 건축하였다.

 

목조건물은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인 大木匠(대목장)이, 단청은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인 丹靑匠(단청장)이,

기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21호인 翻瓦匠(번와장), 현판은 중요무형문화재 제 106호인 刻字匠(각자장)이 참여하여

건축한 백제 시대의 城門(성문)이다.

 

 

正陽門(정양문)의 뒷모습 천정문앞에서 본 모습

 

 

正陽門(정양문)

이 문을 정양문이라 한 것은 해가 가장 높이 떠 온 세상을 밝고 환하게 비추는 때로써 모든 기운이 가장 완성한 때를  가르키는 정양(正陽)을 이르는 말이다. 

 

 

天政門(천정문)

 

天政門(천정문) = 중남문

궁궐의 가장 중심 공간인 정전의 출입문으로 천정문의 남문을 뜻하여 천정문이라 하였다.

 

백제사비시기의 중궁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정전인 천정전(天政殿)을 국가의 큰 정사를 하늘에 고하여 결정했다는 천정대(天政臺)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곳 중궁의 정전은 왕의 즉위 의례, 신년 행사 등 각종 국가 의식이 거행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왕궁내의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다.

 

 

天政門(천정문) 뒷모습 천정전앞에서 본 모습

 

 

天政門(천정문) 뒷모습 천정전앞에서 본 모습

 

天政殿(천정전)= 중궁

 

국가의 큰 정사를 하늘에 고하여 결정한 정사암에서 유래한 천정대(天政臺)에서 이름을 따왔다.

천정전은 사비궁의 가장 중심공간으로 왕의 즉위 의혜, 신년행사를 비롯한 각종 국가의식이 거행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등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천정정은 왕궁의 가장 중심공간에 있는 정전(正殿)으로서 그 나라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천정전(天政殿)이라는 말은

"정치는 무릇 하늘의 뜻에 반함이 없어야 한다." 는 의미로서 이 말은 백제시대의 주요 유적인

『천정대(天政臺), 충남 기념물 제 49호』에서 유래한 말이다.

 

천정대(天政臺)는 이곳 백제문화단지에서 4km정도 떨어져 백마강변에 있는 유적으로 삼국유사에 따르면 천정대를 "정사암(政事岩)"이라 불렸는데

이는 나라에서 재상을 뽑을 때, 3~4명의 후보 이름을 적어 상자 안에 넣어두고 며칠 후 열어보아 이름 위에 도장이 찍힌 사람을 재상으로

뽑았기 때문 이라고 전한다.

하늘을 받들고 섬기던 부족사회로의 풍습이 백제 때에도 여전히 남아 재상 임명등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일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이 같은 전설과 기록은 천명(天命)을 중히 여기고 그것을 받들어 정치를 베풀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사비궁의 가장 중심 공간에 정전(正殿)을

배치하고 이를 천정전(天政殿)이라 하였다. 이곳 천정전(天政殿)은 외국사신 접견이나 신년하례, 왕실의 행사의식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시에만 사용하던 공간으로 년중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공간이다.

건물은 국가의 가장 큰 권위를 상징하기 위하여 높은 기단위에 외부는 2층 규모이며 내부는 통층으로 건축하여

건물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웅장함과 함께 엄숙성을 강조하여 왕의 권위를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건물은 백제 고유의 건축양식으로 기둥 상부에 45도 경사진 부재가 건물을 웅장하게 해주는 하앙식 구조로써 목재 또한 끼우고 맞춤,

의한 방법으로 조립된 전통기법으로 건축하였다.

 

목조건물은 중요무형문화재 제 74호인 대목장(大木匠)이, 단청은 중요문화재 제 48호인 단청장(丹靑匠)이,

기와는 중요 무형무화재 제 121호인 번와장(翻瓦匠), 중요무형문화재 제 106호인 각자장(刻字匠)이 참여하여 건축한

 백제시대의 궁궐 중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天政殿(천정전) 비나 눈 그리고 바람등의 것을 피해 천정전으로 걸어들어갈수 있는 통로...

 

 

天政殿(천정전) 비나 눈 그리고 바람등의 것을 피해 천정전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이 곳에서는 사진전도 함께 하고 있다.

 

 

   

天政殿(천정전)의 좌우 옆 모습

 

 

어좌(御座)

 

어좌(御座)는 임금께서 앉는 자리로 용좌(龍座)라고 부르며기도 한다.

이 곳 천정전(天政殿)은 신하들이 왕에게 신년인사를 드리거나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왕궁의 중심건물로써

건물 내부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가운데 칸에 어좌(御座)를 배치하였다.

 

어좌(御座)의 기단부는 고대(고대) 가구자료와 당시 왕실불교의 특성 등을 감안하여 공주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제 128호)의

대좌와 안상(眼象) 문양을 적용함으로써 왕의 존귀함을 표현하였다.

 

상부 닫집은 삼국시대 벽화 등 관련 자료에 의하여 장막을 두른 보개(寶蓋) 형태로써 공주 무령왕릉 출토 금제관식과 왕두침의

귀갑문(龜甲紋), 부여 부소산에서 출토된 청동제 향로 뚜껑부의 문양과 능산리 은제초화장식문양 등으로 장식하였다.

 

어좌(御座) 위 용상(龍床) 뒤에는 부여 규암면 외리에서 출토된 문양중 세상이 태평할 때에만 나타난다는 봉황문(봉황문)을 두어

왕실과 나라의 무궁함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백제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화이불치(華而不侈) 검이불루(儉而不陋) : 화려하지만 사치하지 않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 는

백제의 미학을 표현하였다.

 

 

어좌(御座)

 

 

왕비의 평상복(平常服)

이 복식은 왕과 왕비의 평상복으로서 일상 생활 궁궐내에서 입었다.

 

 

이마 위 머리에 쓰던 관과 귀거리

 

 

왕비가 사용하였던 머리에 쓰던 관

 

 

왕비가 걸었던 귀걸이

 

 

왕의 평상복(平常服)

이 복식은 왕과 왕비의 평상복으로서 일상 생활 궁궐내에서 입었다.

 

 

왕이 사용하던 귀걸이

 

 

왕의 관모 =  왕의 관꾸미개에 불꽃무늬(火焰文)를하고 달개를 달은 관모

 

 

무령왕릉 출토 유물(武寧王陵 出土遺物)  :  시대 = 삼국시대 중 백제 6세기(三國時代 百濟 6世紀)

 

왕비의 관꾸미개는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 무늬(忍冬唐草 文)와 불꽃무늬(火焰文)를 맞새김 하였는데,

대칭형의 구도로 되어 있으며 왕의 관꾸미개는 달개가 달려 있는것에 비해 왕비의 관꾸미개에는 달개는 달려 있지 않다.

문헌기록이나 출토 위치 등으로 미루어 검은 비단으로 만든 관모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파악되고 있다.

 

 

왕의 관꾸미개에 불꽃무늬(火焰文)에 달개가 달려있는 장식품

 

 

왕의 관모

 

 

왕의 대례

 

왕의 대례복에 함께 사용되었던 관대(허리띠)와 장식들

 

 

무령왕릉 출토 유물(武寧王陵 出土遺物)  :  시대 = 삼국시대 중 백제 6세기(三國時代 百濟 6世紀)

 

 

달개가 달린 관모 꾸미게

 

 

왕비 대례복

 

왕비의 대례복에 함께 사용되었던 관대(허리띠)와 장식들

 

 

왕비의 관모

무령왕릉 출토 유물(武寧王陵 出土遺物)  :  시대 = 삼국시대 중 백제 6세기(三國時代 百濟 6世紀)

 

왕비의 관꾸미개는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 무늬(忍冬唐草 文)와 불꽃무늬(火焰文)를 맞새김 하였는데,

대칭형의 구도로 되어 있으며 왕의 관꾸미개는 달개가 달려있는것에 비해 왕비의 관꾸미개에는 달개는 달려 있지 않다.

문헌기록이나 출토 위치 등으로 미루어 검은 비단으로 만든 관모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파악되고 있다.

 

왕비의 관모에 달던 관 꾸미개 여기에는 달개가 달려있지 않고 밋밋하다.

 

 

연영전(延英殿)

신하들의 집무공간으로 천하의 인재들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많은 훌륭한 인재를 맞아 백성들의 태평성대를 위한 정사를 펼쳐야 함을 의미한다.

 

 

연영전(延英殿)에서 바라본 능사 오층목탑

 

 

어디로 가든 다 통하는 통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지만 이 통로가 있어 다니는데 지장이 없었다.

 

 

문사전(文思殿)

 

동궁에서 가장 중심적인 공간으로 왕이 평소 문관(文官)에 관한 집무를 보는 공간이다. 문사전(文思殿)의 文은 동쪽을 의미한다.

 

문사전(文思殿)은 백제시대 왕궁인 사비궁 중 동쪽에 위치한 동궁전(東宮殿)의 중심건물이다.

문사전(文思殿)은 왕이 평상시 집무를 보는 곳이며 주로 문관(文官)과 관련된 업무를 보는 공간으로 앞쪽에 위치한 건물인 연영전(延英殿)과 구분된다.

연영전(延英殿)은 천하의 인제를 맞이한다는 의미로서 신하들의 업무공간이다.

이 두 건물은 왕이 있는 공간과 신하들이 있는 공간으로 구분이 된다.

이러한 특성으로 두 건물의 건축양식도 차이가 있는데 왕이 집무를 보는 문사전(文思殿)은 연영전(延英殿)에 비하여 기단이 높고,

기둥위에 45도로 돌출된 하앙을 두러 처마를 높게하였으나

연영전(延英殿)은 기단이 낮고 하앙을 두지 않는 등 건물의 격에 맞게 건축양식도 차별화 하였다.

 

목조건물은 중요무형문화재 제 74호인 대목장(大木匠)이, 단청은 중요문화재 제 48호인 단청장(丹靑匠)이,

기와는 중요 무형무화재 제 121호인 번와장(翻瓦匠), 중요무형문화재 제 106호인 각자장(刻字匠)이 참여하여 건축한

 백제시대의 궁궐 중 동쪽에 위치한 건물의 중심이다.

 

 

문사전(文思殿)에서 바라본 능사 오층목탑

 

 

문사전(文思殿)에서 바라본 능사 오층목탑

 

 

고분공원(古墳公園)으로 나가는 문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를 궁내 통로 벽면에다 조각하여 붙여놓았다. 부분적으로 세밀하게 볼 수 있어 재미있었다.

백제 금동대향로 (百濟金銅大香爐) : 국보  제287호   시대 = 백제

 

↓↓ 악기를 연주하는 5인의 선인

구멍없는 피리를 불고 있는 선인

 

소를 다르고 있는 선인

 

현금을 연주하는 선인

 

북을 연주하는 선인

 

비파를 연주하고 있는 선인

 

 

금동 대향로의 세계

중국에 서역의 향품이 전해져서 전국시대 말기부터 악취를 없애고 부정을 쫓기 위해 향로를 만들었다.

백제 금동대향로의 기원을 중국에서 찾는 사람도 있는데, 이들에 의하면 백제 금동대향로는 한나라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아

백제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제작되었다고 한다.

중국에는 백제의 것과 같은 대형 향로가 없으며, 한나라 때와 같은 금동 제품이 남조에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남조시대 유물들 중 비록 실물은 아니지만 백제의 금동대향로와 비슷한 것이 확인되었다.

 

불교문화연구가들은 백제금동대향로가 불교의 연화화생설과 관련있다고 하는데,

불교의 이상향인 연화장의 세계는 비로자나불이 있는 광대하고 장엄한 이상세계를 말한다. 연화장 세계의 맨 아래에는 풍륜이 있고,

풍륜 위에는 향수해가 있어 그 향수해에 큰 연꽃이 핀 것을 연화장이라 하는 이상세계이다.

즉, 대향로를 받치고 있는 용은 향수해를 의미하고 연꽃잎 위의 세계가 이상세계라는 설명이다.

봉황을 고대 동북아에서 신성시해 온 천계(天界)로 보고, 5악사와 기러기를 백제의 5부로 보아 백제대향로에 고대 동북아의 전통사상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설도 있다

 

동 대향로의 구성

백제금동대향로는 전체 높이가 62.5cm이며 용 모양의 향로 받침, 연꽃이 새겨져 있는 향로의 몸체, 산악도가 솟아잇는 향로 뚜껑,

뚜껑 위의 봉황 장식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황과 향로 뚜껑은 하나의 주물로 제작되어 있어, 제작 과정에서 세 개의 주물틀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향로 본체의 가운데 테두리의 구름 문양 아래에는 연꽃이 핀 연못이 있고, 그 위인 뚜껑에는 봉우리가 세 개 있는 산들이 있다.

이 산에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사람, 신선으로 보이는 사람들, 호랑이, 사자, 원숭이, 멧돼지, 코끼리, 낙타 등 많은 동물들이 장식되어 있다.

또한 곳곳에 폭포, 나무, 불꽃 무늬, 귀면상 등이 있다.

제단 모양으로 꾸며진 정상에는 봉황이 날개를 펴고 춤추고 있고, 그 아래에는 5악사가 있는데 이들은 소, 피리, 비파, 북, 현금을 연주하고 있다.

그 주위의 다섯 봉우리에는 각가 기러기로 보이는 새가 봉황과 함께 춤추는 형상이 있다.

향로의 몸체에는 연꽃이 있는데 그 위에 갖가지 새와 물고기가 새겨져 있다. 또 한쪽에는 무예를 하는 인물도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발가락이 다섯 개 있는 용이 위의 연꽃을 물고 하늘로 날아가려는 듯 용틀임을 하고 있다.

 

 

 

◈금동대향로의 세밀한 설명◈

금동 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12월 충남 부여 능산리 무덤들 사이의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 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논바닥에 엎드려, 일회용 종이컵으로 물으 퍼내가며 조심스럽게 이뤄졌던 발굴 작업 끝에 천사백여 년의 세월을 진흙 속에 묻힌 채

우리 곁으로 돌아온 높이 61.8cm, 무게 11.8kg이나 되는 대형 향로입니다.

계속되는 발굴 작업으로 출토된 다른 유물에서 백제 위덕왕 13년(567년)이라는 기록이 발견되어,

이 향로는 그 후 문화 · 예술적으로 최고 수준에 이르렀을 7세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유추하고 있습니다.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한 마리의 용이 머리를 들어 입으로 향로를 물고 있는 받침 부분과 불교의 연화화생을 나타내는 연꽃잎으로 된 몸체,

그리고 도교적 사상을 담고 있는 신악과 신선의 모습이 묘사된 뚜껑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상에는 두발을 딛고 긴 꼬리와 날개를 젖히고 있는 봉황이 장식되어있습니다.

그 봉황의 가슴 윗부분에는 두 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연기가 나올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향로 전체에는 신선으로 보이는 인물 21염, 동물 65마리가 있는데, 뚜껑의 정상에는 5명의 인물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禮樂(예악)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유교사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왕에게 제사를 지내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여러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작 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주며, 동아시아 고대 금속공예의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있는 귀중한 작품이랍니다.

글 = 수덕사 근역성보관 학예연구원 감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