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사지와 정림사지 박물관
예전에 드나들던 문인것 같다.
정림사지 박물관(定林寺址 博物館 )
백제 사비시기 불교와 그 중심에 있었던 정림사를 주제로 백제 불교문화르 재조명하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고취시키고자 건립되었다.
박물관의 건물형태는 불교의 상징인 "卍"자 모양으로 중앙홀을 중심으로 진입로, 전시실, 관리실 등이 사방으로 뻗은 날개 모양으로 상호 연계하여
박물관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백제시대중 가장 화려했던 사비시기의 불교유적 등 백제의 꿈과 땀이 담긴 정림사지박물관
연꽃 도깨비 무늬
봉황무늬
연꽃무늬
石塔(석탑) : 高麗時代(고려시대)
石塔(석탑) : 高麗時代(고려시대)
소승(파랑색)과 대승(빨강색)불교의 표시
군수리 석조여래좌상 : 보물 제 329호 시대 = 백제
백제사찰에 대한 최초의 조사
軍守里寺址(군수리사지)
군수리사지는 백제사비기 사찰의 터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본래의 절 이름이나 유래는 알 수가 없다.
부여군 내에서 실시된 백제사찰에 대한 최초의 조사로 불상(佛像)과 연화문 · 인동문이 아름답게 양각된 상자형(箱子形), 금제고리, 작은 구슬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1탑 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 사찰의 가람구조가 밝혀져쓰며,
이를 통해 군수리사지가 일본의 불교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扶餘 王興寺址 舍利器) : 보물 제1767호 시대 = 백제
명문이 쓰여진 사리기
※청동제 사리함 명문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
"丁酉年二月 十五日 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
사리기 명문을 통해 확인되는 王興寺(왕흥사)
1934년 "왕흥(王興)"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며 사찰 이름과 함께 절의 위치가 밝혀졌다.
2007년 목탑지 발굴조사에서 최초로 사리기가 봉안된 백제의 사리장치가 확인되었다. 청동제사리함 외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왕흥사(王興寺)축조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왕흥사는『삼국사기[三國史紀]』와『삼국유사[三國遺史]』에도 전해지며,
특히『삼국유사』에는 빼어났던 왕흥사의 경관을 알려주는 구절이 남아 있다.
<박물관의 글>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 (扶餘 王興寺址 舍利器 一括) : 보물 제1767호 시대 = 백제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은 목탑지의 심초석 남쪽 중앙 끝단에 마련된 장방형 사리공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가장 바깥에 청동제의 원통형 사리합을 두고 그 안에 은으로 만든 사리호, 그리고 보다 작은 금제 사리병을 중첩하여
안치한 3중의 봉안 방식을 취하였다.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가장 귀한 재질인 금, 은, 동을 순서대로 사용한 백제 사리장엄의 면모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우선 청동제사리합은 바닥이 납작한 원통형 몸체의 위, 아래로 두 줄의 음각선을 둘렀고 사리함 뚜껑에도 두 줄씩 음각선을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 넣었다.
뚜껑 중앙에 솟아 있었던 연봉형의 손잡이는 부러진 채 발견되었는데, 현재 복원되어 있다.
청동 합 안에 넣었던 은제사리호는 직립된 긴 목 아래로 둥근 몸체와 낮은 굽을 지닌 호의 모습을 하였다.
목 부분에 접합한 흔적이 보이는 것은 금제 사리병을 안치하기 위해 상부와 하부를 따로 만들어서 나중에 접합한 것으로 추측된다.
불룩하게 솟은 뚜껑 중앙의 연봉형 손잡이가 있고 그 주위에 연잎을 유려하게 새겼다.
특히 몸체의 안쪽 바닥에는 별도의 받침대가 있는데, 은제사리호 내부에 안치되는 금제사리병이 움직이지 않도록 계획된 것이다.
가장 안쪽의 굽 달린 금제 사리병은 아래쪽으로 갈수록 볼록해지는 호리병 형태로서 가장자리에는 음각선이 한 줄 새겨져 있다.
뚜껑 가운데로 보주형의 손잡이가 솟아있으며 역시 그 주위에 6엽의 연잎을 새겼다.
청동제사리합에는 6행 29자의 명문이 확인된다.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神化爲三” 즉,
“정유년(丁酉年, 577년) 2월 15일에 백제왕 창(百濟王昌)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찰(刹)을 세우는데,
2매였던 사리가 장시(葬時)에 신(神)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명문은 사찰(刹)의 건립시기, 사리기의 제작시기 등을 알려주고, 더불어 사찰의 건립 배경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은 현재까지 확인된 국내 사리기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사리장엄구로 가치가 높다.
<문화재청의 글>
기와를 굽고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만드는 과정
반가사유상을 만드는 과정
반가사유상 보물 제 83호의 모양을 제작하고 있다.
의자왕의 바둑판
金銅觀世音菩薩立像(금동관세음보살입상) : 국보 제 293호 소재지 = 국립부여박물관 부여 규암면 사지출토
모조품
금동으로 만들어진 보살상으로 머리 정면에 작은 부처가 새겨진 관(冠)을 쓰고 있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뒷면 머리중앙에 큼직한 돌기가 마련되어 두광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드러운 미소와 호리호리한 몸, 자유로운 천의자락과 보주를 살포시 잡은 모습이 세련되고 생기있다.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扶餘 窺岩里 金銅觀音菩薩立像) 진품
*뒷모습 *살짝 옆모습임 장식의 세밀도라고 할 수도 있음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扶餘 窺岩里 金銅觀音菩薩立像) : 국보 제293호 시대 = 삼국시대
1970년에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의 절터에 묻혀 있던 무쇠솥에서 다른 하나의 관음보살입상과 함께 발견된 보살상으로 높이는 21.1㎝이다.
머리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진 관(冠)을 쓰고 있으며, 크고 둥근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목에는 가느다란 목걸이를 걸치고 있고,
가슴에 대각선으로 둘러진 옷은 2줄의 선으로 표시되었다.
양 어깨에서부터 늘어진 구슬 장식은 허리 부분에서 자그마한 연꽃조각을 중심으로 X자로 교차되고 있다. 치마는 허리에서 한번 접힌 뒤 발등까지 길게 내려와 있는데
양 다리에서 가는 선으로 주름을 표현하고 있다.
오른손은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으로 작은 구슬을 살짝 잡고 있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져 옷자락을 잡고 있다.
보살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2중의 둥근 받침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형태로 소박한 느낌을 준다.
얼굴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미소와 비례에 맞는 몸의 형태, 부드럽고 생기있는 조각수법을 통해 7세기 초 백제시대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의 글과 사진>
부여 군수리 금동보살입상 (扶餘 軍守里 金銅菩薩立像) : 보물 제330호 시대 = 삼국시대
부여 군수리 금동보살입상 (扶餘 軍守里 金銅菩薩立像) : 보물 제330호 시대 = 삼국시대
부여 군수리 금동보살입상(扶餘 軍守里 金銅菩薩立像)은 1936년 충청남도 부여 군수리 백제 절터를 조사할 때 발견된 금동보살이다.
머리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관(冠)을 쓰고 있고, 얼굴 좌우로 두꺼운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얼굴은 둥글고 원만하며,
깊이 있는 내면의 웃음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백제인의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다.
신체는 두꺼운 옷에 싸여 있으나 비교적 양감이 있고 당당한 모습이다. 배에서 X자형으로 교차되는 옷은 발목 부분까지 길게 늘어져
새의 날개깃처럼 양쪽으로 퍼진 모습이며, 발목까지 내려온 또다른 옷자락에는 U자형의 주름이 표현되어있다.
오른손은 네번째 손가락과 새끼 손가락을 구부린 채 위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손등을 보이면서 아래로 내리고 있다.
이 불상은 옷모양, 손모양 등이 시대적 특징을 나타내주고 있으며, 넓은 얼굴과 풍만한 미소는 백제불상에 즐겨 묘사되는 것으로
백제인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6세기 불상으로 보인다.
四面石佛(사면석불)
禮山花田里四面石佛(예산화전리사면석불) : 보물 제 794호. 출토지 = 충남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
남쪽에 보주형의 본존불, 나마지 면에 如來立像(여래입상)이 3m 길이의 자연석 바위 네 면에 새겨진 사면불이다.
동 · 서 · 남 · 북 사방세계, 즉 모든 시간과 공간에 부처가 존재한다는 뜻의 四方佛(사방불)신앙을 따른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사면불이다.
四面石佛(사면석불)
능산리 불신편(佛身片) : 소재지 = 국립부여박물관 출토 = 부소산 능산리사지
점토로 빚고 불에 구워 만든 소조불상(소조불상)이다. 양 손을 모으고 하트모양 지물을 감싸 쥔 모습이 백제 특유의 보주를 든 보살과 흡사하다.
입체감을 주기 우해 몸을 두텁게 만들고, 한쪽 방향으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활달한 율동감을 전해준다.
정림사 모형도
정림사 모형도
정림사 모형도
흙으로 빚은 보살상 모두 없어지고 손만 남아있다.
정림사 오층석탑을 만드는 과정
정림사 오층석탑의 자리 배치
1.흑갈유소병(黑褐釉小甁) 2. 토기매병(土器梅甁) 3. 흑갈유편호(黑褐類片壺) : 시대 = 모두 고려
1.흑갈유소병(黑褐釉小甁) 2. 토기매병(土器梅甁)
거울
비녀
청호백자소호(靑華白瓷小壺) : 시대 = 조선 *기증품
정언욱영정화기(鄭彦郁影幀畵記) : 도유형문화제 제 193호 시대 = 조선
정언욱영정(鄭彦郁影幀畵記) : 도유형문화제 제 193호 시대 = 조선
백제금동대향로 모조품
백제 금동대향로 (百濟金銅大香爐) : 국보 제287호 시대 = 백제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높이 61.8㎝,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몸체는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킨다. 연잎의 표면에는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 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독립적 · 입체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작 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종이로 접어서 만든 백제 금동대향로
정림사지 오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 9호)과 석조여래좌상(보물 제 108호)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파란구름의 하늘 이였으면 더 멋지고 아름다웠을텐데 비가오는바람에 하늘이 안 예쁘다.
부여 정림사지 (扶餘 定林寺址) : 사적 제301호 시대 = 백제 영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에서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중문 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오층석탑 (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 국보 제9호 시대 = 백제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 9호)과 석조여래좌상(보물 제 108호)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扶餘 定林寺址 石造如來坐像) : 보물 제108호 시대 = 고려시대
충청남도 부여의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로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석불상은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 · 중대 · 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작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현재 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작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뒤편에는 많이 망가져있다.
석조여래좌상 (扶餘 定林寺址 石造如來坐像)의 뒷모습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扶餘 定林寺址 石造如來坐像) : 보물 제108호
점심먹으러 들어간 집의 안치되어있는 불상 집 안엔 온통 옛 물건들로 정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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