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라고 합니다.
사천왕문을 통하면 바로 보이는 3층 목탑은 기존의 대웅전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양식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목탑형식인 목조탑파 건축으로는 법주사의 팔상전과 쌍봉사의 대웅전 2동만이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탑 형식으로 지어진 대웅전은 아마 쌍봉사가 국내 유일하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화순의 쌍봉사는 천년고찰로 통일신라시대인 839년 이전에 창건되었다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이해에 혜철선사가 하안거를 지냈다는 기록이 전해졌지만 확실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그 후 855년에 철감선사가 중국에서 건너와 금강산에 머물다 이곳에 내려 왔다하며 사찰의 앞과 뒤에
봉우리가 두 개 솟아 쌍봉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곳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화순군에선 유일한 국보가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국보57호인 철감선사 탑의 모습은 경지에 이른 조각가의 솜씨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며,
대웅전은 철감선사 탑비와 함께 쌍봉사의 대표하는 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雙峰寺(쌍봉사)는 新羅(신라) 九山禪門(구산선문)중의 一門(일문)인 獅子山門(사자산문)의 開祖(개조)인 澈鑑禪師(철감선사)가
統一新羅(통일신라) 48대 景文王(경문왕) 8년(868년)에 창건하였다.
대웅전은 평면이 方形인 3층 전각으로 사모지붕의 木조탑파형식을 지닌 희귀한 양식이다.
목조탑파건축으로는 법주사 팔상전과 쌍봉사 대웅전 2동만이 현존한다.
1936년 5월 3일 보물 제 163호로 지정되어 보존해 오던중 1984년 4월 3일 신도의 부주의로 소실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으며
복원공사는 문화재관리국이 그간 자료를 수집하여 1985년 8월 5일 착공하여 1986년 12월 30일 준공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1962년에 해체 수리하던 둥 3층 종도리에서 묵서한 상량문이 나왔는데, 그에 따르면 원래 3층전(삼층전)이라 불렸으며
1690년(숙종 16년)에 2중창했고, 1724년(경종 4년)에 3중창했다고 한다.
※부도 밭 = 이날 쌍봉사의 부도 밭에 가봤어야 했는데, 쌍봉사의 부도 밭에는 여러 스님들의 부도와 함께 소실되고 없어진 예전 대웅전의
“보물지정표지석(보물제163호)”도 함께 나란히 세워져 있답니다. 화마가 발생했던 그날 얼마나 화재로 치열했을지 잠시나마 떠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건진게 없다고 전해집니다.
신심이 있는 보살들이나 거사님들은 이 비석을 보시고 "졸지에 대웅전을 다비시켰다"고 표현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비석을 다른 스님들과 함께 부도 밭에 같이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大雄殿(대웅전)
화순쌍봉사대웅전목조삼존불상 (和順雙峰寺大雄殿木造三尊佛像)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 시대 = 조선시대
화순 쌍봉사에 모셔져 있는 목조삼존불좌상으로서 앉은 모습의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양옆에 서있는 특이한 형식의 삼존불상이다.
쌍봉사는 우리나라 현존 유일의 3층 목탑식 전각이어서 보물로 지정되어 보호하여 왔으나 1984년 불에 타 다시 지었다.
불이 난 당시 다행히도 목조삼존불좌상은 화를 입지 않았다.
가운데 모셔져 있는 석가여래상은 약간 앞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으로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우며 머리는 소라모양의 나발이다.
붉은 입술에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귀는 크고 두툼하다. 양어깨를 감싼 옷은 두툼한 느낌을 준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펴서 자연스럽게 무릎 안쪽에 올려 놓고 있으며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오른발바닥 위에 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석가여래상의 양옆에 서있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는 두 손을 가슴에 모아 합장하고 있다.
가섭 · 아난존자와 함께 조선 숙종 20년(1694)에 만들어진 석가여래좌상은 조성 수법이나 형식에 있어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하여 연대를 알 수 없는 다른 조각상의 표준이 되는 것으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문화재청의 글>
화순 쌍봉사 대웅전 목조삼존불상 (和順 雙峰寺 大雄殿 木造三尊佛 像)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 시대 = 조선 숙종 20년(1694년)
대웅전 안의 목조삼존상은 앉아서 설법하고 게신 석가여래좌상(높이 120cm)을 중심으로 왼쪽의 아난존자(높이 140cm)와
오른쪽의 가섭존자(높이 142cm)가 합장하고 서 있는 전통적인 삼존상 형식이다.
석가모니불의 상호는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선이지만 원만하며 고개는 중생을 굽어보시듯 약간 숙이고 있다.
두 손 모양(수인)은 석가모니불께서 수행하실 때 모든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고 깨달음을 이루셨다는 뜻의 항마촉지인이다.
아난존자는 부처님을 오랫동안 옆에서 모신 제자답게 후덕한 얼굴이며, 가섭존자는 수행을 잘하는 수행자의 얼굴답게 점점이 수염까지 그려져 있다.
이 처럼 생생하게 표현한 제자들의 모습도 보는 이들에게 불심을 일으키게 해준다.
이 삼존불을 친견할 수 있게 된 것은 한 농부의 장한 마음과 용기가 크다. 대웅전이 화재를 만나 불길에 휩싸였을 때(1984년)
마을 농부가 달려와 삼존불을 한분씩 등에 업고 나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2년 후 대웅전을 복원할 때 부처님과 제자들도 새옷을 입듯 개금과 채색을 하였다.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선이나 오른쪽 팔꿈치까지만 걸친 법의, 구칙적인 치마 상단의 옷주름 등은 조성 당시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 삼존상은 발원문과 극락전아미타불 대좌의 묵서명에 조성 시기와 동기, 참여자 등이 기록되어 있어 불상 연구에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쌍봉사의 안내 글>
大雄殿(대웅전)
쌍봉사극락전 (雙峰寺極樂殿)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
쌍봉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8년(868)에 철감선사가 중국에서 귀국하여 절터의 경치가 좋은 것을 보고 세웠다고 한다.
극락전은 앞면 3칸 · 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린 우물천장이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창문은 2짝 여닫이문을 달았다.
극락전앞에 있는 단풍나무 두 그루가 유명하다. 가을단풍이 들면 볼만하다고 문화재청에서 말하고 있네요
모든이들 가을에 꼭 한 번 가보시기를...
<문화재청의 글>
극락전 앞 단풍나무 두 그루 단풍 만이 아니라 극락전을 화마로 부터 구했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해졌다.
삼월 삼짓날을 이 절의 신도들이 기도하면서 켜놓았던 촛불이 넘어지면서 당시 보물 제163호인 대웅전에 불이 붙는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극락전으로 번지는 불길을 막은 것은 사람이 아닌 극락전에 오르는 돌계단 양 옆에 서 있던 단풍나무들이였다고 한다.
이 佛心(불심)지극한 단풍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태워가면서 불길을 막아 극락전을 온전히 지켜낸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極樂殿(극락전)
極樂殿(극락전)에 모셔져있는 칠성탱화와 산신탱화
칠성탱화
일반적으로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는데 별나라의 주군(主君)으로 인간의 수명을 담당한다고 하며,
산신탱화
산신은 일반적으로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으로서, 불교가 이 땅에 뿌리내리는 토착화 과정에서 호법신중(護法神衆)으로 불교에 흡수되었습니다.
신중단(神衆)
인도 재래의 신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이나 불교를 지켜주는 호법 신장(護法神將)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상은 귀족 또는 장군의 모습, 온화한 모습, 진노하는 모습 등 갖가지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천부 신장 상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제석천상(帝釋天像) 등이 있고 각종 명왕상(明王像)도 있습니다.
동진보살(위태천)
동진(童眞)이란 불교에서 평생을 동정으로 지내는 남자를 일컫는 말이다. 보살 중에도 이러한 보살이 있으니 바로 동진보살이다.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서, 위타천(韋陀天) · 위천장군(韋天將軍) · 위태천신(韋汰天神)이라고도 한다.
이 신은 4왕천(四王天) 중 남방 증장천(增長天)의 8장군 중 하나로서, 32천의 우두머리이기도 하다.
당나라 때 율사 도선(道宣)이 만난 뒤부터 가람에 모시게 되었다.
동진보살에 대한 신앙은 우리나라의 신중탱화(神衆幀畫)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되고 있는 삼장탱화(三藏幀畫)뿐만 아니라,
현재 유행하는 신중탱화에서도 중심이 되는 신장으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여러 유형의 신중탱화 중에서도 이 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상하에
십이지신장(十二支神將)과 팔부신장(八部神將) 등의 신장상만을 묘사하는 탱화가 가장 많이 전해지고 있다.
탱화에서는 오른 손에 칼을 들거나 합장하여 팔뚝에 삼차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묘사되며, 닭의 날개 모양이 양쪽으로 달려 있는
투구를 쓰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불경을 간행할 때 권두 또는 권말에 동진보살을 판각해서 경전의 수호를 상징하는 경우도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 모습도 탱화에서와 거의 비슷하다.
법당 범종
화순 쌍봉사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和順雙峰寺極樂殿木造阿彌陀如來坐像)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 시대 = 조선 숙종 20년(1694년)
쌍봉사 극락전에 모셔져 있는 앉은 모습의 아미타여래상이다. 원래는 양 옆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협시불과 함께 삼존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으나,
1989년 8월경 양 협시불을 도난당하여 이후에 새로 조성한 것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아미타여래좌상은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으며 등이 약간 굽은 모습이다. 머리는 소라모양의 나발이고,
짧은 목에는 삼도가 얕게 그려져 있다.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의 주름은 뚜렷하면서도 두툼한 느낌을 준다.
오른손은 올리고 왼손은 내린 모습인데 양손은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손모양을 하고 있으며 오른다리를 왼다리 위에 걸쳐 앉아 있다.
이 불상은 숙종 20년(1694)에 만들어진 것으로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목조삼존불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과 조각형식이 매우 흡사하다.
<문화재청의 글>
극락전에는 아미타여래좌상(높이 165cm)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원래 있던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도난당하여 최근에 다시 조성하였다.
편안하고 든든한 느낌을 주는 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목조상 그대로이다.
상호는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선 등 대웅전 석가여래좌상과 닳아 있다. 다만 등이 약간 굽은 석가여래좌상에 비해 허리를 바로 잡아
늘씬한 모습을 볼 때 조성시기가 좀 뒤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손 모양(수인)은 오른손을 올리고 왼손을 내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중품하생인을 취하고 있다.
어깨부터 손목까지 흘러내린 풍성한 법의는 원만한 얼굴선, 크고 두툼한 귀, 넓은 어깨 등과 잘 어울리어 아미타불 앞에 앉으면
누구라도 귀의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게 한다.
극락전도 대웅전 화재로 피해를 입을 뻔했으나 돌계단 옆의 수령이 수백년 된 단풍나무가 불길을 막아 지켜냈다.
뜨거운 불길에 고목 한가지를 잃은 단풍나무지만 삼라만상에 불성이 깃들어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아미타여래좌상은 조각양식 등을 참고해 볼 때 대웅전 석가여래좌상을 조각한 사람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좌의 묵서명과 발원문은 조성 시기와 동기 참여자 등을 알 수 있어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쌍봉사의 안내 글>
木造 阿彌陀如來坐像(목조 아미타여래좌상)
나무로 만들어진 아미타여래좌상은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으며 등이 약간 굽은 모습이다. 머리는 소라모양의 나발이고,
짧은 목에는 삼도가 얕게 그려져 있다.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의 주름은 뚜렷하면서도 두툼한 느낌을 준다.
오른손은 올리고 왼손은 내린 모습인데 양손은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손모양을 하고 있으며 오른다리를 왼다리 위에 걸쳐 앉아 있다.
대세지보살
1989년 8월경 양 협시불을 도난당하여 이후에 새로 조성한 것이다.
관세음보살
1989년 8월경 양 협시불을 도난당하여 이후에 새로 조성한 것이다.
극락전벽화 = 목어
옛날 어느 절에 덕 높은 스님이 몇 사람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어가고 제멋대로 생활하며,
계율에 어긋난 속된 생활을 일삼다가 그만 몹쓸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죽은 뒤에는 물고기 몸을 받아 태어났는데 등 위에 큰 나무가 솟아나서 여간 큰 고통이 아니었다.
하루는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 가는데 등 위에 커다란 나무가 달린 고기가 뱃전에 머리를 들이대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스승이 깊은 선정(禪定)에 잠겨 고기의 전생을 살펴 보니, 이는 바로 병들어 일찍 죽은 자기 제자가 방탕한 생활의 과보(果報)로 고통받는 모습이었다.
이를 가엾게 생각하여 수륙천도제(水陸薦度際)를 베풀어 고기의 몸을 벗게 하여 주었다.
그날 밤 스승의 꿈에 제자가 나타나서 스승의 큰 은혜를 감사하며 참으로 발심하여 공부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등에 있는 나무를 베어 고기 모양을 만들어, 부처님 앞에 두고 쳐주기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고, 강이나 바다의 물고기들은 해탈할 좋은 인연이 되겠기에 ...
이렇게 해서 고기 모양의 목어(木魚)를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차츰 쓰기에 편리한 둥근 목탁(木鐸)으로 변형되어, 예불이나 독경을 할 때 혹은 때를 알릴 때에도 사용하며,
그 밖의 여러 행사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일설에는, 고기는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자므로 수행자도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해야 불도(佛道)를 성취한다는 뜻에서
고기 모양의 목어를 만들어 아침 저녁으로 치게 하였다고도 한다. )
우리나라의 큰 사찰에 가보면 종각이 있고, 이 종각에는 네 가지 법구(法具 : 사물四物)가 갖추어져 있다.
쇠로 된 범종(梵鐘)과 가죽으로 만든 커다란 법고(法鼓), 구름 모양의 운판(雲板), 그리고 고기 모양의 목어(木魚)이다.
범종은 고통 속에 살아가는 땅 밑 중생들의 해탈을 기원하며 울리고,
큰 북은 네 발 가진 짐승의 무리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치는 것이며,
목어는 물 속 생물들의 구원을 위해 두드리는 것이며,
운판은 날아다니는 날 짐승과 온갖 곤충들의 안락을 바라며 소리내는 것이다.
이 사물의 울림 속에는「원컨대 이 소리 온누리에 두루 퍼져 고통 받는 온갖 중생 다 함께 해탈케 하여지이다」하는 염원이 깃들어 있는 것이며,
곧 뭇 중생의 행복과 해탈을 기원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자비의 소리인 것이다.
팔을 끊어 믿을을 바친 혜가(慧可)
선종(禪宗)의 제 2대조인 혜가 대사(慧可大師, 487~593)는 중국 낙양(洛陽)의 무뢰사람으로 이름은 신광(神光)이고 성은 희(姬)였다.
신광은 어릴 때부터 덕이 있고 책 읽기를 좋아하여 여러 가지 서적을 두루 섭렵하고, 불서(佛書)를 읽다가 문득 출가하기로 마음먹고
32세 때에 낙양 향산사로 들어가 좌선에 몰두하였다. 40세에 은사를 떠나 숭산 소림사에 달마 대사(達磨大師)을 찾아가 법의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나 굴속에 9년 동안 면벽(面壁) 수행을 하면서 법을 전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광은 소림굴을 아침저녁으로 찾아가 스승으로서의 예를 갖추어
달마대사를 섬기면서 법(法)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달마 대사는 묵묵부답으로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옛날에 도를 구하고자 하는 수행자들은 뼈를 깨뜨려 골수를 빼고, 피를 뽑아 주린 이를 구제하고 굶주린 호랑이에게는 내 몸을 내어 주어 굶주린
배를 채우도록 하였는바 나는 도대체 왜 이런 정성을 다하지 못하는가?"
그래서 신광은 당(堂) 안에 들지 못하고 뜰에 서서 법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뼈를 깎는 수행정진으로 달마 대사의 응답만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더구나 그날 밤엔 밤새 많은 눈이 내려 몸이 꽁꽁 얼고 무릎까지 눈이 차 올라와도 혜가는 달마대사가 선정에 든 굴 밖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밤을 새우고 서 있었다.
달마 대사가 아침에야 내다보니 사람이 밤새 눈 속에 몸이 반 쯤 파묻혀 그대로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대는 무엇을 구하고자 밤새 눈 속에 파묻혀 꼼짝하지 않고 나를 찾아 왔는가?”하고 물었다.
"달마 대사님의 법의 가르침을 받아 무명에서 해탈하고자 함이옵니다.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 하여 주시옵소서."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달마대사는 위엄 있는 목소리로, “부처님의 위없는 도는 부지런히 정진하여 행하기 어려운 일도 능히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능히 참아야 얻을 수 있거늘 너의 보잘것없는 지혜와 아주 작은 공덕만을 가지고 진실 된 법을 구하려고 하느냐!
천하에 붉은 눈이 내릴 때 나의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신광은 지체 없이 예리한 칼을 뽑아 왼쪽 팔을 잘라 버리니 땅에서 파초 잎이 솟아나 끊어진 팔을 받쳤다.
"모든 부처님이 이처럼 도를 구할 때는 법을 위하여 본인의 몸을 잊었거늘 네가 오늘 너의 팔을 잘라 네 몸을 버리니
이제는 구하고자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
달마대사는 신광에게 혜가라는 법명을 내려 주었다. 그러자 혜가의 잘린 팔이 저절로 붙었다.
"부처님의 법인을 들려주소서." "부처님의 법인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니라.”
"저의 마음이 불안합니다. 스승님께서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시옵소서.” "불안한 네 마음을 가져 오너라. 편안하게 해 주겠다.”
"아무리 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느니라.”
이 말에 혜가는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본래 이 당나라에 온 것은 법을 전해 어리석은 이를 제도하고자 함이었다.
한 꽃에서 다섯 잎이 피게 되리니 열매는 자연히 맺으리라.
달마대사가 혜가에게 내린 전법게다. 그제야 입당이 허락되었고, 혜가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달마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선종(禪宗)의 제 이조(第二祖)가 되었다.
혜가대사는 34년 동안 널리 중생을 제도하다가 552년에 제자 승찬에게 법을 전하고, 107세에 입적하였다.
혜능대사(慧能大師)
혜능대사(慧能大師)는 중국 당나라 때의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노(盧)가였으며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땔나무를 팔아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하루는 시장에 나무를 팔러 나갔다가 한 손님이 금강경 외우는 소리를 듣고 홀연히 마음이 밝아졌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혜능은 어머니를 하직하고 손님이 일러주는 데로 황매산의 홍인대사를 찾아뵙고 예배드렸다.
“너는 어디에서 왔으며 나에게 무엇을 구하려고 하느냐?”
저는 영남 신주사람인데 오직 부처되는 법을 구하고자 할 뿐입니다. “
“영남사람은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사람에게는 비록 남과 북이 있으나 불성에는 남과 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인 저와 스님은 다르지만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홍인대사는 법기(法器)임을 곧 알아보았지만 대중을 따라 일하게 하였다.
노 행자로 불린 혜능은 후원에서 장작을 패고 힘이 부족하여 돌을 짊어지고 방아를 찧었다.
여덟달이 지난 어느 날 홍인대사는 자신의 의발(衣鉢)을 전할 사람을 찾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각자 깨달은 진리를 게송으로 지어내라고 하였다.
그때에 대중들로 부터 인정을 받고 있던 신수는 고심 끝에 게송을 지어 대중이 잘 다니는 곳의 벽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붙여 놓았다.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네.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부지런히 털고 닦아, 勿使惹塵埃(물사약진애) 티끌이 없도록 하리.
홍인대사는 신수가 지은 것임을 바로 알아보고, 그에게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으니 더욱 수행에 힘쓰라고 하였다.
방아를 찧던 혜능은 한 사미승이 이 게송 외우는 소리를 듣고 나서 자기가 부르는 것을 그 게송 옆에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깨달음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네
本來一無物(본래일무물)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 어느 곳에 티끌이 일어나리요.
신수보다 탁월한 게송을 보고 대중들은 감탄하였다.
홍인대사가 이를 보고는 주변의 해(害)가 있을까 두려워 신발로 문질러 지워버렸다. “이것 또한 아직 깨닫지 못한 글이니 모두들 돌아가거라.”
그리고는 은밀히 방앗간으로 혜능을 찾아가서 말하였다. “쌀은 다 찧었느냐?” (공부는 다 되었는가 하는 뜻)
“이미 찧은 지는 오래 되었으나 키질을 못하였습니다.” (공부는 다 되었으나 아직 인가를 못 받았다는 뜻)
홍인대사는 지팡이로 방아를 세 번 치고는 말없이 돌아갔다.
혜능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그날 밤 삼경에 스승을 찾아뵈었다. 오조홍인대사는 병풍으로 가려놓고 금강경을 설법하신 후,
달마대사로부터 받은 가사(袈裟)와 발우(鉢盂)를 전하며 제 육조로 인가하였다.
그리하여 육조 혜능대사는 중국에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키며 76세로 입적할 때까지 조계산을 중심으로 교화활동을 하였다.
부처님께 모래공양을 올린 소년(아쇼카왕의 전생이야기)
부처님께서 왕사성(王舍城)에 계실 때, 어느 날 아침 아난존자를 비롯한 여러 비구들과 함께 성안으로 걸식을 하러 들어가셨다.
그때 큰 길 가운데에 두 아이가 모래밭에서 놀고 있었는데, 첫째 아이의 이름은 사야(闍耶)였고 둘째 아이는 비사야(毘闍耶)였다.
두 아이는 부처님께서 가까이 오시자, 사야는 모래를 쌀로 생각하여 부처님의 발우 안에 담아드렸고
비사야는 합장하고 기뻐하면서 즉시 게송으로 말하였다.
“자연스러운 큰 자비(慈悲)와 원만한 광명으로 몸을 장엄하셨으며 이미 생사(生死)를 멀리 여의셨네.
저는 이제 한 마음으로 생각하오니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는 까닭에 모래를 받들어 공양하나이다."
이때 사야는 공양을 올린 다음에 이렇게 발원하였다.
" 이 선근(善根)으로 말미암아 제가 마땅히 산지왕(繖地王)이 되게 하시고, 불법 가운데서 널리 공양하게 하소서.”
부처님께서는, 미래의 세상에서 수승하고 오묘한 과(果)가 있게 될 것을 아시고, 복전(福田)이 되기 위하여 그 모래를 받으셨다.
“아난아, 너는 아이가 손으로 모래를 받들어 발우 안에 담는 것을 보았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예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때 모래를 쥐어 아난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소의 똥을 가져다 이 모래와 잘 섞어서, 부처님이 경행(經行)하는 땅에 바르도록 하여라.”
“이 아이는 내가 열반에 든 지 백 년 뒤에 파타리불다성(波吒利弗多城)의 왕으로 태어나 아육(阿育)이라 이름 할 것이다.
전륜왕(轉輪王)이 되어 정법(正法)을 믿으며 , 널리 사리(舍利)를 공양하여 8만 4천의 탑을 세워서 많은 사람들을 풍요롭고 이익 되게 할 것이다.”
이 모래공양을 올린 소년이 바로 아쇼카왕의 전생이다
아쇼카왕은 어려서 성품이 거칠고 사나워서 부왕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는 즉위한 후 감옥과 지옥을 만들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기원전 3세기에 전 인도를 통일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다.
어느 날 한 사문의 설법을 듣고 불교에 귀의한 이후 무력에 의한 정복을 중지하고, 사람이 지켜야 할 윤리인 다르마(dharma:法)에 의한 정치를
이상(理想)으로 삼았다.
또한 광대한 영토에 8만4천개의 사원(寺院)과 보탑(寶塔)을 건축하는 등 지난 일을 참회하고 백성들에게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펼치며
불법을 융성하게 하였다.
• 파타리불다성(波吒利弗多城)): 범어 pataliputra의 음역으로, 의역하면 화씨성(華氏城)이라고 한다.
• 아육(阿育): 아쇼카의 음역으로, 근심이나 비애가 없다는 뜻이다.
• 전륜왕(轉輪王): 전륜성왕(轉輪聖王)ㆍ전륜성제(轉輪聖帝)ㆍ윤왕(輪王)ㆍ이라고도 하며, 윤보(輪寶)를 돌리는 왕이라는 뜻이다.
전륜왕은 칠보를 갖고 있으며 4덕(德)을 구족하여서, 수미사주(須彌四洲)를 통일하여 정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데,
그 국토는 풍요하고 인민은 화락하다고 한다.
참고자료: 『아육왕경(阿育王經)』제1권 -동국역경원-
안수정등(岸樹井藤)
한 나그네가 끝없는 들판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나운 코끼리 한마리가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죽을힘을 다해서 도망치던 나그네는 다행히 한 우물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마침 한 줄기의 넝쿨이 우물 속으로 뻗어 있었다.
어쩔 줄을 모르던 그는 급히 나무넝쿨을 타고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우물 안은 잠시나마 편히 쉴 곳이 못되었다. 위쪽으로는 검은 쥐와 흰 쥐 두 마리가 넝쿨을 갉아먹고 있었고. 우물 안 벽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으며 또 아래쪽으로는 무서운 독룡이 나그네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것이었다.
놀란 나그네는 밖으로 나가려고 위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들불이 일어나 연기가 자욱하여 나갈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머리위에 있는 벌집에서 꿀이 떨어져 그의 입에 들어갔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나그네는 달콤한 맛에 취하여
그동안의 위험과 괴로움을 잊고 꿀이 떨어지는 쪽을 쳐다보았다.
이 이야기는 비유경(醫輸經)에 나오는 우리의 인생을 비유한 것으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가르침이다.
여기에서 나그네는 인생이며, 끝없는 들판은 무명의 긴밤(無明長夜)을 코끼리는 무상(無常),을 우물은 생사, 넝쿨은 생명줄을,
검은 쥐 흰 쥐 두 마리는 낮과 밤을, ,네 마리 독사는 우리몸의 구성요소인 사대(四大; 흙, 물, 불, 바람)를, 꿀은 오욕(五慾; 재물, 애욕, 음식, 명예, 수면),
벌은 삿된 생각, 들불은 늙고 병듦, 독룡은 죽음을 각각 비유한 것이다.
♠도림선사와 백락천의 벽화이야기 ♠
당나라의 백락천(白樂天) 이라고 하면 유명한 시인이요, 뛰어난 경륜을 지닌 정치가이기도 하다.
그가 본래 학식과 총명이 뛰어난데다 벼슬이 자사(刺史)의 지위에 올라 자뭇 그 우월감에 충만해 있을 때 였다.
한 때 그가 항주(抗州)의 자사로 부임한 후의 이야기이다.
하루는 그리 멀지 않는 사찰에 도림선사(道林禪師; 741년~824년)라고 하는 이름난 고승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한 번 직접 시험해보리라
작정하고 선사가 머물고 있다는 절로 찾아갔다.
도림선사는 청명한 날이면 경내에 있는 오래된 소나무 위에 올라가 좌선(坐禪)을 하곤 하였다.
마침 백락천이 도림선사를 찾아온 날도 나무 위에서 좌선하는 중이었다.
백락천이 나무 아래 서서 좌선하는 스님의 모습을 올려다 보니 아슬아슬한 생각이 들어 『선사의 거처가 너무 위험합니다.』
하고 소리치니, 선사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네가 더욱 위험하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듣고 있던 백락천이 어이없어 하면서
『나는 벼슬이 자사에 올라 강산을 진압하고, 이렇게 안전한 땅을 밟고 있거늘 무엇이 위험하단 말이오?』 라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선사는 그가 학문과 벼슬에 자만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이 기회에 교만한 마음을 깨우쳐주기 위해 곧 바로 쏘아 부쳤다.
『 티끌같은 세상 지식으로 교만한 마음만 늘어 번뇌가 끝이 없고, 탐욕의 불길이 쉬지 않으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는가.』
백락천은 자기의 마음을 환하게 꿰뚫어 보는 듯한 눈매와 자기가 자사라는 벼슬에 있음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자기 할 말을 다하는 기개에 눌려
제가 평생에 좌우명을 삼을 만한 법문 한 귀절을 듣고 싶습니다. 하고 애초에 선사를 시험하려 했던 불손한 태도를 바꿔 공손한 자세로 가르침을 청했다.
『나쁜 짓을 하지말고(諸惡莫作)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衆善奉行)』
이같은 대답에 대단한 가르침을 기대했던 백락천은 그거야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니요. 하고 신통치 않다는 듯이 말하니 선사는 침착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네.』
이 말을 들은 백락천은 비로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 가르침을 실천하여 인격화되지 않으면 아만과 번뇌만이 더할 뿐 진리의 길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당대의 문장가 백락천은 그 자리에서 도림선사에게 귀의하여 불법의 수행을 돈독히 하였다고 한다.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려 주고 있는 백락천의 명문(名文) 시구(詩句)들도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인격에서 울려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
地藏殿(지장전)
지장전에는 보물 제1726호지정된 '지장보살상일괄'이 모셔져 있습니다.
무독귀왕입상 · 지장보살좌상 · 도명존자입상
화순 쌍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和順 雙峰寺 木造地藏菩薩三尊像 및 十王像一括) : 보물 제1726호 시대 = 조선시대
화순 쌍봉사 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과 「綾州地獅子山雙峰寺諸殿記文輯錄」과 「雙峰寺事蹟記」등을 통해
이 상은 1667년경 雲惠를 비롯한 그의 일파 조각승들이 참여하여 제작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작품의 경향은 조선후기 17세기 중 · 후반 전라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했던 조각승 운혜의 조각 경향을 잘 간직하고 있고,
더불어 과거에 시문된 고색 찬연한 채색문양이 잘 보존되어 있다.
곧 이 시왕상과 권속상들은 회화와 조각이 잘 어우러진 불상으로 조선후기 채색불상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조각승 운혜는 17세기 전반을 활약했던 守衍-靈哲의 계보를 잇는 조각승으로 그의 조각 경향은 敬林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특히 입체적이고 건장하면서도 중량감 넘치는 선 굵은 조각 경향을 선호하였는데,쌍봉사 지장시왕상에서도 이러한 조각 경향이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 지장보살상에서 발견된 조성기를 통해 이 상은 1667년경에 조성된 것이 확실하므로 아직 제작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해남 대흥사 지장시왕상,
강진 백련사 지장시왕상, 해남 미황사 지장시왕상, 순천 동화사 지장시왕상, 순천 정혜사 지장시왕상 등 운혜파의 조각으로 추정되는 조각상들의
조성연대 추정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귀중한 자료로 판단되고, 더불어 이 중에서 冥界彫刻이라는 종교적 엄숙성과 17세기 불교 조각계가 추구한
대중적 평담성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화순 쌍봉사 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은 17세기 중 · 후반경 활발한 조각활동을 펼친 조각승 운혜의 불상양식 연구와
운혜파 조각승의 조각활동과 경향을 시기별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문화재청의 글>
제 4 오관대왕 제 2 초강대왕
제 3 송제대왕. 제 5 염라대왕
제 9 도시대왕. 제 10 오도전륜대왕. 인왕상
동자상과 인왕상
화순 쌍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和順 雙峰寺 木造地藏菩薩三尊像 및 十王像一括) : 보물 제1726호 시대 = 조선 현종 8년(1667년)
지장전은 모든 중생을 구원할 때 까지 성불하지 않겠다고 원을 세운 지장보살이 계신 곳이다. 쌍봉사의 지장전에는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죽은 이를 심판하는 시왕, 판관, 귀왕, 동자, 사자 등 모두 21구의 목조상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보살(높이 104cm)의 머리는 보살의 특징대로 삭발한 민머리이며 머리띠를 두르고 있는데, 법의나 옷주름 등은
극락전의 아미타여래좌상이나 대웅전의 석가여래좌상과 비숫하다. 이런 양식은 같은 조각가나 그 일파가 만들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지장보살 왼쪽에 서 있는 도명존자(높이 146cm)는 민머리에 합장을 하고 있으며, 오른쪽의 무독귀왕(높이 148cm)은 보관을 쓰고 있다.
이 지장삼존상 좌우에는 조선시대 시왕상 중에서 가장 빼어난 조각 기법의 국보급 시왕상(높이156cm)이 의자에 앉아 있다.
시왕상은 모두 머리에 관을 쓰고 있으며 옷은 융복과 곤룡포 차림이 섞여 있다. 의자 양쪽에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생동감이 넘친다.
시왕들 사이에는 시왕을 보좌하는 판관, 귀왕, 동자, 사자 등 6구(높이 100~120cm)가 서 있는데,
조상기에는 각 2구씩 8구가 기록되어 있어 2구가 분실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목조상들의 채색은 아직도 현대기법으로 재현할 수 없어 퇴색한 예전 빛깔 그대로이다.
한편 각 상들의 명칭과 수량, 조성시기와 동기 조성자 등이 기록되어 있는 조상기는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쌍봉사 안내 글>
지장전 벽화이야기 = 지장보살이 죄인들을 보고 눈물 짓고 있다.
지장전 벽화이야기 = 인로왕보살과 반야용선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내영(來迎) = 죽은 사람의 넔을 맞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보살
나무대성인로왕보살(南無大聖引路王菩薩)
죽은 사람을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보살, 사찰에 영가단(靈駕壇)이 있는데 그 뒤에 감로탱화(甘露撑畵)가 걸려 있다.
인로왕보살은 이 탱화속에 존재하는 보살이다. 글자 그대로 극락길을 안내하는 보살이다.
대개 지장보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과 함께 망자(亡者)를 인도한다. 이런 불화를 인로왕탱화라고도 한다.
인로왕보살은 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극락 인도의 깃발인 것이다.
이 깃발에 인로왕보살이라고 쓰여 있으며 이런 영혼인도 의식은 고려시대 때 활발하였다고 한다.
지장전 벽화이야기
업경대를 통해 자신이 지은 죄의 행동을 보며 염라대왕에게 심판을 받는 장면
제 2 확탕지옥(第 二 鑊湯地獄) 鑊 = 가마 확, 죄인을 삶아 죽이는 형기(刑器) 고기를 삶는 가마 *湯 = 넘어질 탕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거나,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준 공덕이 없는 자가 가는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무쇠솥의 펄펄 끓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고통을 받는다.
제 일 도산지옥(第 一 刀山地獄)
날카로운 칼날이 뾰족뾰족 튀어나온 평상 위에 알몸의 죄인을 눕히고, 지옥의 옥졸들이 커다란 칼로 막 찌른다.
깊은 물에 다리를 놓은 공적도 없고, 배고픈 자에게 밥을 준 공덕도 없는 죄인이 들어가는데 칼을 심어놓은 험한 산에서 죄인들이 칼에 찔리어
고통을 당하개 하고 관속의 시신에 쇠못을 박는다.
제 3 한빙지옥(第 三 寒氷地獄)
16 유증(遊增) 지옥의 하나. 추운 바람과 어느 고통을 받는 지옥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가정에 화목하지 못하고, 동네 어른을 존경하지 않은 죄인이 가는 지옥인데 백년이고 천년이고 얼음속에 갇혀 지내야 한다.
제 8 거해지옥(第 八 鋸解地獄) = 거해(鋸解)란 말은 톱으로 썰어서 분해 한다는 뜻이다.
거해 지옥에서는 톱으로 죄인의 몸을 자른다. 산 채로 몸이 잘리는 고통을 겪는 지옥이 거해 지옥인데,
날카로운 톱날이 죄인의 몸을 파고든다. 목이 잘린 죄인이 피를 흘리며 땅에 쓰러져 있다.
돈을 듬뿍 받고도 나쁜음식을 대접한 자, 쌀을 팔아도 되를 속여 적게 준 자가 가는 곳으로 죄인을 형틀에 가두고 큰 톱과 작은 톱으로
열 두가지 뼈를 썰면서 산채로 토막 토막 분해한다.
제 9 정철지옥(第 九 釘鐵地獄)
죄인의 몸에 쇠못을 박는 지옥을 정철 지옥이라고 한다.
지옥 형벌의 하나로 죄인의 머리와 몸 모든 곳에 카다란 못을 박아서 죄인에게 참기 어려운 고통을 주는 지옥이다.
목에 커다란 나무칼을 찬 죄인과 못을 박을 때 고통으로 실신한 죄인이 왼쪽에 쓰러져 있다.
그리고 사납게 생긴 지옥 옥졸이 죄인 위에 걸터 앉아 머리채를 움켜잡은채, 커다란 못을 머리에 천천히 꽂으려 하고 있다.
이때 지장보살이 지옥고를 치르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동자를 거느리고 나타난다.
제 6 독사지옥(第 六 毒蛇地獄)
죽고나서 42일 되는날 여섯 번째의 심판을 맡는다. 살인, 강도, 고문, 도둑질을 한 자가 가는 곳인데 독사들이 우글거리며 온 몸을 감아 물어 뜯는다.
독사의 지옥은 굶주린 뱀들이 우굴거리는 곳으로 옥졸들은 죄인이 모면 이 곳으로 떨어뜨린다. 죈인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머리에 뿔이 달린
지옥의 옥졸은 사정없이 형벌을 집행한다. 뱀은 죄인을 물기도 하고 죄인의 몸을 감고서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며 혀를 날름거리기도 한다.
철상지옥 = 쇠판에 올리기
불에 뜨겁게 달구어진 쇠판을 걷게하고 몸에다가 쇠못을 박아버리는 지옥, 쇠 절구에 죄인들을 찧고 쇠못을 빼곡히 박은 침상위에
몸을 뉘여 죄를 다스리는 곳이란다. 살아생전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은 사람들이 가게되는 지옥
제 5 발설지옥(第 五 拔舌地獄) = 혀를 뽑는 고통을 당한다고 하는 지옥.
말로써 악업(惡業)을 저지른 자가 죽어서 간다는 지옥
부모님과 조상님의 말에 불손하게 대꾸를 한 자. 입으로 일가화목을 깨뜨린 자, 동네 어른을 박대한 자는 발설지옥으로 간다.
이곳은 죄인ㅇ르 형틀에 매달고 집게로 입에서 혀를 길게 뽑아 그 위에서 소가 밭을 갈듯 쟁기를 이끄니 처참한 고통을 겪는다.
입으로 짓는 죄악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를 일깨워 준다.
흑암지옥(오도 전륜대왕)
낮도 없고 밤도 없는 암흑만이 지속되는곳 남녀 구별을 못하고 자식 하나 못 낳은 사람들이 죽어서 가게되는곳
부모나 스승의 물건을 훔친 사람을 심문하고 벌준다고 한다.
※이곳을 관장하시는 분은 오도전륜대왕 열번째인 마지막 지옥이기에 형벌과 더불어 생전 행위에 대한 심판 후에 다시 태어날 곳을 결정한다.
사후 맞이하는 3년 즉 대상을 관장하는 분 = 중생의 어리석음과 번뇌를 다스리는 왕
염라대왕의 심판 장면
<대비바사론>에는 8대 지옥을 등활지옥(等活地獄), 흑승지옥(黑繩地獄), 중합지옥(衆合地獄), 호규지옥(號叫地獄),
대규지옥(大叫地獄), 염열지옥(炎熱地獄), 대열지옥(大熱地獄), 무간지옥(無間地獄) 등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8대 지옥은 네 벽마다 문이 하나씩 있으며, 그 문으로 들어가면 문마다 네 종휴의 소지옥이 있다.
각 지옥마다 16개의 소지옥이 있어, 지옥이 모두 128개가 된다고 한다.
부처님 앞에가서 지억 중생구제를 하지 못하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하고 있는 지장보살의 벽화인것 같다.
옆으로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도 보인다.
지장보살이 죄를 짓지 않게 법문을 하고 계신다.
地藏殿(지장전)
羅漢殿(라한전)
아난존자, 석가모니, 가섭존자
나한들
16 나한들
아난존자, 석가모니, 가섭존자
16 나한들
나한들
미소가 아름다운 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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