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천년관음기도 도량 홍제동 옥천암

백련암 2015. 10. 9. 14:02

천년 관음기도 도량  북관음 옥천암 언제 누가 창건하였는지 알수 없음

옥천암 마애좌상 (玉泉庵 磨崖坐像) : 시대 = 고려시대  12~ 13세기    서울시 유형문화재 : 제 17호

마애불상 양식의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서울 玉泉庵 磨崖菩薩坐像) :  보물  제1820호   지정일 = 2014. 3. 11.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서울 玉泉庵 磨崖坐像)’은 5미터가 넘는 대형의 마애상으로 상 전면이 흰색 호분이 칠해져 있어

일반적으로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 또는 ‘백의관음(白衣觀音)으로 불렸다.

마애보살좌상에는 목조 보호각이 세워져 있고 그 앞으로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성현(成俔, 1439-1504년)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이 지역을 ‘불암(佛巖)’으로 언급하고 있다.  마애보살좌상의 상호(相好)는 사실적이고, 설법인(說法印)의 수인의 형태도 유려하며,

어깨에 드리워진 천의(天衣)와 가슴에 대각선으로 걸쳐있는 조백(條帛)이 넓은 띠주름도 유연하게 흘러 내려 훌륭한 조각 표현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개성 관음굴 석조보살반가상 2구와 비교되는 고려 후기 조각의 특징을 잘 보여주면서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고려시대 불교조각 연구에 중요한 작품으로 판단된다. = 문화재청에서

 

옥천암은 서울의 동서남북의 4대 관음 기도처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동쪽 = 낙산사 홍련암,   ♤남쪽 = 남해 보리암,   ♤서쪽 = 강화 보문사,   ♤북쪽 = 삼각산 옥천암은 북관음이라 한다.

지성으로 기도하면 하나의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것으로 알려진 4대 해수관세음도량은 모두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반하여,

북쪽 삼각산 옥천암 해수관세음상만은 바다도 아니고 강도 아닌 조그만 개천 홍제천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울의 중심인 삼각산은 불교의 성지이라고한다.

숙종시기에 북한산성을 새로 쌓을 때 성능(聖能)스님이 총 책임을 맡았는데 그분이 쓰신 책에는 사암 21곳이 적혀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많이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옥천암 창건에 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장의사, 향림사, 진관사, 승가사, 소림사 등을 중심으로 삼각산의 불교사를 복원하면서 옥천암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한다.

 

이 가운데 지금은 사라진 장의사(莊義寺, 藏義寺)가 옥천암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으리라 본다.

지도에서 옥천암의 우측으로 가보면 탕준대를 지나 조지서(造紙署)에 이른다.  이 자리는 현재 세검정초등학교에 해당하는데 여기에 장의사가 있었다. 

어느 날 장춘랑과 파랑의 혼백이 신라의 문무왕을 찾아왔다.  그는 황산벌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죽어서라도 변함없이 나라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왕은 이에 깊이 감동하여 장의사를 세워 그들의 충절을 위로했다.  사기에 따르면 이 시기는 대략 659년 쯤이다.

 

이후 통일신라 말기까지 도봉산 천축사, 백련산 백련사, 삼각산 승가사, 서대문구 안산의 봉원사 등이 창건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옥천암 주변에서 불교 역사가 펼쳐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옥천암 마애좌상 (玉泉庵 磨崖坐像) : 시대 = 고려시대  12~ 13세기    서울시 유형문화재 : 제 17호

마애불상 양식의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봄에서  여름으로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서울 玉泉庵 磨崖菩薩坐像) :  보물  제1820호   지정일 = 2014. 3. 11.

普渡閣 백불이라 부르지만 조선말기 부터 통칭하여 백의 관음상으로 부르고 있다. 혹은 해수관음상으로도 부른다.

 

이 불상은 옥천암 보도각(普渡閣 ) 안 바위에 새겨진 마애좌상(磨崖坐像)이다. 불암(佛巖) 또는 '보도각(普渡閣 )백불' 로 일컫지만,

조선말기부터 통칭하여 "백의 관음상"으로 부르고 있다.  조선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때, 이 존상앞에서 기원했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아들 고종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  서울의 이름난 존상이다.

 

독립된 거대한 불암바위 앞면에 5m의 장대한 마애상을 새겼다. 그리고 이 위에 팔작지붕의 전실(前室)형 건물을 세워 마애상을 보호하고 있다.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玉泉庵 磨崖菩薩坐像)

 

 

 

존상의 머리에 고려초기부터 유행하던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데, 뿔처럼 생긴 관대에는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화려한 꽃무늬 수술 장식이

표현되어 있다.  머리카락은 어깨를 따라 팔꿈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존상의 얼굴은 타원형인데 양감이 비교적 부드럽고 눈. 코. 입이 단아하다.

신체는 건당하면서도 유연한 편이며, 얼굴은 다정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이어서 고려 12~13세기 마애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얼굴은 눈이 가늘고 입이 작게 표현되어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玉泉庵 磨崖菩薩坐像)   =  가을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玉泉庵 磨崖菩薩坐像)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玉泉庵 磨崖菩薩坐像)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玉泉庵 磨崖菩薩坐像)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玉泉庵 磨崖菩薩坐像)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가 아들 고종의 복을 비는 치성을 드리며 불상에 분을 바르기 시작해 `백불'로 불리게 되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이곳에서 왜적과 대항했는데 왜군이 백불을 조선군사로 알고 탄환을 모두 소비하자,

권율장군은 이때를 타 왜병을 전멸시켰다는 전설도 내려오고 있다.

 

 

 

普渡閣 백불이라 부르지만 조선말기 부터 통칭하여 백의 관음상으로 부르고 있다. 혹은 해수관음상으로도 부른다.

이 불상은 옥천암 보도각(普渡閣 ) 안 바위에 새겨진 마애좌상(磨崖坐像)이다. 불암(佛巖) 또는 '보도각(普渡閣 )백불' 로 일컫지만,

조선말기부터 통칭하여 "백의 관음상(白衣 觀音像)"으로 부르고 있다.

 

조선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때, 이 존상앞에서 기원했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아들 고종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 서울의 이름난 존상이다. 

독립된 거대한 불암바위 앞면에 5m의 장대한 마애상을 새겼다.  그리고 이 위에 팔작지붕의 전실(前室)형 건물을 세워 마애상을 보호하고 있다.

 

 

겨울

 

안암동 보타사 백불을 비교해보는 차원에서 같이 올려놓았습니다.

    

◈왼쪽의 백불은 안암동에 있는 보타사 법당 뒤 바위에 새겨진 마애좌상이다.

이 像은 옥천암 보도각 마애좌상과 매우 비숫하지만 자연스럽게 휘어진 암벽에 새겨져 있어서 보다 유려한 편이다.

 

 

    

◈오른쪽 = 안암동 보타사 백불에는 "나무금강회상불 보살(南無金剛會上佛 菩薩)" 이라고 써있음=

이마애불의 원패처럼 연꽃 받침과 연잎이 장식된 직사각형 형태는 고려시대 사경의 표지화 에서 볼 수 있는것이다.

보타사 마애불또한 보물로 승격되었다 보물 제 1828호이다.

 

 

보타사 백불 보충설명

보타사의 대웅전 뒤에 있는 커다란 바위면을 "ㄱ'자 형태로 깊게 파고 그안에 보살상을  새겼는데 측면에서 보면,

벽면을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쪽에는 자연석의 보개(寶蓋)가 늘어진 형태로 되어 있다.

현재 마애불 앞에는 대웅전이 있지만 이마애불상이 새겨진 바위면 左. 右에 구멍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애불을 중심으로 별도의 목조 전각(殿閣)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낮은 부조로 새겨진 이 마애불상은 몸전체에 호분(胡紛)이 칠해져 있어서 흔히 백불(白佛)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불상에 호분을 두껍게 칠한 백불의 예 로는 고려 후기에 조성 된 것으로

서울 홍은동에 있는 "옥천암" 보도각 마애보살좌상과  안암동 굴암사 석조약사여래좌상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이 마애보살상은 5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으로 두다리를 포개어 결과부좌한 자세로 앉아있으며, 머리위에는 원통형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관대(冠帶)의 左,右에 늘어진 복잡한 장식이나 목걸이나 팔찌, 그리고 얼굴의 이목구비에 칠해진 채색등이 흰색으로 호분과 함께

화려하면서 장식적인 느낌을 준다.

 

 

예전에 모습 =  현판에 脩德殿(수덕전)으로 되어있다.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으로 큰 사찰의 대웅전역할을 한다.

규모는 적지만 내부에 신중단 · 지장단 · 칠성단 · 산신단 · 독성단 · 영단이 좌우로 배치되어있다.

우리고유 민속신앙까지 흡수한 통불교적 형태를 한 곳에서 볼 수 있어 아기자기함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곳이다.

1987년에 산신각 등의 건물이 소실되자 이듬해 하나로 통폐합되어 중창되었다.

아미타여래좌상이 본존불로 봉안되어 있으며 석가모니후불탱을 비롯해 지장시왕탱화 · 신중탱 · 칠성탱 · 산신탱 · 독성탱 등

모두 6점의 불화들은 근래에 조성되었는데 그 중 독성탱화는 화기에 의해 1954년에 조성된 불화임을 알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주지스님인 정경스님이 오시면서  불사를 이뤄내 내부가 완전히 바뀌어지면서 현판도 극락전으로 바뀌어 달았다.

 

 

예전의 법당 부처님 모습 = 수덕전에 모셔진 아미타여래좌상

아미타여래좌상이 본존불로 봉안되어 있으며 석가모니후불탱을 비롯해 지장시왕탱화 · 신중탱 · 칠성탱 · 산신탱 · 독성탱 등

모두 6점의 불화들은 근래에 조성되었는데 그 중 독성탱화는 화기에 의해 1954년에 조성된 불화임을 알 수 있다.

 

 

脩德殿(수덕전) 지금은 極樂殿(극락전)으로 현판을 바뀌어 달려있다.

 

 

 極樂殿(극락전) 현판

 

 

예전의 부처님(아미타불)은 없고 지금 새로운 부처님(아미타불)이 계신다.

 

 

현재 계시는 주지스님과 많이 닮아있는 아미타부처님

 

 

아미타불과 탱화도 모두가 화려하게 바뀌어져 있다.

 

 

 

▣해동지도(海東地圖)

옛 해동지도(海東地圖)에 따르면 삼각산 뒤쪽 능선에 승가봉, 문수봉을 등지고있는 옥천암은 앞으로는 홍제천이 굽이쳐 흐르는

커다란 바위벽에 관세음보살님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고 그 위에 불암(佛岩)이라고 적혀있다.

 

이 산맥을 따라 백운대를 거쳐 함경도 안변을 지나면 백두산까지 이어질 것이다.

녹번과 홍제원, 홍제교, 경복궁, 창의문 등도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이 해동지도(海東地圖)는 대략 1750년근처인 영조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옥천암의 관세음보살님은 이렇듯 오래 전부터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

수덕전 현판을 극락전으로 교체하고 극락전의 주불인 아미타 부처님을 새로 모시고 후불탱화와 함께 점안식을 했습니다.

극락전의 주불인 아미타 부처님은 설법인을 하고 계시며 육계 아래 계주를 달고 계신 내포 가야산의 보덕사 부처님을 모본으로 조성하였습니다.

佛母(불모)는 보원사 부처님을 조성했던 서창원 선생이고 그분의 스승이며 보원사 철부처님의 監董(감동= 감독관)을 맡아 주셨던

불상연구의 대가 간송미술관 최완수 선생님을 이번 옥천암 부처님 조성에도 다시 한 번 모셔서 현재 緣起文(연기문)을 쓰고 계십니다.

20대 초반의 청년을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평생 불상연구에 매진케한 그 부처님을 옥천암에서 뵐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아미타 부처님을 뒤에서 장엄할 후불탱화는 주존을 아미타불로 모시고 그 주위에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문수, 보현, 금강장, 제장애,  미륵,

지장보살 등 8대보살님과 가섭, 아난, 사리불, 목견련, 가전연, 부루나, 우바리, 수보리, 아나율, 라훌라존자 등 10대 제자,

그리고 동방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의 사천왕과 천,룡,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등

팔부신중을 권속을 거느리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더불어 조왕탱화를 모신 조왕단을 후원에 모실 예정입니다.

 

법당 후불탱화는 현재 있는 후불탱화를 보수해서 모실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보존 상태도 그렇고 여의치 않아 새로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산신탱화

 

 

산신단

 

 

독성단

 

 

독성인 나반존자

 

독성인 나반존자

 

 

우측 = 지장보살과 권속들

 

 

좌측 = 지장보살과 권속들

 

 

지장단 = 지장보살 탱화

 

 

칠성단

치성광여래 부처님으로 천체(하늘의 별을 통칭)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칠성당에 모셔져 있음 칠성불이라고도 함)

 치성광여래께서 손에 들고 계시는 것은 금륜이며 그것은 곧 전륜성왕이 갖출 7가지 보배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금륜은 윤보라고도 하며 전륜성왕이 굴리면 여러 작은 왕들이 전륜성왕 앞에 조아릴 정도로 전륜성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인데

이것을 치성광여래께서 손에 가지고 계심은 부처님의 위엄이 전륜성왕과 같기 때문입니다

 

 

칠성단

칠성탱은 가운데 치성광여래가 앉아 있고 그 신광과 두광을 따라 28(宿)가 무지개 모양으로 배치되었으며, 치성광여래 좌우에 7여래가 표현되어 있다.

그림 하단에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이 있고 화면 상단 좌우에는 각각 삼태(三台)와 육성(六星)도 배치되어 있다.

 

 

신중탱

신중탱은 목각으로 조각되어 있음

신중단 = 불교의 호법신(護法神)들을 묘사한 불화이다. 법당의 중심부에서 좌우측 벽에 봉안된다.

 

 

동진보살인 위태천이 당당하게 계신다. 위로는 예적금강신이 조각되어져 있다.

 

 

위태천(동진보살)

 

 

좌측 = 신중단     우측 = 산신단

신중단 = 불교의 호법신(護法神)들을 묘사한 불화이다. 법당의 중심부에서 좌우측 벽에 봉안된다.

 

 

극락전 벽화들

 

 

 

 

 

 

 

범종각

 

 

 

 

 

 

 

 

 

 

 

 

 

 

 

 

 예전엔 이렇게 일주문에서 들어오면 중간문(불이문처럼)이 있었다.

 

 

일주문

 

 

현재의 모습

 

 

 

 

예전사진

 

   

 

 

일주문

 

 

 

 

 

 

옥천암 전경

 

 

옥천암 보도각 백불<홍지문아래 홍제천 개울가에 위치하고 있다> 

 

 

옥천암 보도각 백불<홍지문아래 홍제천 개울가에 위치하고 있다> 

옷은 양쪽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신체는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옷주름은 선이 깊지는 않지만 신체 전반에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손은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아미타불의 손 모양을 하고 있다.

 

옛 문헌에 따르면 창의문밖 한 북문 근처에 스님들의 처소가 있으니 옥천암이다.

샘이 절벽 사이에서 솟는데 풍병(風病)이나 속이 결리고 아픈 증세가 있는 이가 이 샘물을 마시면 신통한 효험이 있고,

눈병이 있는 이도 이샘물로 씻으면 낫는다. 고하였단다

 

옥천암 불상은 절벽을 깍아 조성했으며 해수관음이라 부른다.

 

그런데 약천(藥泉)이 바로 근처이다. 그러므로 샘물을 마시는 이는 당분간 스님들의 처소에 머물면서 반드시 목마르게 하는 짠 음식을 먹고

이후에 종일토록 샘물을 마셔 배가 부르게 해야만 효험이 있다고 적혀 있다고 한다

 

 

옥천암 전경 계곡

홍지문에서 홍제원 방향으로 더 가면 옥천암이 나온다. 이곳 보도각에 있는 마애보살 좌상은 전체적으로 흰색 호분이 칠해져 있어

보도각백불(普渡閣白佛)로도 불린다. 별도로 독립된 불암(佛巖)에 새겨진 이 장대한 마애불상은 고려 초기부터 유행하던

큰 보관을 쓰고 있는데 그 모습이 인상적이다. 뿔처럼 생긴 관대에는 화려한 꽃무늬 수술이 장식돼 있다.

부처의 얼굴은 타원형인데 양감이 비교적 부드럽고 눈, 코, 입이 단아하다. 12, 13세기 고려 시대 마애불상 양식의 대표적 걸작으로,

뒷면에는 소원을 빌면서 바위를 갈았던 붙임바위가 남아 있어 민간 신앙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1900년대 보도각백불의 모습

1900년대 보도각백불의 모습

 

 

 = 홍지문 및 탕춘대성<弘智門 蕩春台城>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33호 시대 : 숙종 45년(1719년)

이  성은 1719년(숙종 45년)에  쌓은것으로, 한양의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여 세운 성이다.

 

도성과 북한산성 사이 사각지대인 지형에 맞게 두 성 사이를 이어 성벽을 만든 일종의 관문성(關門城) 성격을 지녔다.

성곽둘레는 약 4Km(약 10리)로서, 성 안에 연무장(鍊武場)인 연융대(鍊戎臺)를 만들고 군량창고 등을 갖추었다.

성벽은 크기가 고른 정방형의 돌로 반듯하게 쌓아 숙종 때 성을 쌓는 기법을 잘 보여준다.

홍지문은 홍예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짜리 문루를 지었는데, 대개의 성문처럼 우진각지붕이다.

그 옆으로 이어진 수문(水門)인 오간수대문은 홍예 5칸을 틀어 수구(水口)로 썼다.

성의 이름은 연산군 때 세검정 동편 봉우리에 탕춘대(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를 쌓고 연회를 베풀었던 것에서 유래했는데,

홍지문은 한북문(漢北門)으로 불렸다. 1921년 홍수로 인해 홍지문과 오간수대문은 무너졌으나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다시 지어졌다.

 

 

弘智門 (홍지문) 현판

조선 시대, 서울 성곽과 북한산성의 방위 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1715(숙종 41)년에 세운 문.

1921년에 허물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한 것으로, 서울 종로구 홍지동에 있다.

 

 

홍지문 및 탕춘대성<弘智門 蕩春台城>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33호 시대 : 숙종 45년(1719년)

옥천암을 가려면 이 홍지문을 지나야 갈 수가 있다 여기까지가 서울로 들어가는 첫문이되면서

옥천암은 성문을 나서는 첫번째 사찰이 되는 것이다.

 

 

홍지문 <弘智門 > 옆모습

인왕산에서 홍지문(弘智門)을 거쳐 탕춘대와 이어지며 북한산 줄기로 뻗은 능선이 있다. 종로구 신영동 136번지에 있던 돈대로서,

1505년(연산군 11년) 이곳에 탕춘대를 마련하고 앞 냇가에 수각을 짓고 미희들과 놀았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왕이 창의문 밖 조지서 터에 이궁을 지으려다 먼저 탕춘대 봉우리 위에 황각을 세우고 언덕을 따라 장람을 연하여 짓고,

모두 청기와로 이으니 고운 색채가 빛났다. - 《연산군일기》, 1506년 1월 27일

탕춘대 위에 청기와 정자가 웅장하게 들어섰다는 이야기다. 홍지문은 탕춘대성을 쌓으면서 만든 문이다.

 

 

홍지문 뒷모습 서울에서 나가는 쪽

 

괴롭고 괴로운 이조 참의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습니까? 비 온 뒤라서 탕춘대 아래의 폭포수가 한창일 것인데 훨훨 날아

함께 가서 구경할 수 없는 것이 애석합니다.  

 약용은 근래에 주대소(朱大韶)를 본받아 새벽에 일어나면 맨머리로 쾌각(快閣)의 위에 앉아 오색 붓으로 고서 몇 장씩을 평하고, 

이어서 허 미수(미수는 허목의 호)가 칡 붓으로 과두체(蝌蚪體)를 쓰느라 산 밖의 일은 알지 못했던 것을 사모했습니다.

어떤 무인(武人)이 찾아와,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들려 했으므로 한 차례 성내었고 융숭한 성비(聖批)가 계시어 더한층 영광스러웠다고 하던데,

 저에게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 《다산 시문집》 제18권, 서(書)

 

1795년 주문모 신부의 변복잠입사건이 터지고, 정조는 수세에 몰린 정약용을 보호하기 위하여 병조참의에서 금정찰방으로 좌천시켰다.

이 편지는 다산(저약용)이 금정에서 채제공의 아들 채홍원에게 보낸 편지다. 젊은 시절 채홍원과 함께 놀던 탕춘대 아래 폭포수 등이 그립다는 편지다.

 

 

홍지문으로 나가면 바로 경기도가 된다.  서울에서 나가는 마지막 문임

 

 

 

 

홍지문과  성벽

 

 

    

 

 

 

 

 

 

 

 

 

 

 

저 멀리 보이는  절의 이름도 모르고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다 그저 눈에 들어오고 아카시아꽃은 만발하여 한번 찍어봤다.

 

옥천암에서 바라본 앞산 온통 노란 개나리가 피어있다.

 

石坡廊(석파랑) = 대원군이 사랑한 아름다운 별장   "석파(돌언덕)"는 흥선대원군의 아호이다.

이곳은 한정식 식당에 불과한 곳이다.

 

그러나 진짜 석파정의 이야기와 장소는 기록을 해 놓는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하응(李昰應)의 별서(別墅)로서 안태각(安泰閣) · 낙안당(樂安堂) · 망원정(望遠亭) ·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風樓) 등 8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뜰에는 해묵은 노송(老松)들이 차일처럼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서쪽 바위산에서 흘러내린 계류(溪流) 한가운데에는 평대(平臺)를 쌓고

그 위에 서양식 건축기법이 더해진 유수성중관풍루를 세웠다. 4모지붕이나 기와를 씌우지 않은 색다른 지붕을 하고 있다.

 

사랑채인 대원군별장은 1958년종로구 홍지동으로 옮겨져(현재 한정식 식당) 따로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원래의 터 뒤쪽 바위에는 ‘三溪洞(삼계종)’이라는 글자를 새겨놓아서 원주인인 영의정 김흥근(金興根)이 살 당시에는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라 불렀다.   뒤에 이름을 석파정(石坡亭)이라 바꾸고 대원군의 호도 석파로 하였다고 한다.

소유권은 이희(李喜)→이준(李埈)→이우(李堣) 등으로 세습되어오다가 6·25 직후 고아원 · 병원 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현재 개인소유로 되어 있다. 서울 성곽의 북서쪽밖에 자리잡고 있어서 수려한 자연경관과 조선 말기의 건축술이 조화된 대표적 건축이다.

 

 

석파정 한정식 레스토랑

 

 

 

 

 

 

석파정(이 건물은 일부이다)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이 창의문 밖에 지은 삼계동 정자(三溪洞 亭子)는 당시 한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로 유명했다.

조선 시대에 삼계동이라 불리며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곳이지만 지금은 터널을 오가는 차량과 주위의 빼곡한 주택들에 가려 찾는 이가 드물다.

황현은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서 "김흥근은 북문 밖 삼계동에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경관이 서울에서 가장 빼어난 곳이었다"라고

말하며 별장에 얽힌 이야기를 기록했다.

 

처음에는 대원군이 김흥근에게 별장을 팔라고 했으나 그가 듣지 않았다. 그러자 대원군은 아들 고종에게 이곳을 다녀오라 권한다.

고종이 다녀간 후 김흥근은 '임금이 와서 놀다 간 곳에 감히 신하가 살 수 없다'며 다시는 이 별장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별장은 대원군 소유가 되었다.

김흥근의 별장을 빼앗은 대원군은 이름을 석파정(石坡亭)으로 바꾸고 한양 제일의 정원으로 가꾸었다.

'석파'란 정자 앞산이 모두 바위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대원군은 자신의 아호를 석파라 할 정도로 이 정자를 좋아했다. 

정자 소유를 포기한 김흥근은 당시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대표하던 인물이다.

 

김홍근은 1848년(헌종 14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그러나 권세를 믿고 방자한 행동을 일삼다

대간의 탄핵을 받고 전라도 광양에 유배당하는 곡절도 겪는다.

1848년 7월 25일, 그의 탄핵 상소가 들어오자 헌종은 마치 기다린 듯 "너희들이 이제야 비로소 알았는가? 처지가 숭현(崇顯)하고

은총이 융중(隆重)한 자로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실로 조정의 불행이다"라며 반기었다.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횡포에 시달려온 임금의 속 깊은 분노가 그 구절에 담겨 있다.

◈◈◈

석파정은 서울미술관 부대시설로 미술관 입장(9,000원) 후 미술관 3층을 통해서만 입장 가능하다.

자가용 이용시는 서울미술관 지하1,2층 이용가능(미술관 관람시 주차 무료) 매주 월요일은 휴관일임

 

 

서울시 유형문화재 23호로 지정받은 흥선대원군 별장 석파랑(石坡廊)

 

 

저 앞에 보이는 문은 "만세문"이라 한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고종황제 즉위를 기념해 경복궁 안에 세워졌던 "만세문"도 볼 수 있다.

암수 학 한 쌍이 불로초를 입에 물고 구름위를 나는 형상 새긴 만세문은 만사형통과 무병장수를 상징한다.

 

 

◈찾아가는 길

  5호선 광화문역에서 내리거나 <3호선 경복궁역에서하차> 하여 지선버스 7018번을 환승하여 유원하나아파트앞에서 하차함 

  하차하여 버스오던방향으로 둘러보면 절이 보임

  큰 사찰은 아니고 작은 사찰이지만 천년의 역사를 가진 관음도량사찰이니 만큼 쉽게생각지는  마시길..._()_

  겉만 보지마시고 한번 기도정진을 해보심은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