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동생과 함께 봉은사를 찾았다. 우리집에서 봉은사를 가려면 2시간이 걸려야 가는 번거로움에
3~4년전에 가고는 안갔다 그런데 이번에 9호선이 봉은사역을 개통하면서 가보았다. 정말 1사간내로 도찾하니 감회로왔다.
예전엔 삼성역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걸었는데 바로 절앞으로 나오니 너무 좋았다.
三層石塔(삼층석탑)
대웅전 앞마당에 세워진 석탑에는 불사리 1과가 봉안되어 있다.
전형적인 삼층 모습으로, 상대 하대의 이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석을 쌓고 그 위에 각각 옥개석을 얹은 것이다.
3층 옥개석 위에는 노반(露盤)을 놓았고 다시 그 위에 상륜(相輪部)가 설치되어 있다. 지대석을 포함한 상륜부까지의 높이는 839m이다.
오랫만에 가보니 대웅전 앞마당을 지붕을 만들어 놓아 다른 법우님들은 어떨련지는 모르지만
내 입장으로 말하자면 좀 답답했다. 예전엔 행사가 있을 때만 천막을 치고 없을땐 치워 열린상태라 맘도 편하게 답답함도 못느꼈었는데...
이 삼층석탑도 왠지 답답해 보인다.
괘불탱화
이번 행사에는 괘불탱화도 옛것과 또 다른것이 탑을 중앙에 두고 양쪽으로 걸려있다.
奉恩寺 掛佛圖(봉은사 괘불도)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31호 시대 = 조선
1886년 헌종의 후궁인 순화궁 김씨(順和宮 金氏)를 비롯한 여러 상궁들의 시주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원통불사(圓通佛事)를 기념하며 제작되었다.
19세기 서울, 경기지역의 대표적 화승 가운에 한 사람인 대허체훈(大虛 軆訓)이 출초하고 영명천기(影明天機)와 긍조(亘照), 돈조(頓照)가 함께 제작하였다. 면본으로, 4폭의 천을 이어 그림을 그리고 양쪽에 나무 봉으로 마감하였는데, 세로 686cm, 가로 394.5cm의 거대한 화면에
1불 2보살, 2제자만을 그린 간단한 구도를 취하고 있다.
화면의 중앙에는 석가모니불을 큼직하게 배치하고 왼쪽(향우)에 가섭존자, 오른쪽에 아난존자를 그렸으며,
하단부에는 문수보살(동자)과 보현보현(동자)가 각각 사자와 코끼리 위에 올라타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석가모니는 화형(花形)의 두광과 신광을 지니고 정면을 향해 당당하게 서서,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올려 활짝 핀 백련(白蓮)을 들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 가운데로 당겨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이처럼 꽃을 들고 있는 석가모니의 모습은 석가모니가 연꽃을 들어 보이니 가섭존자 만이 그 뜻을 알고 빙그레 웃었다는,
선종의 교법을 단적으로 표현한 염화시중(拈花示衆)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작품에 앞서 선석사 괘불(1702년), 용문사 괘불(1705년),
오덕사 괘불(1768년), 남장사 괘불(1788년), 개운사 괘불(1879년) 등에서 볼 수 있는데,
개운사 괘불의 제작에 참여한 大대허 체훈(大虛 體訓)과 만파 돈조(萬波 頓照)가 봉은사 괘불의 조성에도 관여하고 있어
유사한 도상이 적용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후 이러한 도상은 화장사 괘불(1901년)로 이어졌다.
얼굴은 이마부분이 넓고 턱 부분이 둥근 편으로 이목구비가 작게 묘사되었으며, 육계가 높고 뾰족하며 중간계주와 정상계주가 뚜렷하다.
신체는 어깨가 넓고 건장한데, 안에 군의를 입고 왼쪽 어깨에 붉은 대의를 걸친 후 대의 자락을 오른쪽 어깨에 살짝 걸친 변형된 통견식이다.
대의에는 화형의 원문 안에 파도문이 정교하게 그려진 황색의 문양이 그려져 있으며, 청색의 내의에도 잔잔한 꽃문양이 시문되어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석가모니의 광배는 두광은 녹색, 신광은 노란색인데 바깥쪽에는 붉은 화염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석가모니의 좌우에는 가섭존자(향우측)와 아난존자(향좌측)가 본존을 향해 합장하였다.
두 존자 모두 얼굴에 비하여 신체가 너무 비대하여 약간은 불균형해 보이는데, 그로 인해 중앙의 석가모니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가섭존자는 본존과 같은 문양이 시문된 붉은색의 옷을 걸치고 가슴 앞으로 두 손을 모아 본존을 향하고 있다.
노년의 존자를 상징하듯 앞머리가 다 빠진 노인의 모습으로, 길게 늘어진 흰 눈썹과 코밑, 턱밑의 흰 수염, 꾹 다문 입술,
형형하게 살아있는 눈빛 깊게 패인 이마의 주름, 뼈가 다 드러나는 야윈 목 등이 오랜 세월 수행에 전념한 나한의 참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강한 음영법의 사용으로 인하여 더욱 극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
반면, 건장한 청년모습의 아난존자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본존을 향해 합장하였다. 가섭존자와 대조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에서인지
아난존자의 얼굴은 눈과 코, 목 부분에 옅게 바림질을 했을 뿐 음영을 거의 가하지 않았다.
한편, 화면의 하단부는 노란색과 주황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본존의 광배와 동일한 모습의 화형 광배 안에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그려져 있다. 두 보살은 두 손으로 비스듬히 백련과 모란꽃을 들고 각각 사자와 코끼리에 올라타 마주보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보관을 쓰고 천의를 입은 보살형이 아닌 쌍계(雙紒)의 동자형(童子形)으로 묘사되었다.
어깨에는 운견(雲肩)을 걸치고 쌍계에는 붉은 리본을 묶은 채 황색 사자와 흰 코끼리 위에 반가좌의 형태로 걸터앉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자와 코를 높이 들고 부르짖는 듯한 코끼리는 19세기 후반 서울, 경기지역의 괘불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모습으로,
흥천사 괘불(1832)과 안양암 괘불(1882년), 봉원사 괘불(1901년), 흥국사 괘불(1902년) 등에서도 동일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채색은 적색과 황색과 청색, 녹색, 노란색, 흰색, 주황색 등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본존의 신체를 황색으로 칠하는 기법은
서울, 경기지역의 동일한 도상의 괘불에서 공통되는 특징으로서, 지역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또한 구도에 있어서도 화면을 꽉 채워 그리는 19세기 후반 서울, 경기지역의 괘불형식을 답습하고 있다.
화기에 의하면 1886년 5월 26일 원통불사(圓通佛事)를 시작하여 6월 5일에 회향하였다고 하였는데,
원통불사는 관음보살과 관련된 불사라는 점에서 이 괘불은 19세기 활발하게 시행되었던 수월도장공화불사(水月道場空花佛事)와
관련하여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불화는 화면을 압도할 만큼 큰 석가모니불 또는 삼세불을 중심으로 가섭존자와 아난존자, 문수동자와 보현동자 등을
간략하게 묘사한 형식이 흥천사괘불(1832년)에서 시작되어 봉은사괘불(1886년)을 비롯하여
그 후 화장사괘불(1901년), 연화사괘불(1901년), 고양 흥국사괘불(1902년), 미타사괘불(1915년) 등으로 이어지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의 서울, 경기지역의 전형적인 괘불형식을 따르고 있다.
보존상태도 양호할 뿐 아니라 19세기 왕실발원 불화의 하나이자 당시 서울, 경기지역의 괘불형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므로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
화면의 중앙에는 석가모니불을 큼직하게 배치하고 왼쪽(향우)에 가섭존자, 오른쪽에 아난존자를 그렸다.
보현 · 문수보살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그려져 있다.
두 보살은 두 손으로 비스듬히 백련과 모란꽃을 들고 각각 사자와 코끼리에 올라타 마주보고 있다.
문수보살
보현보살
阿彌陀佛本心微妙眞言 怛也陀 唵 我里多羅 娑婆訶(아미타불본심미묘진언 다냐타 옴 아리다라 사바하)
"나무아미타불" 염불법에는 [진언]이 거의 없다.
이것은 염불이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되 신비주의적 요소를 배제한 합리적인 가르침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 유일하게 등장하는[아미타불본심미묘 진언]은 꼭 해설하고자 하면 대개 이렇다.
다냐타[怛也陀] = "그리고" 혹은 "그러하여"라는 뜻이다.
옴[唵] = 진언마다 나오는 말인데 "찬탄하다" 극찬하다"등의 뜻이다.
아리다라[我里多羅] =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이다.
사바하[娑婆訶] = "성취하다" "원만" "이룩하다" 등의 뜻이다.
다냐타 옴 아리달 사바하[怛也陀 唵 我里多羅 娑婆訶] = 염불하고 관세음보살을 찬탄하오니 부디 성취하리라.
염불법으로 깨달음에 이르러 반드시 관세음보살 같은 삶을 성취하리라는 서원을 담고 있는 진언중에 진언이다.
그러므로 [아미타불 본심미묘 진언] 이라고 부른다. = 정목스님 글에서
건장한 청년모습의 아난존자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본존을 향해 합장하였다. 가섭존자와 대조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에서인지
아난존자의 얼굴은 눈과 코, 목 부분에 옅게 바림질을 했을 뿐 음영을 거의 가하지 않았다.
가섭존자는 본존과 같은 문양이 시문된 붉은색의 옷을 걸치고 가슴 앞으로 두 손을 모아 본존을 향하고 있다.
노년의 존자를 상징하듯 앞머리가 다 빠진 노인의 모습으로, 길게 늘어진 흰 눈썹과 코밑, 턱밑의 흰 수염, 꾹 다문 입술,
형형하게 살아있는 눈빛 깊게 패인 이마의 주름, 뼈가 다 드러나는 야윈 목 등이 오랜 세월 수행에 전념한 나한의 참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강한 음영법의 사용으로 인하여 더욱 극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
奉恩寺 選佛堂(봉은사 선불당)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64호 시대 = 신라
봉은사는 고려시대 견성사로 불리웠으며, 조선 연산군 4년(1498) 정현왕후가 성종(재위 1469∼1494)의 릉인 선릉의 원찰로
견성사를 중창하면서 이름을 봉은사로 고쳤다.
조선 최대의 명찰 중에 하나였고 불교 중흥의 역할이 컸으나 임진왜란 등 전란으로 불타 몇 차례 중건 및 중수된 바 있다.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봉은사 선불당도 1939년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1941년에 중건한 것으로 대중들이 참선하는 선방이다.
명종 7년에 봉은사에서 스님이 되기 위해 치러야하는 시험인 승과를 실시하였다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어 선불당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심검당이 있던 자리에 중건된 이 선불단은 정면8칸, 측면 3칸 규모의 단층 목조 기와집으로 초익공 양식을 이루고 있으나
내부의 실제구조는 정면5칸으로 되어 있어 특이하다. 동서로 4칸, 남북으로 3칸 규모인 큰방을 중심으로 내부 삼면이 방으로 둘러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으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은 연대가 오래되지 않았고,내부의 천장과 뒷편이 수리되면서 조금 변형이 되었으나
서울 시내에 이와 같은 양식과 규모를 가진 유례가 드문 귀중한 목조건물로 평가 된다.
奉恩寺 選佛堂(봉은사 선불당) 觀世音菩薩 坐像(관세음보살 좌상)
문에 그려져 있는 호법신장들
대웅전
奉恩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 보물 제1819호 시대 = 조선
‘서울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서울 奉恩寺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은 조선 후기 1651년 조각승 승일(勝一)이
수(首)조각승으로 9명의 보조 조각승들을 이끌고 제작한 상이다.
1765년의 개금발원문(改金發願文)을 통해 1689년에 화재로 본존 석가상은 소실되어 새로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승일이 제작한 본존 석가상은 좌우협시상에 비해 30cm 정도 크고, 변형식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법의를 걸치고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한 모습이어서 조형적인 면에서 구별되나 착의와 수인(手印) 등은 17세기 중엽의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존 석가불상은 좌우의 아미타불, 약사불과는 다른 조각가에 의해 제작되었지만, 조각적으로 우수하고 발원문과 개금문을 통해서
삼세불의 봉안과 개금에 참여했던 시주자들, 조각을 담당했던 조각승들을 알 수 있으므로
조선 후기 17세기 중후반 불교조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문화재청의 글>
대웅전 닷집과 삼세불탱화
봉은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 = 보물 제1819호 1651년
봉은사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이 2014년 3월 12일 보물 제1819호로 지정이 되었다.
조선 후기 효종 2년(1651년), 조선시대 최고의 조각승인 승일(勝一)스님이 봉은사에 도착하였다.
승일스님 앞에 보인 봉은사는 전쟁으로 인하여 폐허가 되어 참담하였고, 스님을 비롯한 10여명의 신도들은 기도의 원력으로
전소되어 사라진 석가모니부처님, 아미타부처님, 약사여래부처님을 조성하여 모셨다.
이어, 1765년의 개금발원문(改金發願文)을 통해 1689년 무렵 화재가 발생하여 본존 석가여래상을 새로 조성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삼불좌상 모두 조각적으로 우수하고, 발원문을 갖추고 있어 17세기 중후반의 불교조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성보로 평가된다.
봉은사 대웅전의 세분 부처님은 고통 속에 헤매고 있는 모든 중생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소원을 들어주는 희망의 부처님이며, 대한민국의 국가문화유산과 성보로 세세생생 이어질 것이다.
<봉은사의 글>
地藏殿(지장전)
지장보살과 지장후불탱화
지장전의 시왕들
무독귀왕과 지장보살 도명존자
지장전 벽화
奉恩寺 十六羅漢圖(봉은사 16나한도)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38호 시대 = 조선
1895년 영산전을 건립하면서 제작, 봉안한 7폭 불화 가운데 4폭으로 16나한을 4폭으로 나누어 그렸다.
현재 영산전의 후불탱화 좌우로 각 2폭씩 걸려있는데, 16존자를 각각 독립적으로 한 존자씩 그린 후 4존자를 한 폭으로 하여 총4폭으로 구성하였다.
그런데 이중 제 10, 11, 13, 15존자도는 결실되어 1955년에 만봉(萬峰)과 석성(碩成)이 새로 그렸다.
원래 16나한도는 향우측에 홀수 존자, 향좌측에 짝수 존자를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새롭게 결실된 부분을 그려 넣으면서 순서가 교란되어,
현재는 향우측 중앙에서 입구 쪽으로 제16ㆍ1ㆍ12ㆍ14존자도, 제9존자 및 새로 조성한 3존자도, 향좌측 중앙에서 입구 쪽으로 제2ㆍ4ㆍ6ㆍ8존자도,
제7ㆍ5ㆍ3존자 및 새로 그린 존자도가 배치되어 있다.
즉 향좌측 한폭 만이 원래대로 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존자도가 서로 뒤바뀌어 있어 혼란을 주고 있다.
각 존자도의 왼쪽 상단에는 주지묵서(朱地墨書)로 존자명이 적혀있어 각 존자의 명칭을 확인할 수 있으며, 제3존자와 4존자, 16존자 아래,
그리고 5존자와 7존자 사이 등 4군데에 화기가 남아있어 1895년에 상규(尙奎), 경선 응석(慶船 應釋), 종선(宗禪), 창민(昌玟), 성전(性㻇), 경협(景冾),
재겸(在謙), 금곡 영환(金谷 永煥), 영명 천기(永明 天機), 漢峯 瑲燁(한봉 창엽), 德月 應崙(덕월 응륜), 허곡 긍순(虛谷 亘巡), 금하 기형(錦荷 機炯),
금성 성전(錦城 性詮), 범화 윤익(梵華 潤益), 선명(善明) 등 많은 화승들이 참여하여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奉恩寺 十六羅漢圖(봉은사 16나한도)
나한들은 모두 심산유곡을 배경으로 가사 위에 장삼을 걸치거나 옷을 풀어헤친 모습으로 시자와 시동을 거느리고 앉아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선정에 들거나(제1존자) 염주를 돌리며 수행정진하고(제2존자) 웃옷을 풀어헤치고 나무에 편안히 기대어
경전을 읽기도 하며(제4존자), 때로는 재주를 뽐내는 시동을 보며 파안대소하거나(제8존자) 무릎을 세우고 앉아있기도 하며(제14존자)
무릎 사이에 지팡이를 끼고 시자의 말을 경청하는 등(제12존자)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나한의 모습은 젊은 사미승 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모습이 대부분인데, 제3존자인 가락가발리타도존자(迦諾迦跋釐墮闍尊者)는 깡마른 체구에
두 손을 다소곳이 배 앞에 모으고 있는 모습에서 오랫동안 수행한 나한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젊은 수도승으로 표현된 나한의 얼굴에는 약하게 음영을 표현하였으며, 제8존자와 16존자처럼 노인형 나한은 주름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비교적 강하게 음영을 사용하고 있다. 대부분 산속의 바위나 돗자리, 짚방석 등에 앉아 있지만,
제5존자와 제6, 제16존자처럼 병풍과 장막 등을 치고 있어 마치 실내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배경이 되는 산수는 청록산수로 조선말기 민화의 배경을 떠올리게 하는데, 산 위에 분리대처럼 일렬로 세워진 나무는
19세기 서울, 경기지역의 감로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나한도의 화승들이 감로도의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어 동일한 모티프를 사용한 듯하다.
이 불화는 심산유곡을 배경으로 시자와 시동을 거느리고 앉아있는 16명의 나한을 모두 4폭에 나누어 그린 16나한도로서
현재는 제 10, 11, 13, 15존자도가 결실되어 12폭만이 남아있다.
비록 4폭이 결실되기는 하였지만 19세기 서울·경기지역의 대표적인 화승들이 대거 참여하여 제작한 나한도이고
서울·경기지역 불화의 지역적 화풍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므로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
그리고 새로 조성된 4폭은 지정에서 제외한다.
또한 현재 이 나한도는 4폭이 결실되어 있을 뿐 아니라 순서가 모두 교란이 되어 있어 원래의 순서에 맞게 재표구하여 봉안하여야 한다.
奉恩寺 靈山會上圖(영산회상도) 삼존불 뒤 후불탱화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37호 시대 = 조선
이 불화는 1895년 영산전의 불상과 좌우 보처, 나한상 등을 개금할 때 나한도 4폭, 사자도 1폭과 함께 제작된 것으로,
세로 114.8cm, 가로 196.5cm의 가로로 긴 직사각형의 화면에 석가모니와 6보살, 제자, 사천왕, 금강신 등을 배치하였는데,
인물들은 3열로 가지런하게 배열하여 화면을 꽉 채우고 있다.
본존 석가모니는 이중륜광(二重輪光)을 지니고 나지막한 수미대좌 위의 연화좌에 결가부좌하였는데,
정상계주 위로 여러 갈래의 빛이 위로 향해 뻗어나가고 있다. 나발(螺髮)의 머리는 위가 뾰족하며,
얼굴은 둥근 편으로 이마부분이 다소 넓고 턱 아래 부분이 좁아져서 원만한 상호를 보여주고 있고,
가늘고 긴 눈썹과 눈, 코와 입 등이 작게 묘사되었다.
신체는 어깨가 넓고 장대하며 적당한 볼륨과 안정감있는 비례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착의법은 우견편단으로 드러난
오른쪽 어깨 위에 대의(大衣)자락을 살짝 덮고 있는데 대의 가장자리는 아름다운 연화문이 화려하게 시문되어 있다.
가슴은 넓게 드러나 있고, 평행하게 처리된 군의(裙衣) 윗부분에도 꽃무늬가 시문되었다.
수인은 오른손은 가슴 가운데로 들어 올려 손가락을 마주잡고 있으며 왼손은 첫째와 셋째 손가락을 맞잡고 길상좌(吉祥坐)를 취한
오른쪽 발목 위에 대었다. 석가모니가 이처럼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 아닌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수인을 결하고 있는 예는
조선후기 불상과 불화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이 불화에서 석가모니의 수인을 아미타구품인으로 그린 것은 화장사 아미타후불화(1870년),
서울 미타사 대웅전 아미타후불화(1873년)의 초본을 그대로 이용하여 제작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두광은 녹색으로, 신광은 황색으로 아무런 무늬도 없이 간단하게 처리하였다.
석가모니 옆으로는 제자와 보살, 사천왕, 금강 등이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최상단에는 제자들이 좌우로 나란히 서있는데 언뜻 보면 마치 14명인 것처럼 보이지만 화면 가장자리의 2명은 8금강 중 2구를 표현한 것으로
총 12명의 나한을 그렸다. 나한들은 젊은 사미승에서부터 나이가 든 비구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이 다양하며,
상반신 밖에 묘사되지 않아 형태를 자세히 알기는 어렵지만 붉은색의 장삼을 입고 합장을 하거나 병, 좌고 등을 들고 있다.
본존의 신광 좌우로는 6보살이 본존을 향하여 나란히 시립하였다. 본존 바로 옆에 있는 보살은 석가모니의 좌우보처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생각되며,
그 옆에는 각각 아미타불과 정병이 그려진 보관을 쓰고 있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가장자리의 보살들은 지물이 명확하지 않아 존명을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법화경》에서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인 보살 중
2구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보살은 모두 녹색의 두광을 지니고 붉은 색의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살이 많은 얼굴에 작은 이목구비 등 비슷한 모습이다. 관음보살이 백련이 꽂힌 정병을 들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합장을 하고 있다.
사천왕은 하단의 양쪽에 2구씩 큼직하게 묘사되어 있다. 화면이 가로로 길어서인지 4구 모두 금색의 탁자 위에 앉아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향우측의 천왕은 비파와 검, 향좌측의 천왕은 당(幢)과 탑(塔), 용(龍)과 여의주(如意珠)를 각각 들고 있다.
다른 권속들이 매우 정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데 비하여 사천왕은 과장될 정도로 몸을 굽히거나 다리를 벌리고 있어 정적인 화면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지만 천의의 휘날림이 번잡하여 다소 산만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많은 인물들을 배치하면서도 위로 갈수록 인물의 크기를 작게 하여 답답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채색은 녹색과 적색이 주조색을 이루고 있으며 청색과 살색, 흰색이, 황색, 금니와 금박 등이 어우러져 있다. 보살의 두광과 붉은 천의로 인하여
다소 어두운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본존의 신광 내부를 옅은 황색으로 칠하고 사천왕이 앉아있는 탁자와 갑옷 일부, 무기 등에
금니를 설채하여 화려하면서도 장식적인 느낌이 든다. 필선은 철선묘를 사용하여 곧고 강한 편이며,
특히 사천왕의 얼굴에 음영법을 사용하고 수염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등 정성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이 불화는 화주인 해옹 자선(海翁 慈船)과 청신녀(淸信女) 금원상행(金圓相行), 상궁(尙宮) 김청정화(金淸淨花), 이대각화(李大覺花) 등이
돌아가신 은사 춘담 세은(春潭 世恩)과 남편 김재룡(金在龍), 상궁 유최□화(劉最□花) 등의 영가천도를 위해 시주하여
금어 덕월응륜(德月應崙), 편수(片手) 상규(尙奎), 선명(善明), 완근(玩根) 등이 그린 영산전의 후불탱화(영산회상도)이다.
많은 인물들을 꽉 차게 표현하였으면서도 여유로운 배치와 안정감있는 신체표현, 섬세한 인물묘사와 강한 음영법,
금니의 사용 등에서 19세기 말 불화의 양식이 잘 드러나 있다. 이에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
奉恩寺 木 三尊佛像 = 釋迦佛,迦葉尊者, 阿難尊者(봉은사 목 삼존불상 = 석가불, 가섭존자, 아난존자)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27호 시대 = 조선
영산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석가불좌상과 목조가섭존자와 아난존자입상의 좌우 협시상이 삼존을 구성하고 있으며,
삼존상의 좌우에는 십육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본존석가상은 불신 좌우, 앞, 뒤로 양감이 느껴지는 체구로 무릎 폭은 체구에 비해 좁은 편이다.
세부를 살펴보면, 머리와 육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 마치 투구를 쓴 것처럼 두부가 둥글게 표현되었고, 그 정상에는 정상계주를,
두부의 전면중앙에는 반원형의 중간계주가 새겨져 있으며 머리위에는 나발이 촘촘하다.
얼굴은 방형에 가까운 둥근 상호에 이마의 선이 수평하고 이목구비는 다소 평면적이며 차분한 인상을 주는데 입의 양끝이 올라간 고졸한 표현이 눈에 띤다. 어깨는 둥글고 대의는 우견편단식으로 입었는데 오른쪽 어깨를 감싼 대의자락이 허리안으로 들어가는 형태의,
이른바 변형식 우견편단 착의법을 나타내고 있는데, 조선후기에 흔히 보이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가슴에는 군의의 윗부분이 드러나고 양쪽 무릎에는 부채꼴로 옷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매우 도식화되었다.
오른손은 촉지인처럼 아래로 내렸고 별재로 제작하여 손목에 끼워 넣은 왼손을 무릎위에 올려 손가락을 약간 구부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데,
오른손은 아래로 내렸는데, 이 수인은 조각승 무염이 조성한 불갑사 대웅전 목조삼세불좌상의 본존 석가불상(1635년)을 비롯한
조선후기 석가불에서 자주 표현되는 수인이다.
본존상 좌측의 가섭존자는 머리 정상이 솟아오른 수행자의 모습으로 동안의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으며,
원령의 내의 위에 가사를 입고 복부 주변에는 요포 같은 것을 덧입었으며, 그 아래로 신대(紳帶)가 두 발 사이로 내려온다.
두손은 모아서 합장하였다. 우측의 아난존자는 삭발한 승형으로 역시 원령의 내의 위에 가사를 걸치고 군의 중앙으로 신대가 흘러내리고 있다.
삼존상의 조성시기는 영산전 후불탱화의 화기에 1895년에 개금되었다고 하므로 최초의 조성은 이 보다 이른 시기일 것으로 생각된다.
봉은사 영산전 석가불상은 조선후기의 불상으로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1895년에 개금된 사실이 후불 벽화의 화기에 명시되어 있으며
초성(初成)시기는 이보다 이른 18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되므로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
奉恩寺 靈山會上圖(영산회상도) 삼존불 뒤 후불탱화 위로 가르빙가인것같은 새가 그려져 있다.
奉恩寺 使者圖(봉은사 사자도) :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 38호 시대 = 조선
1895년 영산전을 건축하면서 조성한 7폭의 불화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영산전의 향좌측 벽 끝부분, 나한도 옆에 봉안되어 있다.
화기에 의하면 자선(慈船)을 화주로 하여 금어편수(金魚片手) 상규(尙奎), 창엽(瑲曄), 재겸(在謙), 재협(在冾) 등이 그렸다고 한다.
세로 113.5cm, 가로 83cm의 면본 채색화로 인왕(仁王) 2구와 사자(使者) 2구 만을 간단하게 그린 것이다.
황색의 채운을 배경으로 위쪽에 인왕 1구, 아래쪽에 인왕과 사자 2구를 그렸는데, 인왕은 모두 상반신을 벗은 채로 합장을 한 채 왼쪽을 향하고 있다.
위쪽에 있는 인왕은 머리에 치포관(緇布冠) 같은 것을 쓰고 있으며 입 밖으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솟아있고,
아래쪽 인왕은 머리에 간단한 장식을 두르고 입을 굳게 다문 채 합장하였다.
사자는 머리에 토끼 귀 처럼 생긴 양각(兩脚)이 높게 솟은 익선관(翼善冠) 같은 것을 쓰고 갑옷을 입은 채
허리에는 칼을 차고 두 손으로 번을 잡고 있는데, 두 상이 거의 동일한 모습이어서 같은 본을 사용하여 그린 것으로 보인다.
두 사자는 감재사자(監齋使者)와 직부사자(直符使者)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사자들은 말과 함께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에서는 인왕과 함께 그려진 점이 특징적이다.
奉恩寺 靈山殿 神衆圖(봉은사영산전신중도) :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 39호 시대 = 조선
1895년 영산전 영산회상도, 나한도 4폭, 사자도 1폭과 함께 제작된 신중도이다.
세로 121.8cm, 가로 166.5cm의 면본채색화로서 편수(片手) 상규(尙奎), 금어 범화(梵華), 상선(尙先), 운조(芸祚) 등이 그렸다.
영산전에 함께 봉안된 다른 불화들에 비하여 적은 수의 화승들이 참여하였는데, 그것은 이 불화가 그리 크지 않은 규모였기 때문이다.
새 날개형의 투구를 쓴 위태천을 화면의 중앙에 두고 좌우에 범천과 제석천, 좌우로 일월천자(日宮天子)와 월궁천자(月宮天子) 및
천부중(天部衆)을 배치하였으며 하단부에는 칼을 들고 서있는 신장 6구를 크게 묘사하여 전체적으로 위태천을 위시한 천룡팔부가 중심이 된 구도이다.
위태천은 금색으로 칠한 화려한 조익형(鳥翼形) 투구를 쓰고 두 손으로 가슴 앞에 무기를 받쳐 들고 있는데,
둥근 동안(童顔)의 얼굴은 턱에 유난히 살이 많아 너무 비대해 보인다.
위태천의 좌우에 묘사된 범천과 제석천은 보관을 쓰고 붉은 옷을 입었는데 두 손을 모으고 하고 위태천을 향하고 있어 마치 위태천의 협시처럼 보인다.
범천과 제석천의 옆으로는 일월이 표시된 관을 쓴 일궁천자와 월궁천자 및 동자, 천녀 등이 표현되었다.
하단에 일렬로 서있는 8구의 신장은 입을 꾹 다물고 두 손으로 칼을 움켜 쥔 채 당당한 자세로 서있다.
붉은색의 옷을 입고 머리에는 관과 투구, 두건 등을 쓴 모습이 다양하게 묘사되었으나 건장하면서도 장대한 상체에 비하여 하체는 다소 빈약해 보인다.
적색이 주조색으로 사용되었으며 녹색과 청색, 흰색, 육색, 황색 등을 함께 사용하였다.
특히 옷과 무기 등에 청색의 사용이 많아 격조가 떨어져 보이며, 갑옷과 투구. 무기에 부분적으로 금색을 칠하여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이 그림을 그린 상규(尙奎)와 범화(梵華)는 19세기말~20세기 초에 청룡사 불사에도 참여하였다.
이 붊화는 1895년 영산전 불화 조성시 함께 제작된 신중도로서 인물표현에서 다소 도식화된 면이 보이기는 하지만
적색이 사용이 두드러지며 청색과 금니의 사용 등 19세기 말 불화양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서울시 문화재자료로 지정한다.
奉恩寺 靈山殿 神衆圖(봉은사영산전신중도) = 왼쪽세밀도
奉恩寺 靈山殿 神衆圖(봉은사영산전신중도) = 오른쪽 세밀도
靈山殿(영산전)
七星閣인 北斗寶殿(칠성각인 북두보전)
칠성각 벽화들
七星閣인 北斗寶殿(칠성각인 북두보전) 현판
影閣(영각)
影閣(영각) 현판
彌勒殿(미륵전)
彌勒殿(미륵전) 법당안에서 이륵대불을 향하여..
奉恩寺 板殿 懸板(봉은사 판전 현판)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83호 시대 = 조선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서화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말년 작품으로 「71과병중작」이라고 새겨져 있다.
김정희는 북학파의 일인자인 박제가의 제자이다.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금석학을 연구하였으며,
뛰어난 예술가로 추사체를 만들었고 문인화의 대가였다.
김정희는 순조 9년(1809)에 생원이 되고, 순조 19년(1819)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고증학을 우리나라에 도입하였다.
전해오기로는 그가 「71과병중작」이란 글씨를 쓴 3일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죽은 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奉恩寺 板殿(봉은사 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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