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청량리 돌곶이 승방 = 우리나라 4대 비구니 도량 중 한 곳

백련암 2014. 7. 28. 17:49

찬장산 청량사 연혁(天藏山 淸凉寺 沿革)

 

淸凉寺(청량사)는 서울特別市 淸凉里 一洞 六一번지 天藏山 남쪽에 자리한 古刹이다.

東國輿地勝覽 卷三 漢城府 佛宇條(동국여지승람 권3 한성부 불우조)에는 淸凉寺(청량사)가 三角山(삼각산)에 있었다라고 햐였으니,

洪陵(홍릉)을 조성하면서 사찰소재 근역을 天藏山(천장산)으로  부른듯하다.

 

서울의 鎭山(진산)인 三角山(삼각산) 그 자락을 타고 淸凉道場(청량도량)이 이어져 왔다. 창건년대(創建年代)와 창건주(創建主)에 대해서는

명확한 자료가 없으나 高麗史節要 卷三 睿宗 12年(1117年) 九月 條(고려사절요 권삼 예종 12년<1117년> 9월 조)에 따르면

宰相 李顗(재상 이의)의 아들이며 문종(文宗)의 甥姪(생질)인 李資玄(이자현)을 三角山(삼각산) 淸凉寺(청량사)로 불러서

治國之道(치국지도)와 養性之法(양성지법)을  下問(하문)함에 對(대)하여 心要一篇(심요일편)을 지어올렸다 하였으니,

이에 미루어 보건대 睿宗(예종  재위 1105년 ~ 1122년)이전에 이미 淸凉寺(청량사)가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현 홍릉자리에 있었던 청량사는 1895년 日帝(일제) 강점기 을미정변 이후 淸凉寺 터를 明堂正穴(명당정혈)이라 하여

明星皇后(명성황후)의 陵(능)인 洪陵(홍릉)으로 조성하게 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尼僧房(니승방)돌꽂이 절인 石串寺(석관사) 를 청량사의 기원으로 보기도 하지만 金正浩(김정호 ?~ 1864년)의 大東輿地圖(대동여지도)에는

지금의 洪陵(홍릉) 자리에 淸凉寺(청량사)가 표시되어 있고 현재의 林業試驗場(임업시험장) 자리에는 돌꽂이 尼僧房(니승방)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니 本是 淸凉寺(본시 청량사)와 돌꽂이절은 별개의 寺刹(사찰) 이었으나 홍릉 조성으로 淸凉寺(청량사)가 이곳으로 옮겨지고

돌꽂이 尼僧房(니승방) 또한 廢寺(폐사) 되면서 合倂(합병)된 것으로 보인다.

 

옛 부터 서울시내에 四大 比丘尼僧房(4대 비구니승방)이 유명하였으니, 지금도 尼道場(니도량)의 寺勢(사세)가 혁혁한

돌꽂이尼僧房(니승방)인 淸凉里 淸凉寺(청량리 청량사),   塔(탑)골 尼僧房(니승방)인 普門洞 普門寺(보문동 보문사),

두뭇개尼僧房(니승방)인 玉水洞 彌陀寺(옥수동 미타사),   새절尼僧房(니승방)인 崇仁洞 靑龍寺(숭인동 청룡사)다.

 

현재 동이명이 淸凉里(청량리)라 하니 예로부터 淸凉寺(청량사)의 북쪽으로 뻗은 飛裡山(비리산)을 가로질러

숲속으로 흐르는 淸凉한 시냇물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의 都城五部中(도성오부중) 東部(동부)의 仁昌房(인창방)에 속하는 城(성) 밖의 지역을 淸凉里契(청량리계)라 불렀다.

 

더불어 高宗(고종)의 後宮(후궁)이며 英親王 李垠(영친왕 이은)의 母親陵(모친능)인 永徽園(영휘원)도 소재하고 있는 天藏山(천장산)은

열악한 회한의 역사 속에서 爲法忘軀(위법망구)의 佛心으로 도량을 가꾸어온 비구니 대중스님들을 보듬어 안고

오늘도 大慈大悲(대자대비)의 願行(원행)을 도심속에 回向(회향)하고 있다.

본시 淸凉寺(청량사)는 1890년대를 기점으로 신명을 다 바친 비구니들의 큰 원력에 의해 본격 중창을 맞이하게 되었다.

 

1895년 돌꽂이절이 廢寺(폐사)되자 南彩白比丘尼(남채백비구니)는 法堂(법당)과 七星閣(칠성각)을 이곳 청량사로 移建復元(이건보원)하면서

大尼僧房(대니승방)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이후 大昔金奉學比丘尼(대석금봉학비구니),  彩白(채색)스님의 상좌(上佐)인 鄭富淵(정부연) · 申慈英(신자영)과 後代(후대)  妙吉張東日(묘길장동일) ·

申元三(신원삼) · 金海恩(김혜은) · 尹相吉(윤상길) 比丘尼(비구니)들의 연이은 불사가 이어졌다.

 

1939년 8월 29일에는 李洸(이광) · 李原赫(이원혁) · 張道煥(장도환) · 金觀鎬(김관호) · 吳世昌(오세창) · 勸東鎭(권동진) · 李炳宇(이병우) · 安鐘元(안종원)등

20여 명의 志士(지사)들이 함께모여 卍海 韓龍雲(만해 한용운)스님의 回甲宴(회갑연)을 위로하며 망국의 한과 자주동립의 의지를 다졌으며,

淸凉寺(쳥량사)란 偏額(편액)과 큰 房채의 柱聯(주련)은 1940년 당시 朝鮮佛敎敎正(조선불교교정)이었던 鼎鎬 朴漢永(정호 박한영)스님의

筆蹟(필적)이다.

 

최근 30여 년 간은 相吉(상길) · 惠明(혜명) · 東淑(동숙) · 性法比丘尼(성법 비구니)등이 住持(주지)에 就任(취임)하여 중창과 도량정비 및

교화사업에 매진하였으며 1988년에는 傳統寺刹保全法(전통사찰보전법)에 따라 傳統寺刹(전통사찰) 제5~2호로 지정되었다.

 

도량 이주 일백여 년 동안 비구니스님들의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중창원력으로 이루어진 이 도량에는 현재 四別堂(사별당) 소재

30여 비구니 대중스님들이 합심하여 교화하며 수행하고 있다. 

 

 

극락보전 산신각 무량수전과 더불어 앞에는 대법전이 있다. = 전경

 

경내에는 비구니 스님들의 정성으로 잘 가꾸어진 가지가지의 꽃들이 이곳저곳에 피어 있습니다.

 

拈花堂(념화당)

 

 

대법전(大法殿)

내부에는 석가여래좌상과 석가모니후불탱화,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다는데 이곳 역시 문이 잠겨져 있어 내부 구경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법전(大法殿) 옆에 모셔져 있는 梵鐘(범종)

대법전 법당 건물 한쪽켠 작은 공간에는 범종을 봉안한 종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범종의 용뉴

 

 

병을 들고계신 관세음보살조각상

 

 

대법전 벽화 = 연꽃위에 올라선 동자상 벽화

 

 

포대화상

 

一鉢千家飯 (일발천가반) = 바루 하나로 천 집의 밥을 얻으며
孤身萬里遊 (고신만리유) = 외로운 몸 만리길을 떠도네
靑日觀人少 (청일관인소) = 맑은 날에도 사람 보기가 드물고
問路白雲頭 (문로백운두) = 길을 물으며 머리는 백발이 되었네

 

포대화상은 중국 후량의 선승(禪僧)으로 이름은 계차(契此) 호 정응대사(定應大師).  당시의 사람들이 별호을 지어 장정자(長汀子),

포대사(布袋師) 또는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 불렀다. 

몸집이 뚱뚱하고 배가 불룩하게 나왔으며, 항상 커다란 자루를 둘러메고 지팡이를 짚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시주를 구하였다.

사람들이 먹을 것이나 물건을 주면 모두 자루 속에 넣곤 하였으므로 그의 별명을 포대화상이라고 붙였다.


위의 게송에서 그의 일생을 짐작하듯이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떠돌며 사람들의 길흉화복이나, 날씨 등을 미리 말하는데 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 한다.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고 명주 악림사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기고 앉아서 입적하였다.

 

彌勒眞彌勒 (미륵진미륵) = 미륵가운데 참 미륵부처님이
分身百千億 (분신백천억) = 백천억의  몸을 나투시네
時時示時人 (시시시시인) = 언제나 사람들에게 나타나도
時人自不識 (시인자불식) = 그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네

 

비로서 사람들은 미륵보살의 화신이라 하여, 그 모습을 그려서 받들어 모시게 되었다.

포대화상은  많은 그림이나 조각에 복덕원만한 모습으로, 때로는 동자들과 어울린  익살스럽고 천진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연잎에 올라선 동자상 벽화

 

 

대법전 앞쪽 청량사현판이 걸려있는 곳의 꽃문살

 

반본환원(返本還源): 꽃피고 새가 지저귀는 우리들 주변의 자연을 그렸습니다.

 

 

대법전 벽화로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이곳은 무량수전에도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인우구망(人牛俱忘): 사람도 소도 없어지고 단지 둥그런 원(圓)만이 있습니다.

 

 

망우존인(忘牛存人): 소는 보이지 않고 소년의 모습만 있습니다.

 

 

기우귀가(騎牛歸家): 소년이 소 등에 걸터앉아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목우(牧牛): 소를 길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득우(得牛): 소년이 고삐를 힘껏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견우(見牛): 소의 모습을 겨우 발견하고 뛰어갑니다.

 

 

견적(見跡):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였습니다.

 

 

심우(尋牛): 소년이 소를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적묵당

 

관음전

 

만다라

 

 

관음전엔 세분의 관세음보살님이 모셔져 있다.

 

 

중앙의 관세음보살을 위주로 좌우에도 관음보살들이 모셔져 있다.

 

 

神衆檀(신중단)

 

 

七星檀(칠성단)                                                                                                  山神檀(산신단)

 

 

감로도

 

 

2층건물로 된 관음전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문

옛날 청량사가 아직 새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옛건물은 철저하게 잠그어 놓고 이 곳에서 예를 올리나보다.

이곳은 공개되어 있다. 처사님에게 이 곳도 청량사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이곳은 관음전과 유치원 위에 있다.

 

 

大雄殿(대웅전)

 

 

법당안쪽의 벽화 목탁의 유래에 대한 전설 이야기

 

옛날 어느 절에 덕 높은 스님이 몇 사람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제 멋대로 생활하며,

계율에 어긋나 속된 생활을 일삼다가 그만 몹쓸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죽은 뒤에는 물고기 몸을 받아 태어났는데  등 위에 큰 나무가 솟아나서 여간 큰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데 등 위에 커다란 나무가 달린 고기가 뱃전에 머리를 들이대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이 깊은 선정(禪定)에 잠겨 고기의 전생을 살펴보니, 이는 바로 병들어 일찍 죽은 자기 제자가 방탕한 생활의 과보(果報)로

물고기로 태어나 고통을 받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를 알고 가엾은 생각이 들어 수륙천도재(水陸薦度齋)를 베풀어 고기의 몸을 벗게 하여 주었습니다.

그날 밤 스승의 꿈에 제자가 나타나서 스승의 큰 은혜를 감사해 하며 다음생에는 참으로 발심하여 공부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등에 있는 나무를 베어 고기 모양을 만들어 부처님 앞에 두고 쳐주기를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고, 강이나 바다의 물고기들은 해탈할 좋은 인연이 될 것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고기 등에 자라난 나무를 베어 고기 모양의 목어(木漁)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차츰 쓰기에 편리한 목탁(木鐸)으로 변형되어, 예불이나 독경을 할 때 혹은 때를 알릴 때에도 사용하며,

그 밖의 여러 행사에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설에는 고기는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자므로 수행자도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해야 불도(佛道)를 성취한다는

뜻에서 고기 모양의 목어를 만들어 아침 저녁으로 치게 하였다고 합니다.

 

 

釋迦牟尼佛(석가모니불)

 

 

七星撑畵(칠성탱화)

 

 

神衆撑畵(신중단)

 

 

山神撑畵(산신단)

 

 

독성탱화(羅漢)

 

 

 

 

지옥의 도(地獄圖) 대웅전안 벽화

 

대웅전 벽화

백장선사의 말씀

일일불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도 말아라

 

 

 

룸비니 동산에서 출산을 하는 모습  [비람강생상]

 

 

설산에서 6년 고행을 행하든 끝에 깨달음을 얻다.  [설산수도상]

 

 

 

 

깨달은 후 오비구에게 첫 설법을 함[초전법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