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김제 흥복사 이야기 = 아내의 선행으로 목숨을 구하다

백련암 2017. 10. 3. 20:23

김제 흥복사


흥복사 사천왕문



흥복사 사천왕상



아내의 선행으로 목숨을 구하다


조선 인조 때 김제 고을에는 '흥복興福'이라는 이름의 아주 욕심 사나운 원님이 살고 있었다.

남이 가진 좋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자기 것으로 만드는가 하면, 세금을 두 배로 거두고 날마다 기생들과 어울려 술타령을 일삼았다.

착취와 수탈이 심해지자 고을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만 갔다.

그러던 어느 해 가뭄으로 큰 흉년이 들어 배고픈 백성들이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겨우 겨우 목숨을 이어갔다.


그러나 욕심 많은 원님은 곳간에 쌓여 있는 쌀을 한 톨도 나누어 주지 않았다.

보다 못한 흥복의 아내는 남편 대신 배고픔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것이 남편의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흥복의 아내는 남편이 잠시 이웃 고을로 출타한 틈을 타 곳간 문을 열고 고을 사람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곳간 문을 열어라. 쌀을 나누어 줄 것이니라."

"마님, 사또가 아시는 날이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옵니다."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니 어서 시키는 대로 하라."

흥복의 아내는 곳간에 가득 쌓여 있던 쌀가마를 남김없이 나누어 주었다.

"마님은 선녀시옵니다. 하늘 같은 은혜 평생 잊지 않겠사옵니다."

"마님, 옥체를 보존하십시오."

동헌 앞마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뿔뿔이 흩어?쓴?.


이때, 사또 흥복은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 들판을 건너 갯다리에 이르렀는데, 몸이 으슬으슬하고 한속마저 들었다.

'내가 고뿔이 들었나?' 하며 아무 생각없이 다리 밑을 바라본 흥복은 까무러칠 듯 놀랐다.

다리 밑에 우람한 기둥만큼 커다란 먹구렁이가 머리를 치켜들고 금방이라도 흥복을 덮칠 것처럼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살려, 사람살려!"

흥복은 있는 힘을 다해 외쳤지만, 마음뿐 도무지 말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 자리에 달라붙은 듯 발걸음도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동안 흥복을 노려보던 먹구렁이가 똬리를 풀고 숲 속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발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

다리를 건너고 이랑 긴 논밭을 지나 주막 앞에 다다랐다.


'휴우, 살았다. 여기서 좀 쉬어 가야지.'

흥복은 땀에 젖은 옷을 벗으며 주막에서 살짝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노인 하나가 나타났다.

"네 이놈, 흥복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느냐?"그 노인은 머리에 구렁이 탈을 쓰고 검정 옷을 입고 있었다. 흥복은 질겁하였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조금전 네놈이 보았던 구렁이니라."

"구......구렁이라고요?"

"그렇다. 이제 이 탈을 네놈이 대신 써야겠다. 네가 지은 죄값이니라."


노인은 머리에 쓴 구렁이 탈을 벗으려고 했다. 그러나 구렁이 탈이 벗겨지지 않으니 "아니. 이럴 수가. 억울하다.

네놈의 부인이 이 탈을 벗지 못하게 만들었구나! 죄 많은 네놈과 모습을 바꿀 때가 되었는데, 억울하다. 억울하다......"


꿈에서 깬 흥복은 자신이 그동안 저질러 놓은 업장이 얼마나 두터운가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 뒤로 흥복은 아내에게 감사하면서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서 불타버린 승가사를 다시 지었다.

이런 사연으로 정유재란 때 불탄 승가사가 인조 3년인 1624년에 '흥복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흥복이 지은 절이라 하여 흥복사라 불렀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김제 사람들은 흥복사 경내에 있는 1,000년이 넘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에 뚫어진 구멍 속에는

수백 년 묵은 커다란 뱀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 뱀은 다름 아닌 흥복과 몸을 바꾸려고 했던 먹구렁이였다.


흥복사를 방문하는 신자들은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보면서, 먹구렁이를 생각하고 흥복의 참회를 떠올렸을 것이다.

 사찰에서는 매년 한 차례씩 막걸리 서 말 정도의 분량을 이 느티나무에 붓곤 한다.

나무에게도 영양분이 되고, 나무 밑둥에 살고 있는 먹구렁이도 먹으라는 뜻에서이다.

'이야기 속으로'에나 들어맞을 법한 이야기이지만, 선인선과 악인악과善人善果 惡人惡果의 이치를 생생하게 전해 주는 사례임이 틀림없다.



⊙⊙⊙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인과의 이치를 언급하면, 당연히 '그렇게 나쁜 짓만 하던 놈도 떵떵거리면서 잘만 살더라!" 라는

 반론이 나오게 마련이다. 왜 악한 사람이 잘사는가?

복은 복대로 가고, 죄는 죄대로 간다. 전생에 쌓아 놓은 복은 이생에서 그만큼 복으로 받는 것이고, 다른 사람 가슴 아프게 한 죄업은 그만큼 받는다.

악인이 잘사는 것은 악인일지라도 전생에 쌓아 놓은 복이 있기 때문이고, 현생에 저지른 악업은 살아 생전에 든지 아니면 내생에든지 꼭 받게 마련이다.

 마음씨 착한 사람이 지지리 고생하면서 사는 이유는 그 사람이 전생에 악한 일을 많이 하다가 마지막 죽는 순간에 잘못을 뉘우치고

깊은 참회를 하였기 때문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

「구렁이와 흥복사」의 주요 모티프는 ‘흥복의 가렴주구’, ‘흥복 아내의 선행’, ‘흥복의 개과천선’ 등이다.

김제현감이었던 흥복은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들이고, 무리하게 재물을 빼앗는 관리였다.

그런데 그 아내의 선행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자 개과천선하여 흥복사를 중건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하는 불사연기전설이다.

「구렁이와 흥복사」는 당시 관리들이 일삼던 무자비한 횡포를 풍자한 설화라고도 할 수 있다.




흥복사 대웅전 삼존상



흥복사의 유래


백제와 고구려, 불교와 도교의 사연이 깃들어 있는 곳이 흥복사이다. 흥복사의 역사는 깊다. 물경 1,3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김제시 백산면 흥사리 승가산에 자리 잡은 흥복사는 백제 때 창건된 사찰이다.

창건할 당시의 원래 이름은 승가사였으며, 650년인 백제 의자왕 10년에 고구려의 고승 보덕화상普德和尙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백제의 땅인데도 불구하고 고구려 승려인 보덕이 와서 창건하였다.  어떻게 고구려 승려가 백제 땅에까지 와 사찰을 창건하였을까?


보덕은 고구려의 영토인 평양 부근의 반룡사(盤龍寺)에 머물던 고승이었다.

당시 보장왕(재위기간 642~668)은 재상인 연개소문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국 도교 일파인 오두미교(五斗米敎)를 고구려에 수입하였다.

연개소문이 보장왕에게 굳이 도교의 수입을 주장한데에는 당시 고구려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이 있다.

연개소문은 혁명적인 개혁을 부르짖었고, 개혁을 하자니 기존 세력과 깊은 관계가 있는 불교를 견제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즉 불교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중국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도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도교를 수입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당연히 불교계는 이러한 움직임에 강력하게 반발할 수 밖에 없었고,

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불교계의 인물이 바로 보덕화상이라고 여겨진다.

급기야 보덕화상은 고구려에서 백제로 종교적인 망명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백제로 온 것이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에서 「보장봉노 보덕이암 [寶藏奉老 普德移庵]」조라는 항목을 할애할 만큼

보덕 화상의 백제 망명 사건을 크게 취급한 것을 보면, 당시 이 사건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사건임이 틀림이 없다.


보덕은 백제 어디에서 정착했는가? 『삼국유사』에 따르면 완산주(完山州)의 고대산(高大山)이었다. 지금의 전주 고덕산(高德山)이다.

조선시대에 폐사되었지만 고덕산에 있던 경복사(景福寺)는 보덕이 망명하여 살던 절이었다.

경복사 내에는 '공중으로 날아서 온 암자'라는 뜻의 비래방장(飛來方丈)이란 유명한 암자가 있었는데,

이름이 그렇게 붙은 이유는 보덕이 고구려의 반룡사에서 완주의 고대산으로 방장을 옮길 때 신통력을 발휘하여 공중을 날아 옮겼기 때문이다.

 보덕 화상이 백제로 망명한 때가 650년이다. 그러니까 사료를 참고해 볼 때 흥복사(승가사)가 창건된 시점은 바로 이때이다.


고구려의 승려 보덕이 조국을 떠나 머나먼 타국 땅 백제에 정착하면서 지은 절이 흥복사였다.

이 절 외에도 보덕 화상의 제자 11명이 세웠다고 하는 금동사(金洞寺), 진구사(珍丘寺), 대승사(大乘寺), 대원사(大原寺),

유마사(維摩寺), 중대사(中大寺), 개원사(開原寺), 연구사(燕口寺) 도 마찬가지이다.

이 중에서 현재 위치가 밝혀진 곳은 금동사와 진구사 정도 뿐, 다른 사찰들은 정확한 소재지를 알 수 없는 상태이다.


금동사진안 마이산에 있고, 진구사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생긴 석등이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임실 용암리에 있고,

지금은 중기사(中基寺)로 바뀌어 있다.

이들 확인된 사찰들에 한해서 풍수적인 조건을 살펴보면 고지대가 아닌 저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 점이 공통적이다.

흥복사가 그렇고 금동사, 진구사가 그렇다.

어찌 됐던지 간에 흥복사는 경복사, 금동사, 진구사와 함께 그 위치가 확인된 보덕 화상 계열의 열반종 사찰이다.

현재는 조계종의 금산사 말사에 속해 있다.

흥복사를 포함한 이들 사찰의 입지 선정과 건축은 당연히 고구려의 보덕의 취향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아마도 흥복사는 백제 양식과는 다른 고구려 냄새를 물씬 풍기는, 백제 속의 고구려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흥복사에서 그 옛날 보덕 화상 시절의 분위기를 느껴 볼 수 있는 유적은 남아 있지 않다. 정유재란 때 건물이 전부 불타 버렸다고 한다.

그놈의 임진왜란, 정유재란, 6ㆍ25전쟁이 참으로 원망스럽다.

우리나라 사찰들도 돈이 들더라도 애초에 희랍의 신전처럼 돌로 만들었어야 했을 것을, 돌로 지었으면 불타 버리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다행히 석조 미륵입상은 돌로 만들어져서 그나마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이 많다. 남는 것은 돌이더라!

흥복사에서 옛 체취를 맡아 볼 수 있는 것은 지명이다. 희미한 옛사람의 추억처럼 이름만이 남아서 그때의 추억을 전하고 있다.

흥복사의 뒷동네 이름이 '승방(僧房)'이다. 뒷동네는 스님들이 거처하던 건물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앞산 이름도 '승방산'이다. 모양이 승방처럼 생겼다는 말이다. 대웅전이 기대고 있는 산 이름도 승가산이고, 보덕 화상 당시의 절 이름도 승가사이다.

 '승가'는 인도 산스크리트어의 'samgha'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이는 스님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를 가리킨다.


이처럼 흥복사 주변의 지명에는 유달리 스님을 가리키는 '승'자가 많다. 불ㆍ법ㆍ승 삼보 가운데 유독 '승'자가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을 밝혀줄 수 있는 기록도 없고, 구전도 없다. 기록도 없고 구전도 없을 때, 나는 용기를 내어 돌진하는 수 밖에 없다. 추리에 기대는 수밖에.


제1선이 기록이고 제2선이 구전이라면, 제3선은 추리이다. 추리는 제1선과 제2선이 무너질 때 사용하는 마지막 카드이다.

 '승'자가 많은 이유는 흥복사에 그만큼 스님들이 많이 살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스님들이 시글시글 많이 살아서 그랬을 것이다.

흥복사 주위는 우리나라에서 쌀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김제 만경의 곡창지대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둠벙 파 놓으면 개구리가 뛰어든다'는 옛날 속담처럼 쌀이 있는 곳에는 문화가 발달하고 사람이 모이게 마련인가 보다.


♧♧♧

전강선사와 박완일


박완일 선생은 환속하여 동국대학교 교수를 지냈지만, 젊었을 때는 스님이었다. 

그는 고등학교때 해인사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효봉曉峰, 1888~1966 스님의 설법을 듣게 되었다.

  '도를 닦으면 생사를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다'는 효봉 스님의 말에 감명을 받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깍고 스님이 되었다.

효봉 스님의 상좌가 되었던 것이다.


통영의 미래사(未來寺)에서 효봉 스님을 시봉하면서 화두에 몰두하던 박완일은 전강 스님 얼굴도 한번 보고,

 자신의 공부가 어느 정도인가를 시험할 겸해서 흥복사를 찾아갔다.


흥복사 마당에서 풀을 뽑고 있던 전강 스님은, 키가 작달막하고 눈빛이 빛나는 젊은 승려가 마당에 성큼 들어서자

그 모습만을 보고도 대번에 그가 자신에게 한판 붙으러 온 선객임을 간파했다. 그만큼 전강 스님의 선기(禪機)는 전광석화였다.


당대 제일의 검객 전강을 찾아가 겁 없이 결투(?)를 신청한 박완일을 향하여 한 방 날렸던 초식이 발로 '안수정등' 화두였던 것이다.

이때가 박완일 선생 나이가 23세 였던 1958년의 일이었고, 선문답이 이루어졌던 장소가 바로 김제 흥복사였다.


전강 스님은 이때 흥복사에 잠시 머물던 승려였다고 한다.

전강 스님은 누구인가? 해방 이후 한국의 선승들 중에서 지혜 제일로 명성을 휘날리고 있던 당대의 고수였다.

전광석화 같은 지혜는 누구도 당할 자가 없다던 전강. 그가 휘두르는 지혜의 칼날은 너무도 예리하고 정확해서 아무리 복잡한 실타래라도

 그의 칼에 걸렸다 하면 끝장이었다.

그는 지나치게 화두에 정신을 집중한 나머지 머리에 피가 몰리는 상기증에 걸려 피를 토하기 까지 하는 처절한 수행을 거치기도 하였다.


전강은 어느 날 곡성 태안사 입구의 돌다리를 건너면서 문득 흐르는 냇물을 보다가 깨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선승으로서 경허 스님 못지않은 파격으로 수많은 기행과 일화를 남긴 인물이었다.

그 전강에게 애송이 승려 박완일이 겁도 없이 한판 붙자고 찾아갔던 것이다.


"누구인가?""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방으로 들어가지."

이런 상황에서는 여러 말이 필요 없다. 한마디를 뱉으면서 전강은 박완일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박완일도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뒤따라갔다. 방에 들어와 좌정을 하자 전강은 그에게 대뜸 '안수정등'의 화두를 내밀었다.


"자네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꿀만 먹겠습니다."

박완일은 반사적으로 답변하였다. 선문답은 반사적으로 나와야 한다. 박완일은 나름대로 그동안 연마한 내공을 총집중한 답변이었다.

"십 년 참선한 수좌보다도 낫구나! 하지만 아직 부족하네. 자네가 다시 나한테 이 화두를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네. 달다."

안수정등 화두에 대한 전강의 답변은 '달다'는 이 한마디였다.

"달다......"


전강이 휘두른 이 한마디는 지혜 제일의 검객이 보여준 초식이다.

이렇게도 할 수 없고,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딜레마를 한칼에 해결해 버린 것이다. 이 화두는 중생의 삶을 비유한 이야기이다.

가없이 너른 들녘은 태어나서 죽어가는 생사의 광야이니 그곳으로 사방에서 불어오는 불길은 생로병사의 불이요, 우물은 황천이며,

코끼리는 무상한 살귀(殺鬼)요, 나무는 사람의 몸이며, 칡넝쿨은 사람의 목숨이며, 검은 쥐 흰 쥐는 해와 달이요,

세 마리의 이무기는 탐ㆍ진ㆍ치 삼독심(三毒心)이며, 네 마리의 뱀은 지ㆍ수ㆍ화ㆍ풍 사대요, 꿀은 오ㆍ욕ㆍ락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