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戊戌年 “충성과 신의, 용맹을 이어받는 한 해 되길”

백련암 2018. 1. 6. 19:55

[신년특집]“충성과 신의, 용맹을 이어받는 한 해 되길”


무술년 / 불교와 개 이야기



인간과 역사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온 동물은 단연 '개'이다



우리집 강아지 쥬쥬


인간과 가장 친숙한 동물 개       삼목대왕 ‘삼목구’ 환생 설화       목련존자 어머니 이야기까지


불교 경전과 설화에서 등장       하찮은 동물로 취급받기도



새해는 무술년 개의 해다. 십이지 열한번째 동물인 개는 시간으로 오후7시에서 9시, 방위로는 서북서, 달은 음력 9월에 해당한다. 

개띠 해는 육갑 가운데 갑술(甲戌), 병술(丙戌), 무술(戊戌), 경술(庚戌), 임술(壬戌) 등으로 순행한다. 

무엇보다 개는 십이지 동물중에서도 우리 주위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이며, 그만큼 인간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왔다.


개는 예로부터 그 성질이 온순하고 영리해 사람을 잘 따르는 동물로 여겨져왔다. 

후각과 청각이 예민하고 경계심이 강하며 자기 세력 범위 안에서는 대단한 용맹을 보인다. 

주인에게는 강직한 충성심을 가지며 그 밖의 낯선 사람에게는 적대심과 경계심을 갖는다. 때문에 집을 지키거나 

사냥에 나서는 것은 물론 잡귀와 도깨비 등을 물리쳐 집안의 행복을 지켜주는 동물로 여겨져 왔다.


충성과 신의의 동물인 개는 불교 경전과 설화에도 등장한다. 

해인사 <유진팔만대장경개간인유(留鎭開刊因由)>에는 개가 삼목대왕의 환생이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시대 합천에 살던 이거인은 어느 날 눈이 셋 달린 ‘이상한 개’를 우연히 만난다. 

이거인은 괴이하게 생긴 개를 내치지 않고 집으로 데려와 삼목구(三目拘)라 이름 짓고 정성을 다해 키운다. 

그러다 어느 날 삼목구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이거인은 삼목구의 장례를 후하게 치룬다.


세월이 흘러 이거인은 명을 다해 저승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삼목구의 본래 모습인 삼목대왕을 만난다. 

삼목대왕은 자신이 죄를 지어 개의 형상으로 이승에 태어났을 때에 보살펴 준 주인, 이거인을 알아보고, 

그를 염라대왕에게 데려가 소원을 들어주기를 청한다. 이거인은 생전에 “부처님 경전을 만들지 못해 후회가 된다”고 말하자, 

염라대왕은 그를 이승으로 다시 돌려보낸다. 이후 이승으로 돌아온 이거인은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완성했다고 한다.


개의 환생설화는 목련존자 어머니 이야기에서도 나타난다. 

석가모니 부처님 10대 제자인 목련존자는 출가해 신통제일이 된다. 어느 날 목련존자는 부모님이 생각나 신통의 눈으로 이곳저곳을 살피고, 

지옥에서 끊는 가마솥에 빠져 고초를 겪고 있는 어머니 모습을 본다. 

목련존자의 신력으로 어머니는 지옥을 벗어나 아귀도를 거쳐 축생보인 개의 몸을 받는다. 

이어 목련존자의 지극한 발원으로 개의 몸을 벗고 도리천에 태어나게 된다. 음력 7월 보름인 우란분절에 스님에게 대중공양을 올려 재를 베풀면

 어머니를 정토에 왕생하게 할 수 있다는 우란분재 풍습도 이 때 시작된 것이다.


현재까지 지역 명물로 내려오는 개도 있다. 

신라 제33대 성덕왕 큰 아들인 김교각 스님은 신라에서 중국 당나라로 가면서 흰 삽살개를 데리고 갔다. 이름은 선청(善聽)이라 지었다. 

삽살개는 스님을 평생 따라다니며 수행을 돕고 곁은 지켰다. 때문에 지금도 삽살개는 중국 구화산을 수호하는 명물로 여겨지고 있다. 

왕가의 손만 타던 이 개가 민가로 흘러나온 것은 신라가 망한 후로 전해진다. 이후 삽살개는 서민의 개로 우리 민족의 애환을 함께 했다. 

삽살개라는 이름도 삽(없애다 또는 쫓는다),살(귀,액운)에서 나왔으니 그 삽살개라는 이름 자체가 바로 액운과 귀신을 쫓는 개라는 뜻이다.


개는 일찍부터 불교미술 소재로 등장하기도 했다. 

독자적인 것보다 십이지의 한 신중으로 표현돼 왔으며, 초기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장수의 형태로 등장하다 후대로 가면서 

무관에서 문관으로 복장이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무릎을 꿇은 공양상 형태로 도상이 변모해왔고, 

십이지상을 최초로 배치한 보물 제1429호 경주 원원사지석탑에서는 상층기단에서는 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개는 인간과 밀접한 만큼 하찮은 동물로 취급받기도 한다. 

충직과 신의의 동물로 표현되지만 비천한 대상이나 부정적인 것을 가리키는 상징이기도 하다. 

‘개고생’, ‘개망신’, ‘개차반’ ‘개꿈’ 등 쓸데없거나 헛된 것을, 보다 심해지면 ‘질이 떨어지는’ ‘정도가 심한’ 등 

다분히 모욕적이고 정도가 심한 부정적 의미를 강조하는 데도 쓰인다.


이는 부처님 당시에도 나타난다. 부처님은 〈백유경〉에서

 “옛날 아수라왕이 해와 달이 밝고 깨끗한 것을 보고 손으로 그것을 가려 버렸다. 

무지한 사람들은 그것을 월식으로 알고 아무 죄 없는 개를 제멋대로 때렸다. 범부도 그와 같다”고 경책했다.


긍정과 부정을 넘나드는 ‘개’이지만 뭐니뭐니해도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순응성이 있어 사람을 잘 따르며 주인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치는 동물이자 충성과 의리의 충복, 안내자이자 지킴이, 인간의 동반자 등

 ‘무술년’ 새해에는 개의 장점만을 받아 활기찬 출발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십이지신이 최초로 표현된 경주 원원사지. 사진은 기단부에 새겨진 십이지 가운데 열한번째 동물 개.



■ 한국불교역사 속 무술년 무슨 일 있었나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시대를 지나, 불교는 연산군~중종대로 이어지는 숭유억불의 조선시대를 맞는다. 

기나긴 억압과 탄압의 암울했던 시기를 버티며 해방을 맞이하지만, 비구와 대처 간 분규로 한국 불교는 또 다른 위기에 직면한다. 

2018년 새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21세기 불교를 맞기 전, 다사다난 했던 한국 불교 역사 속 ‘무술년’을 돌아본다.


■ 1958년 ‘격동의 시기’

일제 식민지 시대 산물인 대처승을 두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6.25 혼란기를 거치며 비구와 대처 간 분규가 한창이던 시기,

 1958년은 그 격동의 시기 한 가운데 있었다. 비구와 대처 양측 모두 중앙교단을 위시해 사찰관계 재단과 기타 재산권 쟁탈을 위해 

각종 소송을 제기했고, 월하스님과 월탄스님이 종단 정화를 위해 비구측 핵심인물로 적극 활약하며 통합종단의 토대를 다졌다.


■ 1778년 ‘조정의 불교탄압’

조선말, 조정의 불교탄압은 계속됐다. 정조 2년 1778년은 특히 스님의 도성 출입을 엄금했던 시기로, 엄격한 도첩제(度牒制)를 시행해 

군역면제의 혜택을 받고 있는 승려의 수를 강하게 억압했다. 수행자들은 자기가 사는 곳 도성에도 드나들 수 없었다. 

정치, 법률, 사회적으로 엄격한 규율 속에 겨우 잔명이나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스님의 도성 출입은 금지됐지만, 조선시대 사찰이며 

금강산 4대 사찰(유점사, 장안사, 신계사, 표훈사) 중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표훈사가 이  때 완전히 복원되기도 했다.


■ 1538년 ‘가장 암울했던 시기’

중종 33년(1538년), 한국불교 전체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로 평가된다. 이 해 9월 조정에서는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지 않은 사찰을 모두 헐어내고

 전라도 지역 승려 3000명을 군적에 편입시키는 등 불교계를 더욱 가혹하게 탄압했다. 

일부 스님이 잘못하면 이를 빌미로 깊은 산중에서 수행하는 스님들까지 처벌당했다. 전국의 유생들이 닥치는 대로 사찰을 불태우고, 

만나는 스님들마다 몽둥이질을 해댔다.  스님도 다 같은 임금의 백성이었지만 철저히 외면 받고 있음을, 보우국사는 이 때의 비참한 상황을 시로 읊었다.


 "불교가 쇠퇴하기가 이보다 더하겠는가. 피눈물 뿌리며 수건을 적시네. 

구름 속에 산이 있어도 발붙일 곳이 없고 티끌세상 어느 곳에 이 몸을 맡겨야 하나." 


■ 1058년 ‘국사·왕사 책봉’

국보 제59호 지광국사 탑과 깊은 인연이 있는 해다. 이 해 고려 문종은 법상종을 대표하던 지광국사 해린스님을 국사로 책봉하고자 친서를 보내 

먼저 세 번 청했고, 수레를 준비해 봉은사로 직접 행행(幸行)해 해린스님을 봉했다. 이와 동시에 영통사(霙通寺)주지 스님인 난원스님을 왕사로 책봉했다. 

후에 해린스님이 법천사로 돌아갈 것을 왕에게 청하니 문종이 현화사에 행차해 재를 베풀고 태자에게 스님을 교외까지 전송하도록 했다고 한다. 

9년 뒤인 1067년 해린스님이 입적하자 문종은 ‘지광’이란 시호를 내렸고 법천사에는 스님 사리가 봉안된 탑과 탑비가 세워졌다.


불교신문     이경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