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강원도 철원 심원사 설화 장님과 앉은뱅이, *황금멧돼지와 사냥꾼

백련암 2019. 9. 26. 20:34


강원도 철원 심원사 설화 : 장님과 앉은뱅이, 황금멧돼지와 사냥꾼, 



朙珠殿(명주전, 즉 명부전)



명주전(明珠殿)의 돌로 만든 자그마한 지장보살의 미소에는 그 의지와 바람이 묻어 있습니다.

심원사. 그곳의 불단에서 자비의 미소로 중생을 내려다보고 있는 지장보살은 개금(改金)이나 장식을 거부하며 도금을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금칠이 벗겨지고 말아, 중생들의 소망을 가까이 접하려는 듯 더욱 정감있는 불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명주는 어두운 마음을 밝게해주는 보배 구슬이며, 누구에게나 유익함을 주는 염원하는 일은 무엇이나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구슬을 말한다.



장님과 앉은뱅이 설화


이 이야기는 견불령(見佛嶺)과 대광리(大光里)라는 지명과 연관된 석조 지장보살의 영험담이다.

고려 초에 심원사의 산 아랫동네에는 어려서 열병을 앓아 장님이 된 이덕기(李德基)

소아마비로 앉은뱅이가 된 박춘식(朴春植)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동네 친구였던 그들은 만나면 언제나 자신들의 신세한탄을 하곤 하였다.


어느 날 그들은 서로 자신들의 전생을 이야기하며 한탄하고 있었는데, 마침 심원사 스님이 종불사(大鐘佛事)를 위한 시주를 청하였다.

"대종불사에 시주하면 부처님의 가피로 재앙이 소멸되고 현생의 복을 얻을 것" 이라는 스님으  말을 듣고,

두 사람은 대종불사의 화주가 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몸을 담보로 시주를 모으러 다니는 화주(化主)가 되기로 작정하였다.

장님 이덕기는 발을 쓸 수 없는 앉은뱅이 박춘식을 업고, 박춘식은 이덕기의 눈이 되어 열심히 구걸하여 대종의 조성을 위해 시주하였다.


그러기를 3년이 되던 해에 마침 타종식의 날이 다가왔으며, 그들은 대종의 타종식을 보기위해

"나무 법 나무불 나무승"을 외우며 대광리의 산길을 따라 절로 향하였다.

절에 이르기 전 첫 타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지자

순간, 앉은뱅이 박춘식은 오색구름을 타고 밝은 구슬을 손에 지닌 지장보살님이 하늘에서 심원사 쪽으로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앉은 뱅이 박춘식은 "지장보살님이 보인다!"고 소리치며 자신도 모르게 장님의 등에서 펄쩍 뛰어내렸는데, 갑자기 두 다리가 쭉 펴지는 것이었다.

박춘식의 외침을 들은 장님 이덕기 역시 그 광경을 보고 싶어 함께 소리치며 눈을 비비자 갑자기 앞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산마루 위의 오색구름에 쌓여 큰 빛을 발하고 있는 지장보살님을 향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하였다.

그들의 정성이 마침내 지장보살님의 가피를 입게 된 것이다.


지금도 이 전설은 철원지역은 물론 전국 각지에 알려져 영험있는 지장보살의 가필글 받기 위해 많은 불자들이 심원사를 찾고 있으며,

그들이 자장보살님을 본 고개는 견불령(見佛嶺), 그들이 살던 마을은 부처님의 큰 광명이 머무르는 동네라 하여

대광리(大光里)라 부르고  있다.



◈황금멧돼지와 사냥꾼

개성에서 東으로 80리 되는 곳에 산이 있으니 보개라, 영봉들이 열지어 솟아있고, 숲은 우거지고, 물은 깊은데,

산의 중앙에 하나의 기이한 봉이 높다라니 홀로 앉아 있으니 환희봉이라 

봉의 南쪽 3리 되는 곳의 아래 암자가 하나 있으니 <石臺庵>이라 한다.


석대암은 1300여 년 전(서기 720년) 사냥꾼 이순석, 순득(李順碩, 李順得) 형제가 한마리의 커다란 멧돼지를 발견하여 활로 쏘았는데

금빛 멧돼지는 붉은 피를 흘리며 달아났고, 그 핏자욱을 따라가니 횐희봉쪽이었다.

형제가 그 흔적을 추적하여 멈춘곳에 멧돼지는 보이지 않고 지금의 지장보살상이 있었는데 석상은 우물 가운데서 상반신만 물위에 나와있고,

하반신은 물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좌측 어깨 중앙에 순석등이 쏜 화살이 꽃혀 있는지라 두 사람은 크게 놀라 석상의 팔에서 화살을 뽑으려 하나

화살은 뽑히지 않고 석상(石像)은 태산과 같은 무게로 움직이지 않으므로 형제는 놀라서 선채 맹세하기를


"대성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주십시요. 우리를 속세의 죄업에서 구제해주시려고 몸을 나투신 것임을 알겠나이다.

내일 우물 곁에 있는 돌위에 나와 주시면 저희들은 뜻에 따라 출가수도하겠습니다."


다음 날 그곳에 와보니 석상이 돌위에 나와있는 고로 출가하여 석상이 나투신 옆에 암자를 창건하니 석대암(石臺庵)이다.

지금도 옛 석대암터 옆에 우물이 있으며 영험비가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렵다.


대덕 11년 정미 8월 성수 조얼대부 한림학자, 삼중대광 정교첨, 의정승 무문과 대제학감, 춘추관사 여흥군 무헌자 법희거사 민지記,

원정우(인종의 연호) 7년 경신 8월 돌에 새겨 세우다.



◈철원 심원사 영기스님

근세의 율사였던 남호, 영기스님은 법명은 영기, 법호는 남호(南湖)이셨는데,

조선 순조 21년(서기 1820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아버지 정언규,  어머니 변씨 사이에서 출생하셨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문둥병이 심하여 걸식을 하며 돌아다니다. 13세때 문둥이 떼거리와 같이 심원사에 오게 되었는데,

대연스님께서 불쌍히 여기고 "석대암 지장보살님께 지극정성 기도 하면 네 병이 치유케 되리라" 고 하셨다.

소년은 이 말을 듣고 매일 지장보살님께 지성으로 기도하여 병이 치유되자 출가하여 불경, 계행, 경학(佛經, 戒行, 經學) 을 닦아

율사로써 이름을 떨치게 된바,  33세때 자신의 몸을 찔러 그 피를 먹물에 섞어 아미타경을 서사하셨고,

삼각산에서 미타경을 목판에 새기고 16관경(16觀經)과 연종보감(蓮宗寶鑑)을 판각, 지금의 남양주군 흥국사에 봉안하고,

1855년 화엄경 판각을 위해 석대암 지장보살님전에 100일 기도후, 1855년 봉은사에서 소초화음 80권과 보현행원품, 별행 1권,

준제천수합벽(準提千手合壁), 천태지은(之隱) 시집등을 판각, 판전 법당을 신축 봉안하고,

1872년 석대암 및 심원사에서 주석하시다 입적하시니 세수 53세요 법랍 39세였다.

지금 봉은사에는 율사님의 공적비가 남아 있다  이처럼 영험스럽고 중생을 죄업에서 구제키 위해 몸소 나투셨다 하여

생지장(生地藏)도량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