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선 시인의 도피안사 시 한편을 소개한다.
도피안사
허리 굽고 귀도 절벽인 노승이 누덕옷 속에
길을 모두 감추고 떠나버려서
그 곳으로 가는 길은 아무데도 보이지않았다
뜻밖에 일찍 뜬 달이
둑 위의 가랑닢과 누워 섹스하는 모습만 훔쳐보고
돌아왔다
이 시에서 3행의 "그 곳으로 가는 길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의 그 곳이라 함은 단순 도피안사로 가는 길이 아닌 피안의 세계로 가는 길임을 짐작케한다.
시인은 자신의 누덕옷 속에 길을 감춘 채 번뇌와 슬픔이 없는 피안의 세계로 가고 있는 것이다.
도피안사는 강원도 철원군 동숭읍 관우리의 화개산에 위치한 작으마한 절이다.
이 곳은 최전방 민통선 안에 위치하고 있어서 일반인들은 출입이 안되던 곳인데 지금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철원 노동당사 까지 통행이 자유로워 지나는 행인의 발길을 잡는다.
내가 군생활을 한 곳이 이곳에서 가까운 백마고지 근처 철책이었다. 백마고지와 철책선 아랫마을인 대마리를 자유롭게 통행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에 철새 도래지이고 군생활의 추억도 떠올릴 겸 이곳을 찾은 것이 5년전의 일이다.
30여년전의 기억을 되살려 제대하기 전 근무했던 연대 본부 앞 매일 밤 외상 소주 가져다 먹던 가게를 찾았더니 30년 전 아주머니가 지금도 가게를 경영하고 계셨다. 얼굴을 저세히 보니 그 윤곽이 떠오른다. 반갑기 그지 없다. 다시 대마리와 백마고지 등을 돌아보고 말로만 듣고 당시에는 보지 못했던(당시 사단관할이 달랐다) 노동 당사를 찾아갔다. 뼈대만이 앙상하게 야산자락에 웅크리고 서 있는 모습, 수 많은 탄흔 자국을 상처로 안고 덩그렇게 서서 행인을 맞는 모습에서 우리가 격어야 했던 동족 상잔의 상처를 볼 수 있었다.
구 철원길로 들어 고석정 방향으로 지나는 길에 문득 도피안사라는 이 이정표를 보게 되었다.
한자의 뜻으로 피안에 이른다(?)는 뜻이다. 도피안사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뭔가 마음에 끌리는게 있었다. 사람들이 그리는 피안의 세계나 이상향은 배부르고 행복한 자들이 아닌 가난하고 소외받아 불행했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 지는 관념의 세계인 것이다. 그들은 현실의 불행과 가난, 끝없는 외로움을 달랠 어머니의 품속같은 마음의 세계를 동경해온 것이다. 그 마음의 동경의 세계가 곧 피안의 세계인 것이다. 도피안사라는 이름에 홀린 내 마음도 그렇게 허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이 절은 통일신라 경문왕 5년(865) 도선국사가 1천500여 명의 대중과 함께 철불을 조성하고 삼층 석탑을 세워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로 알려져 있다.
사적기 유점사본말사지(楡岾寺本末寺誌)』에 의해 이 절에 대한 간단한 연기 설화와 축조 연대를 알 수 있다. 도선국사가 철조비로사나불상을 조성하여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봉안하러 가던 도중 갑자기 불상이 없어져 찾았 나섰더니, 지금의 도피안사 터에 안좌하고 있어 그 곳에 절을 창건하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부처가 스스로 피안의 곳에 이르렀다해서 이름을 도피안사라 했다고 한다.
도피안사가 자리한 화개산이 물위에 떠 있는 연약한 연꽃의 모습이어서 삼층 석탑과 함께 산세의 허약함을 보충하였고, 도선국사는 이 절을 비보사찰(裨補寺刹) 중 하나로 삼았으며, 창건 이후 천년동안 그 명맥을 이어왔다고 하나 자세한 중수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그 뒤의 절의 내력은 『유점사본말사지』에 이임재(李?宰)가 지은 「화개산도피안사중수기(花蓋山到彼岸寺重修記)」에 전하는데, 1898년 봄 큰 화재로 사찰의 모든 건물이 전소되면서 비로자나불좌상이 노천에 노출되었다고 한다. 이에 영주산인(靈珠山人) 월운 스님이 군하(群下)의 유력자인 강대용(姜大容)의 도움으로 법당 3칸을 지은 후 불상을 봉안하고 후불탱을 조성하였으며, 1914년에는 강대용이 화주가 되어 칠성각과 산신각을 중건하였다고 한다. 1927년에는 주지 의권 스님이 모든 건물을 새롭게 보수하였고, 1931년 회명 일승 스님이 도피안사 사적(到彼岸寺事蹟)을 지었으며, 1933년에는 당국과 교섭하여 절 입구의 도로를 확장하였다. 광복 후에는 공산치하에 들어갔다가 6·25전쟁 때 쫏겨 가던 괴뢰군이 철조비로사자불을 땅에 묻고 건물은 전소 시켜 완전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이곳을 지키던 한 장군에 의해 땅속에서 이 불상을 찾아내게 되었고 군작전구역이었으므로 15사단에 의해 불당이 지어지고 군에서 관리를 하던 것을 1986년 관리권이 민간으로 이양되고 1988년부터 정부의 지원을 받아 대적광전 삼성각 등을 개축하고 범종각 사천왕문을 중건하였다고 한다.
<비보사찰>
비보사탑사상은 신라말·고려초의 승려 도선(道詵)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이 비보사탑사상은 밀교(密敎)의 택지법(擇地法)과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풍수지리사상이 결합된 것이다. 도선의 비보사상이 최초로 적용된 사례는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을 도운 택지(宅地) 선정과 제택건립(第宅建立)이었다.
<유점사>
이 도피안사에는 국보 63호 철조 비로사나자불이 모셔져 있고 전각아래 마당에는 보물 223호인 3층 석탑이 있다.
이 철조 비로사나자불좌상은 장흥 보림사의 철불(국보 117)과 함께통일신라의 말(7세기)의 대표적인 불상이라고 한다. 높이 91㎝,광배는 없고 대좌와 불신 모두 철로 만들어졌으며 부처의 뒤에 철불 조성과 관련된 139 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다른 여느 불상보다 그 연대와 사적 경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불상이기도 하다. 육계(부처의 정수리에 솟아 있는 상투 모양의 혹)는 뚜렷하지 않으며 얼굴은 갸름하다. 반쯤 뜬 눈, 작은 코에 입은 다물었고 섬약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여타의 부처 모습이 아니라 보통 인간의 얼굴 형상을 한 불상이다. 피안의 세계에 든 어느 농부의 얼굴인지도 모른다.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조비로나사불>
이 비로사나불상은 1100여년전에 쇳물이 부처님으로 탄생하셨다. 그 생긴 모습이 근엄하거나 해탈의 미소를 머금은 부처라비보다 평범한 얼굴을 한 모습이지만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쥔 지권인(智拳印)으로 보아 비로사나불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탄생한 이 불상은 쇠붙이의 투박한 질감을 갖고 지금까지 내려왔을까? 최근에 이 불상의 복원작업이 이루어져 완성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복원작업을 한이유는 이 철불이 본래의 철불 모습이 아닌 금으로 개금이되어 금동불로 되어 있어서 문화유산적 시각에서 볼 때 원형 훼손에 해당되기 때문에 개금된 것을 벗겨 본래으 모습으로 복원하자는 데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2005년 문화재청은 장흥 보림사 철불과 도피안사 비로사나불상을 철불로 환원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복원한 것이라고 하는데, 금박이 벗겨진 철불은 다시 우레탄 같은 특수 코팅이 입혀졌다고 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철불상이 금불상처럼 보인다 하여 원형대로 복원을 하려 하였다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되는 것이 당연하다. 색감이 철불 같다고 하여 투명 우레탄을 뒤집어 쓴 불상이 과연 원형대로 복원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복원 과정에서 철불의 귀가 훼손된 것을 석고로 복원한 것도 알게 되었고 이를 또다시 우레탄으로 복원하였다고 하는데 이또한 복원이란 측면에서 볼 때 옳은 일이었을까?
<비로사나불이 모셔져 있는 대적광전>
보물 223호 3층 석탑. 아래의 연꽃이 새겨진 지지대와 8각의 기단, 그위 상층 연꽃 무늬의 기단은 철조비로사자불의 좌대의 모양과 비슷하게 되어있다. 석탑과 비로사자나불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근거가 될런지도 모른다.
4각 석탑의 기단을 6각 기단으로 만든 것인데 육방, 육합의 의미로 새긴다면 연꽃을 온세상이 바치고 있는 모습이며 그 연꽃 좌대위에 불신이 모셔져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보지만 불심에 관해 문외한인 나의 견해일 뿐이다.
위 불상 사진은 현재 도피안사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는 사진이다. 철좌대에 앉아 있어야 할 비로사자나불의 철좌대는 수미단에 가려져 전모를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안타깝다.
<철조비로사나불의 본 모습>
본 모습이라고 하나 천년을 넘어선 세월 속에 훼손되어진 부분이 석고나 우레탄으로 복원되고 개금된것을 벗겨 복원하는 과정에 투명 우레탄을 입힌 새로운 비로사나불이다. 관연 진정한 복원의 모습일까?
위의 비로사나불의 본 모습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이 철불의 연꽃 으로 만든 3단 철좌대와 3층 석탑의 기단의 몸습이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절 3층 석탑에는 희한한 개구리 한마리가 살고 있다고 한다.
금와라고 하는데 불공을 드릴 때면 나와서 불당을 쳐다보다 들어가는간다하여 이절에선 이 개구리를 금와 보살이라고 부른다.
이 일이 알려지면서 SBS 세상에 이런일이 라는 프로에 소개가 되기도 했다고 하는데 웬만한 정성으로 만나기가 어렵다고 한다.
쵤영진도 이곳에 와서 몇일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돌아가련 때에 금개구리를 만난 것이라고 처사가 귀띰해 주었다.
이를 보기 위해 각지에서 불자들이 모여드는데 쉽게 만나긴 어렵고 여러날 불공을 드리면 만날 수 있다고 한다.
필자가 탑신을 살펴보았는데 틈새가 아주 좁고 낮아서 의하한 생각이 들정도였다.
<필자가 갔을 때는 두 분의 금의 보살님이
믿을 수 없이 작은 탑신의 틈에서 진신을 보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본 믿을 수 없는 것을 보았다는 글로 보아 착한 사람한테만 보여지는 보살일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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