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전 관세음보살 용궁전 용왕신 천년 넘은 느티나무 중 할아버지나무전설에 의하면 영종도 중산 월촌에 사는 윤공이란 어부가 꿈을 꾼뒤 바다에서 작은 옥불을 어망으로 끌어올려 이 절에 봉안하였다고 하며현재 그 옥불은 없고 모조 옥불을 모시고 있다. 인천 용궁사 옥부처와 느티나무 |
바다서 건져올린 불상 관세음보살로 변해
사찰 봉안 후에는 소와 말이 절 앞에서 발 못 움직이기도
‘동북 아시아의 허브’로 불리는 신 공항이 들어선 인천 영종도. 예전에는 인천항에서 뱃길로 건너던 오지 중의 오지였다. 그곳에 영종대교가 개통돼 인천광역시가 국제적인 도시로 발돋음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역사가 없는 섬 같지만 영종도에는 14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사찰 용궁사가 자리하고 있다.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동 667번지. 백운산 중턱에 위치한 용궁사는 신라 문무왕 10년(서기 670)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원래 이 사찰의 이름은 백운사였다고 한다. 산 이름인 백운산을 따라 지은 이름으로 보인다. 이후 구담사로 불리다가 다시 용궁사로 변경됐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사찰답게 경내에는 1000여 년이 넘는 수령의 느티나무가 떡하니 들어서 있고, 울창한 숲이 조화를 이룬다. 이 사찰에는 많은 영험설화가 전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관음전에 모셔져 있었다는 옥부처님과 느티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때는 구담사로 불리던 구한말 이전으로 추측된다. 영종도 앞 마을에는 손 씨라는 어부가 살고 있었다. 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던 손 씨는 인근 섬인 작약도까지 어업을 나가곤 했다. “살아가기도 팍팍하구만. 오늘도 바람 찬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 내다 팔아야하니 말이요.” 손 씨는 몇 시간을 나가 바다에 그물을 내렸다. “어쨌거나 고기가 많이 잡혀 온 가족이 잘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손 씨는 처음 그물을 들어올릴 시간이 되어 사공들과 힘을 합해 어부가를 힘차게 불렀다. “어기어차, 그물을 올려라. 이번 만선 이루어서 우리 어머니 봉양하세/ 어기어차 그물을 올려라. 이번 만선 이루어서 우리 큰딸 시집보내세/ 어기어차, 그물을 올려라. 이번 만선 이루어서 문전옥답 마련해보세.” 드디어 그물이 올려졌다. 묵직했던 그물이라 사공들은 잔뜩 기대했지만 큰 돌덩어리만 올라왔을 뿐 고기는 한 마리도 없었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허탕이었다. 하는 수 없이 손 씨 일행은 뱃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은 재수가 없는가 보네.” 집으로 돌아온 손 씨는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전날 바다에서 본 돌덩어리가 꿈에 나타나 말을 건내는 것이었다. “나는 그대가 바다에 버린 돌 부처요. 나는 원래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대는 왜 알아보지 못하는가. 나를 다시 거져 올려 마을의 태평바위위에 올려 놓으시오. 그러면 이 마을은 크게 흥성할 것이오.” 다음날 손 씨는 일찍 바다로 나가 돌 덩어리를 버렸던 자리에 그물을 내렸다. “다시 그 돌부처님이 올라 올까.” 반신반의하면서 그물을 올리자 돌 부처님이 그대로 올라왔다. 손 씨를 비롯한 어부들을 그 자리에서 절을 하며 부처님을 배에 싣고 영종도로 돌아왔다. “이보시게. 이 부처님은 지난 밤 내 꿈에 나타나 이 태평바위에 모셔두면 마을이 크게 융성한다고 계시를 주었다네.” 손 씨가 자초지정을 이야기하자 다른 어부들도 “나도 그런 꿈을 꾸었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정성을 다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태평바위(현재 백운사 앞 선착장 인근)에 돌 부처님을 모셨다.
돌 부처님을 모시자 마을에서는 신이(神異)한 일이 일어났다. 하루는 마을의 한 아이가 활쏘기를 하다가 그만 돌 부처님의 팔을 맞히고 말았다. 그러자 그 돌 부처님의 팔에서 갑자기 피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 돌 부처님이 피를 흘리신다.” 아이들이 소리치자 하늘에서 약병이 내려와 스스로 돌 부처님의 팔을 치료했다. 순간 돌 부처님은 옥관세음보살님으로 변했다. 그리고 화살로 돌 부처님의 팔을 맞힌 아이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두렵고, 한편으로는 경외심이 일어났다.
“이보게들. 저 옥관세음보살님을 저기 바위에 계속 모셔도 되겠는가.” 급기야 마을에서는 큰 회의가 개최됐다. “우리 마을 뒷산에는 신라시대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서 깊은 사찰 백운사가 있지 않는가. 그곳에 관세음보살님을 모시면 후환도 없을 것이네.” 마을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어른이 제안하자 모두 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런데 이 부처님을 현몽한 손 씨의 생각은 어떻소.” “저도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옥관세음보살은 백운사로 이운하고 관음전에 모셨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입에서 입으로 전국에 전해지며 수 많은 기도객들이 영종도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백운사는 수만평의 전답을 거느린 대찰로 거듭났다. 그리고 처음 돌 부처님을 발견한 손 씨도 큰 부자가 됐다. 그는 바다에 나가기만 하면 만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손 씨가 부처님의 계시를 받고 저렇게 큰 부자가 된 것이야”라며 부러워했다.
느티나무 아래에선 악행한 사람 배 아파 나동그라진 일도 생겨
신이한 일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옥관세음보살님을 모신 백운사를 지나가던 소나 말들이 갑자기 발을 못 떼는 일이 일어났다. 위치는 꼭 백운사를 지나갈 때만 일어난 것이다. “아니 저렇게 멀쩡하던 말이 왜 저러지. 우리 소도 금방까지 멀쩡했는데 여기서는 한발짝도 발을 못 뗀다네. 필시 옥관세음보살님의 신통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야.”
그래서 이 길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은 백운사 앞에 다다르기 전에 말에서 내려서 걸어갔다. 우마차를 타고 다니던 사람들도 모두가 백운사 앞에서는 내려서 절을 향해 합장하고 지나가곤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들도 백운사에 큰 보시를 하고 장사를 나가면 다시 큰 돈을 벌어 들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출현해 백운사 옥관세음보살님이 탐이 나서 싣고 가다가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떨어져 배는 가라앉고 말았다고 전한다. 대신 현재 관음전에는 중국에서 모셔왔다는 목관음보살좌상이 봉안돼 있다.
그 후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백운사는 구담사라는 사찰명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후 흥선대원군이 10여 년 동안 기도를 하고 아들 고종을 얻은 뒤, 사찰 설화를 듣고 ‘용궁사’로 개명했다 고 한다. 현재 용궁사의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호인 ‘석파’가 선명하며 중창기에는 상궁의 이름이 즐비하다. 옥관세음보살님과 더불어 용궁사에는 오래된 느티나무의 영험설화도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도량이 청정하기로 유명한 용궁사 느티나무는 두 그루가 있는데 할아버지와 할머니느티나무로 이름이 붙여졌다. 한번은 마음이 사악한 사람이나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도량을 찾았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또 느티나무 위에 집을 짓고 과거를 준비했던 사찰신도 선조가 과거에 급제해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인천=여태동 기자
▲ 찾아가는 길 1) 서울에서는 영종대교를 지나 들어가는 길이 제일 수월하다. 영종대교를 지나면 화물터미널 방향이 나온다. 이곳에서 곧장 나와 영종, 용유 방향으로 나와 좌회전을 한다. 선착장 방향으로 가다 해수목욕탕을 지나 좌회전 해 들어와 삼거리에서 다시 좌회전해서 들어오면 용궁사 이정표가 보인다. 인천에서는 월미도에서 영종도로 가는 뱃길을 이용하면 된다. (032)746-1361
도움 및 참조: 용궁사 주지 원종스님, <사찰이야기>(미래문화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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