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고달사지와 원종스님 |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신라 경덕왕 23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는 고달사지(高達寺址)가 있다. 일명 고달원지(高達院址)라고 하는 이곳은 지금은 폐사되었지만 광할한 사지에 부도와 석불대좌 등 성보가 즐비하다. 오랜 역사만큼 이 곳에는 창건주인 원종스님과 관련한 이야기 두가지가 전한다.
함흥 살던 ‘고달’ 佛事 매진하다 불문에 귀의
옛날 함흥지방에 효심 깊은 고달이라는 착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체유라는 노모와 달여(達如)라는 아내, 그리고 유달(有達)이라는 외동딸과 함께 가난한 생활에서도 행복하게 지냈다. 고달은 깊은 산속에서 불도를 닦으며 살아 온 석공이었다.
그는 고달사 중건을 위한 석공으로 부름을 받고 불사를 돕기 위해 고달사(高達寺)에 오게 되었다 한다. “내가 없는 동안 유달이와 어머니 봉양을 부탁하오.” 노모와 사랑하는 처자를 고향에 두고 평소 불심이 두텁던 고달은 막중한 역사(役事)를 자기가 맡게 된 것에 더욱 감격하여 훌륭한 작품을 남기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집을 떠났다. 불사 일을 하기에 앞서 고달은 모든 잡념을 없애기 위해 100일 동안 정화수를 떠놓고 부처님께 정성을 들인 후 작업에 임하여 오직 돌을 쪼고 쌓고 다듬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내 반드시 불후의 명작을 부처님 전에 공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고달이 불사에 매진하고 있는 동안 고향에서는 남편 없는 세 식구의 생계를 아내 달여가 꾸려나가기에는 벅찼다. 날이 갈수록 생활은 쪼들리고 마침내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었다. “여주에 불사를 나간 바깥 양반은 언제 오려나.” 달여는 날마다 동구 밖에 나와 남편 고달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다. 하지만 큰 불사를 진행하고 있었던 고달이 돌아오기는 만무했다.
기다림에 지친 달여는 마침내 어린 딸 유달이를 업고 남편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때는 추운 엄동설한이었다. 입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 채 지칠대로 지쳤지만 오직 남편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먼 길을 나선 것이었다. 길을 묻고 물어 지금의 양평에 도착하였으나 추위와 굶주림에 못 이겨 외동딸 유달이가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아이고, 유달아. 이 어미가 너를 잘못 데리고 나왔구나. 먹을 것 못 먹이고, 입을 것 못 입힌 이 어미가 너를 죽게 만들었구나.” 설움에 복받친 달여는 어린 딸의 주검을 안고 울고 또 울었다.
양지바른 곳을 찾아 유달을 장사지낸 달여는 슬픔과 추위에 지친 몸을 이끌고 천신만고 끝에 고달사에 도착했다.
“스님, 이곳에 제 남편 고달이라는 분이 불사를 위해 왔는데 만날 수가 있을까요?” 하지만 고달은 불사를 시작하기 전에 외부와 일체 연락을 하지 말라는 당부가 있어 아내라고 해도 만나게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런 분이 있기는 하지만 불사를 시작하며 일체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해서 지금은 만날 수가 없습니다.” 달여는 애원했으나 거절당했다. 하는 수 없이 고향으로 발길을 돌린 달여는 고달사에서 강북으로 약 10km쯤 떨어진 지금의 대신면 보통리(大神面 甫通里) 강가에서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한을 품은 채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다.
3년간의 불사를 마친 고달은 노모와 처자를 찾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노모는 돌아가신 후 고 아내와 딸은 남편을 찾아 1년 전에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처자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찾아 나섰다. 하지만 외동딸인 유달이는 지금의 양평에서 죽고 아내인 달여는 객사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만 실신하고 말았다. “왜 이렇게 허망하게 가 버렸단 말이오. 이 세상사가 이렇게 허무할 줄 알았다면 태어나지도 말았을 것을….” 아내와 딸의 무덤을 찾아 정성껏 제사를 지낸 고달은 그 길로 고달사에서 스님이 되었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고달스님은 9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불도에만 전념, 죽은 아내와 딸의 명복을 빌었다고 전한다. 지금의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에는 ‘원통’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곳이 고달이의 아내 달여가 원통하게 죽었다 하여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고달의 지극한 정성으로 불사를 완성하였다 하여 석공 고달의 이름을 따서 사명(寺名)을 ‘고달사’라 불렀다고 한다.
장사 태어날 땅에 사찰 창건해 크게 ‘융성’ 지역관료의 잘못된 욕심으로 퇴락 길 걸어
고달사를 창건한 원종스님(본명이 고달이라 전한다)은 절을 창건하기 위하여 각처를 돌아다니며 절터를 물색하고 전국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 행치고개(처음에는 행차고개라 부름)라고 불리는 곳에 와서 피로를 풀다가 마을의 산세를 보니 자기가 늘 염원하던 곳과 같은 절터였다. 그런데 그곳 지형이 예상과는 달리 계곡이 99개의 골인지라 이상히 여겨 다시 마을에 내려와서 자세히 세어보니 100개의 골이 분명했다. “앞으로 이곳에는 장사(壯士)가 태어날 것이야. 그리고 장차 나라를 위한 큰 재목이 될 것도 분명해.” 스님은 자신의 본명을 본따 사찰 이름을 ‘고달사’로 정했다.
원종스님이 사찰을 창건하자 소문을 듣고 각처에서 스님과 신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고달사 마을 앞에서 500m쯤 되는 곳 논 가운데 높이 20m 내외의 조그마한 산이 있으니 이 산을 ‘신털이 봉’이라 불렀다.
고달사 스님들이 전국에 시주를 받아 해질 무렵 고달사 입구에 도착하면 피곤하여 이곳에서 쉬면서 신을 턴 곳이라 해서 불린 명칭이라고 한다. 고달사가 번창하자 전국에서 고승이 자주 다녀갔다. 어느 날 고달사를 찾은 한 고승이 이 절에서 정진하고 있는 여자 신도 한 사람을 보니 그 상이 수도를 그만두고 속가에 가서 결혼을 하게 되면 삼정승을 낳을 사람이 분명했다. 천안통으로 살펴보니 그 여인의 배필은 장차 고달사에서 태어날 장사였고 그 사이에서 태어날 후손은 나라를 위해 큰 인물이 될 사람이었다. 절세의 인물을 본 고승은 고달사를 떠나 여흥(현재 여주)목사 사가에 가서 하룻 저녁을 유숙하게 되었다. 때마침 저녁에 목사와 함께 차담을 나누던 중에 여흥목사가 아들의 혼처를 근심하고 있었다. “훌륭한 혼처가 있으나 그 규수는 장차 고달사에서 태어날 장사와 혼인하여 나라의 큰 인물을 생산할 사람이라….”
그 고승은 혼처가 있으나 곤란하다고 하였으나 여흥목사는 자신의 후손을 훌륭하게 만들고 싶은 심사에 계략을 꾸몄다.
그는 장차 고달사가 있는 마을에서 태어날 장사가 태어날 시간에 관졸을 보내 목을 베어버렸다. 그리고는 목이 붙지 않도록 재를 뿌려 장사가 죽게 만들었다. “이제는 저 규수는 내 며느리가 되어 나라를 위해 일할 큰 재목이 될 것이야.”
한편 고달사의 원종스님은 장사가 출생하기 전날 밤 혼미한 중에 꿈을 꾸었다. 장사가 출생하자 관졸에게 죽는 꿈이었다. “이상하구나.” 원종스님은 밖으로 나와 하늘의 기운을 보니 자신이 꾼 꿈이 사실이었다. “아니 저 여흥목사가 큰 일을 저지르고 말았구나.” 원종스님은 급히 장사가 태어날 장소에 가보니 자신이 꾼 꿈과 같이 관졸이 태어난 장사의 목숨을 거둔 뒤였다. 이상한 일은 더 있었다. 장사의 태생을 알았는지 고달사의 여자 신도가 갓 태어난 장사의 목을 끌어안고 통곡하며 함께 죽어 있었다.
“아, 저 어리석은 여흥군수의 욕심으로 인해 천기가 달아나 버렸구나.”
이같은 일이 있자 원종스님은 고달사로 돌아와 여러 스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내가 이 절을 창건한 연유는 이곳에서 장차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인재가 있었기 때문이요. 지금껏 그 일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한 욕심많은 사람에 의해 그 일이 수포로 돌아갔소. 이 길로 소승은 고달사를 떠나려 하오. 대신 이곳에서 태어나려 했던 장사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천도재를 잘 지내주세요.” 원종스님이 떠나면서 당부의 말을 하자 남은 대중들은 고달사 마을에서 동쪽으로 1km쯤 떨어져 있는 수리바위에 재물을 올려 놓고 북바위에서 북을 치고 진잠바위(징바위)에서 징을 치며 장사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하지만 장사의 원혼이 너무나 억울했던지 이후 고달사 마을에서는 흉년과 기근이 계속됐고, 융성했던 고달사도 사세가 기울면서 결국 폐사되고 말았다.
여주=여태동 기자
찾아가는 길 / 영동고속도로 여주 나들목에서 나와 북내면 이정표를 따라 들어온다. 북내면 소재지에 오면 고달사지 이정표가 보이고 그 길을 따라 내룡리 혹은 주암리로 와서 두 번 좌회전하면 고달사지 옛터가 나온다. 옛터 위에는 조계종 고달사가 있다. 조계종고달사(031)884-2922
참고 및 도움: <여주군사>, 고달사 주차장 매점 원정희할머니(71) |
'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성 청룡사와 바우덕이 (0) | 2009.11.12 |
---|---|
안성 칠장사 금바가지와 유과공양 (0) | 2009.11.12 |
인천 용궁사 옥부처와 느티나무 (0) | 2009.11.12 |
평택 심복사 비로자나부처님 (0) | 2009.11.12 |
원효스님 오도성지 평택 수도사 (0) | 2009.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