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안성 칠장사 금바가지와 유과공양

백련암 2009. 11. 12. 15:42

안성 칠장사 금바가지와 유과공양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번지에 위치한 칠장사.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진덕여왕 2년(646)에 창건했으며, 고려시대

혜소국사가 크게 중창했다.

칠장사에는 병해대사에게 글과 무술을 배운 의적 임꺽정 이야기를 비롯해 창건주 혜소국사의 도적 교화, 나한전 기도로 장원급제한 어사 박문수의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어사 박문수 나한전서 기도하고 장원급제 

창건주 혜소국사 7명 도적을 교화시키고  의적 임꺽정 스승위해 목조부처님 ‘조성’


#1 예전에 칠장사가 위치한 칠현산(七賢山)은 아미산으로 불렀다. 사찰 이름도 ‘칠장사(七長寺)’ 대신 ‘칠장사(漆長寺)’로 불렀 

     다고 한다.

     사찰명이 칠장사(七長寺)로 고쳐지고 산이름도 칠현산으로 불린 연유는 일곱명의 도적을 교화시킨 혜소국사의 설화에서

     기인한다.

시기는 고려시대(11세기경)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칠장사에는 법력이 뛰어난 고승인 혜소국사가 주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칠장사 인근에는 악명 높은 도적이 일곱 명 숨어 살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밤에 몰래 절에 들어와 물을 마시려다

보니 물바가지가 순금으로 되어 있었다. “이게 웬 떡이냐.”
도적은 금 바가지를 훔쳐서 동료들에게 자랑했다. “저기 칠현사에 갔더니 금 바가지 있지 뭐야. 그래서 내가 냉큼 가지고 왔지. 자네들은 보기나 했나. 이런 금 바가지를 말이야.”

도적들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절에 금 바가지가 있었단 말이야. 그거 정말 신기하구만.” 다음날 도적 가운데 한 명도 칠장사로

숨어 들어왔다.

“우물이 어디 있더라. 그리고 금 바가지는 어디 있더라.”

사찰 경내를 배회하던 도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저거야. 나도 드디어 금 바가지를 가질 수 있게 됐다. 야호!” 도적은

쾌제를 부르며 금 바가지를 가지고 도망쳤다. 다음날 또다른 도적도 금 바가지가 탐이 나서 사찰에 숨어들어왔다.

“아니, 다른 친구들도 금 바가지를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나라고 못가질 것 없잖아. 나도 절에 가서 금 바가지 하나 가져와야지.”
세 번째 도적 역시 칠장사로 들어와 우물을 찾기 시작했다.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어슬렁 어슬렁 사찰 경내를 돌아다녔다.

“옳지. 저기 우물이 있구나. 어서 빨리 금 바가지를 훔쳐 가야겠다.” 도적이 우물에 가 보니 역시 금빛이 찬란한 바가지가 둥둥 떠 다니고 있었다.

다음날 네 번째 도둑, 그 다음날 다섯 번째 도둑이 금 바가지를 하나씩 훔쳐 왔다. 결국 7명의 도적이 하나씩 금 바가지를 갖게 되었다.

“야 정말 멋있는 금 바가지야.”

모두들 자기들이 훔쳐 가지고 온 금 바가지를 얼싸 안고 도적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내 바가지 금 바가지. 이 세상에 제일 귀한 보물이지.”

시간이 흐르자 일곱 도적들은 또다른 욕심이 생겼다. “하나만으로는 부족해. 나는 두개의 금 바가지를 가져야겠어.”

각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칠장사로 숨어들어 금 바가지를 훔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도적들이 매일 금 바가지를 훔쳐 가는데도 어김없이 절에는 금 바가지가 있는 게 아닌가.

도적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자신들이 훔쳐서 감춰놓은 온 금 바가지를 확인하기 위해 비밀창고 문을 열었다.

“아니, 내가 훔쳐온 금 바가지가 없어졌어.” 다른 도적들도 자기들이 숨겨놓은 곳을 확인해 보니 감쪽같이 금 바가지가 사라지고

 없었다.

깜짝 놀란 도적들은 혜소국사의 도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절에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칠장사 이름도 일곱 명의 도적을 제도했다는 의미를 실어 칠장사(七長寺)로 고쳤다고 한다.

사찰이 위치한 아미산도 칠현산(七賢山)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7명의 도적은 나중에 성현이 되어 7명의 나한이 되었다고

한다. 

#2  조선시대 때 암행어사로 유명했던 박문수는  태어날 때부터 불교와 인연이 있었다. 

부친박문수의 아버지는 늦게까지 자식이 없자 아들을 낳겠다는 일념으로 100일 기도를 발원했다.

때마침 어떤 스님이 찾아와 말하기를 기도는 절에서 하지 말고 집에서 문수보살을 생각하며 하라고 했다. 그래서 99일 동안을

날마다 하인을 시장에 내보내 스님 한 분씩을 모셔오게 해서 공양을 올리며 기도를 했다.

 

100일째 되는 날은 정성스럽게 공양을 준비하고 스님을 모시러 간 하인이 혼자 돌아왔다.

“어째서 스님을 안 모시고 너만 왔느냐?”

“스님이 한 분도 안 보입니다.”

“스님이 안 계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 좀 더 찾아볼 일이지.”

“한 분이 계시긴 했는데 좀 거북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그 스님이 문둥병 환자였다는 것이다. “병이 너무 깊어 몸 전체에서 고름이 뚝뚝 떨어지고, 턱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침이 줄줄 흐르는 스님이었습니다.”

그러자 박 어사의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했다. “스님을 모셔오라고 했지 누가 문둥이를 보라고 했느냐?”

결국 하인은 스님을 모셔왔고 정성껏 공양을 올렸다. 스님은 아무 말 없이 공양을 받아 먹었다. 박 어사 부부는 “이렇게 저희들이 마련한 공양을 받아 주셔셔 감사합니다”라며 인사를 올렸다. 문둥병을 앓고 있던 스님은 고름을 뚝뚝 흘리며 밖으로 나갔다.

대문을 넘어서자 스님의 고름은 연꽃으로 변하며 문수보살의 모습을 띠며 하늘로 올라갔다.

박 어사 부부는 곧 새 생명을 잉태하게 되었고, 이름을 ‘박문수’로 지었다.

과거 때가 되자 박문수는 집을 꾸려 한양으로 향했다. 이곳 저곳에 숙식을 하던 중 하루는 칠장사에 하룻밤을 머물게 됐다.

이미 칠장사 나한전은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들이 기도를 많이 해 급제했다는 영험이 전해지던 유명 기도처였다.

박문수는 조심스럽게 어머니가 만들어 준 조청유과를 나한전에 올리며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이번 과거시험에 출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기도를 마친 박문수는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칠장사의 나한인데 당신의 기도를 들어주기 위해 왔소.”

깜짝 놀란 박문수는 그저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어떻게 저의 소원을 들어주시려는지요?”

“며칠 후 그대가 한양에 도착해 과거 시험을 볼 때 시제가 있을 것이요. 그 시제를 보여줄 터이니 잘 기억하시오.”

나한님은 하얀 종이와 붓을 꺼내 시제를 써 내려갔다. 깜짝 놀란 박문수는 잠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본 시제가 또렷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이상하구나.”

며칠 후 과거시험장에 들어간 박문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이럴수가. 며칠전 칠장사 나한님이 알려준  시제가 그대로 나왔구나.”

어려움 없이 시제에 따라 문제를 푼 박문수는 장원급제할 수 있었다. 그의 나이 32세 때였다. 돌아오는 길에도 박문수는 칠장사에 들러 유과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몽중등과시(夢中登科時)’의 설화 내용이다.

이후 박문수는 암행어사를 시작으로 병조정랑, 경상도 관찰사, 병조판서, 어영대장, 호조판서, 우참찬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목민관으로서의 명성을 날렸다.

칠장사에는 요즘도 각종 시험을 앞둔 수험생과 수험생 자녀들이 나한전을 찾는 기도객이 줄을 잇고 있다.

칠장사에는 임꺽정이 스승을 위해 조성했다는 목불(일명 꺽정불)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신라 47대 협안왕 서자인 궁예가 10살때까지 칠장사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활연습을 했다는 설화도 흥미롭다.

찾아가는 길 /

중부고속도로 일죽 나들목에서 나온다. 38번 국도로 안성시내 방향으로 2km정도 나오다 칠장사 방면

이정표가 나온다. 이곳에서 내려와 좌회전을 해서 17번 국도를 따라 2km정도 다시 내려와 안성 컨트리클럽을 지나면 우회전 방향으로 칠장사 이정표가 나온다.

그곳에서 약 2km들어오면 칠장사다. (031)673-0776

안성=여태동 기자

 

참고 및 협조: 칠장사 홈페이지, 칠장사 주지 지강스님, <사찰이야기>(미래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