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상원사와 문수보살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에 위치한 상원사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오대산은 중국의 오대산처럼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자리’로 알려져 있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인 효명왕자가 오대산에 들어와 차를 달여 문수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다가 서라벌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니 효소왕이었다.
그는 재위 4년때인 696년에 지금의 상원사터에 ‘진여원(眞如阮)’을 창건하여 문수보살상(문수동자좌상)을 봉안했고 20년 후에는 동종(국보 제36호)을 조성했다.
한강의 발원지인 ‘우통수’가 인근에 위치하기도 한 상원사는 문수보살의 가피(加被) 영험이 전하는 기도도량으로 이름이 높다.
조선시대 세조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진여원을 중창하고 문수보살상을 조성해 원찰(願刹)로 삼은 이야기와 효명왕자의 설화는 지금도 생생하게 대중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신라 효명왕자 공양 올리고 보위에 오르다
조선 세조, 문수동자 친견…난치병 고쳐
고양이 도움으로 자객의 피살음모 면해
신문왕의 두 왕자 보천과 효명왕자는 일찍이 세속 일에 뜻을 두지 않고 수행자로 살기 위해 오대산으로 향했다.
“우리 형제 이제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평생 수행하며 생사해탈을 이뤄보자.” “네, 형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순간이고 허망한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오대산에서 자연을 수행의 도반으로 삼아 반드시 견성해 윤회의 사슬을 끊겠다고 발원을 했습니다.”
두 형제가 오대산에 이르렀다. 갑자기 땅에서 연꽃이 피어오르며 형 보천이 있던 자리에 암자가 지어졌다. 보천왕자가 말했다. “나는 이 암자이름을 보천암이라 정할 것이네.” 말이 끝나자 암자의 현판에는 ‘보천암(寶川庵)’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보천암에서 남쪽인 효명왕자가 있던 곳에도 연꽃이 피어났다. “형님, 제가 기거할 암자는 ‘효명암(孝明庵)’이라 이름 짓겠습니다.” 그러자 역시 효명암의 현판이 암자에 걸렸다.
두 형제는 아무 부족함 없이 오로지 일심으로 생사해탈을 위해 정진에 정진을 할 따름이었다. 하루는 두 형제가 오대산 봉우리에 올라갔다.
그런데 동쪽 편 만월산에 1만의 관세음보살 진신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아, 황홀하구나. 우리의 기도가 관세음보살님을 감동시켰나보다. 이렇게 우리 앞에 나타나 주시니 말이야.”
두 형제는 다시 남쪽 기란산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1만의 지상보살이 나타났다. 서쪽 장령산에는 1만의 대세지보살님이, 북쪽 상왕산에는 500나한이 나타났다. 가운데인 중앙의 지로산에는 1만의 문수보살이 나타났다.
환희심에 경탄한 두 형제는 현재의 상원사(진여원)에서 매일 문수보살에게 참배하고 예를 올렸다.
문수보살은 36가지의 형상으로 나타나 기도 하다가, 다시 수백, 수천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두 형제는 감로수를 길러 차를 달여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두 왕자가 떠난 신라 왕실에는 권좌를 둘러싼 골육상쟁이 벌어졌다.
신문왕의 아우는 왕의 두 왕자가 세속의 일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자 마치 권력을 잡은 것처럼 세력을 규합하며 왕위를 넘보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신하들은 오대산에서 수행하고 있는 두 왕자들을 왕위에 모시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하여 군사 500을 거느리고 오대산으로 향했다. 이 사실을 안 형 보천왕자는 자리를 피해 버렸다.
신하들은 하는 수 없이 차선책으로 효명왕자에게 간청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니 그가 바로 효소왕이 되었다. |
'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주 구룡사 거북바위와 아홉 마리 용 (0) | 2009.11.12 |
---|---|
평창 월정사와 전나무숲 (0) | 2009.11.12 |
안성 청룡사와 바우덕이 (0) | 2009.11.12 |
안성 칠장사 금바가지와 유과공양 (0) | 2009.11.12 |
여주 고달사지와 원종스님 (0) | 2009.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