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원주 구룡사 거북바위와 아홉 마리 용

백련암 2009. 11. 12. 22:22

원주 구룡사 거북바위와 아홉 마리 용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1029번지에 위치한 구룡사는 지금부터 약 1300여 년전인 신라 문무왕 6년(666)에 의상스님에 의해 창건했다고 전한다.

중국 유학을 마치며 신라의 전 국토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겠다는 원력을 세운 스님은 강원도 원주땅에도 도량을 건립하

리라 마음먹고 터를 물색하다가 관서지방의 거산(巨山)인 치악산을 향했다.

 

계곡이 울창하고 물길이 힘찬 구룡골에 접어 들어 스님은 발길을 멈췄다.

       

의상스님, 신통력으로 용들을 항복시키다

                

 연못 메운 자리에 절 세우고 ‘九龍寺’ 명명  거북바위 쪼개 쇠락해지자 ‘龜龍寺’로 바꿔

          

“과히 명당이로구나. 백두대간의 주맥이 오대산을 거쳐 서쪽으로 태기산을 지나, 치악산에 이르고 있어. 이곳은 천년이 지난

신령스러운 거북이 연꽃을 토하고 있고, 영험한 아홉 마리의 용이 구름을 풀어 놓는 형상을 한 천하의 명당이야.”

 

스님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동쪽으로는 주봉인 비로봉이 우뚝 솟아 있어 커다란 기운을 형성하고 있고 다시 천지봉에서 떨어지

는 산맥의 기운이 앞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구룡골 계곡의 수량도 풍부하고 울울창창한 수목들이 뿜어내는 경치도 좋았다. “이곳에 도량을 세우면 능히 천년은 넘게 불연

(佛緣)이 이어질 게야.”

 

의상스님은 가만히 터를 훑어보다가 깜짝 놀랐다.  도량이 들어서기 어려운 장애가 나타난 것이다.

“어허, 큰일이로고. 대웅전이 들어서야 할 자리에 연못이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문제는 더 있었다. 그 연못에는 오래전부터 아홉 마리 용들이 하늘로 승천하지 못하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의상스님은 큰 뜻을 위해 작은 뜻은 접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연못을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연못 속에 살고 있던

아홉 마리의 용들도 적극적으로 항거하기 시작했다.

 

“스님, 너무하십니다. 저희들은 미물에 불과하오나 지금까지 승천의 꿈을 꾸며 이곳에서 살고 있었는데 연못을 메우려하다니요.

 더구나 스님은 부처님의 자비심을 가르치는 분이 아니십니까.”

 

의상스님은 단호했다. “어찌하겠느냐.

 

부처님의 도량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를 너희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자리를 양보하고 다른 곳에 가서 살도록 하여라.”

 

자신들의 터전을 빼앗길 위기에 빠지자 용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용들은 온갖 도술을 부리며 의상스님의 의도를 막으려 하다

가 결국 의상스님에게 제안을 했다.

 

“우리 서로 내기를 해서 우리가 이기면 대사가 이곳에 절을 못 지을 것이요, 지면은 선뜻 자리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의상스님이 동의하자 용들은 연못에서 날아 하늘로 치솟더니 청천벽력과 함께 우박 같은 장대비를 쏟아놓았다.  

삽시간에 계곡이 넘쳐 스님이 있는 곳까지 잠겨버렸다. 이 바람에 근처의 산들은 삽시간에 물에 잠기고 온통 물난리가 났다.

 

그러나 의상스님은 용들의 계략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비로봉과 천지봉 사이에 배를 띄워 놓고 그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만하면 스님은 이미 물귀신이 됐거나 물고기 밥이 되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야.” 용기가 탱천한 용들은 의상스님의 시신이라도 거두겠다는 생각으로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배 위에서 유유히 노닐고 있는 스님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것입니까.”

 

의상스님은 깊은 단잠에서 깨어난 듯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그러면 이번에는 내가 재주를 부려 볼까.”

 

스님은 붓과 경명주사를 꺼내 부적 한 장을 그려서 아홉 마리 용들이 살고 있는 곳에 집어 던졌다.

그러자 연못이 갑자기 부글부글 끊기 시작했다.

 

“아이고 뜨거워라.  연못 바닥에 화산이 폭발한 것 아니야?  여기에 남아 있다가는 익어버리고 말거야. 빨리 도망가자.”

용들을 오랫동안 머물고 있던 정든 연못을 빠져 나와 바삐 동해바다로 달아났다.

 

뜨거운 물에 쫓겨 달아나던 용들은 얼마나 다급하게 꿈틀거렸던지 구룡사 앞산에는 여덟 개의 골짜기가 생겨났다.

 

그 중 눈이 멀어 미쳐 도망가지 못한 용 한 마리는 대웅전 옆의 ‘소(沼)’에 숨어 들었다. 훗날 이 용은 큰 장마를 만나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며 그 자리를 ‘구룡소’라고 부른다.

 

의상스님은 용들이 달아나자 대사는 연못을 메우고 사찰을 창건한 뒤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뜻을 넣어 절 이름을 ‘구룡사

(九龍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구룡사는 당시 ‘아홉구(九)’를 쓰는 사찰이름 대신 ‘거북구(龜)자’를 쓰게 되었다.

 

거기에 얽힌 설화도 전한다.

 

구룡사는 수행도량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오랜 시간이 흐를수록 흥망성쇠를 달리했다. 더욱이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불교가 배척

당해 어려움이 더 컸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궁중에서 치악산에서 나는 산나물을 공출하자 구룡사 스님들이 공납책임을

맡으며 민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구룡사 스님들이 치악산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소정의 뇌물이 오갔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산나물을 모으는 과정에서 스님들이 개입하면서 뇌물을 받는 일까지 생겼다.

 

결국 사찰은 일반 민중들과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사찰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그때 한 노스님이 나타나 한탄조로 말했다. “구룡사는 물질적으로 풍성하기는 하나, 수행도량으로서 운은 다 되었소.

 

그러니 이곳에 머무는 스님들도 하루빨리 도량을 떠나야 할 것이오.” 구룡사에 머물던 대중들은 덜컥 겁이 났다.

가뜩이나 어려운 시기에 절을 떠난다는 것은 설상가상의 어려움이 닥친다는 것과 같았다.

 

“무슨 방법이 없습니까?” 그러자 노스님은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만”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게 무엇입니까?” 다급해진 구룡사 스님들이 다그쳤다.

 

“지금 구룡사가 어려움을 겪고 것은 절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 바위를 없애버리면 지금의 쇠락 기운은 멈춰질 수 있을 것이오.”

 

사찰 스님들은 석수쟁이를 불러 재빨리 거북바위를 반으로 갈라 버리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구룡사의 사세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가난에 쪼들린 스님들은 하나 둘씩 사찰을 떠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른 노스님이 사찰을 지나가다가 구룡사 주지스님을 찾아 질문을 했다. “과거 이 절 앞에 거북바위가 있지 않았습니까?”

 

“네, 그런데 스님은 어떻게 과거의 일을 잘 알고 계시는지요?” “

이 절이 왜 이렇게 쇠락하는지 주지스님은 모르고 있군요.” “그게 무슨 말인지….”

 

노스님은 찬찬히 말을 이었다. “원래 이 사찰은 절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거북바위가 기운을 지키고 있었소.

그런데 누가 이 바위를 쪼개버려 혈맥을 끊어버렸으니 운이 막혀 버렸소.”

 

주지스님은 노스님에게 물었다.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거북바위의 맥은 끊어져 버렸으니 다시 살린 수는 없지요. 대신 죽은 거북의 이름을 살려서 사찰이름을  구룡사(龜龍寺)로

  바꾸면 분명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구룡사 주지 스님은 사찰현판을 노스님이 시키는 대로 바꾸자 기울었던 사세는 점점 살아났고 다시 대찰을 이루면서 천년고찰

의 형태를 갖출 수가 있었다.

2008년 10월 현재 구룡사에는 주지 원행스님이 부임해 불교대학을 왕성하게 운영하며 지역불교를 활성화 시키고 있으며,

한국불교의 전통을 알리는 템플스테이를 운영해 전국에서 찾고 있다. 

 

찾아가는 길 /

영동고속도로 새말나들목을 나온다. 우측으로 돌아 진행하다가 원주방향으로 다시 우회전하면 놀이공원이 나온다.

이곳에서 구룡사 이정표를 따라 들어오면 구룡골이 나오고 구룡사 주차장이 나온다. (033)732-4800

 

참고 및 도움: 구룡사 홈페이지, 구룡사 주지 원행스님, 원주불교대학실무자 최상순 씨

 

원주=여태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