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굴산사지범일스님, 신라 땅에 정취보살을 모시다 |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위치한 굴산사지 당간지주. 과거 구산선문의 당당한 위용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당나라서 ‘짝귀스님’ 예시 받고 귀국 양양에서 ‘보살상’ 찾아 낙산에 봉안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는 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였던 사굴산문의 본거지였던 굴산사지가 있다. 사적 제448호로
지정된 굴산사지에는 보물 제85호인 부도(浮屠), 보물 제86호인 당간지주(幢竿支柱), 강원문화재자료 제38호인 강릉 굴산사지 석불좌상 등이 남아 있다. 이곳은 사굴산문을 연 범일(梵日)국사에 대한 재미있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다.
당나라 명주에서 개국사 낙성대법회가 봉행됐다. 이 자리에는 당나라는 물론 신라의 고승대덕을 비롯한 수 만명의 사부대중이
동참했다. 당나라 명주에서 수행정진 중이었던 신라국 범일스님도 주요 내빈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법회가 끝나갈 무렵 끝자리 한 켠에 앉아 있던 이름 모를 스님이 범일스님 곁으로 다가왔다.
“스님께서는 혹여 신라국에서 오시지 않으셨는지요?”
“예, 소납은 신라국에서 왔소이다만….”
범일스님은 순간 멈칫했다. 스님의 왼쪽 귀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세상에 한쪽 귀 없이
태어난 것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이름 모를 스님은 범일스님에게 깍듯한 예를 갖추고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 “제가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소납에게 말씀해 보시지요.” 귀 한쪽이 없는 ‘짝귀스님’은 자신도 신라국에서 왔다며 말문을 열었다.
“소납도 신라의 접경지인 익령현(현재의 양양)에 있는 ‘덕기방’이라는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부탁하고 싶은 말은 스님께서
귀국하시면 꼭 한번 제가 사는 마을을 찾아 달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지금 당장 말씀드릴 수가 없음을 이해해 주십시오.”너무도 정중하게 부탁하는지라 범일스님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청을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스님께서 제가 사는 마을에 오시면 반드시 커다란 부처님과의 인연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수 많은 중생들의 복밭을 일군다고 생각해 주시고, 저의 청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소납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짝귀스님은 비록 정상인과 같지 않았지만 자비스런 풍취를 느낄 수 있었다. 더욱이 같은 고국에서 온 스님이니 나중에 꼭 한번
찾아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귀국하면 꼭 찾아가겠으니 그때 뵙지요.”
범일스님은 여러 조사와 스승을 찾아 공부하다가 염관 제안선사로부터 법기(法器)임을 인정받고 의발을 전수받은 후 신라로 돌아와 굴산사를 창건했다. 중국에서 법을 받았다는 소문에 신라에 알려지자 전국에서 법을 청하는 대중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산사는 범일스님의 법향이 가득했다. 그러다보니 중국 당나라에서 만났던 ‘짝귀스님’을 찾아가겠다던 약속은 계속 미루어졌다.
“꼭 한번 찾아가 봐야 할 텐데….”
그렇게 10여 년이 훌쩍 지나갔다. 하루는 스님의 꿈에 꼭 10여 년 전에 당나라에서 만났던 그 짝귀스님이 나타났다.
“스님, 저 와의 약속을 잊어버리신 겁니까.”
범일스님은 깜짝 놀랐다. “아! 죄송합니다. 스님. 약속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데 귀국 후 일과가 너무 바빠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렇게 됐습니다.” 너무나 황망한 범일스님은 무척 미안했다. “제가 수 일 내로 시간을 내겠습니다.”
짝귀스님은 대답했다. “도량을 일구시어 중생제도하시는 일도 중요하지만 소납을 꼭 한번 찾아오셔서 부처님과의 인연을 짓는 것도 중요하니 꼭 한번
들러 주시지요. 소납은 계속 ‘덕기방’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짝귀스님은 그때서야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 소납은 빠른 시일 내에 만나 뵙길 바라면서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범일스님은 마치 현실에서 겪은 듯 생생하기만 했다.
“그래.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니 지금이라도 실행해야겠어.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 살면서도 내가 무심했지.”
날이 새자 시자를 동행한 범일스님은 양양으로 향했다. 출발 당일 저녁이 되어 범일스님은 낙산사 아랫마을에 머물게 됐다.
숙소에 머물면서 마을 앞을 지나가는 여인이 있어 덕기방이라는 곳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러자 여인은 스님 앞에 와서 공손히 예를 올리며 말했다. “저는 덕기방이라는 지명은 모릅니다.
하지만 제 딸의 이름과 꼭 같으니 신기하기만 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도 있다고 생각한 범일스님은 덕기라는 딸 아이에 대한 자세한 상황을 물어보았다.
“제 딸은 올해 8살이 됐습니다.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범상치 않다는 생각을 했는데 자라면서도 이상한 행동을 했습니다.”
“이상한 일이라니요?”
“예, 덕기는 마을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틈만 나면 남쪽에 있는 시냇가에 가서 혼자 놀다가 오곤 했어요.
거기서 무엇을 했냐고 물어보면 금색동자랑 재미있게 놀았다고 하면서 신이 난듯 이야기를 해요.”
“금색동자랑 놀아요?” “네, 자기와 놀아주는 금색동자는 몸이 황금색이라고 해요.”
“허허. 참으로 이상한 일이군요.” 범일스님은 한참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궁금증이 더해졌다.
“제 딸은요 스님. 날마다 금색동자와 놀면서 글도 배운다고 하네요.”
순간 범일국사는 직감이 왔다. “범상치 않는 일이로고. 이 보시오 부인. 내가 부인의 딸을 한번 만나 볼 수 있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범일스님은 부인이 인도해 주는 집으로 가서 딸 아이를 만났다.
“이름이 덕기라고 했니?” “네, 스님.”
“그렇구나. 그러면 덕기가 같이 노는 금색동자를 함께 만나볼 수 있을까?” 덕기는 스님 일행을 시냇가로 인도했다.
시냇가 돌다리 근처 아래에 도착해 덕기는 손가락으로 물 밑을 가리켰다. “저기요!”
그곳에는 황옥석의 돌부처가 물빛에 어렸는데 범일스님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돌부처님의 한쪽 귀가 없어. 필시 당나라에서 본 짝귀스님과 똑같아.”
당나라 개국사 낙성식에서 만난 짝귀스님을 꼭 닮은 모습의 돌부처를 본 범일스님은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물속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보시오, 범일스님. 나는 정취보살이오. 이곳에서 오랫동안 스님을 기다렸으니 나를 어서 낙산사로 옮겨 주시구료.
그곳에는 내가 앉을 자리가 있을 것이오.” 범일스님 일행은 물속에서 돌부처를 건져 올렸다. 모시고 낙산사에 이르니 관세음보살 옆에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 빈 좌대에 안치시키니 보살상에 꼭 맞게 미리 만들어 놓은 듯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하게 맞았다.
정취(正趣)보살은 ‘극락 또는 해탈의 길로 빨리 들어서게 한다는 보살’로 ‘다른 길로 가지 않는다’, 또는 ‘목표를 향하여 묵묵히
걸어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무이행보살(無異行菩薩)’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 설화는 일연스님이 신라스님이 정취보살을 신라에서 만나게 된다는 점을 부각시켜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으로 추측된다.
범일스님은 신라 문성왕대(839~856)에 활동한 스님으로 ‘국사’에 오를 만큼 법력이 높았으며 굴산사의 개조가 되어 ‘굴산조사’라
는 칭호까지 얻었다. 여태동 기자
찾아가는 길 /
1) 영동고속도로 강릉 나들목에서 나와 남대천 물이 길과 함께 나란히 가다보면 오른편으로 관동대학 안내 간판을 따라 꺾어
들어가면 들판이 펼쳐진다. 너른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커다란 당당한 당간지주가 눈에 들어오는데 이 일대가 구정면학산리로 굴산사지다. 참고 및 도움 /
<삼국유사>, 강릉 현덕사 주지 현종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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