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북도 = 나를 찾아서...

서산 부석사

백련암 2011. 4. 12. 01:57

서산에 가면 부석사가 있다. 부석사하면 우리는 흔히 영주 부석사를 떠올린다. 간혹 서산 부석사에 와서 무량수전을 찾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서산 부석사와 영주 부석사는 사찰명만 같은 것이 아니다. 사찰의 창건설화도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에 얽힌 이야기로 내용이 같다.

부석사 전면 바다에 부석도 보인다. 어찌된 일일까? 자못 궁금증을 자아낼 수 밖에 없다.

 

서산 "부석사,는 경북영주의 부석사와 이름이 같아 혼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곳 부석사는 영주에 부석사처럼 유명하거나

규모가 큰 사찰은 아니지만, 그 창건설화와 역사는 영주의 부석사와 똑같이 전해지는 쌍둥이 절이다.

 

주경(宙耕) 스님은 올해로 10년 째 부석사 주지 일을 맡고 있다.

1986년 수덕사로 출가해 설정(현 방장) 스님을 은사 스님으로 모셨는데, 법명을 내리며 하신 말씀이 "우주를 갈아엎는 큰 일꾼이 되라"는

것이었다 한다. 해인사 승가대(1989~92년)에서 수학할 때는 입승(立繩ㆍ학생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입승이란 목수들이 쓰는 먹줄을 의미하는 용어로 학인승들의 규범을 세우고 화합에 앞장서야 하는 자리라고 한다. 

 

안면도 가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부석사’라고 쓴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서산 부석사는 677년(문무왕 17)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영주 부석사가 676년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니 그 1년 후 지어진 셈이다. 영주 부석사에는 선묘설화가 내려오는데, 의상대사를 흠모한 선묘라는

여인이 용이 되어 절의 창건 방해세력들을 무찌른다는 내용이다.

큰 바위를 세 차례나 공중에 들었다 놓았다 반복하며 겁을 주었고, 거기서 ‘뜬 바위’라는 뜻의 ‘부석(浮石)’이 유래되었다.

 

서산 부석사에도 선묘설화가 있다. 다만 그 바위는 영주 부석사처럼 무량수전 왼편에 있지 않고, 절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에 있다.

서산 주민들은 이 바위를 검은녀라고 부르는데, 항상 바다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바위는 간만의 차이에도 관계없이 눈에 보이는 것이 항상 떠 있는 것처럼 보여, "검은녀"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우리는 이 대목을 놓칠 수 없다. 의상대사와 검은녀, 서산이 삼국시대에 중국을 오가는 뱃길의 출발점이였다고 한다면 서산과 영주 부석사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창건설화와 더 부합되는 지리적 위치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산길을 따라서 굽이굽이 올라가다 보면 도비산 중턱에 부석사가 길게 누운 소 형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마당에 서면 눈앞에 바다가 펼쳐져 보인다.

스님이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서 자세히 보니 부석이 보인다. 의상대사가 절을 짓고 있을 때 일부 주민이 절 짓는 것을 방해하자 용의 화신인

산더미 만한 바위가 공중에 떠서 주민을 호통치다가 절 앞에서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천수만 앞바다에 떠 있으면서 부석사 공사를 지켜보았다고 한다.

 

사적기가 현재 남아있지 않아서 창건연대를 명확히 알 수 없으나 태안 마애불, 서산 마애불, 보원사지 등과 함께 백제의 사찰이 아니였을까 조심스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품고 있는 얘기가 많은 사찰이다. 휙 보지 말고 자세~히 보자. 언젠가는 그 역사의 비밀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석사(浮石寺) = 충청남도 문화재재료 제 195호, 소재지 = 충남 서산시 부석면 부석사길 243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대사가 지었으며 그 뒤 무학대사가 보수하였다고 전한다.
경내에는 극락전을 비롯하여 같은 건물로 연결된 심검당, 무량수각 등의 건물이 있으며, 극락전 앞에 안양루가 서해를 향하고 있다.

◎고려시대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는 건축물이다.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로 677년 의상이 창건하고 조선시대 무학스님이 중창하시고,

근대에는 한국선불교를 중흥시킨 경허, 만공대선사들께서 이도량에 머무시며 수행정진하였다.

인중지룡<人中之龍>을 길러내는 곳이는 "목룡장<牧龍莊>"과 지혜의 검을 찾는곳이라는 "심검당<尋劍堂>" 현판은

경허스님의 글이고, 부석사 큰방에 걸려있는 "浮石寺" 현판은 만공스님께서 70세 나이에 쓰신글이란다.

 

 

            지장보살                         아미타불(중앙)                 관세음보살

 

아미타부처님은 복장물(腹藏物)에서 숙종 15년(1689년) 왕자 균이 태어날 때 서원을 세워 제작된 것이다.

1905년 풍양 조씨의 묘 조성때 옛 용봉사가 파괴되면서 부처님도 방치되어 있다가 이 곳으로 옮겨 모셨다.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로 좌우 보처없이 불단에 안치하였다. 갸름한 얼굴에 반개한 눈, 이마에는 백호, 삼각형의 높은 육계는 소라형으로

중심에 계주를 장식하였다. 통견(通肩)의 옷주름은 형식적으로 늘어져 있고 결가부좌한 다리는 둔중한 느낌을 준다.

뒤에는 아미타후불탱(阿彌陀後佛幀)이 걸려 있다.

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선신(善神)을 도상화한 그림을 신중탱이라 한다.

많은 신들을 배치하여 그리므로 다양하고 복잡한 구도를 보이는 이 신중탱은 일반적으로 제석(帝釋)과 위태천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무장을 한 신중들을 배치한다.

이단 구도로 상층에는 보살이 일렬로 늘어서 있으며, 하단에는 제석을 중심으로 무장한 팔부중을 배치하여 그렸다.

 

민간신앙을 흡수하여 부처님으로 승격시키고 칠성의 주존을 치성광여래로 모시며 그림으로 도상화한 것이 칠성탱(七星幀)이다.

화면 중심에는 치성광여래가 연화대좌에 앉아 자리를 잡고 있으며, 양쪽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좌우에는 일곱 분의 성군(星君)이 배치되어 있다. 전체적인 색채는 적색과 청색이 주류를 이루며 녹색을 가미하여 그려져 있다.

 

 

 

부도 탑

 

 

 

용왕각, 산신각, 선묘각<삼성각>

 

선묘낭자

 

용궁

 

이 산신탱은 호랑의 변화신인 산신을 중심으로 반드시 호랑이와 함께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림의 중심에는 백발의 늙은 산신이 복건을 쓰고 한 손에는 파상선을 들고 소나무 아래 앉아 있다.

그 옆에는 항상 따라다니는 호랑이가 포효하고 양쪽에는 동자가 천도복숭아를 공양하고 있다.

 

뒤에 바위가 열린듯 보이는곳이 만공스님의 토굴이다.

 

 

 

 

 


관세음보살 좌상 

현재로써는 부석사에서 제작하였다는 명문이 새겨진 고려후기(1330)에 조성된 금동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이

대마도 관음사에 봉안되어있다.

이것을 보면 부석사가 적어도 고려후기(1330) 이전에 창건되어 있었던 사찰임은 확실하다.

 

고려시대 관세음보살좌상으로 현재 일본 대마도 관음사에 모셔져 있다.

이 좌상의 복장품에서 중국 元 天曆3년(천력, 고려 충숙왕 17년, 元德2年, 1330년)명의 결연문(結緣文)이 나옴으로서 제작연대가 밝혀졌다.  

 불상은 묶어 올린 머리(結髮[결발])가 높고, 양쪽 어깨로 머리카락이 내려와 있고(垂髮[수발]), 耳璫(이당, 귀걸이)를,

가슴에서 양쪽 옆구리로 영락을 배치하였다.  팔에는 완포(腕鋪)를 두었다.

또한 군의(裙衣)의 매듭은 정중앙에 가로로 위치하고 있다. 무릎의 의문도 복잡하게 장식되어 있는 등

고려시대 중기부터 말기에 보여지는 특색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本体部(본체부, 몸체)는 하나로 주조되었고 광배와 대좌 등은 유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