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북도 = 나를 찾아서...

보원사지 터

백련암 2012. 4. 2. 15:42

보원사(普願寺)는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절이다. 현재 절터는 ◐사적 제 316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보물로 지정된 석조, 당간지주, 오층석탑, 법인국사탑, 법인국사탑비, 등이 남아있다.

사역내에서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된 바 있어 창건시기를 백제시대까지 올려볼 가능성인 유적적이다.

2006년 부터 ~ 2017년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보림사(寶林寺)에 있는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徵)의 탑비에 "체징이 보원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827년)"는 기록에서 처음으로

보원사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 최치원의《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화엄종을 주종파로 하는 큰 사찰중에 보원사를 언급하고 있다.

975년 법인국사 탄문이 보원사에서 입적하였고,《고려사에는 1530년에 보원사 계단(戒壇)에서 경율시험을 봤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의《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원사가 상왕산에 있다" 고 하여 16세기 까지 계속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619년 발간된 서산과 태안의 지방지 성격을  갖는 호산록 <湖山錄>에서 보원사지가 강당사(講堂寺)로 바뀐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후 1871년에 발간된 호서읍지<湖西邑誌>에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철조여래좌상으 양손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 시기 부터 사세가 기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원사지 오층석탑<普願寺址 五層石塔>은 보원사지에 위치한 석탑으로 대한민국의 보물 제 104호이다 고려초기의 탑파 양식을

보여주며, 높이가 9m나 되는 큰 탑이다

하성기단의 각면에 사자모양을 새기고 상성 기단의 각면에는 팔부신중을 새겨 신라말기 석탑의 수법을 보여준다.

한편 앏고 길게 뻗은 처마가 백제의 전통을 따르고 있어 매우 특이하다.

 

 

 

 

부처 = 철조 불 좌상(鐵造 佛 坐像) : 고려(高麗) 11세기 : 충남 서산 보원사지 터 출토(忠南 瑞山 普願寺址 出土)

 

쇠로 만든 이 부처는 충남 서산시 운산면 보원사 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두 손이 모두 없어졌지만 오른 손목에 위치로 보아 손갖춤은 석가모니가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道를 깨닫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갖춤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몸에 비해 큰 머리와 부자연스러운 옷주름등은 고려 철불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특히 강원도 원주에서 출토된 철불 3구와 얼굴 모습, 왼쪽 어깨에서 한번 접혀져 있는 편단우견(偏袒右肩, 오른쪽 어깨는 들어내고

겉옷인 대의를 왼쪽 어깨와 오른쪽 허리에 걸친 모습) 왼팔이 접히는 곳에 표현된 리본 형태의 옷주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갖춤에서

거의 동일한 수법을 보이고 있어 같은 조각가 집단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철조 불 좌상(鐵造 佛 坐像) 시대 : 통일신라 8세기,   충남 서산 운산면 출토

 

쇠로 만든 이 부처는 1948년 충남서산 운산면에서 옮겨온 것이다. 두 손이 모두 없어졌지만 오른 손목의 위치로 보아 석가모니가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도를 깨닫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항마촉지인(항마촉지인)의 손갖춤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민머리에 생동감 넘치는 얼굴, 당당한 어깨와 풍만한 가슴, 그리고 결가부좌(오른족의 발바닥을 위로하여 왼쪽 넙적다리위에 얹고 왼발을 오른쪽 넙적다리위에

얹은 앉음새)한  다리의 넘치는 양감 등에서 석굴암의 본존불과 매우 비숫하다.

형식화된 9세기 철불과 확연히 구별되는 것으로 보아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우리나라 철불 가운데 가장 앞선 시기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보원사 철불은 2013년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특별전에 출품돼 호평을 받은 바 있으며,

석굴암 본존불과 함께 통일신라 불교 조각품을 대표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어떤 인연이였을까?  2011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고 감명을 받은 부처님을 서산에서 보았다 찍은사진이 있어 올립니다.

 

 

호지불(護持佛 = 금동여래입상) 시대 : 통일신라시대

 

몸통과 대좌까지 한 틀로 구은 소형 호지불이다

護持佛이란 : 신변안전을 위하여 몸에 지니고 다니던 부처님을 말합니다.

 

 

당간지주<幢竿支柱>  시대 : 통일신라~ 고려초기   보물  제 103호 

절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기(旗)나 탱화를 게시하는 몽도로 사옹되는 물건

 

저 멀리 보이는 비석과 부도,  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乘塔碑>와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과, 석조,

석조는 조금만 돌아가면 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안 가시고 설명만으로 끝내고 마신다....

 고루고루 다 보고 싶었고 설명을 듣고, 사진도 자세히 찍고 싶었으나 나만의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저 차에서 내려 눈앞에 보이는 당간지주와 석탑만을 보고 왔다.

 

 

보원사지 오층석탑<普願寺址 五層石塔>  시대: 통일신라 ~ 고려초기,  보물 제 104호(1963년 1월 21일 지정)

 

통일신라 ~ 고려초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이다. 목조탑파에서 석조탑파로 변환되는 과정의 형식이며 아래층 기단의 사자상을, 위층 기단에

8부중상을 새긴 것이 특이하다.

 

기단부에 우주(隅柱), 탱주(撑柱)를 세웠고 탑신부 1층 밑에 받침돌 한 장을 끼워 넣은 것과 옥개석의 물매가 평활하며 끝이 살짝 들어 올려진 것 등이

백제계 양식이다.  또한 옥개석 받침을 4층으로 한 것은 신라계 양식을 가미한 것으로 백제지역에 신라 이후 세워지는 석탑의 공통된 양식이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미려하고 경쾌하며 안정감이 있다. 상륜부에는 긴 찰주만 남아 있지만 1945년 광복 전까지

아름다운 복발, 앙화,보륜, 보개, 수련, 용차, 보주 등의 부재가 완전하게 있었다고 한다.

 

1968년 해체 복원시 사리 내갑(內匣), 외갑, 사리병, 납석소탑 등이  출토되어 부여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탱주

 

 탱주

 

보원사지 오층석탑<普願寺址 五層石塔> 시대 고려시대, 보물 제 104호

부처님 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든 것이다.

 

 

보원사지터에서 발굴한  석물들 = 1.

 

 

보원사지터에서 발굴한 석물들 = 2

 

 

오층석탑으로 가는 길목에  보원사지 터의 발굴현장이다.

 

이 밖에도

서산 보원사지 석조<瑞山 普願寺址 石槽>보물 제 102호, 시대 = 통일신라 ~ 고려초기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 보승탑<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보물 제 105호, 시대 = 고려 명종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 보승탑비<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碑> 보물 제 106호 시대 = 고려 명종.  등이 있다...시간에 쫓겨사진을 못 찍음

 

왠만하면 난 단체로 성지순례를 안간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어 함께 동행을 하였지만 역시 실망으로 끝나고 말았다

저 멀리 보이는 비석과 부도, 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乘塔碑>와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과, 석조,...

석조는 조금만 돌아가면 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안 가시고 설명만으로 끝내고 마신다....

점심시간을 끝내고 내가 혼자 갔다오려고 하였지만 스님이 3시 출발 할것이니 그때 까지만 오라하신다.

시간을 보니 10분밖에 안 남아 개인행동으로 다른사람에게 불편을 줄까봐 난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것은 뭔 마음일까?  자꾸자꾸 슬퍼지면 가슴이 아리다()()()

마음에서 뭔지 모를 슬픔이 밀려오고 참으면서  또 한번 다짐한다 나중에 혼자서 다시 찾아오리라고 

그러나 다음에 올 때도 이 마음과 느낌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고루고루 다 보고 싶었고 설명을 듣고 싶었으나 나만의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저 차에서 내려 눈앞에 보이는 당간지주와 석탑만을 보고 왔다.

 

*맨위 부처님과 호지불은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어온 사진들이다. 이분들이 계시던 곳이 이곳 인 줄은 몰랐으니 이 또한 인연이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