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보이는 남산 타워의 모습
興法寺 眞空大師 塔 · 石棺
흥법사 진공대사 탑과 석관(興法寺 眞空大師 塔 · 石棺 ) : 고려시대(高麗時代) 940년, 보물(寶物) 제 365호
이 승탑과 석관은 신라 말기로부터 고려 초기까지 활동한 고승 진공대사(眞空大師)의 묘탑(墓塔)과 석관(石棺)으로 1931년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興法寺) 절터에서 옮겨왔다.
진공대사는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신라 효공왕(재위 897~912) 때에 귀국하여 왕사(王師)가 되었다.
고려가 건국된 이후에도 태조의 왕사가 되었다가 태조 23년(940년)에 입적하였는데 태조가 친히 비문을 지을 정도로 대사는 생전에
태조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이 승탑의 탑신은 팔각 집 모양을 기본 평면으로 하였으나 기단 중대석(中間部)은 원통형으로 하여 구름과 용무늬(雲龍文)가 화려하게
조각되어있어 매우 이채롭다.
아담한 탑신 위에는 곡선이 강한 지붕을 얹고 보개로 장식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 승탑은 고려 태조의 왕명으로 지어진 것으로서 고려시대 초기 승탑 중 우수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승탑(僧塔)은 신라 신덕왕(神德王)과 고려 태조(太祖)의 왕사(王師)를 지낸 진공대사(眞空大師) 충담(忠湛, 869- 940년)의 묘탑이다.
진공대사의 입적(入寂)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탑과 함께 발견된 석관(石棺)을 통해, 고승의 시신을 화장(火葬)뿐만 아니라
매장(埋葬)도 했음을 알 수 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작약꽃= 함박꽃이라고도 하고 목단, 모란이라고도 함
뿌리와 꽃피기전에 단단한 알맹이는 약제로도 사용
현화사 석등(정면)玄化寺 石燈
옥계에도 연꽃무늬 하대석에도 연꽃무뉘로 둘러쳐져있다.
앞면 (앞과 뒤 문늬모양이 틀림) 뒷면
현화사 석등(玄化寺 石燈) : 고려시대(高麗時代) 1020년
고려 현종(顯宗) 10년(1020년)에 세워진 석등으로 원래 경기도 개성 부근의 현화사 터에 있다가 1911년 서울로 옮겨왔다.
이 석등은 일반적인 팔각 석등과 달리 사각 석등으로 되어 있고 불발기집도 사방으로 시원하게 트여 있다.
불발기집에 세운 작은 네 기둥은 석등 밑의 간주석(받침 기둥) 모양을 축소한 형태이며, 지붕은 듬직하고 안정감이 있다.
이 석등의 당당한 품격과 신선하고 세련된 조형미는 고려시대 문화의 전성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석등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석등의 장대한 규모와 건장한 자태는 당시 국가 대찰로 창건된 현화사의 명성을 짐작케 한다.
고려 현종(顯宗) 10년(1020년) 개성 현화사에 세운 석등이다. 규모가 큰 이 석등으로 미루어 당시 국가 대찰로 창건된 현화사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석등의 불발기집(火舍石)은 팔각으로 된 것이 많은데, 이 석등은 사각이며 불빛창(火窓)도 따로 없이 사방으로 시원하게 트여 있다.
석등 앞에 있는 배례석(拜禮石)은 공양 가운데 으뜸으로 치는 "등공양(燈供養)" 할 때 예를 갖추기 위해 만든 것이다.
작약꽃 동산
나주 서문 석등(전경)
중간석 하대
나주 서문 석등(羅州 西門 石燈) : 고려시대(高麗時代) 1093년 보물(寶物) 제 364호
이 석등은 전라남도 나주의 읍성 터 서문 안의 절터에 파손된 채로 남아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석등의 기둥 돌에는 석등을 세운 내력과 함께 이 석등이 고려 선종 10년(1093년)에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석등의 본체인 불발기집은 파손되어 조선총독부 시절 다시 옛 모습대로 만들었으며, 그 위의 지붕은 처마 밑에 드림 장식을 하고
처마와 추녀 끝에는 귀꽃 장식을 하여 고려시대 중엽에 새로이 드러내는 매우 장식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 위에는 현재 작고 아담한 덧지붕만이 남아 있으며, 맨 꼭대기의 꽃봉오리 모양의 보주는 원래 부서진 것을 옛 모양대로 새로 만든 것이다.
이 석등은 고려시대 문화의 전성기에 나타난 단아하고 격조 있는 팔각석등의 조형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석등의 기단부는 긴 팔각기둥과 위 · 아래에 연꽃을 장식한 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가운데 긴 팔각기둥 돌은 간주석(竿柱石)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새겨진 글을 통해 고려 선종(宣宗)10년 (1093년)에 만들어진 석등임을 알 수 있다.
불발기집(火舍石)은 원래 파손되어 없었으나, 1929년 나주에서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새로 만들었으며, 맨 꼭대기 장식도 새로 만든 것이다.
남계원 칠층 석탑(뒷면)
개성 남계원 터 칠층 석탑(開城 南溪院 址 七層 石塔) : 고려시대(高麗時代) 11세기 국보(國寶)제 100호
이 석탑은 경기도 개성시 덕암동 부근의 남계원 절터에 있던 것을 1915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왔고 2005년 다시 지금의 위치에 세운 것이다.
전체적인 탑의 기틀은 신라 석탑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나 몸체가 되는 탑신의 층수가 많아지고, 추녀 끝에서 지붕 밑이 들려지며
전체적으로도 묵직한 조형 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점 등에서는 고려 석탑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이 탑 안에서는 고려 충렬왕 9년(1283년)에 봉안한 것으로 여겨지는 쪽물을 들인 종이에 은물로 글씨를 쓴 경전[紺紙銀泥寫經]
일곱 축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 탑은 세부 묘사에서는 통일신라 석탑을 따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탑신이 칠층이고, 지붕이 앏고 넓으며, 위로 올라갈수록 탑신의 두께가 둔중한
느낌을 주는 고려 탑 특유의 특징도 보인다.
박물관 주변에 피어있는 목단꽃
경북 김천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慶北 金泉 葛項寺 東西 三層石塔) : 통일신라 시대 758년, 국보(國寶) 제 99호
경상북도 김천의 갈항사 터 동·서쪽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16년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온 후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 개관하면서 야외에 전시중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이 탑처럼 2단의 기단부(基壇部) 위에 3층의 탑신부(塔身部)로 이루어진 탑이 일반적인 형태로 많이 만들어졌다. 서로 규모와 구조가 같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특히 가운데 기둥은 두 개씩을 두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고 있으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의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마련하였다.
기둥과 면석 등에는 정혈(釘穴)이 있는데 여기에는 금동판(金銅板)의 장식을 따로 부착하였던 자리로 추정된다.
두 탑은 규모는 크지는 않으나 조화로운 각부 구성을 보이며 통일신라 초기 석탑의 양식을 잘 이어받았다.
한편 동탑의 기단부에는 758년(경덕왕 17)에 탑을 세웠다는 내용이 새져 있어 제작연대를 파악할 수 있어 중요하다.
이 탑이 있던 갈항사는 통일신라 초기 절(寺刹)인 감은사(感恩寺)처럼 하나의 금당(金堂)에 두 탑이 있는 배치(雙塔一金堂式[쌍탑일금당식])
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탑의 기단부에 새겨진 글을 통해 신라 경덕왕 17년(景德王 17年, 758年)에 영묘사(靈廟寺) 언적법사(言寂法師)
세 남매가 이 탑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동탑 서탑
서울 홍제동 5층석탑(弘濟洞 五層 石塔) : 고려시대, 보물 제 166호
이 석탑은 서울 홍제동 사현사沙峴寺 터에 있던 탑으로, 1045년(고려 정종[高麗 靖宗] 11年) 사현사 창건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5층의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에는 장식이 없으나, 2층 이상은 기둥모양을 새겨 한 면을 둘로 나누고
그곳에 문짝으로 보이는 네모난 액자형을 표시하였다.
지붕돌은 넓고 얇은 편이나 육중해 보이고, 두꺼워 보이는 처마는 수평으로 펼쳐지다가 양끝으로 치켜 오르면서 더 두꺼워진 듯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으면서도 온화하고 부드러운 새김법, 새로이 유행하는 탑신받침의 덧붙임,
그리고 벽 테두리 장식 등에서 고려 전기 석탑의 조형미가 잘 나타나고 있다
강원도 원주 천수사 터 오층석탑(江原道 原州 泉水寺 址 五層石塔) : 고려시대 (高麗時代)
하층기단(下層基壇) 덮개돌(甲石)아래 부재는 없어졌다. 각각의 탑신부(塔身部) 몸돌은 한 개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2층 몸돌 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히 낮아진다.
지붕처마에는 각 층마다 3단의 받침이 있으며, 네 모서리는 풍경의 일종인 풍탁(風鐸)을 단 작은 구멍이 네 개씩 남아 있다.
탑 꼭대기 장식인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강원도 원주 천수사 터 삼층석탑(江原道 原州 泉水寺 址 三層石塔) : 고려시대 (高麗時代)
탑의 몸체를 받치고 있는 기단부(基壇部)는 통일신라 석탑에서 보이는 2층 기단 형식이다. 탑신부(塔身部) 몸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1층과 2층 탑신 아래에는 굄돌이 놓여져 있다. 지붕 처마 층단받침은 4딘으로 되어있고 지붕의 윗면은 경사가 완만하다.
탑의 꼭대기에 해당되는 상륜부(相輪部)에는 네모난 지붕 모양 장식(로반[露盤])만 남아있다.
경기도 이천 안흥사 터 오층석탑(京畿道 利川 安興寺 址 五層石塔) : 통일신라 말(統一新羅 末)- 고려 초(高麗 初) 10세기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과 상륜부(相輪部)가 있는 일반적인 형태이다.
탑신(塔身) 높이는 2층 부터 급격히 줄어들며 처마 밑 층단은 네 단인 5층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섯 단을 이루고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露盤)만 남아 있다. 탑의 세부 수법이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띠며, 균형 잡힌 비례로 보아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석탑으로 보인다.
장명등(長明燈) : 조선시대 = 무덤 앞을 밝히는 석등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1街가 문인석(서울시 龍山區 元曉路 1街, 文人石) : 조선시대(朝鮮時代)
???
문인석(文人石) : 조선시대(朝鮮時代) = 무덤을 지키는 문관
석양(石羊) : 조선시대(朝鮮時代) = 무덤을 지키는 양
온녕군 석곽(溫寧君 石槨) : 조선시대 1453년(朝鮮時代 1453年)
이 석곽(石槨)은 경기도 양주(楊州) 금표(禁標)지역 안의 온녕군(溫寧君) 묘에서 나왔다. 온녕군(溫寧君)은 조선 태종(태종)의 일곱째 왕자이다.
무덤에서는 고려왕실의 무덤과 달리 구리수저 한벌과 분청사기 항아리 둘, 접시 두개만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조선 왕실의 검소함을 엿볼 수 있다.
'불화이야기=고려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로왕보살= 引路王菩薩 (0) | 2011.07.24 |
---|---|
팔각정<중앙박물관> (0) | 2011.05.28 |
나옹선사사리탑, 쌍사자 석등,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 보리사대경대사현기탑비,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 염거화상탑, 보신각종 (0) | 2011.05.28 |
나한과 금부처, 석불, 수인, 팔부신중들, (0) | 2011.05.28 |
제석천왕과 여러신들, 민화의 기복, 안락 (0) | 2011.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