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각종(普信閣 鐘) : 조선시대(朝鮮. 1468년) 보물(寶物)제 2호
보신각 종(普信閣 鐘) : 조선시대(朝鮮. 1468년) 보물(寶物)제 2호
보신각 종은 조선 세조(世祖)14년(1468)에 현재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원각사에 걸기위해 만든 종으로 처음 만들어졌다.
그 후 절이 없어지게 되자 이 종은 남대문에 옮겨지고 다시 선조 30년(1597)에 현 명동성당 부근인 명례동현에 옮겨졌다.
그 후 광해군 11년(1619)에 서울의 한복판인 관철동의 보신각에 옮겨져 파루(罷漏, 오전 4시)에 33번, 인정(人定, 오후 10시)에 28번을 울려
도성의 문을 여닫는 일과 하루의 시각을 알리는 데 쓰였다.
하나의 몸체에 양 쪽으로 용머리가 달린장신 고리(龍紐)가 달려 있으며, 몸통 한 가운데는 세겹의 굵은 때가 둘러져 있는데,
이러한 모양의 종은 고려 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와 널리 만들어진다.
그러나 종의 안전을 위하여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게 되었으며 2005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 개관하면서 야외에 전시중이다.
이 종의 특징은 몸통 한가운데 세 겹의 굵은 띠를 장식한 점인데, 밑면에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두 가닥의 띠를 두르고 있다.
몸체에 주조 연대가 있어 제작 시기가 확실한 임진왜란 이전의 몇 안 되는 범종의 하나로 손꼽힌다.
성덕대왕 신종(聖德大王 神鍾, 일명 에밀레종) 박물관 사진에서
이 종은 신라 제35대 왕인 경덕왕이 돌아가신 아버지 성덕대왕을 위하여 만들기 시작하여 그 아들인 혜공왕에 의해 771년에 완성되었다.
종의 꼭대기에는 용뉴(龍鈕)와 음통(音筒)이, 몸에는 위로부터 보상당초무늬를 새긴 문양띠, 그 아래는 4개의 유곽(乳廓), 4구의 비천상, 2곳의 당좌(撞座),
맨 아래에는 보상당초와 연꽃 문양띠가 양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우아한 형태와 화려한 장식,아름답고 여운이 긴 종소리 등 우리나라의 종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다.
◈성덕대왕 신종 탁본들임
성덕대왕 신종 앞면에 새겨진 글씨 탁본(聖德大王 神鐘 前面 銘文 榻本) : 통일신라 771년 국보 제 29호
성덕대왕 신종(국보 제 29호) 앞면의 글은 성덕대와에 대한 칭송, 종을 만든 경덕왕과 혜공왕의 효심, 그리고 신종의 소리로써 명복을 빌고 깨달음을 얻어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균형잡힌 해서체로 쓰인 글씨는 통일 신라 8세기 서예의 특징인 여유 있는 필획과 유연한 필치를 보여준다.
성덕대왕 신종 뒷면에 새겨진 글씨 탁본(聖德大王 神鐘 後面 銘文 탁本) : 통일신라 771년 국보 제 29호
성덕대왕 신종(국보 제 29호) 뒷면에는 찬시(讚詩)및 종을 만든 이들의 직책과 이름 등이 있다.
찬시의 내용은 앞면과 마찬가지노 경덕왕과 혜공왕의 효심으로 만들어진 신종의 장중한 면모와 아름다운 소리에 대한찬사,
그리고 신종을 제작한 위대한업적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덕대왕 신종의 명문(聖德大王 神鍾 銘文)= 앞면에 새겨진 글에서 중요한 내용을 일부 소개한다.
무릇지극한 道는 형상의 밖에 있어, 보려하여도 그 근원을 볼 수없으며, 대음(大音)은 천지의 사이에 진동하나, 들으려 하여도 그 울림을 듣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이해의 방편인 가설(假說)을 열어 진리의 깊은 이치를 관찰하시고, 신종(神鍾)을 높이 달아 "일승의 원음(一乘圓音, 진리)"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중략>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덕대왕의 德은 산과 물처럼 높고 깊으며, 그 이름은 해와 달처럼 높이 빛났습니다.
충성스럽고 어진사람을 등용하여 풍속을 어루만지고, 예(禮)와 악(樂)을 숭상하며 미풍양속을 권장하였습니다.
들에서는 농사를 짓는데 힘썼으며, 시장에는 사치스러운 물건이없었습니다.
풍속과 민심은 금옥(金玉)을 중히 여기지 않고 학문과 제주를 숭상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중략>
근래 효자이신 경덕대왕은 성덕대왕께서 살아 계실 때 왕업(王業)을 이어받아 모든 국정을 감독하고 백성을 어루만지셨습니다.
일찍이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해마다 그리운 마음이 간절하였는데 얼마되지않아 부왕(父王)인 성덕대왕이 승하하였으므로 궐전(闕殿)에
임할 때 마다 슬픔이 더하여 추모의 정이 더욱 절절하고, 명복을 빌고자하는 생각은 다시 간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경덕왕은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위해 구리 12만 근을 들여 종(鍾)을 주조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의 임금이신 혜공대왕께서는 그 행동이 조상들의 행하심과 맞았고, 뜻은 지극한 진리에 부합하였으며, 탄생하신 이래 일어났던 상서로움은
매우 특이하였고, 아름다운 덕망은 당시의 으뜸이었습니다. ...<중략>
경성대왕의 유언에 따라 숙원을 이루고자 유사(有司, 종 제작 담당부서)는 그 일을 주선하고, 종의 기술자는 설계하여 본을 만들었으니
이해가 바로 대연년(重光, 大淵獻[대연헌]의 줄임말로 辛亥年 [771年]을 가리킴) 대려월(大呂는 12월)이었습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해와달이 빛을 서로 빌려 비추며, 음과 양이 서로 그 기를 조화하여 바람은 온화하고 하늘은 맑았습니다.
마침내 신종이 완성되니 그 모양은 마치 산과 같이 우뚝하고, 소리는 용의 울음과 같았습니다. ...<중략>獻= 바칠 헌
원컨대 이 오묘한 인연으로 존령(尊靈)을 받들어 도와서, 맑은 진리의 소리를 듣게 하고, 설법이 없는 진리의 자리에 올라. 과거 · 현재 · 미래에 뛰어난
마음을 맺어 절대적 진리의 세계에 들게 하며, 나아가 왕실이 金나무 가지에 맺혀 영원토록 무성케 하여 나라의 대업이 철위산(鐵圍山)처럼
번창하게 하고, 모든 중새은 지혜의 바다의 물결을 함께 타고 속세를 벗어나 깨달음의 길에 오르게 하소서.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 (나옹대화상의 사리탑)
令傳寺 普濟尊者 舍利塔, 江原道 原州 令傳寺 터. : 高麗 1388年. 보물(寶物) 358호
보제존자는 나옹화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 승탑은 일반적인 승려의 묘탑과 달리 석탑모양의 쌍탑을 이루고 있는데
이처럼 고려시대 말기에는 승탑도 석탑과 같은 형태로 조성되기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제존자 즉 나옹화상은 신륵사에도 석종형 승탑(보물 228호)이 있는데, 제자들이 나옹화상의 사리를 나누어
영전사와 신륵사에 각기 묘탑을 세워 봉안한 것이다.
제 1탑
제 2탑 =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 =
令傳寺 普濟尊者 舍利塔, 江原道 原州 令傳寺 터. : 高麗 1388年. 보물(寶物) 358호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 강원도 원주 영전사 터. 고려 1388년.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懶翁, 1320 - 1376년>의 사리를 모시기우해 고려 우왕<禑王> 14년<1388年>에 세운 승탑이다.
보통승탑이 팔각 집<八角 堂>모양이거나 종 모양을 띠는 것에 비해 이 승탑은 특이하게 불탑과 같이 네모난 형태의 두탑으로 이루어져 매우 이채롭다.
나옹의 사리를 모신 승탑은 이 탑 외에도 그가 입적<入寂>한 여주<麗州> 신륵사<神勒寺>와 그가 주지로 있던 양주<楊州> 회암사<會巖寺> 터에도 남아 있다.
이 승탑은 고려시대 말기에 활동한 고승 보제존자의 묘탑으로 우왕 14년(1388)에 세워진 것이다.
보제존자는 나옹화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원래 이 승탑은 강원도 원주시 영전사 절터에 있다가 1915년에 서울로 옮겨왔다.
이 승탑은 일반적인 승려의 묘탑과 달리 석탑모양의 쌍탑을 이루고 있는데 이처럼 고려시대 말기에는 승탑도 석탑과 같은 형태로 조성되기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탑의 조형에서는 짜임새 있고 안정된 균형을 이루고 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보제존자 즉 나옹화상은 신륵사에도 석종형 승탑(보물 228호)이 있는데, 제자들이 나옹화상의 사리를 나누어 영전사와 신륵사에 각기
묘탑을 세워 봉안한 것이다
고달사 쌍사자 석등(京畿 麗州 高達寺 址 雙獅子 石燈,), : 고려(高麗 10세기), 보물(寶物) 제 282호
경기도 여주 고달사 터 쌍사자 석등(京畿 麗州 高達寺 址 雙獅子 石燈,), : 고려(高麗 10세기), 보물(寶物) 제 282호
두 마리 사자가 불발기집(火舍石)을 받치고 있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석등이다. 통일신라시대에서부터 이러한 형태의 석등이 등장하지만,
이 고달사 쌍사자 석등은 여느 쌍사자 석등과 달리 웅크린 사자가 불발기집을 받치고 있어 이채롭다.
이 석등은 고달사가 우리나라 3대 선원의 하나인 고달원高達院으로 명성을 떨치던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경기 여주 고달사 터 = 고려(高麗) 10세기 보물 282호<뒷 모습>
옆모습 두마리 사자의 문양이 다르다.
염거화상 탑(廉居和尙 塔), : 통일신라(統一新羅) 8세기, 國寶 제 104호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활동한 염거화상의 묘탑으로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 터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염거화상(?~844)은 도의선사의 제자로, 신라 선종 산문의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대 선사이다.
그는 보조선사에게 가르침을 전하여 가지산문을 대성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탑의 구조를 살펴보면 기단과 탑신, 지붕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 기단 밑부분과 상륜부는 없어졌다.
지붕과 탑신은 목조건물의 형태를 충실히 모방하였으며, 탑신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어 있다.
이 승탑은 우리나라 승탑의 기본 형식이 되는 팔각 집(八角堂) 모양을 처음 선보였을 뿐만 아니라 탑 안에서 발견된 금동 탑지(塔誌)를 통해 제작 연대를
알 수 있어 우리나라 승탑의 시원을 밝히는 데 그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승탑은(僧塔)은 탑지(塔誌)가 함께 전해져, 승탑의 주인공과 만들어진 연대를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탑이다.
신라 문성왕(文聖王 844년)6년에 선종(禪宗) 산문(山門) 가운데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 2대 선사인 염거화상(廉居和尙 ?-844년)을 위해
만든 것으로 팔각 집(八角堂) 모양에 사천왕 등의 부조상을 새긴 전형적인 승탑의 모습이다.
이후 만들어진 승탑들은 이 승탑을따라 대부분 팔각 구조에 화려한 부조상을 새겼다.
경남 창원 봉림사 터 진경대사 보월능공탑(鳳林寺 眞鏡大師 寶月凌空塔) : 통일신라(統一新羅) 823년. 보물(寶物) 제362호
통일신라 말기의 고승이며 신라 선종산문 중의 하나인 봉림산문을 세운 진경대사(眞鏡大師, 855~923)의 묘탑으로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동의 봉림사 터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승탑의 형태는 팔각 집 모양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기단부는 상대, 중대, 하대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으며
기단부의 가운데 부분의 북모양 중대석은 꽃장식의 띠를 두르고 있으며 아래에는 중대받침을 부착하였다.
탑신부의 몸체는 단순한 팔각이며 이무런 장식이 없다.
지붕은 처마 밑이 평탄하며 지붕 위는 경사가 완만하고 널찍한 지붕의 추녀 끝에는 우아한 꽃무늬 장식이 돋아 있다.
전체적으로 날씬한 몸체와 장식을 절제하면서도 변화를 시도한 조형적 특징은 신라 승탑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이 변모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승탑(僧塔)은 통일신라 말기의 고승으로 신라 선종(禪宗)산문 중 하나인 봉림산문(鳳林山門)을 세운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 855- 923년)의
묘탑(墓塔)이다. 팔각 집 모양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날씬한 몸체에 장식을 절제하면서도 변화를 시도한 조형적 특징을 보인다.
특히 기단부 가운데 꽃띠를 두른 북 모양 중대석은 같은 시기 석등에서도 보이는 형식 가운데 하나이다.
경기도 양평 보리사 터 대경대사 현기탑비(菩提寺 大鏡大師 玄機塔碑) : 고려(高麗) 939년, 보물(寶物) 제 361호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활약한 승려 대경대사의 업적을 새긴 탑비이다. 원래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의 보리사 절터에 있던 것을
경복궁으로 옮겨온 후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야외전시장에서 전시하고 있다.
대경대사는 특히 고려 태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데 930년에 대사가 입적하자 태조는 ‘대경(大鏡)’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제자와 신도들은 이 탑비를 세웠다.
탑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돌[龜趺]의 머리는 보주를 물고 목을 세운 용머리[螭首] 모습이며 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을 사실적으로 조각하고 있어
고려시대 초기 탑비예술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탑비는 신라말에서 고려초기에 활동하던 성주산문(聖住山門)의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麗嚴, 862- 930년)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대사가 입적(入寂)한 지 9년이 지난 고려 태조 22년(939)에 세워졌다. 거북 받침돌(龜趺)의 거북 머리가 용머리로 바뀌었는데, 이러한 경향을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탑비에서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머릿돌(螭首)의 구름과 용은 매우 생동감 있게 조각되었다.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居頓寺 圓空國師 勝妙塔) : 고려(高麗, 1018~1025년), 보물(寶物) 제 190호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居頓寺 圓空國師 勝妙塔) : 고려(高麗, 1018~1025년), 보물(寶物) 제 190호
이 승탑은 고려 태조 13년(930년)에 출생하여 현종 9년(1018년)에 입적한 고려시대 전기의 고승 원공국사의 묘탑이다.
원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의 거돈사 터에 세워졌는데 1948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이 승탑과 같이 있던 탑비는 지금도 거돈사 절터에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 승탑을 이어 받은 팔각 집 모양으로 단정하고 균형 잡힌 형태에 격조 있는 장식을 더하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승탑 중에서 매우 수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원공국사(圓空國師) 지종(智宗, 930- 1018년)의 묘탑(墓塔)이다. 이 승탑과 짝을 이루는 원공국사의 탑비가 원주 거돈사터에 남아있다.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승탑 형식을 이어받아 단정하고 균형잡힌 팔각의 형태에 사천왕, 팔부신장(중) 등의 부조상을 새겼다.
탑신 정면 문 위에 탑 이름을 새긴 점이나 탑신에 꽃띠 장식을 한 것등은 고려시대에 새롭게 시도된 것이다.
건달바(乾達婆) 와 아수라(阿修羅)
가루라(迦樓羅), 와 龍
아수라(阿修羅), 와 건달바(乾達婆),
천(天), 과 야차(夜叉),
팔부신중 : 통일신라(統一新羅) 출토지 미상(出土地 未詳)
석탑 기단부에는 부처님의 法을 수호하는 여덟명의 神들인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새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탑마다 그 새겨진 모습이 경전에 기록된것과 다르고 배치와 형태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 팔부중상은 배열이 일정치 않고 조각 양식 또한 서로 달라 비숫한 시기에 다른 탑에 조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왼쪽부터 천(天), 야차(夜叉), 아수라(阿修羅), 건달바(乾達婆), 가루라(迦樓羅), 龍으로 보이며, 또 다른 석탑의 부재로 보이는 돌에 새겨진 것은
건달바와 아수라로 추정된다.
수표(水標)
수표는 하천의 물 높이를 쉽게 알아보기 위하여 만든 표지석이다. 대개 홍수를 대비하기 위하여 만들었다.
이 수표는 조선시대 서울 청계천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수표 돌기둥 앞뒤에 눈금을 1척(21.5cm)에서 10척까지 새겼고,
3척 · 6척 · 9척 선상에는 0표를 음각하여 각각 갈수(渴水, 가뭄) 평수(平水, 평균수위) 대수(大水, 홍수)를 헤아리는 표지로 삼았다.
즉 물이 6척 안팎 높이로 흐르는 것이 보통의 물 높이이며, 9척 이상이 되면 위험하다는 것을 예고한 것이다.
이 수표에 있는 "계사갱준(癸巳更濬)"과 기사대준(己巳大濬)"의 글씨는 영조의 경진준천(1760년) 이후에
다시 청계천을 준설(濬渫, 하천의 바닥을 파내어 물길을 트는 것)하면서 새긴 것이다. 이 수표는 보물 제 838호를 복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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