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수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남해 금산 보리암’을 떠올리면, 사람들은 신앙적으로는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도량이라고,
자연풍경적으로는 해돋이 명소라고 자랑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관음도량이지만, 지금 다시 한 번 보리암을 찾는 것도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보리암 창건설화의 주인공인 원효스님은 금산이 마치 방광 하는 듯 빛나 이곳에 초옥을 짓고 수행하였습니다.
또 다른 주인공인 장유선사는 금산의 천태망상의 변화에 매혹되어 이곳에 터를 잡고 인도 아유타국에서 모시고 온 관세음보살을 모셨다고 합니다.
창건설화의 두 주인공 수행공덕으로 기도객들은 영험을 받고 있습니다.
조선의 개국조인 이성계는 이곳에서 새로운 왕조를 열게 해달라는 백일기도를 드리고 소원을 성취하였습니다.
보리암은 강원도 낙산사 홍련암, 경기 강화도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관음신앙의 3대 기도처 가운데 하나다.
아울러 남해군에 있어서는 용문사, 화방사와 함께 남해 삼대사찰이기도 하다. 본래 보광산이었던 이곳이 금산으로 부르게 된 전설은 이러하다.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려고 백두산과 지리산에서 기도를 하였으나 효험을 얻지 못하고, 다시 금산에서 백일기도를 하였는데, 어느 날 꿈에 금산의 산신령이
나타나 이성계를 왕으로 만들어주는 대신 보광산 전체를 비단으로 싸 달라는 요구를 하였다.
이성계는 이를 수락하였고 이내 왕이 된 이성계는 산신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보광산 전체를 비단으로 감싸고자 하였다. 그러나 산 전체를 비단으로 둘러
싼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임을 깨달은 이성계는 기지를 발휘하여 비단 금(錦)자를 써서, 금산(錦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상주 마을 금산 입구에서 약 3km정도 올라가면 보리암에 다다른다. 울창한 숲과 남해바다가 이루는 조화를 감상하며, 걸어서 50분 정도 올라가면 보리암에
도착할 수 있다.
보리암의 창건은 683년(신문왕 3) 원효 대사에 의해서라고 전한다.
산하를 유력하던 원효 스님이 이곳에 초암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음보살을 친견한 뒤에 산 이름을 보광산(普光山)이라 하고 절 이름 또한 보광사(普光寺)라
하였는데, 이것이 금산과 보리암의 전신이다.
이름난 기도도량으로 널리 알진 것에 비하면 보리암의 창건과 관련한 옛 기록은 찾을 길이 없어 남해와 사중에서 전하는 이야기만이 창건 시기를 추측하게
할 따름이다. 다만 보리암을 비롯하여 화방사 등 남해 지역 사찰들이 원효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는 믿음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으며,
보리암이 원효 스님이 창건한 첫 번째 사찰로 전하고 있어 남해에서의 보리암의 위상은 예나 오늘이나 적지 않을 것임을 느끼게 한다.
창건 이후 보리암의 사적을 알만한 자료가 없어 어떠한 모습으로 변천해 왔는지 또한 알 길이 없다. 다만 보광산이 금산으로 바뀌는 과정을 전하고 있는
이성계 관련 설화가 조선 초기 금산의 존재를 전하고 있을 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보리암은 금산에 있으며, 남쪽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고 하는 내용이 간략히 기록되어 있는 정도이다.
1660년(현종 1)에 와서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보리암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그 뒤 1901년에 낙서(樂西)와 신욱(信昱) 스님이 중수하였으며,
1969년에 이르러 양소황(梁素滉) 주지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리암 올라가는 길목에 햇살이 가득하다
저 멀리 보리암의 입구를 알리는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저 아래마을이 꼭 전갈별자리 처럼 생겼다 밤에 불빛을 보면 더욱그렇다
서서히 해가 지기시작하는군요
보광법당은 마갈타국 보리도량의 곁에 있다고 하는데, 부처님이 이 곳에서 3차례 화엄경을 설하셨다고 한다.
보광전 = 26평 규모의 전각으로 1969년에 제작된 것이다.
보광전 감실법당에는 관음보살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신라시대의 불상으로 목조에 도금한 것입니다. 반개한 눈으로 참선하는 모습으로 화려한 보관에는 화불이 새겨져 있다.
결가부좌하여 계인(契印)을 결하며 정병을 들고 있다. 왼쪽엔 = 남순동자, 오른쪽 = 해상용왕
보광전의 지장탱화 = 석장을 들고 서있는 지장보살을 양쪽에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를 이루며 좌우에는 시왕들이 있다.
특이한것은 그림의 하단부분에 '지옥도'가 그려져 있다.
보광전 신중탱화 = 신중탱은 목각에 도금을 한 것으로1993년에 제작되었다.
= 삼층석탑 =
삼층석탑은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원효대사가 모셔와 이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 전해온다.
하지만 전설과는 달리 삼층석탑은 고려 초기 양식을 취하고 있다.
단층기단 위에 놓인 탑신 세 층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상륜부에는 구슬 모양의 보주가 놓여 있다.
천길 낭떠러지 위에 보리암 삼층석탑이 있어 이 절벽을 탑대(塔臺)라 한다.
이 탑대는 금산 38경중 5경에 해당하는 곳으로 전망이 좋아 봄철의 신록과 가을의 단풍 그리고 상주 앞바다는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곳이다.
2층 기단위에 3층의 탑신석을 갖추고 있으며, 그 위의 상륜부는 보주만이 남아있는 모습이다. 전체 높이가 230㎝에 불과해 작은 탑에 속한다.
판석으로 지대석을 마련한 후 방형의 기단석을 2중으로 쌓았다.
하층기단에는 안상을 조각하여 장엄을 시도하였다. 3층의 탑신석은 우주를 조각했을 뿐 별다른 장식을 발견할 수 없어 전체적으로 소박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3단으로 되어 있는 등 전체적으로 시대가 후대로 내려오고 있음을 살필 수 있게 한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보리암 앞 삼층석탑은 보리암의 역사를 전하는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보리암의 전통을 대변하는 석조물로서 그 가치가 높다고 할 것이다. 현재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마지막 예불이 밤 11시부터 새벽 1시 반에 끝난다
새벽예불시간까지 이곳에서 혼자 철야를 하다가 도량석목탁소리에 정신이 들어 잠시 쉬는동안
달과 별이 너무 밝고 아름다워 한컷찰칵^^
새벽예불 5시 반에 끝나고 스님과 해수관음상앞으로 와 기도하고 끝을냄
먼동이 터오네요
해가 떠오르네요<석등>
삼층석탑 06시 15분
석탑은 신라 김수로왕비 허태후가 인도에서 파사석이란 돌로 세웠다. 이곳에서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탑 앞에서는 나침판이 제구실을 못한다는 사실이다 석탑 첫번째 기단에 나침판을 놓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침판 바늘이 제멋데로 움직인다
석탑만 벗너나면제대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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