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조선왕실 여인들의 애한이 서린절 청룡사

백련암 2011. 9. 26. 23:24

 

청룡사

 

대웅전 부처님

 

우화루와 심검당

 

=정업원구기=

*정업원이란 : 원래 궁궐안에 있는 법당 이름이며,  왕비, 공주, 비빈, 상궁, 시녀<혹은 스님이 되기도 하면서>들이

바깥 출입이 어려울 때  기도하던 사찰이다.

양반출신의 여인들이 출가하여 머물던 절을 말한다

 

* 비각 현판 =前峯後 巖於千萬年<전봉후 암어천만년> = "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오리"               *영조의 친필임*

 

 

단종비 정순왕후 슬픈사연 곳곳에 간직 

 

왕권다툼에 희생....  궁전나와 수행자길 선택

 

"살아남은 자 " 죽은 왕 명복 빌며 한생 마감

 

현재는 빽빽이 들어선 달동네 가옥들이 주변에 가득하고 뒤쪽으로는 재 개발로 아파트가  신축돼 명당의 지세를 느끼기 어럽다.

역사의 현장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조차 든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기지고 돌아보면 "청룡사와 정업원구기' 비문이 옛 역사에 채취를

느낄 수 있고, 청룡사앞 동망봉과  인근 원각사 옆 바위에 새겨진 "자주동천" 문구와 옛 우물터가 비운의 역사를 오롯이 전해주고 있다.

 

동대문 밖 낙산공원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청룡사라는 자그마한 절이 있다. 이곳은 500여년전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머물던 절로, 예전에는 정업원이라 불렸다. 왕비가 평생토록 동쪽 먼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지었다는 동망봉(東望峰)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그곳에서 정순왕후는 왕비마마가 아닌 ‘허경스님’이라는 이름으로 60여년의 세월을 보냈다.

 

1943년 정순왕후는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해 가히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만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으면 왕비에 간택됐다.

이듬해 열다섯의 나이로 조선의 국모가 되었지만 3년뒤 단종이 폐위됨에 그녀 또한 폐서인이 되었다.   당시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에서

초막을 짓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당할 때 왕비는 남편을 따라 가지 못하고  도성 밖으로 내쳐졌다. 이때 단종과 왕비가 눈물로 이별을 고했던 청계천의 다리는 "영이별다리' 로 불리다가 후일 "영도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궁에서 쫓겨난 왕비는 끼니를 연명할 꺼리가 없어 걸식까지 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조 때 유본예가 쓴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따르면

정순왕후를 동정한 부녀자들이 끼니때마다 푸성귀를 가져다주곤 했는데, 궁에서 이를 못하게 말리자 왕비가 살고 있는 초막 근처에

여자들만 드나드는 시장을 열어 물건을 사는 척 모여들어서는 왕비에게 먹거리를 가져다주는 ‘금남(禁男)의 시장’이 동대문 밖에 들어섰

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남편이 영월에서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지자 왕비는 자신이 살고 있던 초막에서 가장 가까운 봉우리에 올라가

멀리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통곡을 했다.

 

왕비는 단종이 죽은 후 머리를 깎고 정업원의 비구니가 되었다. 일부 기록에는 그녀가 도성 밖으로 쫓겨나면서 비구니가 되었다고 하지

만 전후 상황으로 볼 때 그녀가 비구니가 된 시점은 단종이 죽은 직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종이 버젓이 살아있는데 왕비가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는 것은 최소한의 상식으로도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정순왕후와 함께 출궁한 단종의 후궁들, 상궁 셋도 함께 출가를 했다. 후궁 김씨는 원경 스님, 후궁 권씨는 혜경 스님이 되었고,

상궁 세명은 희안 스님, 지심 스님, 계지 스님이라는 법명으로 스님이 되었다.

 

정업원의 비구니가 된 후에도 정순왕후는 상궁 셋과 함께 염색하는 일을 하며 살아갔다. 일설에는 그녀가 정희왕후의 배려로 그다지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아갔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기록에는 그녀가 세조의 도움을 받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평생 염색물을 들이는 일을 하며 살아갔다고 전해진다. 현재 보우승가대학 뒤편에 남아있는 자줏골 빨래터가 바로 그곳이다.

 

정순왕후는 82살까지 고단한 삶을 살다가 1521년(중종 16)에 세상을 떠났다. 열여덟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남은 60여년의 삶을 동망봉

에서 통곡으로 채운 정순왕후. 그녀에게는 허경 스님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고, 청룡사는 그의 존재를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전해

주고 있다.

 

청룡사는 조선 여인들에게 있어서 해방구와 같은 곳이었다. 창덕궁 뒷켠에 있던 왕실사찰 정업원이 연산군의 횡포로 폐사되자,

이곳의 비구니들은 동대문 밖 자주동절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출가한지 40여년이 된 허경 스님이 초막을 짓고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정업원에서 쫓겨난 비구니들은 이곳에 와서 그 일대를 사찰군락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보문동 일대는 수많은 비구니들이 살아가는 사찰로 바뀌었다. 보문사와 청룡사, 미타사 등 비구니 사찰이 밀집돼 있는 보문동 일대

를 탑골승방이라 부른 것도 이때부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452년 조선 문종에 뒤를 이어 왕위에 단종이 오른다.  그 해 나이 겨우 12세, 문종은 자신이 병약하고 어린세자가 걱정되어 신하인

황보인과 김종서 등에게 부탁을 한다.

 

"경들은 세자가 즉위하면 나랏일을 잘 보살필수 있도록 보필해 주시오."

 

왕위에 오른 단종은 즉위한지 2년째 되든해인 1454년 정순왕후 송씨를 왕비로 맞이 한다.  왕비의 나이 15세였다. 

어린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은 단종의 미래는 밝지 않았다.

 

조선왕의 자리는 언제나 질투와 시기심으로 가득찬 주위의 권력다툼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숙부인 수양대군은 호시탐탐 조카의 보위를 노렸다.

 

문종은 집현전의 학사인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의 신하에게도  단종을 잘 보필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물거품

처럼 허사가 되고 말았다.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등의 무인세력을 휘하에 두고 기회를 엿보다가 단종 즉위 이듬해인 1453년 10월 김종서를 살해 한 뒤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사 조득관 등을 궐문에서 죽이고 좌의정 정분 등을 유배 시킨다.

 

이 모든일은 왕명으로 진행되었으나 단종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리고 문종의 동생<세종대왕의 셋째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안평대군도 강화도로 유배된 뒤 교동 도로 옮겨져  죽임을 당하고 만다.

 

피비린내 나는 왕권 다툼에 단종은  2년뒤인 1455년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이 되고 수양대군<세조>이 조선 7대 왕에 오른다.

정순왕후는 사정전을 나와 수강궁에 머문다. 왕대비의 그때 나이는 16세 였다

 

슬픈역사는 계속되었다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해인 1456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단종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모두

처형됐고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등된다. 

다시  숙부인 금성대군<수양대군 동생>이 경상도의 순흥<順興>에서 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사<賜死>되자 노산군에서 대역죄인으로

몰려 서인<庶人>으로 추락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왕대비에서 대역죄인으로 몰린 정순왕후도 더 이상 수강궁에 머물 신세도 못 되어 삼각산 청룡사로 오게 됐다,  평소 궁에서도

정업원<淨業院 = 궁안에 있는 법당으로 처음에는 내불당이라 불렀으나 유생들의 항의에 의해 신<身>, 구<口>, 의<意>삼업을 청정히 

           한다는 의미>에 가서 부처님께 예불하고, 경전을 독송하며 죄업을 참회했던  정순왕후는 궁밖으로 나가면서 출가를 결심했다. 

 

"나는 청룡사로 가련다' 너희들도 나를 따르겠느냐." "예. 저희들도 마마님과 함께 하겠나이다.  

 "함께 동행했던 시녀 3명과 후궁 2명이 일제히 대답을 하였다.

 

이른새벽 궁을 나선 이들은 총총걸음으로 청룡사로 향했다. 정순왕후 일행이 먼저 궁을 떠나 청룡사에 당도하자  점심나절이 넘었다.

절에서는 벌써 왕후를 맞을 준비를 해놓고 雨花樓<우화루>에 머물 처소를 마련해 놓았다. 어수선 했지만 정순왕후의 마음은 편했다.  

" 이 생을 청룡사에서 부처님을 시봉하면서 마감하리라·······."

 

저녁나절이 되자 단종이 궁을 나왔다는 전갈이 왔다. 정순왕후는 담담했다. "그래. 올 것이 왔구나.

"태연한척 했지만 마음에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마음을 추스리고자 경내를 거닐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울렸다. 

"마마.  상왕전하가 도착하였나 보옵니다." 초취한 모습을 한 단종이 청룡사로 들어왔다. 

날개가 부러진 새 같이 어깨에는 힘이 빠져 있었고 곧장 왕후에게 쓰러질듯했다.   

"상왕전하 오셨사옵니까.  어서 드시지요."  단종이 입을열었다 "

그럴시간이 없고. 내 영월이라는 곳으로 떠나야 하는 처지라 부인을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가려고 이리 들렸소." 

마음 한 켯이 쓰라리며 목젖에서 신물이 넘어왔다.  정순왕후는 이것을 참기 위해 마른 침을 삼키면서 말을 건넸다.

'그래도 밤이 으슥해 지는데 하룻밤을 지내시고 가심이 어떠할런지요."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를 듣자 단종은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생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부인의 간곡한 청이었다. " 그럽시다." 

방안에 든 단종은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자신에 편에 서 주었던 숙부 금성대군과 안평대군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도 죽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무서운 생각이 뇌리를 자꾸 파고 들었다. 

옆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는 부인의 흐느낌이 어깨에 와 닿았다. 

 "부인. 미안하오."

 

다음날 새벽일찍 단종은 떠날 채비를 했다. 雨花樓를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정순왕후는 주변 사람들은 물러가게 하고 마지막 이별인사를 나누었다.

 

"상왕전하 몸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부디 옥체를 보전하시어 기력을 되찾으시옵소서."  "내 그리 하리다."

비록 궁을 떠나는 몸이나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부인을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리다." 정순왕후는 단종을 마을 다리까지 배웅을 하였다.

후세에 그 다리는 '영원히 이별을 나눈 다리' 라 하여 영리교<永離橋>라 불렀고 다시 '영미다리' 로 불렸다고 한다.

 

단종을 떠나보낸 정순왕후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삭발염의를 했다. 함께 왔던 시녀 3명과 2명의 후궁도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시녀는 희안, 지심, 계지라는 법명을 각각 받았고 정순왕후의 상좌가  되었다. 후궁 김씨는 원경, 후궁 권씨는 혜경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녀의 나이 17세 였다. 

삭발하는 동안  정순왕후의  뇌리에서는 양반집 규수에서 왕비에서 비구니스님으로  이어지는 기구한 운명의 파노라마처럼 스치며

지나갔다.

 

허경스님이 된 정순왕후는 일체 밖에 세상과 인연을 끊고 매일 동망봉에 올라 오로지 단종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러나  이 애절한 기도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듬해  10월 말 영월에서 비보가 날아왔다.  "스님  상왕전하께서  승하하셨다고 합니다." 소식을 들은 허경스님은 조용히 동망봉으로

향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세속과의 인연은 끊었다지만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이 생의 질긴 업연을 녹이기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일설에는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안 왕후가 아침, 저녁 이 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다는 곡소리가  마을

아래까지 들리면 온 마을 여인네 들이 땅 한번치고 가슴 한번을 치며 동정<同情>하는 곡<哭>을 해 동망봉<東望峰>'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보위에 오른 수양대군<세조>은 근처에 '영빈전'<영빈정동=英嬪貞洞 이라고 전함> 이라는 아담한 집을 짓고 식량을 내렸으나 허경스님은 끝내 거부하고 청룡사에서 82세 까지 살다가 입적했다고 한다.

 

불교가 배척당하는 시대라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았던 쳥룡사 비구니 스님들은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생계를 꾸렸다고 하며

그 흔적은 지금도 인근 원각사 옆 바위에 '자주동천' 이라는 글귀로 남아 있다. 우물도 복원돼 있다. 

 

<한경지략>에는 허경스님을 동정한 성 안팎 백성들은 끼니때마다 푸성귀를 갖다 대 주곤 했는데 부녀자들이 많아 긴 행렬을 이룰 정도

였다고 전한다.

궁에서 이를 못하게 말리자 여인들은 지혜를 모아 청룡사에서 멀지 않은곳에 푸성귀를 파는척 모여들어 몰래 허경스님에게 갖다 주곤

했다고 전한다.  이것이 동쪽 남쪽 마을인 '여인 시장 터' 의 유래가 됐다.

 

허경스님은 입적후 단종의 누님인 경혜공주의 시집인 정씨 집안의 묘역<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묻혔다가  177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년>11월 6일 단종 복위와 더불어 정순왕후로 복위 되어, 종묘에 신위가 모셔지고  능호를 사능이라 했다.

 

후대왕인 영조는 1711년에 창덕궁을 들렸다가 지난날의 일을 듣고 나서 청룡사 "정업원 터" 비석 정면에는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써서 비석을 세우게 하고, 

비석 뒷면에는 定業院 舊基 歲 辛卯 九月 十六日飮제書  즉 "정업원 옛터 辛卯年<영조 47년> 9월 6일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

비각 현판에 글씨는 "前峯後巖於千萬年<전봉후암어천만년>" 즉 "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오리" 이란 친필을 내렸다. 라는 글이 있다.

 

또 '동망봉<東望峰>'이라는 글자를 새기게 했으나  일제 때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가 깨어져 나가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찾아가는 길 = 

지하철 6호선 창신역 하차 3번출구로 나가서 창신초교<낙산으로오르는길>쪽으로 나와 곧바로 난 도로를 돌아 5분정도 걸어가면

청룡사가 보인다  가는중에 정업원구기 가 있고 앞쪽에 동망봉이 보인다.

청룡사를 끼고 좌측으로<낙산쪽 으로> 오르면 원각사가 나오는데 그 옆에 복원된 초가 뒤뜰에 자주동천이라는 글귀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우물도 함께 복원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