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남양주 봉선사의 설화, 세편

백련암 2011. 7. 23. 14:07

봉선사 일주문

 

대웅전

 

 

①광릉택지(光陵擇地)

 

광릉에 모셔진 세조때에 보한재 신숙주(申淑舟)라는 대관이 있었다.

그는 일찍기 광릉자리를 신후지지(身後之地 : 죽은 뒤에 묘지)로 정해 놓고, 은근히 초당까지 지어놓고 드나들었느니

지금 봉선사 서쪽 약 1킬로미터 떨어진 숙주암터가 바로 그곳이다.

 

그런데 이 소식이 세조에게 들어갔다. 그때까지 마땅한 신후지를 정하지 못했던 세조로서는 보한재의 신후지가 매우 뛰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그렇다고 점잖은 체모에 달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지관 하나를 데리고 미복으로 사냥길을 떠나 이쪽으로 와서 살펴보니 매우 구미에 당기는 명당이었다.

그는 곧 이 근처에 유명한 지관이 있다는 말을 들어온 터라 곧 그를 찾아가 그를 찾아가 그로 하여금 감정을 해보게 할 생각을 떠올랐다.

그들이 지관을 찾아가는 도중 어느 길모퉁이에서 묘를 쓰고 있는 일행을 만나게 되는데, 자신이 보기에도 한 금정만 올려다 쓰면 매우 명당인데 지금그 자리에다 묘를 쓰면 그날 하관 즉시에 꼭 상주가 급살할 자리였다.

깜짝 놀란 세조 일행은 첫째 미구에 다가올 급살광경이 무서웠고, 또 하나는 어느놈의 지관이 이렇게 자리를 잡았을까?

모르고 그랬다면 모르면서 아는체 한 죄가 크고 알면서도 그랬다면 천기를 희롱한 죄가 죽여 마땅할 것 같았다.

그러나 상주사 급살당한 시간은 다가오고, 상가에는 겁보리 한 되도 없이 이장할 능력도 없다니 어쩌라?

그래서 이생원(세조)은 선심쓰기로 겉보리 3말 값을 주어 이장케 하고는 그 유명한 지관을 찾아 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광릉 자리를 점검해 볼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그러한 기대가 아니라 지관을 혼짱을 내 주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알고 그랬다면 엄벌해야 되겠도 모르고 그랬다면 꼭 엄벌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일행이 그 집엘 갔을 때는 일모 주인은 나뭇짐을 지고와 마당에다 꽝하고 부리고는 손님에게 개의치 않고 부엌에 가서 냉수 한그릇을

떠다가 시원스리 마시고나서야 나그네에게 다가오며, 어디서 오셨소 한다.

나그네 일행은 불쾌하기 그지 없었다.

이 죽일놈의 영감쟁이 맛좀 봐라 하는 생각으로 주인장. 저기 산비탈에 오늘 장사 지내는데 그 택지를 하셨다지요?

예. 그렇소.

왜 한 금정만 올려다 썼으면 금시발복을 할 터인데 지금 그 자리를 정해 주셨습니까?

그 자리는 하관시에 상주가 즉사 할곳인줄 아셨소? 모르셨소? 지관의 양심이 그래서야 되겠소이까 하고 자못 위협조로 나무랬다.

그러자 그 노인은 껄껄 웃으면서 앗다 그 사람들. 아직 젊은 양반들인데 다행히 지서(地書)는 좀 읽은 것 같아 대견스러우나

아직은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는군.

암 그 자리는 그날 신시에 상주가 급살 당할 자리고 그 윗자리가 금시발복할 자리인것만은 분명하나 저기 저기 산세를 보면

겉보리 3말을 공짜로 얻어 먹고 써야 효력이 나게 되었고, 오늘은 꼭 겉보리 3말이 공짜로 생기게 된 줄은 몰랐군.

차분히 공부 좀 더 하시게라고 말한다.

아차. 일행은 깜짝 놀라 땅에 부복하여 사과하고 문제의 땅을 보니 과연 대지라 했다.

이런 소식을 전해 들은 신숙주 선생은 자신의 속마음은 숨기고 이 땅을 세조의 신후지지로 천거하고

자신은 다시 별내면 고산리로 옮겨 정했다고 한다.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②어실각(御室閣)과 능참봉(陵參奉)

봉선사 큰법당 바로 동쪽에 빈터가 하나가 있으니 그것이 어실각 터이다.

괴애 김수온(金守溫)의 봉선사기에?능침과 산등성이 하나를 넘어 진영을 모실 전각을 절 곁에 짓고...

?라고 한것이 바로 이것인데, 6.25사변때 소실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각의 서편엔 세조대왕 동편엔 정희왕후 윤씨의 위패와 영정을 모셨었고,

각의 정면에 숙종대왕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 인경왕후 김씨, 영빈김씨 등의 위패가 봉안되었고,

어실각 앞에는 홍살문이 있었다.

이 어실각으로 인해 봉선사 주지는 자동으로 봉향판사가 되어 춘추 제향때에는 관복을 입고 잔을 드리는 영광고를 누렸고, 또 간혹

설익은 양반 나부랭이가 와서 서툴게 굴면 봉선사 스님네는?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고개를 바짝 들고 혀바닥을 나불거리는거냐?

저 홍살문이 보이지 않느냐.?하고는 판사관무헌(判事管務軒) 앞으로 끌고가서 판사 앞에서 볼기를 치는 재미도 있었다.

그러나 광릉에 주재하고 있는 능참봉이 문제였다. 그 이유는 봉선사 젊은 슬여들이 순번으로 가서 그의 시중을 들어 주기로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몸종노릇을 해야 한다. 방을 청소하거나 타구를 대령하는 일, 요강을 씻어 오는 일, 담뱃불을 붙여 올리는 일 등이니

그 얼마나 메시꺼운 일이겠는가?

요즘 형편으로는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그때는 스님네의 인심도 순후했거니와 능참봉의 마음에 들게 시봉을 한 사람에게는 충남 서산군 해미에 있는 토지의 추수관으로 발탁되는 희망이 있었다.

그때, 사중 땅이란 것이 모두 나라에서는 하사한 것이기 때문일 터인데, 사중 토지의 추수관, 즉 추수책임자를 당사 주지가 명하는 것이 아니라 능참봉이 마음에 드는 스님을 뽑아 이 사람을 보내도록 하라고 지시하게 되었으니 능참봉의 마음에 들려고 앞 다투어 혼신의 힘을 기우려 시봉을 했다고 한다.

추수관으로 가면 무슨 이득이 있는가? 천석지기 가까이 되는 논의 소작인들의 융숭한 대우, 선물, 그리고 약간의 계수조작으로 이른바 송죽거리가 마련되기 때문이니, 송죽거란 논마지기나 사서 여생동안 죽이라도 끊이지 않을 만치 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서로 돕고, 또 도움을 박는 처지라 했는지도 모른다.

 

관세음보살

 

③화봉대사(華奉大師)의 선행(善行)

포천군 군내면 어귀에는 지금도 들 복판에 용화사(龍華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은 원래 길어귀에 서 계시던 석불을 허술한 건물로

가리우고 재가불자가 모시고 있는 실정이다.

이 석불은 입상인데, 그 높이는 9척 정도 두 눈썹이 움푹 패인 것이 특징이니 이 처럼 눈썹이 움푹 패인 이유는 전부터 이 석불의 눈썹을 긁어다 먹으면 막태에 유효하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의 화봉스님은 봉선사의 승려로서 소시적부터 탁발로 생업을 삼는 분이었다.

대개의 탁발승의 경우 젊어서 부지런히 벌어서 논마지기나 장만하고는 중년이후부터는 그 추수를 받아 한 곳에 안주하여 편안히

지내다가 사후에는 제위답(祭位畓)으로 사중에 넣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이 화봉스님은 그렇지 못했다.

첫째 본인이 곡차를 좋아했고 가만히 한곳에 있지를 못했고, 딱한 사람들의 사정을 모르는체 하지를 못했다.

그래서 집집마다 다니면서 광세를 치며'이등도사...'를 목빠지게 부르다보면, 부유한 집보다는 딱한 처지에 놓인 집을 더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러니 그들의 사연을 들어주다 보니 동냥은 진척이 없었다.

그런대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동네어귀의 어느 목로집에 가서 우선 한 되 퍼 주고, 곡차 한잔 하고 또 한 되 퍼주고 법값과 방값을

제 하고는 나머지가 얼마가 되었건 낮에 보았던 딱한 사람들을 불러 골고루 나누어주고는 손을 터는 것이다.

이렇게 지내니 무슨 재물이 모이겠는가?

그러저럭 세월이 흘러 노년에 이르러 몸도 곤하고 의욕도 떨어진 어느 늦가을 그의 행보가 포천고을에 닿았다.

예사때와 같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쉬려니 달은 너무나 밝고 주막집이라 해도 변변치 않고 해서 얼근한 김에 석불님 뒤로 가서

석불님과 등을 대고 기대 앉아서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얼마쯤 자났을까? 공기도 차고 소피도 보아야겠고 해서 눈을 뜨니, 돌연 저쪽에서 인적이 나더니 차츰 가까워지는 것이다.

호기심에 고개를 숙여 엿보니 분명히 모녀 같은 두 아낙이 무엇인가를 이고 들고 와서 석불님 앞에다 늘어 놓는 기색이었다.

장난기가 심한 노장인지라 꼼짝도 않고 하회를 기다리는데 얼마쯤 진설이 끝나더니 모녀는 열심히 빌고는 절을 하고, 절을 하고는 또

빌고.... 한참 되풀이하더니, 마침내 어머니로 보이는 아낙이 손을 비비면서 축원을 하는데 그 개요는 대략 이렇다.

 

어지신 석불님. 그저 저희 모녀의 소원 하나를 꼭 들어 주사이다. 이 철없는 것이 어쩌다 뒷집 머슴놈과 만나서 못된 씨를 갖었으니

어찌합니까.

그저 다른 일로 벌을 주시면 무엇이나 달게 받겠지만 이 잘못된 씨만은 제해 주십시오. 평소 영험이 있으신 눈썹이시니 저희들에게도

영검을 내려 주심시오.

이렇게 수도 없이 반복하는 동정으로써 화봉스님은 사건의 개요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죽은듯이 꼼짝않고 석불님 뒤에 앉았는데 축수가 끝난 모녀는 행동으로 들어가려는 것이다.

옛다. 내가 이렇게 엎딜터이니 너는 내 등에 올라서서 숟가락 총으로 석불님 눈썹을 긁어 그 가루를 한 손에 받아라.

이렇게 말하고는 곧 행동으로 들어가 처녀가 눈썹 긁는 소리가 늦가을 새벽 하늘을 진동시킨다.

이때 스님은 심술궂게도 그 굵은 목청을 높여?아이고 눈썹이야?했다.

이 소리에 위의 딸도 밑의 어머니도 혼비백산하여 제상 위에 나동그라지니 촛불은 캄캄, 제물그릇은 왈그락 땡강, 실로 순신간의

난장판이 되었다. 그런 정황에 모녀는 앞뒤를 살필 겨를도 없이 종지꼽아 날살려라 하고 도망을 갔다.

그들이 간 뒤에 이 장난기가 심한 노장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앞으로 나와 아직 쏟아지지 않은 음식과 곡차를 챙겨 포식을 하고는

이튿날 느지막하게 일러나 그릇들을 대충 챙겨 어제 저녁에 도망가던 그 지점으로 가서?이게 누구네 그릇이냐고 묻고 다닌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그릇 주인은 얼른 나와 스님을 맞아다가 쌀 한말을 드릴테니 입을 다물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스님은 그 어디 쌀 한말로 될 일입니까.

다니다 보면 딱한 사람이 하두 많으니 그때그때 그들에게 주십시오. 석불님의 음덕은 꼭 계실것입니다. 하고 떠나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고 끝내 소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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