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암은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신라선덕여왕 15년(서기 646년))하기에 앞서 수도하던 곳이라니, 절골의 발원지며 통도사의 모태인 셈입니다.
통도사의 창건주 자장율사(慈藏律師)가 통도사 창건(서기 646년)에 앞서 수도하던 곳이다.
옛 이름은 자장방이라 하여 통도사 경내의 칠방의 하나로서 자장율사의 제자들이 매양 수도하던 암자이다.
창건이후 중건 사실에 대하여는 미상이나 회봉대사(檜峰大師)에 의하여 중건 되었다하며 1963년 용복화상(龍福和尙)이 중수하였다.
그 후 1987년 부터 1993년에 이르는 사이 현 문화상에 의하여 감원실, 금와당, 취현루 등 3동이 중건 되어 오늘에 이른다.
법당은 암벽을 의지하여 서향 하였으며 그 옆에는 1896년에 조성된 약 400m에 달하는 마애불상(磨崖佛像)이 조각되어 있다.
법당 뒤쪽 암벽에는 석간수(石間水)가 나오는데 자장율사가 손가락으로 바위에 구멍을 뚫어 금개구리를 살게 한 금와공(金蛙孔)이 있어 유명하다.
◈이 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하권(下卷)『승유어급변화금와(僧遺魚及變化金蛙)』에 말하기를
"축서산 통도사의 자장암 결의 커다란 암벽에 손가락 하나가 들어 갈만한 구멍이 있는데 그 속에 작은 개구리가 있다.
몸은 청색이고 입은 금색인데 어떤 때는 벌이되기도 하여 그 변화 하는 것을 헤아릴 수 없다.
여름철에 바위가 과열되면 뜨겁기가 솥과 같으나 그 위를 뛰어 다닌다. 절의 스님(寺僧)이 이를 일러 금개구리라 하더라.
그런데 이 금개구리는 도무지 山門 밖을나가지 아니 한다고 하므로 한때 어떤 관리가 그 말을 믿지 아니하고
그 금개구리를 잡아 함속에 넣어 단단히 닫고서 손으로 움켜쥐고 돌아가다가 도중에 열어 보니 없어졌다.
세상에 전하기를 그 개구리는 자장율사의 신통(神通)으로 자라게 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지금도 이 금개구리는 불심이 지극한 불자에게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세칭 금와보살이라 한다.
▲가는 길목에서 볼 수 있는 누런 벼 이삭이 마음을 풍료롭게 한다. ▲세심교를 지나 초소가보이는쪽(왼쪽)으로 가다보면 자장암이 나온다
풍요로운 논 밭만있는것이 아니다. 다람쥐도 한몫을 해 주는 즐거운 자장암길이였다 주변이 너무 아름답다.
기암과 낙낙장송이 어우러진 곳에 자리 잡은 관음전
일주문을 대신 한듯 보이는 문으로 들어서면 관음전으로 들어간다 경내이다. 앞에는 요사채이다
관음전 뒤쪽은 바로 기암괴석에 낙낙장송이 어우러져 있다.
감로전 우측으로 있는 전각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이며 요사이다. 법당 왼쪽에 세워진 출입문으로 들어섭니다.
문짝이 달린 이 출입문엔 "자장암"이란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이 자장암 문은 여닫는 두 짝의 문으로 이 문으로 들어가야만이
관음전외 마애불이나 자장전이나 모든 전각들을 볼 수 가 있습니다. 그 유명한 금와보살이 이 울타리 안에 있습니다.
관음전 뒤쪽은 바로 기암괴석에 낙락장송이 어우러졌던 바로 그 비경입니다. 둥글둥굴한 바위들이 부드럽게 산세를 이어갑니다.
그 바위 틈새로 죽선을 펼친 듯 잘 생긴 소나무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습니다.허전하지도 빼곡하지도 않게, 넘치지도 모자람도 없이 눈길이 시원할 만큼
공간을 두고 휘휘 가지를 드리웠습니다. 잔디마당엔 디딤돌이 징검다리처럼 놓여있고 이 디딤돌과 나란하게 관음전이 있습니다.
자장암에는 이렇듯 거북바위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애불 뒤쪽으로 호랑이 형상을 한 바위, 코끼리 형상을 한 바위,
쥐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도 있다고 합니다. 어떤 바위는 법당을 신장하고 어떤 바위는 염불소리 들으며 업보를 참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병풍처럼 펼쳐진 바위 삼면에 암각된 돌부처님들...
1896년에 조성된 약 400m에 달하는 마애불상(磨崖佛像)아미타불 좌우에 관음상도 함께 있다.
평풍을 펼쳐 놓은 듯 "⼌" 형태의 자연석 삼면에 아미타부처님과 대세지보살 그리고 관세음보살상이 암각되어 있습니다.
관음전 우측으로 바위부처님인 마애불이 있습니다. 자연바위를 " ⼌" 자로 다듬고, 앞쪽을 조금 더 벌려 세운 병풍 같은 바위 삼면에
마애불이 암각되어 있다. 정면이 되는 중아부에는 아미타좌불이 암각되어 있고, 좌우 각각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협시불로 암각되어
있다. 중앙의 아미타부처님은 가슴까지 오른손을 추켜올려 엄지손가락과 검지를 맞댄 중품상생의 수인을 하였고
하단전 부위에 얹은 왼손은 엄지손가락과 약지를 맞대 중품하생의 수인을 하셨습니다.
별다른 문양이 없는 두광에는 군데군데 진언 중의 진언이라는 "옴"자가 범어로 음각되어 있습니다. 마애불들이 자칫 그 균형적
측면에서 불두와 불신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곳 아미타부처님은 아주 균형적입니다.
어깨부터 흘러내린 가사의 곡선미와 장삼자락의 펄럭임이 아주 사실적으로 암각 되어 있습니다.
접어진 병풍처럼 면을 달리해 암각된 왼쪽의 대세지보살이나 오른쪽 관세음보살은 입상으로 매우 섬세하고 부드럽게 암각되어 있습니다.
주불로 모신 아미타좌불의 가슴높이 크기인 두 협시불 역시 화려한 문양은 없으나 부드러운 곡선만으로도 원만함과 대원력
그리고 자비로움이 다 표현되어 있습니다.
왼쪽 면의 대세지보살 아래쪽에 "聖上卽位 三十三年 丙申 七月 日 化主 吉山 定一 金翼來, 金弘祚, 丁泰燮, 李善同, 朴漢淳, 張雲遠
(성상즉위 삼십삼년 병신 칠월 일 화주 길산 정일 김익래, 김홍조, 정태섭, 이선동, 박한순, 장운원)" 라는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어
마애불의 조성일과 화주 명단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성상은 고종을 말합니다. 고종즉위 33년 즉 1896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96년은 조선개국 505년이 되는 해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기 시작하고, 서재필 등이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독립신문이 창간된 해 이기도 합니다.
의병이 일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될 때 이곳에서는 국운회복을 염원하며 바위 갈아 부처님을 모신 모양입니다.
이 마애불은 110년 전에 불각된 것이니 다른 마애불들에 비해 그 역사가 유구하지는 않으나 부드러우면서도 사실적인 곡선미가 뛰어 납니다.
이 마애불과 관음전 사이에 작은 길이 있습니다 그리로 들어가면 금와보살 바위가있습니다.
아마도 주지스님이 기거하시는 건물인 것 같습니다. 무슨"향□다실"이라 쓰였는데 자세히 못봐 알 수가없다.
*건물이 너무 아담하고 예쁘게 아름답다*
관음전 뒤 바위등에 모셔져 있는 탑
관음전과 경내
이 날아마도 제사가 있었나보다 법당이 좁으니 마당에다 돗자리를 깔아놓았고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바람에
제대로 보지를 못하고 왔다 다음엔 꼭 다시 한번가서 제대로 보고오고 싶다.
법당내부
법당 바닥에 솟은 칼바위
관음전 법당바닥에 솟아오른 바위는 이렇듯 문지방 밖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바위는 거북형태를 하고 있는 산세의 꼬리 부분이라고 합니다.
거북이의 꼬리부분의 칼바위 정말 밖으로 나와있는 바위는 거북의 뒷태인 꼬리를 그대로 닮았다.
정말 독특한건 관음전 중간쯤에 있는 법당 내외에 걸쳐있는 칼바위 웬만하면 터 담으며 깨 버렸을 법도한데 그러지 않고 바닥 돌을 그대로 살려
법당을 짓고 법당 밖에 있는 바위가 문지방을 지나 법당 바닥에도 예리하게 솟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법당바닥에 깔린 돗자리도 솟아오른 바위 모양으로 돗자리를 솟아오른 바위 모양으로 잘라 갈무리를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글입니다.
바위를 왜 그대로 놓고 법당을 지었을까? 우선은 있는 그대로에 필요한 부분만을 덧댄 조화를 추구한 듯하다. 마애불 바위를 손상시키지 않으며
어색하지 않는 전각을 구상하다 보니 지붕도 조금은 생뚱한 두 가지 양식을 혼용하였듯, 있는 그대로를 살리며 전각을 세우느라
이렇게 바위를 남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있는 그대로 조화를 맞추려는 마음, 순리에 순응하려는 그런 마음이 이런 독특함을 남긴 듯하다. 이러한 조화는 단순히 주변경관이나
건물양식에 그치지 않고 부처님의 세계라 할 법당 안과 밖을 이렇듯 단절하지 않아, 밖이 곳 법계이며 속세가 곧 법계임을 나타내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경계를 나타내는 문지방을 그댜로 관통해 있으니 법당 안과 밖을 일치시키는, 불이(불이)의 의미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건 날카로운 돌을 보며 수행정진의 채찍쯤으로 삼았을지도 모른단 생각입니다.
지칫 무뎌지거나 담담해 질 수 있는 구도자의 마음을 이 칼바위처럼 갈고 닦으라는 표상으로 남긴 건 아닐까 생각됩니다.
참선이나 기도를 하다 졸리기라도 하면 잠시 이 바위에 걸터앉는 것만으로도 모든 잡념쯤은 사라질 듯합니다. 바위의 차가움이 정신을 맑게 하고
그 날카로움이 지세를 가다듬게 할 테니 말입니다. 아무래도 그 정설이 궁금해 범준 스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관음전이 들어선 자리는 전체적으로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북의 머리는 관음전 뒤쪽 바위에 있으며,
그 거북의 몸통에 해당하는 자리에 관음전이 세워 졌답니다. 거북이 등자리에 관음전이 들어서니 그 꼬리가 출입문에 걸치게 된 이라고 합니다.
치켜 올라간 꼬리가 다 묻히도록 땅을 돋고 전각을 지으면 그 높이가 너무 높아지고, 파괴하거나 자를 수도 없으니
이렇듯 꼬리를 살려 전각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 바위가 분명 거북의 꼬리기에 지금도 불단에 올렸던 다기의 청수는 반드시 그 꼬리바위에 부어준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칼바위처럼 보였던 바위 형상이 거북이 꼬리형상으로 보입니다.
생물뿐 아니라 자연의 산세에서도 그 존귀성을 부여하는 불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관세음보살
일명 칼바위라고 한다
관음전이 들어선 자리는 전체적으로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북의 머리는 관음전 뒤쪽 바위에 있으며
그 거북의 몸통에 해당하는 자리에 관음전이 세워졌답니다.
거북등자리에 관음전이 들어서니 그 꼬리가 출입문에 걸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치켜 올라간 꼬리가 다 묻히도록
땅을 돋고 전각을 지으면 그 놓이가 너무 높아지고 파괴하거나 자를 수도 없으니 이렇듯 꼬리를 살려 전각을 지었다고 합니다.
3층석탑, 자장전, 자장전 옆에 수세전이 있다.
이 마애불 앞에는 그리 높진 않은 3층 석탑이 있으며, 오른쪽으로 壽世殿(수세전)이 있습니다.
다른 절에서는 인간의 수명과 길흉화복을 관장한다는 칠성신을 봉안하고 칠성각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수세전이란 편액을 달았습니다.
법당이 있는 곳으로 들어서는 문 바로 우측에 마애불이 있고, 문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정면으로 보이는,
수세전과 직각을 이루고 있는 곳에 자장율사를 기리는 자장전이 있습니다.
자장전에 모셔져있는 자장율사(慈藏律師)
앞에 보이는 통도사 천왕문 야간축제
▲관음전 위에 있는 낙낙장송 ▲자장암 감로수
*전날 야경 등축제 사진을 찍느라고 ISO<감도>높이 조절한것을 깜빡.... 그러다 보니 노이즈가 장난이 아니다 어찌 이런 실수를
*설법전 쪽으로 나와 계곡과 통도사의 담길을 따라 계속걷다 보면 산내암자들의 표시팻말이 나온다 팻말을 따라 가다보면 가고 싶은 암자를 찾아가기
쉽게 안내표지를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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