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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성철, 혜암, 일타대 종사외 사리탑, 원경왕사비, 길상탑, 장경각, 당간지주

백련암 2012. 3. 18. 01:09

♠성철대종사 사리탑♠

소중한 가르침, 무소유의 청빈한 삶, 장좌불와의 올곧은 수행정신으로 유명하신 성철큰스님의 부도탑입니다.

 

 

퇴옹당 성철 대종사 사리탑(1912년 ~ 1993년)

나를 찾아가는 禪의 공간

 

성철스님<1912년 ~ 1993년>은 해인총림의 방장과 대한불교 조계종의 6대. 7대 종정을 역임하며 올 곧은 수행정진과 중생을 향한 자비의 실현.

서릿발같은 사자후로 근. 현대 한국불교사에 큰 영향을 끼치셨다.

성철스님의 사리를 모신 이 사라탑은 통도사 적멸보궁을 기본형으로 하여 우리나라 전통 부도의 아름다움을 현대적 조형언어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가운데 구는 완전한 깨달음과 참된 진리를 상징하고, 살짝 등을 맞대고 있는 반구는 활짝 핀 연꽃을 표현하며, 크기가 다른 정사각형의 3단 기단은

계. 정. 혜 삼학과 수행과정을 의미한다.

사리탑을 둘러싸고 있는 참배대는 앞쪽에서 뒷쪽으로 가면서 서서히 높아졌다가 낮아지는데, 이것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흐르는 시간의 무한성을 상징한다.

1998년 성철스님의 열반 5주기에 회향하였으며, 여기는 성철스님께서 늘 말씀하신 "자기를 바로 보라"는 가르침이 살아있는禪 의 공간이다.

 

해인사 성철스님문도회

 

 

스님을 이야기 할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를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스님 말씀 중의 일부이구요,

전체를 말하면 이렇습니다.

 

.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라.

.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은 알겠는가 ?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혜암대종사♠

혜암대종사 행적비

 

 

혜암대종사 사리탑(1920년 ~ 2001년)

 

스님은 그렇게 평생을 올곧은 수좌의 모습으로 정진하다가 2001년 12월31일 세납 82세, 법랍 56세로 원당암 미소굴에서

후학들에게 “인과가 역연하니 참선 잘하라”고 당부한 후

“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 마음 또한 머물 바 없도다. 무쇠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 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했다.
혜암 스님이 입적한 후 미소굴에는 스님의 유물로 주장자, 안경, 회중시계, 돋보기, 그리고 ‘금강경’ 한 권이 있을 뿐이었다.

 


♠일타대종사♠

 

일타스님의 행적비

 

 

 일타스님의 사리탑(1929년 ~ 1999년)

 

 

♠영암대종사 사리탑♠

 

 

♠영암대종사 사적비♠

 

 

♠명진대화상 사리탑♠

 

 

♠명진 대화상 행적비♠

 

 

♠경하율사 탑♠

 

 

♠고봉선사 탑♠

 

 

해인사 碑林

 

해인사 입구 비석거리에는 해인사 사적비를 비롯해 20여기의 공덕비들이 안치되어 있다.

비석거리는 =  해인사 사적비를 비롯한 20여기의 공덕비들이 일주문에 다다르기 전 길 옆에 안치되어 있다.

 

 

 

 

해인사 길상탑 (陜川 海印寺 吉祥塔) : 보물  제1242호, 시대 = 통일신라.  소재지 = 경남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85, 해인사 (치인리)

운양대 묘길상탑(雲陽臺妙吉祥塔) = 보물 제 1242호  시대 : 통일신라 895년

 

해인사 일주문 가기 전 위치한 탑으로, 일반적인 절의 건물 배치와는 무관하게 길가에 세워져 있다.

2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구조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갖추고 있다.
바닥돌 위에 아래층 기단을 받고, 윗면에 얇은 괴임을 새긴 후 위층 기단을 얹었다. 위층 기단은 하나의 돌로 짜여져 다른 탑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모습이다.

탑신은 1층의 몸돌이 2·3층의 몸돌보다 크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각 층 모두 5단이다.

지붕돌의 처마는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전체적으로 경쾌한 느낌을 준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네모난 받침돌만 남고 모두 없어진 상태이며, 받침돌 윗면에 철주를 꽂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탑에서 나온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 중 조그만 탑이 157개가 있으나, 소탑은 원래 99개, 77개를 두는 것이 원칙이므로

19개는 없어진 듯 하다.  탑에 대한 기록인 탑지(塔誌)는 4장인데, 통일신라 후기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글에는 신라 진성여왕 8년(895) 통일신라 후기의 혼란 속에 절의 보물을 지키려다 희생된 스님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탑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탑의 앞에있는 안내문의 내용=
전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소탑(小塔)으로,

탑지의 기록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서기 약 900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당시 오랜 전쟁으로 굶주린 병사들을 위해 해인사의 훈혁스님이 농촌에서 벼 한 다발씩을 덜어 군량미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이 탑을 만들었다 한다.

그래서 이 탑을 전몰병사와 호국안민을 위한 호국탑(護國塔)이라고 부른다. 높이 약 3 미터, 3층탑으로 전형적인 신라형 탑이다.

 

 

五臺山寺 吉祥塔誌(오대산사 길상탑지) : 시대 = 南北國時代 중 統一新羅(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진성여왕 9년(895년)

僧訓(승훈) 지음,  釋喜(석희)  씀

 

합천 해인사 묘길상탑에 봉안되었던 탑지 4매 중 하나로, 원래는 오대산사의 길상탑을 위한 것이다.

탑지 4매는 각각 해인사, 운양대, 백성산사, 오대산사를 위한 것이었으나,  어떤 연유로 인해 해인사 묘길상탑에 함께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앞면에는 통일신라 말 진성여왕때  대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혼란상과 전란 중 사망한 승군들의 넋을 위로하며

길상탑을 세운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뒷면에도 승군을 애도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陜川 般若寺址 元景王師碑) : 보물  제128호 고려시대

소재지 = 경남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73-4 (치인리)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합천군

 

원경왕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碑)로, 반야사의 옛터에 있었던 것을 1961년에 해인사 경내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거북받침돌과 비몸,

지붕돌을 갖추었는데, 각 부분이 얇은 것이 특색이다.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는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숙종 9년(1104)에 승통(僧統)이 되었다.

예종의 스승이 되기도 하였고 그 후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하자 왕은 ‘원경’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비문은 김부일이 짓고 글씨는 이원부가 썼다.

고려 인종 3년(1125)에 만들어진 이 비는 조각기법이나 간단한 형태의 지붕돌 등에서 고려 중기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 참고로 元景王師 樂眞의 생몰연대에 대한 의견은 대략 3가지 정도가 있다.
1. 葛城末治 설(조선금석고) : 1050-1119
2. 李弘稙 설(국사대사전, 한국인명대사전) : 1045-1114
3. 許興植 설(한국사 연구 35) : 1048-1116

 

원경왕사비<元景王師碑>

고려시대의 고승 원경왕사(1045년 ~ 1114년)를 기리고자 인종 3년(1125년)에 세운 碑다.

가야면 야천리 반야사 터에 있던 것을 1961년 해인사 경내로 옮겨왔다. 거북받침돌, 비몸, 지붕돌을 갖추었고, 각 부분이 얇은 것이 특징이다.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는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숙종 1년(1104년)에 승통이 되었다.

예종 때 왕사가 된 후,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하였다.

 

 

일주문

일주문의 주련

歷千劫而不古(역천겁이불고) 천겁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요 

亘萬歲而長今(긍만세이장금) 만세를 뻗쳐도 항상 오늘

 

 

 

= 당간지주=

 

해인사 일주문 앞에 세워져 있는 이 지주는 불, 보살의 위신력과 공덕을 표시한 깃발을 매어 달기 위해 기둥을 세우는 곳 이다.

 

 

제목 = 부처의 소리

이 조각품을 보면 착시현상을 느낀다 나만 그런가...

 

 

고사목<枯死木>

 

이 나무는 신라 제 40대 애장왕 3년(서기 802년)순응과 이정 두 스님의 기도로 애장왕후의 나치병이 완치되자 왕이 이 은덕에 감사하여

두 스님이 수행하던 자리에 해인사를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때 이를 기념하여 식수한 나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느티나무는 1200여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해인사와 더불어 성장하여 오다가 1945년에 수령을 다하여 고사(枯死)하고

지금은 둥치만 남아 해인사의 장구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장경각 오르는 계단

 

 

脩多羅藏 <수다라장> 고려대장경이 모셔져 있는 곳

 

팔만<81,258매>대장경이 있다. 우리의 대장경은 정확한 명칭은 고려대장경이라 하는 것이 맞다고 한다.

이유는 중국, 일본, 거란, 몽고등에도 팔만대장경이 있습니다. 구분이 필요하기에 고려대장경이라고 하는것입니다.

대장경은 자작나무와 산벗나무로 이루어졌고 그외 돌배나무, 떡갈나무 등  과거 우리 산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장경각 가파른 계단위 팔만대장경문을 지나면 수다라전과 법보전, 그리고 동서 양쪽의 건물등 4동의 건물로 되어있다.

대장경은 보통 삼장을 합하여 말하는데

삼장이란 =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경장과 계율을 전하는 율장 또한 부처님의 말씀을 해설한 논장이있다.

손오공이 서역을 갈 때 호위한 분이 바로 삼장법사이다. 지금도 남방불교에서는 삼장법사라는 칭호는 아주 도력이 높은 스님을 지칭한다고 함

 

장경각은 살창으로 된 문이 있어 공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데 앞쪽에는 아래 창이 크고 위가 작은 반면

뒷쪽은 아래가 작고 위가 큰 형태로 되어있는 등 아주 과학적인 설계가 돋보인다.

 

 

장경각 안에 모셔져있는 대장경

우리의 문화유산이면서 세계의 문화유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