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인연

부처님의 이야기속 사람들 = 바라드와자, 야사(Yasa), 위두다바

백련암 2011. 10. 18. 16:09

[붓다를 만난 사람들] 33. 바라드와자

 

부처님 꺾으려다 법문에 감화 승단에 귀의하다

 

 

                                                 불교 비난 일삼으며 불자인 아내 살해위협까지
                                                 출가 사문으로서 수행에만 전념 아라한과 증득

 

 

불교가 발생한 기원전 6세기 무렵, 인도의 종교계는 기존의 바라문교와 이에 대항하는 사문이라 불리는 다양한 사상가들의 등장으로

복잡한 상황이었다. 부처님 역시 사문종교가의 한 사람으로 등장하여 당시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던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했다.

그런데 배화교도였던 캇사파 3형제 그리고 회의론자 산자야벨라티풋타의 제자였던 사리풋타와 목갈라나 등의 대규모 귀의로부터 알 수 있듯이 불교는 등장 초기부터 다른 종교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불교교단의 급속한 발전은 타종교인들에 의한 불교 폄하, 비난, 중상모략 등을 불러일으킨다. 부처님의 왕성한 전법 활동으로 바라문을 비롯한 이교도들의 공양물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이를 시기한 일부 종교가들은 때로는 아주 유치한 방법으로 부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했다.

예를 들어, 아지비카교도들은 싱카라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부탁하여 그녀가 부처님의 아기를 가졌다는 소문을 퍼뜨려 부처님의 명성을 떨어뜨리려 했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은 결국 거짓임이 드러나고, 오히려 결과적으로 불교교단을 더욱더 융성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단순한 시기가 아닌,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에 의해 불교를 불신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럴 경우 부처님의 절묘한 설법이 가장 큰 힘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회곳곳에 뿌리 깊게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바라문들은 불교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보수적인 성향을 고수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들의 교의가 지니는 모순을 명확하게 지적하며 시기적절한 설법을 적극적으로 펼침으로써 이들을 교화해갔다.

초기경전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바라드와자이다.


바라드와자는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에 사는 바라문으로 불교를 아주 싫어했다. 그런데 그의 아내 다난쟈니(Dhanañjanī)는 불교신도였다. 우연한 기회에 부처님의 설법을 접하게 된 그녀는 깊은 감동을 받고, 이후로 부처님께 귀의하여 신심 깊은 우바이로 살았다.

바라드와자는 자신과 종교를 함께 해주지 않는 다난쟈니가 야속했다. 게다가 열성적인 불교도였던 다난쟈니는 삼보귀의의 게송을 입에 달고 살았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매일 입버릇처럼 읊어대는 아내의 이 말에 바라드와자는 온 몸을 부르르 떨며 넌덜머리를 쳤다. 하지만 이미 불법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찬 다난쟈니의 마음을 움직일 도리가 없어 난감할 뿐이었다. 이런 감정은 다난쟈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불법을 접하게 하여

부처님에 대한 남편의 편견을 깰 수는 없을까, 고민이었다.


논리로 불법 깨겠다며 부처님께 도전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바라드와자는 500명의 바라문을 집으로 초대하여 공양하려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내 다난쟈니가 마음에 걸렸다. 바라문교도가 아닌 그녀가 혹시 실례를 범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내일 500명의 바라문을 초대하여 식사 공양을 올리려 하니, 제발 내일만큼은 그 입에 달고 사는 삼보귀의의 게송을 읊지 마시오.”
하지만 다난쟈니는 말한다.
“죄송하지만, 그것만은 약속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입에 익숙해져 버린, 자신의 삶 그 자체가 되어 버린 게송이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중얼거리며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얻어 온 말이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제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를 말이었던 것이다. 바라드와자는 분노했다.

내일 하루만 조용히 있으라는데 그걸 약속하지 못하겠다니…. 그는 순간 이성을 잃고 화를 내며 칼을 뽑아들었다.


“약속하시오. 약속하지 않는다면 이 칼로 당신을 죽여 버릴 것이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의 으름장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조용히 말한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두 사람은 밤새도록 다투었다. 그렇게 날은 밝았고 공양을 받기 위해 500명의 바라문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난쟈니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손수 바라문들을 접대했다. 남편과의 싸움으로 심신이 지쳐있었지만 남편이 초대한 바라문들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음식을 차리다 그만 그릇이 한 쪽으로 기울면서 뜨거운 국물이 그녀의 손등에 튀었다.

순간 너무 놀란 그녀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삼귀의의 게송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러자 음식을 기다리던 500명 바라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 자신들을 초대해 놓고 부처님에 대한 귀의를 입에 담는 그녀를 어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바라문들은 불쾌해하며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버렸다.

이제 바라드와자도 더 이상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밥상을 차려주면서도 부처님에 대한 귀의를 외치는 그녀였다.

평소부터 못마땅했던 감정이 드디어 폭발했다. 바라드와자는 말했다.
“이제 그만 좀 하시오. 당신이 항상 그토록 칭송하고 존경하는 그 빡빡머리 사문을 내 오늘 논파해 보일 것이오.”
그 말을 듣자 다난쟈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좋을 대로 하세요. 그 어떤 사람 혹은 신이라 할지라도 그 분을 논파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원하신다면 찾아 가 보세요.

그러면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아내의 대답에 한층 불쾌해진 바라드와자는 그 길로 부처님이 계신 죽림정사로 달려갔다. 그리고 인사를 나눈 후 한쪽에 앉아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고타마여, 무엇을 죽이면 행복하게 자고, 무엇을 죽이면 슬퍼하는 일이 없겠는가. 고타마여, 당신은 무엇을 죽이는 것을 칭찬하는가.”
제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바라문교에서는 가축 등의 살생이 권장되었는데, 부처님은 살생을 금지했다. 바라드와자는 이 사실을 알고 부처님도 살생을 칭찬하는 경우가 있는가라고 비꼬아 질문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바라문의 내면을 들여다보신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분노를 죽이면 행복하게 자고, 분노를 죽이면 슬퍼할 일이 없느니라. 바라문이여, 독의 근본인 분노를 죽이는 것을 성자는 칭찬하느니라. 그것은 죽이고도 슬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니라.”
부처님의 대답을 들은 바라드와자는 당황했다. 지금 자신의 마음이 안고 있는 문제를 너무나도 정확하게 읽어낸 답변이었다.

이 적절한 설법은 그 동안 바라드와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던 부처님에 대한 모든 반항심과 편견을 일시에 거두어갔다. 그는 말한다.


“놀랍습니다. 존자 고타마시여! 놀랍습니다. 마치 쓰러진 사람을 일으키듯이, 가려진 것을 벗겨주듯이, 길을 잃어 헤매는 자에게 길을 알려 주듯이, 혹은 ‘눈뜬 자는 빛을 보리라’ 며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추어 주듯이, 존자 고타마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을 설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에 불법에 대한 신심을 일으킨 바라드와자는 부처님께 청하여 출가하게 되었고, 이후 열심히 수행하여 아라한이라는 지위까지 올랐다고 한다.


출가 소식에 친구들도 불교 귀의


한편, 이 소식을 들은 바라드와자의 친구들은 당황했다. 그토록 불교를 싫어하던 바라드와자가 갑자기 불교로 개종했을 뿐만 아니라,

출가까지 했다는 소문이다. 고타마가 바라드와자에게 몹쓸 짓을 하여 그의 이성을 흐리게 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친구들은 매우

불쾌하게 여기며 부처님이 계신 죽림정사로 쫓아갔다. 그리고는 부처님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비난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아무 말 없이 그 욕설을 다 듣고 나신 후 그들의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그 가운데 한 사람에게 이렇게 질문하셨다.


“바라문이여, 멀리서 친척이나 친구가 객으로 찾아오면 당신은 그들에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접대하겠지요.”
“그렇소.”
“그런데 만약 그들이 그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누가 먹어야 합니까?”
“그야 주인인 내가 먹어야겠지요.”
“바라문이여, 바로 그와 같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욕설을 퍼붓고 비난했지만 나는 그것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욕설과 비난은 주인인 당신에게 돌아가, 당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바라문은 부처님이 화가 나서 이렇게 말한 것이라 생각하며 “빔비사라왕과 왕신들은 ‘사문 고타마는 최상의 깨달음을 연

아라한’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 보라. 고타마는 이렇게 화를 내고 있지 않은가.”

이를 들으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화내지 않고, 신심을 잘 제어하고, 올바르게 생활하며, 지혜 있어 해탈하고, 평화로운 적정(寂靜)을 이룬 자에게 어찌 분노가 일어나리오. 분노에 대해 분노로 되돌려주는 것은 더 나쁜 일이다.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로 되돌려 주지 않는다면 그는 두 개의 승리를 얻나니

이는 자신과 상대, 양쪽을 모두 이익하게 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만이 이와 같은 사람을 우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설법을 들은 바라문은 크게 감복하였고 함께 온 친구와 더불어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또한 다른 2명의 친구도 역시 각각 적절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불교에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새하얀 천을 물들이는 일과, 이미 어떤 색으로든 물들여진 천을 다시 물들이는 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과정도 어렵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기도 힘든 것이다. 특히 종교는 한 사람의 영혼까지 사로잡는 법이다. 이교도에 대한 전법이 어려운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조금의 주저나 망설임도 없이, 그것도 오로지 진리가 지니는 설득력으로 이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가셨다. 한 두 번의 문답 속에서 부처님이 제시하는 진리를 발견한 바라드와자, 그리고 그의 바라문 친구들…. 이들은 부처님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붓다를 만난 사람들] 34. 야사(Yasa) 

 

진리를 좇아 부처님께 출가한 첫 번째 비구

 

쾌락의 본질 꿰뚫어보고 자유를 찾아 방황
친구 54명 잇따라 귀의…불교 확산 계기돼

 

 

5명의 비구에게 초전법륜을 하신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새벽이었다. 좌선을 즐기시던 부처님은 피로를 느껴 잠시 쉬고자 경행을 하고 계셨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절규하듯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싫다, 괴롭다,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본 부처님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 젊은이였다. 무엇이 그리도 힘겨운지 그는 괴롭다는 말을 연발하며 주위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정처 없이 새벽녘의 산야를 헤매고 있었다. 잠시 그를 관찰하던 부처님은 경행처로부터 내려가 준비된 자리에 앉으셨다. 부처님이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그는 울부짖으며 걸어왔다. 부처님은 따뜻한 어조로 말을 건네셨다.


“이곳에는 괴로움이 없다네, 비참함도 없다네. 어서 이리 와 앉으시게. 내 그대를 위해 법을 설하겠네.”
갑자기 자신 앞에 나타난 수행자. 그리고 그 수행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그는 한 줄기 가느다란 희망을 느꼈다. 앞에 앉은 그를 위해 부처님은 먼저 이렇게 설법을 시작하셨다.


“보시를 실천하고 계율을 지키면 하늘에 나게 되느니라. 여러 애욕에는 환난과 공허함과 번뇌가 있기 마련이니, 애욕으로부터 벗어나면 큰 공덕이 드러날 것이다.”


부처님은 그에게 보시의 가르침, 지계의 가르침, 생천의 가르침, 모든 욕망의 재난과 해악과 더러움 및 출리의 뛰어난 이익에 대해 설하셨다. 가난한 자나 종교가 등에게 자비의 마음으로 보시를 행하고, 생물을 괴롭히거나 다른 사람의 재물을 빼앗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간음을 하거나 술을 마시는 것과 같은 잘못된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 과보로 내세에는 하늘에 태어나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시론(施論)·계론(戒論)·생천론(生天論)의 이 설법은 원래 불교 이전부터 당시 인도의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신앙되고 있던

사상으로, 부처님은 난해한 교리가 아닌 일반적인 인과응보의 도덕론으로 그의 마음을 먼저 사로잡고자 하신 것이었다.


이는 부처님이 재가신도를 대상으로 주로 펼친 설법 형식인데, 상대방이 업보 사상을 이해하고 인과의 도리를 올바르게 신앙하게 되면 이어 불교적인 고집멸도의 사제를 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를 차제설법(次第說法)이라고 한다. 만일 상대방의 마음이 인과의 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사제나 인연법을 설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법문 듣고 곧바로 출가


보시·지계·생천의 가르침을 듣고 그의 마음이 건전하고 유연하며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환희용약하는 마음이 되었음을 아신 부처님은 이어 사제를 설하셨다. 그는 마치 청정하고 오점 하나 없는 천이 깨끗하게 물들듯이,

그 자리에서 “인연법에 의해 모이고 생기하는 성질이 있는 것은 모두 멸하는 성질이 있는 것”이라며, 즉시 사제의 도리를 이해하고 진리를 보는 눈을 얻어 제1단계의 성자가 되었다고 한다. 부처님과 운명의 만남을 이룬 이 젊은이의 이름은 야사. 5비구 이후, 다시 부처님의 깨달음의 빛을 이어 받은 자이다.


야사는 초전법륜의 땅인 미가다야(鹿野苑)가 있는 바라나시의 한 부호 상인의 아들이었다. 바라나시는 일찍이 인도의 16대국 가운데

하나였던 까시국의 수도로 갠지스강을 따라 수륙교통의 요충지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때문에 상업무역의 중심지로 항상 사람과 물건이 넘쳐나는 활기찬 곳으로 부유한 상인들도 많았다. 야사의 아버지는 바라나시에서도 유명한 대부호 상인이었다. 부자 아버지를 둔 덕에 야사는 어려서부터 물질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로운 생활을 했다.


여름, 겨울, 그리고 우기를 위한 3개의 궁전을 갖고 있었으며, 그 궁전에서 수많은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밤낮으로 환락을 즐기는 등

매우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삶을 살았다.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생활…. 하지만 야사는 뭔가 모를 공허함을 느꼈다. 아름다운 처도, 기녀들과 함께 하는 환락의 시간도 그에게 큰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야사는 지금 자신이 즐기고 있는 쾌락의 본질을 꿰뚫어보게 되는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 그날도 역시 밤늦도록 아름다운 시녀들과 함께 향연을 즐기다 잠이 들었다. 목이라도 말랐던 것일까. 새벽녘 문득 잠에서 깨어난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야사는 순간 역겨움에 정신이 아찔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태를 부리던 여인들은 어디로 가고, 뒤엉킨 머리카락에 침까지 흘리며 잠꼬대하는 추한 여인들이 쓰러진 채 자고 있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자고 있는 그녀들은 마치 버려진 시체처럼 해괴망측하여 마치 무덤가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너무나도 큰 충격에 야사는 그 길로 집을 나섰다. 혐오감과 무상함이 야사의 전신을 휘감았다. 홀로 집을 나선 야사는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호소하며 정처 없이 헤매다 미가다야를 향하게 되었다. 부처님이 그를 발견하신 것은 바로 이때였던 것이다.


고타마 싣닷타와 출가 과정이 너무나도 유사한 야사. 하지만 두 사람이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은 사뭇 다르다. 싣닷타는 오랜 세월 정진하며 스스로 깨달음의 길을 열어야 했지만, 부처님이라는 훌륭한 스승과 조우할 수 있었던 야사는 훨씬 쉽게 그 길로 다가갈 수 있었다.


한편, 아침 무렵이 되어서야 야사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 그의 집에서는 소동이 일어났다. 야사의 부모는 사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그가 미가다야로 향한 것을 알고 서둘러 그 쪽으로 향했다. 부처님은 저 멀리 야사의 아버지가 오고 있는 것을 보자, 신통력으로 그 자리에

있던 야사를 아버지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했다. 눈앞에 아들이 있는 줄도 모른 채, 야사의 아버지는 부처님에게 다가와 물었다.


“혹시 야사라는 청년을 못 보셨습니까?”
“이리 와서 앉으시오. 여기 앉아 있으면 야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오.”
부처님의 대답을 들은 야사의 아버지는 기뻐하며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를 위해 야사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시론·

계론·생천론 등을 설하셨고 그 역시 진리를 보는 눈을 얻었다. 감격한 그는 부처님께 귀의의 뜻을 밝히고 우바새가 되었다.


이렇게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가르침이 설해지고 있는 동안, 야사는 있는 그대로 자신의 경지를 관찰하여 집착을 여의고 마음이 번뇌로부터 해탈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더 이상 그가 욕망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신통에 의한 신변을 거두셨다.

야사의 아버지는 아들이 앉아있는 것을 보자 이렇게 말했다.


“야사야, 네 어머니는 밤낮으로 슬픔에 젖어 살고 있단다. 어서 가서 어머니의 목숨을 구해다오.”
그러나 야사는 자신은 이미 진리를 보았고, 집착을 여의었으며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했다고 하며, 더 이상 세속생활로 돌아가 재가자의 몸으로 여러 가지 욕망을 누리며 살 수 없음을 전했다. 결국 야사의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부모·처는 최초 우바새·우바이


아버지가 떠나자 야사는 부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부처님, 저는 부처님 밑에서 출가하여 계를 받고 싶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잘 왔구나, 비구여. 가르침은 잘 설해졌다. 괴로움을 완전히 멸하기 위해 청정한 수행을 해라.”
부처님의 이 말씀은 그대로 야사의 구족계가 되었고, 이렇게 해서 이때 세상에는 부처님과 5비구를 포함하여 7명의 아라한이 존재하게 되었다. 한편, 야사의 아버지의 공양 초대를 받아 그들의 집으로 가신 부처님은 야사의 어머니와 야사의 출가 전의 처를 교화하셨으며, 이들 역시 재가신도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야사의 아버지와 어머니·처는 각각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 최초의 우바새와 우바이가 된다.


또한 이때 야사의 친구인 위마라(Vimala), 수바후(Subāhu), 푼나지(Puṇṇaji), 가왐파티(Gavaṃpati)의 4명도 출가하게 된다. 이들 역시

바라나시의 대장자의 아들이었는데, 야사가 출가했다는 소식을 듣자 “야사 정도의 양가집 아들이 출가할 정도라면, 그것은 아마도 훌륭한 가르침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야사를 찾아갔다. 야사는 자신을 찾아온 4명의 친구를 데리고 부처님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부처님, 이들은 제가 재가생활을 할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입니다. 이들을 위해 가르침을 설하여 부디 깨우쳐 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기꺼이 법을 설해 주셨고, 이들 역시 야사처럼 진리를 보는 눈을 얻어 출가했다. 한편, 야사의 다른 친구 50명도 그의

소식을 듣고 찾아와 앞의 4명의 친구와 마찬가지 과정을 거치며 출가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는 61명의 아라한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이때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을 펴라는 취지의 ‘전도선언’을

하셨다고 한다. 야사와 그의 친구들의 귀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온 세상으로 퍼져가는 직접적인 동인이 되었던 것이었다.


야사와 그 친구들의 귀의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들의 귀의 후, 우루웰라에서는 30명의 청년들이 부처님께 귀의한다. 이들은 모두 왕족 출신이었는데, 부부동반으로 혹은 미혼인 자는 기녀를 동반하고 야외로 나와 놀다가 이들이 잠든 사이에 기녀가 귀중품을 가지고 도망쳐 버렸다. 잠에서 깬 후 이 사실을 알고 미친 듯 기녀를 찾아 헤매는 이들에게 부처님은 질문을 던지신다.

 

“청년들이여, 자기 자신을 찾는 일과 기녀 한명을 찾는 일 중 너희들에게 있어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이렇듯 부처님의 가르침은 당시 갠지스강 주변의 비옥한 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급격한 물질적 풍요 속에 매몰되어 욕망의 노예로

살아갈 수도 있는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이들의 삶을 진리로 인도했다.


 

[붓다를 만난 사람들] 35. 위두다바

출신에 대한 분노로 사캬족을 멸망시킨 광인

아버지 파세나디왕 폐위하고 코살라국 찬탈
어머니 고향 사캬국서 받은 멸시 피로 갚아

 

 

“왕이시여, 저쪽 히말라야 산기슭에는 한 정직한 민족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코살라국의 주민으로 부와 용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가계는 아딧차(Ādicca, 태양)이며, 태생은 사키야(Sākiyā)입니다. 저는 그런 가문에서 출가했습니다.”


이는 고타마 싯닷타가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기 전, 당시 최대강국인 마가다의 왕 빔비사라로부터 태생에 관한 질문을 받고 답한 말이다. 이 대답에서도 드러나듯이 사캬족은 자기 종족의 계보에 대해 매우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사캬족의 시조는 아리아족의 태양계 씨족의 첫 왕인 감자(甘蔗, Okkāka)왕이라고 한다.
사캬족은 자신들을 고귀한 민족이라 여기며, 자국이야말로 당시 최고의 대국인 마가다나 코살라보다 오랜 전통을 가진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

이런 자부심으로 인해 사캬족 사람들은 약간 오만한 면도 있었던 듯한데 순수 혈통에 대한 자만과 집착은 훗날 사캬국을 피바다로 물들이는 계기를 제공한다.


부처님 당시 사캬국은 코살라국의 속국이었다. 코살라는 마가다와 더불어 당시 2대 강국으로 파세나디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파세나디는 부처님과 아주 친한 사이였다. 죽기 전 그가 부처님께 남긴 “부처님께서도 왕족이시고, 저도 왕족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코살라사람이고 저도 코살라사람입니다. 부처님도 80세이시고 저도 80세입니다”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왕은 자신의 속국인 사캬국 출신의 부처님에게 매우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 왕은 재가신도로 살며 부처님과 모든 일을 의논하여 결정할 정도로 신심이 깊었다. 부처님을 향한 존경의 마음은 그로 하여금 부처님과 같은 종족인 사캬족으로부터 왕비를 맞이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나타났다. 즉, 사캬족과 친인척 관계를 형성하고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사캬족은 명문(名門)으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왕은 서둘러 사캬국으로 사신을 보냈다.


“나는 사캬국으로부터 왕비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당신들과 친척이 되기를 원하니, 부디 내게 어울리는 왕녀를 보내주시오.”
한편, 파세나디의 전갈을 받은 사캬족 사람들은 시큰둥했다. 사캬족은 코살라왕가를 천하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왕족 가운데 그

누구도 자신의 딸을 코살라의 왕비로 보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싫다고 안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행중인 부처님 때문에 3번 회군


“우리들은 코살라왕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은가. 만약 왕족의 여인을 보내지 않는다면 큰 원한을 사게 될 것이네. 하지만 보낸다면

우리들의 순수한 혈통은 파괴되고 말 것일세.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보낼 수도 안 보낼 수도 없는 상황. 그때였다. 당시 사캬국의 왕이었던 마하나마는 자신의 딸 와사바캇티야(Vāsabhakhattiyā)를 보내자고 제안한다. 와사바캇티야는 마하나마가 자신의 노비인 나가문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다.

이 행동이 훗날 사캬족의 비참한 멸망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사캬족 사람들은 마하나마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의 딸을 사왓티로 보낸다.


파세나디에게 시집온 와사바캇티야는 왕의 첫 번째 아내가 되었다. 그리고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름은 위두다바. 성장하여 16살이 된 그는 무예를 닦기 위해 어머니의 고향인 사캬국을 찾았다. 당시 사캬족은 용맹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유학차 떠난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매우 폭력적이고도 거친 성격의 소유자로 사캬국에 가서도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거만한 그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캬족 사람들은 그를 싫어했고, 특히 그가 노비의 자식이라는 점을 거론하며 경멸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공회당에서 그가 앉았던 의자를 가리키며 한 여자가 비아냥거렸다.


“이게 그 와사바캇티야라는 노비가 앉았던 의자구나.”
그리고는 우유를 섞은 물로 씻어내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혈통을 경멸하는 말을 들은 위두다바는 감당할 수 없는 분노에 치를 떨며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했다.


“이제야 어머니의 과거를 알았구나. 그래 내가 앉았던 자리를 우유 섞은 물로 씻어내려면 씻어내라. 내가 왕위에 오른다면 너희들의

숨통을 끊어 그 피로 내가 앉았던 자리를 씻어내고야 말겠다.”
어머니에 얽힌 불편한 진실, 혈통을 근거로 한 어머니와 자신에 대한 조소와 경멸…. 아직 어린 그의 마음은 심하게 상처받았고,

가슴 속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이 일을 계기로 와사바캇티야의 혈통은 코살라국에도 알려지게 되었고,

파세나디는 그녀와 위두다바를 예전처럼 대우하지 않았다.

자신의 호의를 무시한 채 자신을 감쪽같이 속인 사캬족에 대한 서운함 내지 분노 때문이었을까. 파세나디는 그들을 노비처럼 대했다.

이 일을 전해들은 부처님은 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왕이시여, 사캬족이 한 일은 옳지 못합니다. 주려면 왕족의 여인을 주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하십시오.

와사바캇티야는 왕녀이며 크샤트리야족의 왕 밑에서 관정을 받았습니다. 또한 위두다바는 크샤트리야족의 왕에 의해 태어났습니다.

예로부터 현자들도 ‘어머니의 성이 무엇이든 아버지의 성이야말로 표준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들은 파세나디는 “그래, 아버지의 성이야말로 표준이 아니겠는가”라며 옹졸했던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예전처럼 위사바캇티야와 위두다바를 대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위두다바의 가슴 속에 자리 잡은 분노의 불길은 거세게 타올라갔다. 사캬국에서 있었던 일을 계기로 부왕과의 관계도 서먹해진 그는 결국 부왕을 폐하고 왕위를 빼앗게 된다. 파세나디가 궁을 비운 사이, 위두다바는 평소 파세나디의 깊은 신임을 받고 있던 장군

카라야나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한 전승에 의하면 이때 파세나디는 부처님을 찾아뵙고 담화를 즐기고 있었는데, 이야기가 끝난 후

밖으로 나와 보니 수행 차 따라왔던 카라야나는 온데간데없고 한 필의 말과 시녀 한 명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위두다바의 야망을 안 카라야나가 그로부터 파세나디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왕이 부처님과 함께 있는 동안 왕권의 상징물을 빼앗아 위두다바에게 넘겼다고도 한다.


여하튼 부처님과의 즐거운 대화를 끝내고 나온 왕에게 들려온 소식은 아들 위두다바에 의한 반란이었다.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안 왕은 왕궁으로 향하지 않고, 그 길로 조카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마가다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왕이 도착했을 때 이미 밤은 깊어 성문은 닫혀 있었고, 근처 공회당에 지친 몸을 뉘었으나 결국 피로와 노쇠로 인해 탈진 상태에 이르러 세상을 떠나고 만다. 다음 날 이 사실을 알게 된 마가다국의 왕 아자타삿투는 숙부 파세나디를 위해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고 한다.


사캬국 멸망시킨 후 갑작스레 사망


한편, 왕위에 오른 위두다바는 이제야 원한을 갚을 때가 왔다고 생각하며 대군을 일으켜 카필라성을 향해 출발했다.


“내 오늘 사캬족을 완전히 몰살시켜 버리리라.”
그날 부처님은 아침 일찍 세상을 두루 관찰하시다 사캬족 사람들이 위두다바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게 되었다.

이미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은 성자이지만 어찌 친족에 대한 정과 측은함이 없을 수 있을까.

위두다바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고 친족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신 부처님은 카필라성 근교에 있는 앙상하여 그늘도 지지 않는 나무 밑에 앉아 계셨다. 그 곳에서 멀지 않은 위두다바왕국의 경계선 근처에는 잎이 무성한 큰 나무가 있었지만, 부처님은 굳이 이 나무를 선택하신 것이었다. 대군을 이끌고 카필라성을 공격하러 가던 위두다바는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부처님을 발견했다. 그러자 다가가 예를 갖춘 후 이렇게 말씀드렸다.
“부처님, 어찌하여 이렇게 더운 날씨에 앙상하여 그늘도 지지 않는 나무 밑에 앉아 계십니까? 저기 푸른 잎으로 우거진 나무 밑에 앉으십시오.”
그러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냥 두십시오. 대왕이시여, 친족의 나무 그늘이 시원한 법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위두다바는 부처님이 사캬족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와 계신 것이라 생각해 부처님께 예를 갖춘 후 대군을 철회하여

사왓티성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사캬족에 대한 증오심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다시 대군을 일으켜 카필라성으로 향했지만 다시 똑같은 나무 아래에 앉아계신 부처님을 발견하고는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기를 세 번. 하지만 네 번째 출병했을 때 부처님은 더 이상 그 자리에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사캬족이 이전에 지은 악업을 관찰하신 부처님은 그들이 저지른 악업이 마치 강물 속에 던져진 독과 같이 더 이상

걷잡을 수 없는 것임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카필라성으로 들어간 위두다바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사캬족 사람들을 해쳤고 그들의 목을 따 얻은 피로 일찍이 자신이 앉아 모욕을 받았던 의자를 씻은 후 돌아갔다. 승리를 거둔 위두다바는 사왓티로 돌아가 왕궁에서 축하연회를 열었는데, 이때 하늘이

울며 큰 폭풍우가 몰아쳐 왕궁은 불타 강에 떠내려가고 왕과 군사들 역시 사라져갔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예기치 못한 불행으로 위두다바가 생을 마친 것만은 분명한 듯 하다.

 

부처님의 만년에 일어난 사캬족의 멸망. 어떻게든 친족의 비참한 최후를 막고 싶어하셨던 부처님의 간절한 마음, 그리고 이와는 달리

분노의 끝을 향해 질주한 위두다바의 광적인 행동이 묘하게 엇갈리면서 서글픔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