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인연

부처님의 이야기속 사람들 = 콘단냐, 출라판타카, 담마딘나

백련암 2011. 8. 26. 11:17

 

[붓다를 만난 사람들] 30. 콘단냐

 

깨달음 얻은 첫 제자…인자한 성품으로 큰 존경

 

싯다르타와 함께 고행한 다섯 수행자 중 한명
승단 발전위해 사리풋타 등 후배에 자리 양보 

 

 

“콘단냐야, 마침내 네가 깨달음을 얻었구나.”


깨달음을 얻은 첫 제자의 탄생에 부처님은 크게 기뻐하셨다. 자신의 가르침을 듣고 자신과 똑같이 깨달음의 문을 연 사람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부처님에게 그 모습을 드러냈던 진리가 콘단냐에게로 이어졌다. 이제 그 진리의 빛은 세상 곳곳을 비추며 퍼져갈 것이다.

콘단냐의 깨달음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스스로 깨달음의 경지를 체득했다는 것과 이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분명 또 다른 문제였다. 네란자라강변의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부처님은 자신이 발견한 법의 미묘함을 재인식하며 과연 이를 다른 사람에게 설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침묵하고

말 것인가 망설였다.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세간 사람들에게 설해도 결국 이해받지 못한 채 피로하기만 한 것은 아닐까, 자신이 가르침을 설해도 탐진치로

덮여있는 사람들이 과연 그 심원하고 난해하며 미묘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생각은 점차 부처님으로부터 설법과 교화에 대한 의욕을 빼앗아갔다.


전승에 의하면 이때 부처님의 마음을 읽은 범천 사함빠띠가 간곡히 청했다고 한다.
“세존이시여! 바라옵건대 법을 설해 주십시오. 선서시여! 바라옵건대 법을 설해 주십시오. 세상에는 천성적으로 그리 때 묻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약 그들조차도 법을 듣지 못한다면 퇴보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법을 듣는다면 진리를 깨달을 것입니다.”


범천의 청을 들은 부처님은 중생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세간을 둘러보셨다. 세상에는 더러움이 많은 자도 있지만 더러움이 적은 자도 있었다. 또한 영리한 자도 있지만 어리석은 자도 있었다. 그리고 내세의 죄과에 대한 공포를 알고 생활하는 자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관찰한 부처님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생노병사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진리를 설하리라 결심한 것이었다.


‘범천의 권청’이라 표현되는 이 사건은 각자인 부처님이 깨닫기 전의 자신과 똑같은 괴로움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세간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먼저 진리를 본 자로서 그 길을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할 것을 결심하게 되기까지의 미묘한 심리 변화를 표현한 것이다.

또 부처님의 깨달음이 개인의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세상 속으로 퍼져 가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설법을 결심한 부처님이 다음으로 고민한 것은 설법 대상이었다. 자신이 깨달은 그 미묘한 법을 들려주었을 때 이를 이해할

수 있는 근기를 지닌 사람이 필요했다.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알라라깔라마와 웃다카라마풋타였다. 당시 선정 수행의 대가로 알려졌던

이들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에 스승으로 삼았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은 이미 저 세상으로 가고 없었다.


부처님 탄생 예언했던 바라문


다음으로 떠올린 것은 바로 부처님이 한때 더불어 고행 생활을 했던 5명의 동료수행자였다. 콘단냐(Koṇḍañña), 밧디야(Bhaddiya),

왑파(Vappa), 마하나마(Mahānāma)그리고 앗사지(Assaji). 싯다르타 태자가 죽음을 불사하고 맹렬히 고행을 실천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부왕 숫도다나가 태자의 비호를 위해 사캬국의 바라문계급 자제들 가운데 선발해 보낸 자들이었다. 이들은 혹독한 고행을 실천하는 싯다르타를 존경하며 함께 수행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네란자라강에서 목욕을 하고 수자타라는 여인이 건네준 우유죽을 먹는 것을 본 후 타락했다며 곁을 떠났다.


부처님은 5명의 수행자가 있는 바라나시의 미가다야(Migadāya), 녹야원)을 향해 길을 떠났다. 미가다야는 사슴 동산이라는 의미인데

당시 선인타처(仙人墮處), 즉 선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불릴 정도로 온갖 종교인들이 모여 생활하고 있었다. 부처님과 헤어진 후 이들은 이곳에서 자기들끼리 수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저 멀리서 부처님이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본 그들은 서로 약속했다.


“저기 수행자 고따마가 오고 있네. 그는 고행을 싫어하여 사치스런 생활로 되돌아간 타락한 자라네. 그가 와도 우리는 인사도 하지 말

고, 일어나 맞이하지도 말고, 발우와 가사를 받아주지도 말도록 하세.”


하지만 부처님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그 위의에 감화된 그들은 자신들이 한 약속을 잊어버리고 일어나서 부처님을 맞이했다고 한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이름으로 혹은 벗이라는 말로 자신을 부르는 그들에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를 이름이나 벗이라는 말로 불러서는 안 된다. 여래는 마땅히 공양 받아야 할 분이며,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은 분이

다. 수행승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나는 불사의 경지를 증득하였다. 이제 법을 설하겠노라.

너희들이 배운 대로 행한다면 머지않아 양가의 자식들이 출가할 때 품었던 목적인 범행의 궁극적인 완성을 이 세상에서 스스로 알고

증득하고 체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5명의 수행자는 오히려 부처님을 힐난했다.


“벗 고따마여, 고행을 닦고 실천하고 수행해도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성스러운 지견(智見)을 얻기 어려운데 하물며 고행을 싫어하여

사치스런 생활로 돌아간 타락한 자네가 어떻게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성스러운 지견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두 번, 세 번에 걸쳐 힐난이 반복되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잘 생각해 보거라. 내가 예전에 이와 같이 말한 적이 있었느냐?”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은 분이다. 수행승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나는 불사의 경지를 증득하였다.

이제 법을 설하겠노라. 너희들이 배운 대로 행한다면 머지않아 양가의 자식들이 출가할 때 품었던 목적인 범행의 궁극적인 완성을 이

세상에서 스스로 알고 증득하고 체현하게 될 것이다.”
마음을 연 5비구는 부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잘 들으려 했고, 참된 지혜를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은

바라나시의 녹야원에서 5비구를 대상으로 쾌락과 고행의 양 극단을 떠나는 중도의 가르침을 주제로 초전법륜을 하게 되었다.


그의 입멸에 히말라야산 통곡


“비구들이여, 두 가지 극단이 있으니 출가자들은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여러 가지 애욕에 빠져 그것을 즐기는 것이니, 이는 열등하고 세속적인 범부의 짓이며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되는 바가 없느니

라.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짓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니, 이 역시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되는 바가 없느니라.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원만히 잘 깨달았다. 중도는 눈을 뜨게 하고 앎을 일으킨다. 그리고 고요함과 수승

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된다.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여래가 원만히 잘 깨달았고, 눈을 뜨게 하고 앎을 일으키고, 고요함과

수승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말하는 것이니,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원만히 잘 깨달았고 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이니라.…”


이와 같은 설법을 듣고 5명의 수행자 가운데 가장 먼저 깨달음을 얻은 것이 바로 콘단냐(陳如)였다. 이어 밧디야와 밥파 두 사람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하나마와 앗사지 두 사람이 깨달음을 열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 5비구에 관해서는 개인적인 신상이나 출가 후의 생활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기 힘들다. 하지만 ‘테라가타’에 전해지는

이들이 읊은 게송의 내용 등으로 보아 부처님이 첫 설법 대상으로 삼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수행이나 위의 면에서 모두 뛰어난

자들이었던 것 같다. 사리풋타가 첫 눈에 그 위의에 반하여 개종을 결심하게 된 것은 5비구 가운데 한 명인 앗사지였다.


특히 가장 먼저 깨달음을 얻었던 콘단냐는 5비구 가운데 대장 역할을 하던 인물로 관대하고 인자한 성품에 박식함까지 갖추어 대중으로

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카필라성 근처 마을에서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점성가의 명인으로 일찍이 부처님이 탄생했을 때

장래의 예언을 위해 초대된 바라문 가운데 최연소자였다. 이미 고령이었던 그는 자신을 어려워하는 사리풋타나 목갈라나와 같은 유능한

후배들을 배려하여 부처님께 숲 속에 있는 만다키니 호숫가에서 살 것을 허락해 달라고 간절히 청했다. 부처님이 허락하시자 그는 그 곳에서 조용히 홀로 수행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12년을 보낸 후 그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는 부처님을 찾아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고하고 다시 호숫가로 돌아가 곧 입멸했다. 숲 속에서 홀로 지내는 그를 위해 음식을 날라주던 많은 코끼리들이 그의 장례를 해주고, 히말라야산이 그의 죽음

을 슬퍼하여 통곡했다고 하는 전승으로부터 그가 얼마나 위대하고 따뜻한 수행자였는지 알 수 있다.


무슨 이런저런 수식이 필요하겠는가. 부처님이 첫 번째 설법 대상으로 선택하셨고 그 가르침에 따라 깨달음을 얻어 평생 수행자답게

살아간 콘단냐 그리고 밧디야, 밥파, 마하나마, 앗사지. 이렇게 부처님을 포함한 6명의 훌륭한 아라한으로 승가는 첫 발을 내딛었고, 이후 진리는 온 세상을 비추며 고통 받는 사람들의 마음으로 퍼져나갔다. 콘단냐를 비롯한 5비구의 존재가 그 누구보다 소중한 이유이다.

 

 

[붓다를 만난 사람들] 31. 출라판타카

 

 

더러워진 흰 천에서 무상의 진리를 깨닫다

 

친형 권유로 출가했으나 우둔함에 절에서 쫓겨나
불법에 대한 굳은 믿음·정진으로 아라한과 증득

 

 

어느 날 부처님은 정사 앞에서 우왕좌왕 방황하고 있는 한 수행승을 발견하셨다. 얼마 전에 형 마하판타카(Mahāpanthaka)를 따라 출가

했던 출라판타카라는 자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몹시 당황한 모습으로 안절부절 못하며 정사 주변을 헤매고 있었다.


“출라판타카야, 왜 그러고 있느냐?”
걱정이 되신 부처님은 다가가 자상한 목소리로 물으셨다. 갑작스런 부처님의 출현에 그는 애써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폭발한 듯  울먹이

며 대답했다.


“형에게 쫓겨났습니다. 저보고 정사를 떠나 환속해버리라고 합니다.”
원래 마하판타카와 출라판타카는 마가다국의 라자가하에 살던 한 거부 장자의 딸과 그 집에서 일하던 하인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였다.

신분이 현저히 다른, 그것도 여성이 상층계급이었던 이 두 사람의 사랑은 주변으로부터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들은 도망치듯 다른 지방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하지만 임신을 하게 되자 장자의 딸은 친정에 가서 해산하고 싶었다. 낯선 곳에서

홀로 아기를 낳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그녀는 떨쳐버릴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남편과 상의해 보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자신에게

주어질 처벌에 남편은 두려워하며 망설였다. 결국 그녀는 홀로 친정을 향해 나섰다. 그런데 친정에 도착하지 못한 채 도중에 길에서

사내아이를 낳고 말았다. 그래서‘길’이라는 뜻을 가진 판타카라는 말을 이름에 붙였다.


그런데 둘째를 임신했을 때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그래서 그녀는 큰 아이에게는 마하(큰) 판타카, 둘째 아들은 출라(작은) 판타카라는 이름을 붙였다. 둘은 형제이면서도 태어날 때부터 너무나도 달랐다. 똑똑하고 현명했던 형과는 달리, 동생은 우둔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본생담’에 의하면 출라판타카가 태어나면서부터 우둔하게 된 까닭은 그 옛날 가섭불이 이 세상에 오셨을 적에 그는 똑똑

한 제자였는데, 가섭불의 가르침을 외울 수 없었던 우둔한 비구를 조롱했기 때문에 그 과보를 받은 것이라고 한다.


4개월간 시구 한 구절도 못 외워


형 마하판타카는 부처님을 만난 순간 이미 부처님으로부터 강렬한 감동을 느끼며 이분이야말로 최고의 스승이라 여겼다고 한다.

‘테라가타’라는 초기 문헌에는 마하판타카가 읊었다고 하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전해진다.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스승을 처음 보았을 때, 최상의 사람을 보았기에 내게는 감동이 일어났다. 손발을 가지고 머리를 굽혀 이와 같이 훌륭한 스승이 오신 것을 존경하는 사람이 어찌 과실을 범하리오. 그때 나는 처자도 재산도 곡물도 버리고, 수염과 머리카락

을 자르고, 출가하여 집 없는 생활로 들어갔다. 배워야 할 것, 올바른 생활 법을 몸에 갖추고, 여러 가지 감관을 잘 제어하여 올바르게

깨달음을 연 사람을 경례하면서 그 어떤 것에도 좌절하는 일 없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나는 서원을 일으키고 마음에 간절히 원하는 바가 있었다. 망집의 화살이 뽑혀지지 않는 이상 나는 잠시도 앉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생활하고 있는 나의 노력 분투를 보라.

세 가지 명지는 이미 체득되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완성되었다. 나는 전세(前世)의 생활을 알고, 천안(天眼)을 얻었다. 나는 경배를

올리기에 어울리는 사람, 보시를 받을 만한 사람이며, 미망의 생존의 원인도 없어져 해탈하고 있다. 그로부터 밤이 끝나가고 해가 나올

무렵, 모든 망집을 고갈시키고 나는 결가부좌한 채 명상에 들었다.”


부처님을 만나 멋진 깨달음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 형 마하판타카는 동생에게도 이 훌륭한 가르침을 접하게 해 주리라 생각하며 동생

출라판타카에게 출가를 권했다. 이렇게 해서 형을 따라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건만, 태어날 때부터 우둔했던 출라판타카는 4개월 동안

한 구절의 시구조차 외우지 못했다. 앞의 한 구절을 외우고 나면 그 다음 구절은 잊어버리고, 다음 구절을 외웠다 싶으면 앞 구절은 생각

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아둔한 그를 사람들은 경멸하기 시작했고, 어떻게든 동생을 이끌어보려던 형도 이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고

절망하며 환속을 권한 것이었다.


부처님이 출라판타카를 발견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부처님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정사 주변을 서성거리는 출라판타카의 머리를 어루만

지며 손을 잡고 승원 안으로 들어가셨다.


“출라판타카야, 실망하지 말거라. 너는 나를 의지하여 출가한 것이 아니더냐. 이제 내 곁에 있거라.”
‘테라가타’에는 훗날 출라판타카가 당시를 회고하며 읊었다고 하는 게송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나의 진보는 느렸다. 나는 이전에 경멸당했다. ‘자, 너는 집으로 돌아가거라.’ 형은 이렇게 말하며 나를 쫓아냈다. 이렇게 쫓겨나, 나는

승원 통로에 있는 작은 공간에 실망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무언가 가르침이 있기를 기대하며….

거기에 존경하는 스승님이 오셔서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내 손을 잡고는 승원 안으로 데리고 가셨다. 자비의 마음으로 스승님은 나에게

발을 닦는 수건을 건네시며 말씀하셨다. ‘이 청정한 천에만 전념하며 주의를 기울이거라.’”


부처님이 그에게 내민 것은 하얀 천 조각이었다.
“출라판타카야, 너는 아무 것도 외우지 않아도 된다. 그저 이 천 조각으로 사람들의 신발을 깨끗하게 닦아 주는 일에 전념하면 되느니

라.”


출라판타카는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그저 천 조각을 들고 다른 출가자들의 신발을 닦아주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부처님께 처음 받았을 때의 천은 새하얀 것이었는데, 점차 더러워져 지금은 처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때가 묻어 까만 천이 되어 있었

다. 이를 보는 순간 출라판타카의 마음은 동요했다. 무언가 모를 한 줄기 빛이 그의 마음을 가로질러 달렸다.


한 치 의심없이 부처님 가르침 실천

 

‘아, 그렇구나. 새하얀 천이 이렇게 변해가듯 다른 모든 것 역시 이렇게 달라져 가겠구나. 세상의 모든 것이 어느 한군데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이런 모습을 두고 말하는 것이구나.’
4개월 동안 한 구절의 시구도 외우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출라판타카였지만, 천에 때가 묻어 더러워져가는 과정을 보며 무상의 진리

를 깨달았던 것이다. 출라판타카의 마음에서 일어난 변화를 알아차리신 부처님은 다시 이런 가르침을 주셨다.


“출라판타카야, 이 천만이 먼지나 때에 더렵혀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마음에 있는 번뇌를 없애는 것이 더 중요하단

다.” 인간의 마음만큼 쉽게 더러워지는 것도 없으며, 또한 더럽혀진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도 지난한 일이기에 수행자라면 항상 자신

의 마음을 청정히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출라판타카에게 새하얀 천 조각을 내밀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도 한다.
“이 자리에서 동쪽을 향해 앉아 ‘먼지, 때를 털어버리자. 먼지, 때를 털어버리자’라고 말하며 이 천을 어루만져라.”


그리고 출라판타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조금의 의구심도 없이 매일 태양을 바라보며 “먼지, 때를 털어버리자”라고 중얼거리며

천을 만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손 안에 있는 천이 어느 새 까맣게 되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순간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를 터득했다고 한다. 어느 전승에 의하든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순수한 믿음과 성실한 실천이

출라판타카에게 깨달음을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우둔하다고 버림까지 받은 출라판타카였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인 그는 이렇게 하여 큰 깨침을 얻었다. 그리고 곧 아라한이 되었으며 이후 많은 신통력을 보였다고 한다. 이런 그를 부처님은

마음을 개발하는 능력에 있어 일인자라고 평가하셨다.


부처님과의 만남을 이루었던 자들은 실로 다양한 근기를 지닌 자들이었다. 부처님과의 첫 만남에서 설법을 듣고 즉시 깨달음을 이룬 자

들이 있었는가 하면, 출가하여 성실하게 수행하다 어느 순간 깨달음을 얻는 자들도 있었다. 한편 천성적으로 어리석고 둔한 자들도 적지 않았다. 아마도 출라판타카는 그 중에서도 특히 아둔한 머리의 소유자였음에 틀림없다. 4개월 동안 시구 한 구절도 외우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이라는 훌륭한 스승, 그리고 그의 순수한 성품 때문이었을 것이다.

천 조각으로 다른 사람의 신발을 닦으라는 혹은 천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먼지, 때를 털어버리자”라고 중얼거리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그는 조금의 의심이나 불쾌감도 품지 않았다. 스승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존경, 그리고 명석함 대신 그가 갖고 태어난 우직함….

부처님과 출라판타카의 만남이 이루어낸 멋진 성과는 지혜롭지 못하고 명석하지 못한 우리 일반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위로가 되는 것 같다.

 

진리의 길도 깨달음의 길도 좋은 스승과 더불어 각자 찾아가기 나름인, 그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는 세계인 것이다.

 

 

[붓다를 만난 사람들] 32. 담마딘나

 

감로법문으로 대중포교 앞장선 비구니 설법제일
 

                                                          불법에 심취한 남편 원망하며 오히려 출가
                                                부처님 가르침에 단박 깨달아 성자로 추앙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온 남편은 여느 때와 달랐다. 항상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내며 다정하게 아내를 대하던 남편이었건만 그 날은 마중 나온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말없이 오랜 시간 사색에 잠겨 있었다.

저녁 밥상을 앞에 두고도 묵묵히 먹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남편은 더 이상 아내에게 다정한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부부생활은 물론이거니와 만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건조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나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일까, 아니면 밖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고민하던 아내는 남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남편은 담담하게 말한다.
“이제 나는 세속적인 것에 전혀 흥미가 없으니, 당신은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구려. 이대로 집에 머물러도 좋고, 아니면 모든 재산을 가지고 친정으로 가버려도 좋소. 아무래도 좋으니 마음대로 하시오.”


사연은 이러하였다.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에서 크게 성공한 부상이었던 위사카(Visa-kha)는 어느 날 부처님의 설법을 직접 듣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이를 통해 단계적으로 성과(聖果)를 얻게 되었다. 세속적인 모든 것에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 위사카는 여성에 대한 욕망도, 음식에 대한 욕망도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예전에는 그리도 사랑스럽던 아내이건만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다. 맛난 음식 또한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위사카는 아내 담마딘나에게 이런 상황을 전하며 이제 자신과 맺은 부부의 연에 연연해하지 말고 원하는 대로 살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얼마나 어이없고 허무한 일인가. 그토록 다정했던 남편이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변해 네가 어떻게

살아도 좋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 남편의 큰 그늘 속에서 살던 담마딘나에게 이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그녀는 내뱉듯이 한마디 던진다.
“당신이 필요 없다고 버린 것을 내가 얼씨구나 하고 집어 삼킬 것 같습니까?”
그녀에게 있어 재산은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할 때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남편의 애정이 존재하지 않는 가정을 떠나

출가하기로 결심한다. 남편에 대한 반발이었을까, 아니면 남편의 마음을 사로잡은 불법을 그녀도 접해보고 싶었던 것일까.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녀는 출가의 길을 선택했다. 그 뜻을 전해들은 위사카는 크게 기뻐하며 그녀를 황금 가마에 태워 비구니승가로 보내주었다. 아내의 출가를 기뻐하는 남편의 등 뒤에서 아마 아내는 섭섭한 마음을 달래며 쓸쓸하게 눈물짓고 있었으리라.


인도 전역 순례하며 불법 전파


이렇게 해서 담마딘나는 비구니승가로 들어가게 된다. 불법에 대한 강렬한 갈망도 아닌, 불가피한 상황도 아닌, 필시 남편에 대한 원망 섞인 애정의 단절을 위해 입단했을 그녀였지만, 인연이 성숙해 있었던 탓일까. 입단 후 그녀는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진 인적 드문 곳에 머물며 그 누구보다 열심히 수행했고 단계적으로 성과(聖果)를 획득해갔다. ‘테리가타’에는 그녀가 최초로 경지에 올랐을 때 읊었다고 하는 게송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최고의 경지를 향하여 의욕을 불태우며, 마음으로 이를 느껴야 한다. 욕망에 결박당하지 않는 자는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자’라 불린다.”


머지않아 수행을 완성시키고 아라한이 된 담마딘나는 남편과 가족들이 살고 있는 라자가하를 향해 길을 나섰다. 진리를 체득한 기쁨을 함께 하고 싶었고, 또한 그들에게도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아마도 이는 남편에 대한 응어리를 풀었기에 가능해진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깨달음을 얻어 심신의 자유와 행복을 만끽하게 되었을 때, 그녀의 가슴 속에서는 욕망을 버렸다는 말과 함께 자신도 함께 버렸던 남편에 대한 원망이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편, 담마딘나의 출현에 위사카는 당황했다. 승가에 있어야 할 그녀가 고향을 찾은 것은 혹시 수행을 견디지 못해 포기하고 환속했기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위사카는 자신의 염려를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에게 교의에 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담마딘나의 지혜를 시험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담마딘나는 조금의 막힘도 없이 대답해 갔고, 이런 그녀를 보며 위사카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그 길로 부처님을 찾아 간 위사카는 담마딘나와 나눈 문답에 대해 말씀드리며 판단을 청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위사카야, 담마딘나는 현자이다. 담마딘나는 큰 지혜를 갖춘 여인이다. 만일 네가 나에게 물었다 하더라도 나 역시 똑같이 대답했을

  것이다.”


부처님으로부터 이런 최대의 찬사를 받은 그녀는 비구니 가운데 설법제일이라는 평을 받게 된다.
이후 담마딘나는 인도 각지를 돌며 날카롭고도 적절한 법문으로 사람들을 교화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높은 명성을 얻었다.

한때 담마딘나는 코살라국의 사왓티 교외에 있는 한 비구니승원에서 안거를 보내고 있었다. 그 근처에는 파세나디왕의 병사들이

머무르고 있었는데, 이들은 국왕으로부터 급료를 받으며 언제 갑자기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쟁이 없을 때는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도박 등으로 시간을 보냈고, 결국 이로 인해 급료를 거의 모두 탕진하여 집에 들여 놓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덕분에 이들의 아내들은 변변한 옷 한 벌 사 입지도 못한 채 초라한 몰골로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의 집을 방문하게 된 담마딘나는 그녀들의 비참한 모습을 가엾이 여기며 급료 가운데 반드시 반은 저축하라고 가르쳤고, 병사의 아내들은 담마딘나에게서 배운 대로 저축을 했다. 그 결과 이들은 처참한 상황에서 벗어나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담마딘나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 위해 비구니들을 식사 공양에 초대하기로 한다.


병사들이 초대의 뜻을 전하기 위해 담마딘나를 찾아가자 그녀는 그들에게 필요한 설법을 해 주었고, 설법에 감동한 병사들은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며 평생 살생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리고 식사 초대의 뜻을 전했다. 그러자 담마딘나는 “부처님께서 지금 이 근처

기원정사에 계십니다. 먼저 부처님을 초대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라고 권유했다.


수카 등 수많은 제자 길러내


이렇게 해서 병사들은 여름 내내 부처님을 비롯한 승가에 의식주, 그리고 약을 공양했다. 그 동안 많은 설법을 접하며 살생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다시금 확인한 이들은 수행자와 마찬가지로 물속의 미생물을 죽이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물을 걸러 마실 정도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코살라국의 변경에 반란이 일어나자 국왕은 병사들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대신들이 이를 말렸다.


“왕이시여, 저 병사들을 보내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연유인가?”
“병사들은 물조차 걸러 마실 정도로 살생을 꺼리고 있습니다. 작은 벌레조차도 죽이지 못하는데 어찌 싸울 수 있겠습니까?”
왕이 병사들에게 사실 여부를 묻자, 병사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작은 벌레들은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기 때문에 죽일 수 없습니다만, 왕의 법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변경에 도착하여 적을 만난 병사들은 모두 앉아 자심삼매(慈心三昧)에 들어갔다. 즉, 자애의 마음으로 상대를 완전히 감싸 안아 버린 것이다. 이 모습을 본 적들은 완전히 전의(戰意)를 상실해 버렸고, 결국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은 채 코살라국의 병사들은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 파세나디왕은 크게 기뻐하며 포상을 두 배로 해주고 급료도 올려주었다고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놓인 상황을 고려한 적절한 설법을 통해 담마딘나는 많은 사람들을 교화해갔는데,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나 할까.

그녀의 제자들도 설법에 능통했다. 그 가운데서도 유명한 것이 숙카(Sukka-)이다. 숙카 역시 담마딘나처럼 라자가하의 양가에서 태어나 부유하고도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처음 부처님이 라자가하에 오셨을 때 재가신자가 되었는데, 그 후 담마딘나의 설법을 듣고 감동하여 출가했다고 한다.


그녀 역시 수행을 시작한 후 머지않아 성자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녀의 설법은 신들도 칭송할 정도였다. ‘테리가타’에는 라자가하의

한 나무에 사는 신이 읊었다고 하는 다음과 같이 게송이 전해진다.


“라자가하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꿀 먹은 벙어리들처럼 잠자코만 있을 뿐, 부처님의 법을 설하고 있는 숙카 비구니에게 왜

가지 않는가. 지혜를 지닌 사람은 감히 거역할 수도 없고, 질리지도 않으며, 저 맛 좋은 가르침을 들이마시나니. 마치 길 가는 나그네가 빗물을 마시듯….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네.”


한 남자의 그늘을 세상 전부라 여기며 살았던 귀부인 담마딘나.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남편은 그 그늘을 거두어갔지만, 현명한 담마딘나는 떠나버린 그늘에 매달려 연연해하지 않았다. 이미 세속적인 욕망의 덧없음을 알고 이를 버린 남편에게 있어 자신의 애정과 집착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일지 그녀는 알았던 것이다. 이제 해야 할, 아니 할 수밖에 없는 일은 남편에 대한 애착을 끊는 것.

 

그렇게 선택한 출가의 길을 통해 그녀는 넓고 넓은 세상에 법의 그늘을 만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설법을 통해 삶의 위안을 받았고, 그녀의 그늘을 나누어 받은 사람들은 또 다시 다른 이에게 자신들의 그늘을 나누어 주었다. 담마딘나로 인해 세상은 그렇게 시원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