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들어와도 화엄사는 조선 불교의 중심지로서 계속해서 번성하였다. 세종 6년(1426년)에는 국가에 의해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지정되고 설응, 숭인, 부휴, 중관, 무렴 등의 고승대덕에 의한 법석(法席)의 요람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선조 26년(1593년)에 가등청정이 이끄는 왜병에 의해 5,000여 간에 이르는 건물이 전소되고 만다.
이로 인해 화엄사에는 석조물을 제외한 목조건축으로서 임진왜란 이전의 것은 전혀 남지 않게 되었다.
이때 많은 문화재가 반출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범종을 일본으로 가져가려 시도했으나 섬진강에 빠쳤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기도 하다.
한편 임진왜란 때 화엄사의 주지였던 설홍(雪泓)대사는 300여 명의 승려를 이끌고 왜군에 대항하다 전사하였다.
또 화엄대사(華嚴大禪) 겸 선교판(禪敎判)을 맡고 있던 간눌(澗訥) 자운(慈雲)은 이순신 장군의 부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화엄사의 중건은 인조 때 들어와 벽암(碧巖) 각성(覺性)선사와 그 문도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벽암선사는 1630년에서 1636년 사이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한 금강문, 나한전, 영전, 명부전, 보제루, 천왕문, 적묵당, 일주문 등의
건물을 중건한다. 이러한 중건 불사로 화엄사는 면모를 일신하였으며, 인조 24년(1646년)에는 백곡(白谷) 처능(處能), 인조 26년(1648년)에는 취미(翠微) 수초(守初)의 법회가 있었다.
효종 원년(1649년)에는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으로 승격되었고 현재 국보 301호로 지정되어 있는 영산회상도 괘불이 효종 4년(1653년)에 조성된다.
= 대웅전= 보물 제299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노사나불과 석가불의 삼신불(三身佛)을 모시고 있는 불전이다.
임진왜란으로 화엄사가 소실된 후 각황전에 앞서 인조 14년(1636년)에 벽암선사에 의해 중건되었다.
현재 화엄사에서 각황전 다음으로 큰 규모의 건물이며, 보물 제299호로 지정되어 있다.
♣노사나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
♣비로자나 부처님(대웅전에 계시는 삼신불)♣
삼신불 뒤 불벽에 모셔져 있는 삼신불도로 비로자나불도, 노사나불도, 석가모니불도의 세 폭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 비로자자불상과 노사나불상, 석가불상의 뒤에 봉안되어 있다.
이 불화는 18세기에 조계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의겸 스님을 비롯해 13명의 화사(畵師)가 동원되어 그린 것이다.
삼신불을 별도의 화폭에 그린 삼신불도를 완전히 갖춘 드문 예로서 통도사 대광명전의 삼신불도(보물 제1042호)와 더불어
18세기 삼신불도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조선 영조)
= 원통전 =
각황전 앞마당 북쪽에 대웅전, 영전과 나란히 남향해 위치하고 있다. 본존으로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조선 숙종 29년(1703년)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외부에도 단청을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면 어간에 건 편액은 정조 23년(1799년)에 조종현이 쓴 것이다
= 원통전에 모셔져있는 관세음보살=
= 나한전 =
각황전과 응진전 사이 모퉁이에 위치한 나한전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16나한을 모시고 있는 건물이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인조 10년(1632년)에 벽암선사가 중건하였으나 정조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나한전은 정조 19년(1795년)에 담인(曇仁)선사가 중건한 것이다.
불단에는 석가여래좌상과 좌우에 나한상 입상(立像) 1구(俱) 씩을 모셨다.
석가여래좌상은 방형 평면의 수미좌 형식으로 된 목조 좌대 위에 모셔져 있다.
작은 규모의 목조 불상으로 신체에 비해 상호가 큰 편이어서 비례가 어색하다. 목은 매우 짧아 삼도(三道)가 불확실하다.
양 손은 무릎 위에 올렸는데 오른 손은 항마촉지인은 하고 있으나 그 모습이 경직되어 있다.
= 명부전 =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시왕을 모신 명부전은 대웅전 남쪽 마당 동쪽을 가로 막으며 서향하고 있다.
인조 8년(1630년)에 벽암선사가 중건하였으나 1970년에 리산 도광선사가 중수하였다. ** 편액은 정조 23년(1799)에 조종현의 글씨입니다
= 원통전앞 사자탑 = 보물 제 300호, 시대 : 통일신라 9세기 말 ~ 10세기 초
이 탑은 아래 기단의 면석에 갓기둥과 버팀기둥이 없는 불단 형식으로 몸돌은 네모난 기둥처럼 우뚝하게 길며, 각 면에는 사천왕상이 얕게 새겨져 있다.
원통전 앞에 위치한 이 석조물은 모든 시대를 거쳐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기단 위에 있는 네 마리의 사자가 긴 장방형의 석재를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현재 화엄사에서는 ‘노주(露柱)’라 부르고 있는데 그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설과 공양대(供養臺)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으나 그곳도 확실하지는 않다.
◈상위에 있는것 = 사천왕 부조, 받침대 = 사사자상
= 동오층석탑 = 보물 제 132호. 시대 : 통일신라 9세기
이 탑은 표면에 아무런 조각장식이 없고 기단도 단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1999년에 사리 장엄구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탑 속에서 발견되었다.
대웅전 앞 한 단 낮게 조성된 마당의 동쪽에 위치한 석탑으로 서쪽의 석탑과 쌍으로 서있다.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5층으로 구성된 탑은 비교적 크기가 큰 편에 속하여 아직 탑의 기능이 쇠퇴한 시점에 조영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따라서 이 석탑은 신라 말 9세기 또는 10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서오층석탑 = 보물 제 133호. 시대 : 통일신라
배례석은 장방형 평면으로 정면과 후면에는 각 2개, 양 측면에는 각 1개의 안상을 새겼다. 윗면에는 3개의 연꽃을 연속해서 새겼는데,
배례석 상면에 가득 찰 정도로 크며 비교적 고부조로 조각되었음이 특징이다. 각 연꽃은 커다란 원형의 연밥 주변으로 내외 2중의 연잎 8개를 새겼다.
대웅전 앞 한 단 낮게 조성된 마당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의 오층석탑과 쌍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서오층석탑은 동탑에 비해 약간 앞쪽으로 위치시키고 그 중심축을 약간 보제루 쪽으로 돌려놓고 있음이 특징이다.
배례석은 장방형 평면으로 정면과 후면에는 각 2개, 양 측면에는 각 1개의 안상을 새겼다.
윗면에는 3개의 연꽃을 연속해서 새겼는데, 배례석 상면에 가득 찰 정도로 크며 비교적 고부조로 조각되었음이 특징이다.
각 연꽃은 커다란 원형의 연밥 주변으로 내외 2중의 연잎 8개를 새겼다.
= 범종각=
보제루를 중심으로 운고각의 맞은 편, 즉 보제루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1976년 5월 1일에 착공하여 11월 28일 준공과 더불어 타종식을 거행하였다.
도리통 3간, 양통 2간의 건물로 도리통은 어간을 협간에 비해 넓은 주간으로 설정하였다. 사방은 개방되어 있으며, 내부에 범종 하나가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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