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 = 心 산사 길없는길

구례 화엄사 = 3

백련암 2012. 5. 18. 02:54

불타는 화엄사, 그리고 아흔 여덟 대덕의 토굴살이

 

화엄사는 임진난 내지 정유난의 병화로 전체적으로 불탔다. 이를 두고 홍세태는 “도선의 유적은 외로운 연기 뿐道詵遺跡只孤烟”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화엄사사적>(1924)은 선조26년(1593)에 절이 불탄 뒤에 아흔 여덟 분의 대덕들이 토굴살이에 의지하면서 터를 지켰다고 적고 있다.

구층암의 사역 역시 이때 불탔을 것이다.

특히 정유난에는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하고 섬진강을 따라 내습하여 구례와 남원 일대가 가장 참혹한 병화를 입었으며,

구례의 봉성과 남원성이 함락될 즈음에 지리산 산중구곡의 암자들까지 모조리 불에 탔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정유난에는 석주관 전투에서 화엄사 승려 153인이 전사하기도 했다.


 

= 각황전 뒷면과 옆면 =

= 각황전 = 국보 제 67호 <2010년>

숙종(재위 1674~1720년)대에 들어와 화엄사는 벽암선사 이후 또 한번의 커다란 중건불사가 이루어진다.

숙종 25년(1699년)에서 숙종 28년(1702년) 사이에 걸쳐 벽암선사의 제자인 계파(桂波)선사와 그 문도들이 3년에 걸친 공사 끝에 장육전 터에 중층의

각황전(覺皇殿)을 건립하였다.

숙종 29년(1703년)에는 각황전 안에 삼존불(三尊佛)과 사보살상(四菩薩像)을 조성하고 일주일에 걸친 경찬대법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장육전을 각황전으로 사액하였고 선종양교대가람(禪宗兩敎大伽藍)으로 승격되었으며, 원통전을 중건하기에 이른다.

이로서 화엄사는 각황전과 대웅전을 갖춘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법회와 강론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부처님을 깨달음의 왕이란 의미로 "각황" 이라 부르는 데서 전각 이름을 정하였다. *편액은 1703년에 형조참판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불단 위에는 3간에 걸쳐 각 간에 1구 씩 삼신불을 모셨다.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측이 노사나불, 우측이 석가모니불이다. 각 불상은 수미단형 위에

복련과 앙련으로 이루어진 좌대를 마련한 위에 모셔졌다.

= 사사자삼층석탑 = 국보 제 35호. 시대 : 통일신라 9세기

이 탑은 기단에 주악천인과 공양상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고, 기단 갑석위에는 연꽃 봉오리를 든 비구니상이 서 있다.

그 위에 1층 몸돌에는 문의 좌우에 인왕상과 사천왕상, 범천상과 제석천상이 새겨져 있다.

탑을 향해 석등을 머리에 이고 앉아 있는 승려상은 찻잔을 들어 공양하는 모습이다.  이곳은 효대라고도 불리는데,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가 어머니를 위해 탑을 세웠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화엄사에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불법의 깨침의 세계를 더욱더 아름답게 장엄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효 이야기 입니다.

사자석탑과 공양석등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4사자 3층석탑은 화엄사의 창건주인 연기조사와 어머니의 전설을 담고 있습니다.

신라 선덕여왕14년(645)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불사리 73과를 모셔와 연기조사의 공덕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탑으로 불사리 공양탑이라고 합니다. 전체적인 탑모양은 연기조사께서 편단우견 우슬착지한 자세로 머리에 석등을 이고 있는데, 왼손으로 찻잔을 들고 찻잔 위에 여의주를 받쳐 어머니

에게는 진리를 공양하고 부처님에게는 차 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어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닌(不二)의 경지를 느끼게 해줍니다.

 

*이 대지 위에는 뒷산을 배경으로 화엄사를 내려다보면서 동향한 석탑이 있고 그 앞쪽에 석등이 있으며, 둘을 연결한 중심축선상에 배례석 두 개가 놓여 있다.

 

 

*삼국시대에 탑의 네 모서리 바깥에 수호신상으로 사자를 배치한 것과 연관된다.

*탑의 바깥쪽에서 수호신상으로 존재하던 사자가 직접 탑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받치는 모습으로 전환된 것이다.

사자는 네 모서리에 뒷다리를 접고 앞다리를 쭉 편 채 앉아있다. 사실적인 사자의 모습이 아닌 인격이 부여된 사자의 모습으로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목에는 영락을 늘어뜨렸고, 입은 크게 벌리거나 닫은 아훔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자 아래는 별석(別石)으로 만든 대좌가 있는데, 복련과 앙련을 새겼다. 사자 머리 위에도 별석에 앙련을 새긴 돌이 있어 탑신을 받치는 기단의 갑석을 받치

고 있다. 사자로 둘러싸인 안쪽 중앙에는 합장한 모습으로 서있는 스님의 상(像)이 있다. 합장을 한 모습으로 인체의 비례가 적당히 표현되어 있는데,

상부에는 갑석 아래에 연꽃을 조각했다. 갑석 윗면에는 두 단의 쇠시리를 두어 탑신받침을 삼았다.

 

▲= 각황전 앞 석등 = 국보 제 12호

각황전 앞에 세워진 이 석등은 높이가 6.4m로 우리나라에 현존하고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석등이다.

 

= 당간지주 =

신라 헌강왕 원년(875년)에 도선국사가 화엄사의 형국이 커다란 배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돛대를 상징하는 당간을 이곳에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현재 당간은 남아있지 않고 지주만 서있다.

 

지주의 네 모서리를 둥글게 모접기 하였는데, 모접기는 중간쯤에서 끝이 나고 상부는 모접기를 생략하였다.

가장 위쪽은 둥글게 곡선으로 접어 완결성을 높였다. 조형으로 보아 신라 때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조선시대에는 당간지주를 세우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돌항아리 전각

= 돌항아리 =

고려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돌항아리는 네모난 화강석을 정교하게 다듬어 항아리처럼 만든 것이다.

법주사에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는데, 용도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픙수지리로 볼 때 화엄사는 전체적인 형국이 항해하는 배의 모양을 닮아 있어 항해 중에 필요한 물을 담는 항아리를 조성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일체유심조= 

〈화엄경〉의 핵심사상을 이루는 이 말은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 부도군 =

 절 입구의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길가 왼편 산기슭에 부도밭이 있다.

절의 역사를 과시하고자 절 입구에 부도밭을 만드는 조선시대 후기 사찰의 경향에 따른 부도밭의 위치라 할 수 있다.

부도밭은 길을 따라 아래위 두 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종무소와 템플스테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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