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 = 心 산사 길없는길

땅끝 아름다운 사찰 미황사(美黃寺) 대웅전, 쾌불, 만하당, 달마전, 범종각, 누각, 자하루

백련암 2012. 10. 18. 03:04

땅끝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미황사는 우리나라 최남단에 있다는 것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찰입니다.

미황사는 바다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창건이야기, 중창이야기를 비롯 경내의 성보에도 바다 냄새가 가득한 사찰입니다. 

 

1629년에 세운 "미황사사적비"에는 미황사 창건에 관한 연기설화를 전하고 있다.

신라 경덕왕 749년(경덕왕 8년)으로 돌로 만든 배 한척이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獅子浦口)에 홀연히 와 닿았다.

배안에서 하늘의 음악과 범패소리가 들리므로 어부들이 살피려 다가갔지만 그 때마다 번번이 배는 멀어져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의조화상(義照和尙)은 장운(張雲)과 장선(張善) 두 사미와 더불어 촌주(村主)인 우감(于甘) 외에 제자 100인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배는 비로소 바닷가에 닿았는데, 그 안에는 주조한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서 있었다.

이어 배안을 살피니 화엄경 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 문수보살 및 40성중, 16나한과 불화 등이 있었고, 또 금환(金環)과 흑석(黑石)이 각 한 개씩

있었다고 한다.

향도들이 경을 해안에 내려놓고 봉안할 장소를 의논하자 흑석이 저절로 벌어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큰 소가 되었다.

 

이날 밤 의조(義照)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金人)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優塡國, 인도) 왕으로서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경상(經像)을 모실 곳을

구하고 있는데 이곳에 이르러 산 정상을 바라보니 일만불(一萬佛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마땅히 소에 경을 싣고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경을 봉안하라”고 일렀다.

의조화상은 꿈에 지시한대로 소에 경을 싣고 나아갔다. 소는 가다가 한 번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산골짜기에 이르러 다시 누우며  ‘미(美-소 울음소리)’하고

크게 울며 죽어버렸다. 이후 소가 처음 누웠던 곳에는 작은 암자를 세워 통교사(通敎寺)라 하고, 소가 누워 죽은 골짜기에는 미황사를 짓고 경(經)과 상(像)을

봉안하였다.  여기서 미황사의 ‘미’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황’은 배 안에 있던 금인(金人)의 색을 취하여 명명한 것이라 한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947호

미황사의 주불전으로 건물의 공포 모습을 볼 때 18세기 중반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건축시기도 이 무렵으로 보고 있다.

내부에는 후불벽을 만들고 조선후기에 봉안된 것으로 보이는 목조삼세불(木造三世佛)을 봉안하였다.

불화는 후불탱인 삼세불탱(三世佛幀, 1993년)과 좌측벽 불단에 신중탱(神衆幀, 1943년)이 모셔져 있다. 이밖에 법고대(法鼓臺)와 1979년에 주조된 중간

크기의 종(鍾), 그리고 괘불(보물 제1342호)을 담은 목조 괘불함이 들어 있다. 전각 앞에는 괘불대와 배례석이 남아 있다.

 

 

미황사 괘불(掛佛)= 보물 제1342호

이 괘불은 항마촉지인을 결한 석가불을 묘사한 것으로 옹정 5년(雍正五年, 1727) 9월에 삼베바탕에 채색하여 조성한 것이다.

중앙에 석가여래를 독존의 입상으로 크게 묘사하고, 화면 상단 좌우에 구름을 타고 법회도량에 내려오는 화불 6위를,

하단 좌우에는 해상용왕과 용녀를 배치한 이 괘불은 조선후기 괘불이 대부분 석가의 영산회상을 주제로 많은 권속을 표현함에 반해 단순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본존은 마치 좌상에서 보이는 원형 두광과 신광을 갖추었는데, 원만한 얼굴에 이목구비는 작으며, 윤곽선만 표현된 나발머리에는 뾰족하게 육계가 솟아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큼직하게 묘사되었다.

신체는 당당하며, 두 손은 항마촉지인을 결하였다. 불의(佛衣)는 왼쪽어깨에 걸쳐 뒤로 돌아 오른쪽 어깨를 살짝 덮는 변형 통견식으로 걸치고,

가슴 아래로 드러난 승각기는 띠매듭으로 고정하였다.

전체적으로 화면은 원형 신광을 경계로 상단에는 천상의 세계를 묘사하고, 하단에는 좌우 용왕 용녀 주위로 바다 속 세계를 연출하였다.

용왕은 원유관을 쓰고 보석함과 같은 지물을 들고 본존불을 향하고 있고, 용녀는 여의주가 담긴 정병을 들고 있다.

바다 속 표현으로는 산호, 조개 등을 묘사하였는데, 본존이 딛고 서있는 연화대좌의 연화도 산호와 같이 표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게, 물고기 등을 조각한 점과 연관하여, 미황사의 위치가 바다와 가까이 있다는 점과 상관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기에 따르면 괘불의 조성에 참여한 화사는 탁행(琢行), 설심(雪心), 희심(喜心), 임한(任閑), 민휘(敏輝), 취상(就詳), 명현(明現)이며,

이들은 18세기 전반 전라도 및 경상도일대에서 활발히 활동한 의겸(義謙)화파의 유파와 임한(任閑)화파의 인물들이다.

 

이 괘불은 다른 괘불처럼 야외 법회 때 걸기도 하지만 가뭄이 들 때 이 괘불을 걸고 제를 지내면 비가 내린다는 영험으로 유명한데,

실제로 1992년 기우제를 지냈는데 제를 지내고 서너 시간이 지나자 달마산으로 먹구름이 몰려와 폭우가 쏟아져 그 영험을 증명한 바 있다고 한다.

 

 

목조삼세불상(木造三世佛像)

조선후기에 제작한 목조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의 삼세불(三世佛)을 봉안하였다.

본존불은 볼이 통통한 계란형의 얼굴에 머리는 나발로 낮은 육계와 반달형의 계주를 갖추었다. 이마에는 백호가 묘사되었고, 작은 눈은 반개하여

정면을 향하고 있는데 명상에 잠긴 표정이다.

 

코와 입은 반듯하며 귀는 길게 목까지 늘어뜨렸으며,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다.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식(通肩式)으로 걸치고,

두 어깨에서 흐른 옷자락은 가슴 아래에서 U자형을 이룬다. 법의 안에 보이는 내의자락은 띠매듭으로 고정하였으며, 두 손은 항마촉지인을 결하였다.

 

 

좌우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크기와 중품하생인의 수인을 취한 점만 본존불과 다를 뿐 얼굴의 생김새나 법의 착의형식은 동일하다.

삼세불의 대좌는 3단의 중앙 불단위에 3개의 연화대좌가 올려진 팔각대좌이며, 대좌의 문양은 화려하진 않지만 연화대좌에는 채색을 팔각대좌에는

금채를 하였다. 삼세불의 각각 앞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약사여래불(南無藥師如來佛)’이 적힌

화려한 불패를 봉안하였고, 후불탱으로는 1993년에 조성한 것으로 삼세불과 그 권속들을 묘사한 삼세불탱(三世佛幀)을 봉안하였다.

 

 

신중탱(神衆幀, 1943년)

 

범종(梵鐘)

범종은 대웅보전 내부 중앙 불단 왼편에 봉안한 것으로 불기2523년(1979)에 조성하였다. 크기는 비교적 작은 소형으로 종정(鍾頂)에는 위엄 있는 용뉴를

장식하고, 종신(鐘身) 상단과 하단에는 당초문이 장식된 상대와 하대를 두르고, 그 사이에 종유가 있는 4개의 유곽을 배치하고 당좌를 중심으로

4분의 비천을 장식하였다. 당좌 위로는 화기를 기록하고, 비천 좌우로는 시주자명과 시주자의 생시를 기록하였다

 

우리나라의 범종은 중국이나 일본과 다르게 윗부분에 고리의 역할을 하는 용뉴(龍紐) 옆으로 원통형의 음통이 있어

종의 내부와 통하기 때문에 따로 구별하여 ‘한국종’으로 불린다.

 

범종의 구성은 대개 몸통의 위와 아래에는 띠[상, 하대(上, 下帶)]를 두르고, 상대 밑에는 9개의 젖꼭지 모양의 장식[종유(鐘乳)]을 감싼

사각형 테두리[유곽(乳廓)]를 두고, 몸통의 중간부에는 종을 울릴 때 당목(撞木)으로 치는 자리인 당좌(撞座)를 배치하고

그 좌우로는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이나 공양상 등을 배치한다.

 

    

 용뉴                                                                                    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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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석

기단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허튼층으로 쌓았다. 초석은 다듬은 것과 다듬지 않은 것을 섞어 사용하였다. 다듬은 초석은 원형주좌를 도드라지게 새긴

원형초석을 놓았는데 초석 표면에 연꽃 외에 거북이나 게 등 수중생물을 새겼다.

초석에 새긴 다양한 수중생물은 단순히 바다와 가깝다는 미황사의 입지적인 이유 외에도 민간신앙을 수용한 불교적 이해로 보인다.

 

   

문살 이 특이하게 두종류로 나누어져 있다.

 

  

 

  

천분의 부처님(천불도)

대웅보전 포벽에는 천불사상을 표현하려는 듯 수많은 부처를 구름위에 묘사하였다. 불상 머리 위에는 아자형 닫집을 설치하였으며 불단에도 비천이나 괴면, 모란 등을 세밀하게 조각했지만 지금은 붉은 칠을 해서 아쉽다. 고주에는 옛 단청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기둥 전체에 가득 그려진 용은 아직도 생동감 있다.  

 

  

 멀미가 심한탓에 미황사를 마음에 두고 몇번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를 거듭하다  이번에 조카와 다시한번 큰 마음을 먹고 떠난 여행

그러나 그도 쉽지가 않았다. 주사맞고 약을 가지고 가고 나주에서 택시를 대절하고 했어도 난 미황사에 도착했을때는 초죽음이 되어있었다.

왜 그렇게 가보고 싶었는지를 예불을 하려고 법당에 들어가는 순간 벽면에 보이는 부처님들은 나의 가슴은 숨이 막히면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게했다. 그저 난 말없이 절만 계속할 뿐....

 

  

옆면 부처님들은 천불도의 한 부분이다. 한지를 덧데어 그림을 그려놓았다고합니다. ↑천불복원도

 

   

옥암당 부도(玉岩堂 浮屠)

대웅보전 오른편에는 옥암당(玉岩堂, 1721년) 부도가 있다.  이 부도는 원래 북부도군에 있었으나 북부도군의 다른 부도를 모두 도난당해 이곳에 옮겨놓았다.

그러나 옥암당 부도 역시 제작시기가 적힌 상륜부 석재가 유실되고 몸돌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스님들의 수행처인 만하당(晩霞堂)선방

 

 

만하당(晩霞堂)선원

 

만하당(晩霞堂) 과 달마전 축대

 

달마전 = 스님들이 계시는 방

 

달마전 승방

 

범종각(梵鐘閣)

'미황사대종중성기'에는 창건 때 조성한 종이 오래되어 도광 14년 즉 1834년에 새로 종을 조성했다고 하나 종은 물론 종각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누각 바로 옆에 자리한 종각으로 2004년에 새로 지었다.

 

범종(梵鐘)

2004년 범종각을 새로 지으면서 함께 조성하였다. 대개 근년에 조성된 범종은 통일신라 범종의 예를 따른 예가 많이 전하는데,

이 범종 역시 통일신라 범종의 예를 따랐다.

 

종정(鍾頂)에는 음통을 감싼 용뉴를 장식하고, 종신(鐘身) 상단과 하단에는 당초문이 장식된 상대와 하대를 둘렀다.

상대 아래로는 9개의 종유가 있는 4개의 유곽을 배치하고, 중앙 당좌(撞座) 위에는 ‘달마범종(達摩梵鐘)’이라 새기고 좌우에 4분의 공양비천상을 새겼다.

한편 종신에는 의례히 기록되는 시주자명이나 화기가 없는데, 다만 당좌 아래 ‘성종사(聖鐘社) 제112호’라는 제기가 있어 그 제작지를 밝히고 있다.

 

 만세루(누각)

 

자하루(紫霞樓)

미황사 중심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누각으로 2001년에 다시 지었다. 하층 어칸을 통로로 사용하고 좌우는 각각 벽과 문을 달아 사용하고 있다.

상층은 전체적으로 트인 한 공간으로 한문학당이나 수련회 등 대규모 행사 때 사용하고 있다.

 

 

범종각(梵鐘閣)

 

 

 

▶찾아가는 길

기차 : 용산에서 나주까지 KTX 를 타고 하차한 후 택시를 타고 나주 터미널에서 해남터미널까지 가서 해남터미널에서 미황사에 가는 버스를 타면 됨

          기차는 첫차를 타야만 시간이 맞을겁니다 그래야만 해남가는 터미널에서 미황사 가는 버스를 타실 수 있습니다.

          해남에서 미황사가는 버스가 많이 다니지 안으며 최대 오후 2시 버스를 타야 여유가 있습니다 이차를 놓치면 오후 5시차가 된답니다.

 

          저희는 시간을 못맞추어 나주에서 택시로 들어갔습니다. 해남터미널에서 미황사까지 택시요금 \3만원이라 함

 

▶더 자세한 교통편을 알려면 즐기는 생활 = 여행, 사진 편에서  그리고 미황사 음악회 편을 보시면 더 많은 교통편을 알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