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황사(美黃寺)
창건 이후 절의 역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고려시대에 들어 지원년간(1264~1294)1281년에 중국 남송(南宋)의 달관(達官),
군자(君子) 등이 절에 내왕했다고 한다. 또 1281년에는 남송의 배가 이곳 바닷가에 표류했는데 한 고관이 달마산을 가리키며 예를
표하고 그림을 그려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조선시대의 역사는 1754년(영조 30)에 기록한 ?미황사법당중수상량문?에 자세히 전하고 있다.
이 상량문은 1982년 대웅전 복원공사 때 발견되었다.
여기를 보면 정유재란 이후 3차례의 중건이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 중건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자
이듬해 만선(晩善) 스님이 공사를 시작해 1601년에 마무리 하였다.
그 뒤 1658년(효종 9)에서 1660년(현종 1) 사이에 성간(省侃) 스님이 두 번째 중창을 진행하였다.
그 사이에도 불사는 계속되어 1722년(경종 2)에는 응진당의 석가모니불을 조성하였다.
세 번째 중창은 1751년(영조 27)에 덕수(德修) 스님이 시작하여 상량문을 쓴 1754년에 마무리하였다.
이 가운데 세 번째 중창 불사의 정황을 보면, 1751년에 동서 양쪽에 금고를 세우고 이듬해 기와를 바꾸었다.
1753년에는 보길도에서 목재를 실어 오고, 대둔사와 마을에서 공사를 협조하여 이듬해에 대웅전과 나한전을 완공하였다고 한다.
이 무렵 미황사에는 12개에 이르는 암자가 있고 건물은 20여동이 있었다 한다.
한편 18세기에는 고승 연담 유일(蓮潭 有一, 1720~1799) 스님이 여러 차례 이곳에 주석하며 수륙재(水陸齋)를 지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폈다. 1799년(정조23)에는 그의 문집인 ?임하록(林下錄)?을 개간(開刊)하였고,
입적 후에는 이곳에 부도를 세워 그를 기렸다.
1822년(순조 22)에는 대법당 삼존불상을 새로 금칠하고 건물에 단청을 장엄하였다.
이어 1834년(순조 34)에는 대종(大鐘)을 다시 주조하였다.
19세기 후반 1858년(철종 9)에는 영허 의현(靈虛 義玄, 1816~1874) 스님이 이곳에서 만일회(萬日會)를 개설하였다.
이때 만일회는 아미타신앙의 법회로 아미타신앙을 고양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미황사는 조선 중후기에 걸쳐 융성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인근 북평면 출신의 주지 혼허(渾墟) 스님이
중창을 위해 모금차 군고단(軍鼓團)을 이끌고 완도와 청산도를 가다 배가 조난당했다. 이때 동행하던 젊은 스님들이 몰살되고,
군고단 준비로 진 빚으로 인해 절은 쇠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근년에 들어서 1989년에 주인 없이 비어있던 미황사에 지운스님과 현공스님, 금강스님이 차례로 주석하면서 절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후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 달마전, 부도암 등을 복원하고, 퇴락한 세심당을 재건하였다.
10여 년 간 중창불사에 원력을 세워 옛 모습 복원에 힘쓰고 있다.
현재의 전각은 보물 947호인 대웅보전과 보물 1183호인 응진당 그리고 명부전, 삼성각이 있고,
이외 만하당(선원), 달마전(승방), 세심당(수련원), 요사채(후원), 향적전(객실), 안심료(후원),만세루(누각),감로다실(종무소) 등이
포진하고 있다. 보물 제1342호로 지정된 괘불은 높이 10m에 달하는 대형 불화이다.
괘불재(掛佛齋) 행사
괘불대(掛佛臺)
대웅전 바로 앞에도 양쪽으로 한 기씩 있다. 모두 조선시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형태는 간결하여 정상부분이 반원형인 직사각형의 기둥 형식이다.
응진당(應眞堂)
안에는 뒷벽과 좌우 측면벽에 붙여서 'ㄷ'자형 불단을 두고 그 위에 아난과 가섭을 협시로 한 석가삼존불상과 16나한상, 인왕상, 시자상 및
보살상을 봉안하였다. 불상 머리 위에는 봉황과 황룡을 조각한 판재를 걸어 닫집처럼 장엄하였다.
'달마산 미황사 대법당중수상량문'에는 나한전으로 적혀 있으나 현재 현판은 응진당이다.
응진당은 공포 형태나 '달마산 미황사 응진당 중수상량문'으로 미루어 1660년에 중건된 기본 골격을 유지하면서
1754년에 서까래와 천장 등을 대대적으로 수리한 뒤 지금까지 이어진 건물로 판단된다.
정면 어칸 기둥에 끼운 안초공을 용머리 모양으로 다듬었다.
응진당 = 대웅전 보다 약간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았다.
전면에 쌓은 담장 사이를 개방하여 마치 돌문을 통해 오르는 듯한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측면과 배면에도 석축을 쌓아 일곽을 형성하였다.
응진전 = 석가삼존 및 16나한, 기타 권속(應眞殿 釋迦三尊 ,16羅漢, 其他眷屬)
아난과 가섭을 협시로 한 석가삼존불상과 16나한상, 인왕상, 시자상 및 보살상을 봉안하였다.
중앙 석가불은 원만한 방형의 얼굴에 가늘고 긴 눈과 작은 코와 입을 갖추고, 낮은 육계가 있는 나발의 머리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표현되었다.
두 눈썹 중앙에는 백호가,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으며, 신체는 외소하나 결가부좌한 두 무릎의 두께는 높다.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식으로 걸치고,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자락은 가슴에서 U자형을 그리다 무릎 아래에서 부채꼴의 형태로 흐른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결하였다. 대좌는 복판의 연화대좌가 올려진 8각대좌이며, 광배는 갖추지 않았다.
석가불 좌우에는 의좌상의 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는 석가의 협시보살인 문수·보현보살로 추정되며, 그 좌우로는 석가불의 또 다른 협시인 아난과 가섭존자가 시립하고 있다. 아난은 젊은 승려의 모습, 가섭은 나이 든 승려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외에 16나한은 기암 괴석이나 대좌에 앉은 의좌상으로 좌우 8분씩 16분이 대칭적으로 봉안되었고, 전각 입구 양쪽에는 제법 큰 인왕상이 권법의 자세로
시립하고 있다. 또한 내부 양 측면과 후면 벽체에는 흑선묘의 나한상과 보살상 등의 벽화가 14폭 남아있다.
응진전 나한님들...
명부전(冥府殿)
현재 건물은 1997년 원래 자리에 새로 지었다. 내부에는 뒷벽과 측벽에 붙여서 ㄷ자형 불단을 조성하고 중앙에 지장보살삼존상을 비롯해
시왕상 등의 권속을 봉안하였다.
명부전 지장삼존 및 권속(冥府殿 地藏三尊 및 眷屬)
중앙 지장보살상은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를 협시로 중앙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하였는데, 지장상만이 개금되었으며 화염문의 광배를 갖추고 있다.
얼굴은 원만상으로 가늘고 긴 눈, 작은 코와 입을 갖추고 있으며, 승문형의 머리를 하고 있다.
두 눈썹 중앙에는 백호가 있는데, 두꺼운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지 않았고, 신체는 건장하다.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식으로 걸치고, 가슴 아래 드러난 내의는 띠매듭으로 고정하였다. 광배는 주형(舟形)인데 외곽에 화염문이 두르고,
안쪽에는 5분의 두 손을 합장한 비천을 투각하였다.
지장보살상 옆으로는 합장인을 결한 도명존자와 함을 받쳐 든 무독귀왕이 시립하였으며, 그 좌우로 10분의 시왕이 의좌하고 있는데,
시왕은 각각 시자를 대동하고 있다.
이 외에 불단의 측면에는 금강저와 검을 들고 있는 2位의 금강역사가 좌우 입구 앞에 보좌하고 있으며,
오른쪽의 금강역사 앞에는 근년에 조성된 법고와 법고대가 모셔져 있다.
염화실(捻花室)
향적당(香積堂)
청운당(靑雲堂)
세심당(洗心堂)
후원이 앞에 있음(세심당 앞면)
▶찾아가는 길
기차 : 용산에서 나주까지 KTX 를 타고 하차한 후 택시를 타고 나주 터미널에서 해남터미널까지 가서 해남터미널에서 미황사에 가는 버스를 타면 됨
기차는 첫차를 타야만 시간이 맞을겁니다 그래야만 해남가는 터미널에서 미황사 가는 버스를 타실 수 있습니다.
해남에서 미황사가는 버스가 많이 다니지 안으며 최대 오후 2시 버스를 타야 여유가 있습니다 이차를 놓치면 오후 5시차가 된답니다.
저희는 시간을 못맞추어 나주에서 택시로 들어갔습니다. 해남터미널에서 미황사까지 택시요금 \3만원이라 함
※ 참고 : 미황사 저녁공양시간 5시 저녁 예불시간 오후 6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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