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 = 心 산사 길없는길

남해에서 유일하게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는 곳 향일암

백련암 2012. 8. 5. 00:02

 

 향일암(向日庵): 용왕전(하 관음전)

 이 관음전은 용왕전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바위에 바트게 지어져서 불전 앞쪽에 마당은 없다.

주좌가 있는 초석에는 복련을 조각했으며 민흘림의 두리기둥을 세워 상부가구를 꾸몄다.

창호는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교상여닫이 문을 달았으면 하부에 청판을 두었다.

불단은 뒷벽에 붙여 설치하였으며 상부에 작은 닫집을 꾸몄다. 관음보살을 주불로 안치하고 용왕과 동자상을 좌우에 협시하였다.

 

관음전 전면 기둥열에는 다음과 같은 주련이 걸려 있는데 주로 방생의때 외는 문구이다.

施雨行雲四大州(시우행운사대주)

五花秀出救千頭(오화수출구천두)

度生一念歸無念(도생일념귀무념)

百穀以利海衆收(백곡이리해중수)

 

 

향일암(向日庵): 용왕전 불단(龍王殿 佛壇)

현판은 "관음전"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용왕전으로 불려집니다. 바다에 인접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바다의 중인인 용왕을 숭앙하는 뜻에서

이런 이름을 붙인 듯 합니다. 지하에 따로 법당을 마련해 놓았는데 이곳에는 여천 흥국사에서 옮겨 온 아미타불상과 신중탱화·아미타삼존탱·

독성탱이 있습니다. 모두 1900년대 초의 작품으로 보입니다.

 

 

용궁, 용왕탱화

 

 

관음전은 대웅전의 우측에 위치한 전각으로 관세음 보살님을 주불로 모시고 해상용왕과 남순동자님께서 협시하고 계십니다.

다른 명칭으로는 용왕전이라고도 합니다.

용왕님은 농사의 풍작과 더불어 바다의 풍어, 천재 지변으로부터의 보호, 그리고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축원하며 사바세계의 중생에서 복을 주는 선신입니다.

 

 

 

 

대웅전(원통보전)의  벽화  부처님의 일대기

 

마야부인의 태중에 드시다. - 도솔래의상(蔸率來儀相)

 

마야부인은 정반왕을 모신지 10년이 되었으나 아직 후사(後嗣)가 없으므로 아침, 저녁으로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기도를 드리며 훌륭한 왕자를

잉태하기를 기도하였다. 그렇게 지성으로 기도하기를 100일이 되어 가는 초가을 보름달 밤 난간에 기대어 졸다가 기이한 꿈을 꾸었다.

하늘문이 열리며 오색광명이 뻗치고 상서로운 구름이 하늘을 덮은 그 속에 연화관을 쓴 거룩한 상호를 갖춘 보살이 여섯 개의 상아가 돛인 흰 코끼리를

타고 좌우에 무수한 하늘 사람과 보살들의 호위를 받으며 부인 앞에 이르러 합장하고 “소자는 다생의 인연으로 부인께 입태하오니 어여삐 여기소서.”

하고는 오른쪽 옆구리로 드는 태몽이었다.

 

 

룸비니 꽃동산에 탄생하다. -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태자를 잉태한 정반왕비는 산달이 되자 당시의 풍속대로 친정에 가서 순산하기 위해 화창한 봄날 룸비니 동산을 지나던 중 잠시 연(輦)에서 내리어 백화만발

한 꽃동산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 동산 한복판에 무우수(無優樹:바라차 나무)가 있었는데 오른손을 들어 나뭇가지를 잡았다. 그 때에 뱃속의 아기가 태동하여

아는 듯 모르는 듯 태자를 탄생했다. 태자가 한손으로 하늘을, 한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옮기는데 땅에서 연꽃이 솟아 올라와 태자를

떠받들었다. 태자는 낭랑한 음성으로 갓난아이답지 않게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높다. 삼계가 모두 고통이니 내가 편안케 하리라.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고 외치었다.

<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 < 보요경(普曜經)>, < 태자서응경(太子瑞應經)>,

<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생로병사의 허무를 관찰하다. -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싯달타태자는 어느 날 궁궐의 사대문 밖으로 나아가 백성들이 살고 있는 민정을 시찰하게 됐다. 그 때 동문으로 나아가 머리에는 흰 서리를 이고 활등같이

굽은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가는 노인을 보았고, 다시 남문으로 나아가 살가죽은 말라붙고 뼈만 앙상한 것이 길가 더러운 땅에 쓰러져 ‘나를 좀 일으켜

달라’고 목 메인 소리로 외치는 병자를 만났다. 그리고 다시 서문에서는 한 시체를 상여 위에 메고 가는 처자와 권속이 그 뒤를 따르며 가슴을 치며 목메어

울부짖는 처참한 광경을 보았다. 다시 북문으로 나아갔는데 그곳에서 어떤 사문(沙門)을 만났다.

그것을 본 태자는 궁궐로 돌아와서 7일 동안 명상에 잠겨 있었다.< 본행경>인생의 허무와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인생의 근본 고(苦)를 깊이 관찰하고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인생의 행락은 불타는 집 안에서의 놀이일 수밖에 없다고 크게 비관하고 개탄하였다.

 

 

한밤에 성을 넘는 태자 -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정반왕은 태자의 마음이 오직 구도 일념으로 뭉쳐 있음을 짐작하고 크게 걱정한 나머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장수와 군사들로 궁성 안팎을 철저히

지키록 했다. 그렇지만 싯달타 태자는 생의 본래 면목을 밝혀서 생로병사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인생의 참다운 행복이란 존재할 수 없음을

통감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위한 구도의 출가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2월 8일<출가제일> 한밤중에 부왕의 간절한 애정과 아름다운 세 명의 태자비와 이별하고

애마(愛馬) 간타카를 타고 마부 차익(車匿: 찬다카chandaka) 사람만을 데리고 성을 뛰어 넘어 출가한다.

 

 

 

 

 

부모은중경에 이야기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왕사성에 있는 기원정사에서 대비구 3만 8천인과 그 밖에 많은 보살 마하살들과 함께 계셨다.

그 때에 세존께서 대중을 거느리시고 남방으로 나아가시다가 뼈 한무더기를 보시더니 오체를 땅에 붙이시어 그 마른 뼈에 정중히 예배를 하셨다.

 

이를 본 아난과 대중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바로 삼계의 큰 스승이시며 사생(四生)의 어버이시라 여러 사람들이 귀의하고 공경하옵거늘 어찌하여 이름 모를 뼈 무더기에

   친히 절하시옵니까? 』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셨다. 『네가 비록 나의 상족제자(上足第子)이며 출가한지도 오래 되었지만 아는 것은 넓지 못하구나. 이 한 무더기의 마른 뼈가

어쩌면 내 전생(全生)의 조상이거나 여러 대(代)에 걸친 부모일 것이므로 내가 지금 예배한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이르셨다.

『네가 이 한 무더기의 마른뼈를 둘로 나누어 보아라. 만일 남자의 뼈라면 희고 무거울 것이며, 여인의 뼈라면 검고 가벼우리라.』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석존이시여 남자는 세상에 있을 때 큰 옷을 입고 띠를 두루고 신을 신고 모자를 쓰고 다니기에 남자인줄 아오면 여인은

생전에 갖은 방법으로 치장하고 다니므로 여인인줄 알게 되오니다. 그러나 죽은 후의 백골은 남녀가 마찬 가지이옵고늘 어떻게 그것을 구별해서 알아보라고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이르셨다. 『만일 남자라면 세상에 있을 때에 마소를 부리기도 하고 사람을 부려 크게 고행함이 없이 지내기도 할 뿐아니라

때때로 가람에서 경을 외우고 법문을 들은 까닭으로 남자의 벼는 희고 무거울 것이요, 여인은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자녀를 낳고 기름(육)에 있어 한번

아이를 낳을 때에 서말이나되는 피를 흐리며 아기는 어머니 젖을 여덟 섬 너말이나 먹느리라. 그런 까닭에 뼈가 검고 가벼우니라.』

 

아난이 이 말씀을 듣고 가슴이 터질 듯 하여 눈물을 흘려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머님의 은덕을 어떻게 하면 보답할 수 있아오리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내가 너를 위하여 분별하게 설하리라. 무릇 사람이 이 세상에 있게 됨은 부모를 인연하기 때문이니라.

   아버지가 아니면 나지 못하고 어머니가 아니면 자라지 못하나니 어머니의 몸 속에 의지하여 달이 차면 이 따에 태어나게 되느니라.

   이로부터 어머니는 여덟섬 너말의 젖을 자식에게 먹이니 어머니의 은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느리라. 어머니가 아이를 가지면 열달 동안의

   신고(辛苦)는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다』고 <부모은중경>에 설하고 잇으며 어머니의 크나 큰 은혜를 크게 열 가지로 나누어 설하고 있다.

 

첫째. 아이를 잉태하여 열 달 동안 온 정성을 기울여 지키고 보호해 준 은혜,

둘째. 해산할 때 괴로움을 겪는 은혜.

셋째, 자식을 낳고 모든 근심을 잊는 은혜.

넷째, 입에 쓴 음식은 삼키고 단 음식은 아기에게 먹여주는 은혜, 

다섯째, 마른자리 골라 아이를 눕히고 젖은 자리에는 자신이 눕는 은혜,

여섯째, 때 맞추어 젖을 먹여 길러준 은혜.

일곱째, 똥 오줌 가려 더러운 것을 씻어주는 은혜,

여덟째, 자식이 먼 길을 떠나면 생각하고 염려하는 은혜,

아홉째, 자식을 위해서는 나쁜일도 마다하지 않는 은혜.

열째, 늙어 죽을 때까지 자식을 사랑해 주는 은혜.

 

고래(古來)로 동양에서는 백행(百行)의 근본을 효(孝)에 두었고 효의 사상은 인륜(人倫)의 근본이었다. 부처님께서는 태어나신지 7일만에 모친을 잃은 까닭에 부친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지극한 애정을 부모은중경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연등부처님은 선혜동자에게 내세에 석가모니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주었다.

 

시간적으로 나누어 보면 현재의 부처님은 석가모니불, 과거의 부처님은 연등불 그리고 미래의 부처님은 미륵불이다.

석가모니부처님도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과거의 부처님이라 할 수 있지만

현재까지 석가모니부처님의 지혜와 자비광명이 이어져 내려 오기 때문에 현재의 부처님으로 언급한다.

 

아주 오랜 먼 옛날, 과거의 부처님이신 연등불이 이 세상에 오셨다.

이 소식을 들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전신인 선혜동자가 연꽃을 구하여 연등부처님께 연꽃 공양을 올렸다.

 

연등부처님이 길을 가시는데 앞에 물기가 있는 길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깐 선혜 보살이 서슴지 않고 자기 옷을 벗어서 그 길에다 깔아드린다.

그래도 물기가 더 남아있으니깐 설산에서 수행한자라 선혜 보살은 머리가 길었던 모양이다.

땅바닥에 그대로 엎드리면서 머리를 풀었다 부처님 내 머리카락을 발고지나가시라는 말이다.

그리고 연등부처님은 선혜동자에게 이후 내세에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주었다.

 

미륵부처님은 지금은 도솔천에 계시지만 56억 7천만 년 뒤에 이땅에 오실 미래 부처님이다.

 

 

 

 

 

수자타(선생녀)의 유미죽 공양

 

고행을 시작한 지도 다섯 해가 지나갔다. 아무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지독한 고행을 계속해 보았지만 자기가 바라던 최고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어느 날 싯달타는 그가 지금까지 해 온 고행에 대해 문득 회의가 생겼다. 육체를 괴롭히는 일은 오히려 육체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를 괴롭히기 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맑게 가짐으로써 마음의 고요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었다.

그는 고행을 중지하고 단식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는 지나치게 지쳐버린 육체를 회복하기 위해서 네란자라강으로 내려가 맑은 물에 몸을 씻었다.

목욕을 한 뒤 강가의 큰 나무 아래 앉아 있을 때

우루벨라 촌장의 딸인 수자타 여인이 유미죽을 태자에게 받들어 올리니 유미죽의 맛은 비길 데 없이 감미로웠다.

그것을 마시고 나니 그의 몸에서는 새 기운이 솟아났다.

이것을 본 다섯 명의 수행자는 싯달타가 타락했다고 하여 그의 곁을 떠나 바라나시의 녹야원으로 가버렸다.

 

 

마왕녀의 유혹

 

목욕을 마치고 유미죽 공양을 마친 싯달타태자의 마음은 날듯이 홀가분했다. 모든 것이 맑고 아름답게 보이고 마음의 환희를 느꼈다.

그는 다시 비장한 맹세를 했다. ‘이 자리에서 육신이 다 죽어 없어져도 좋다. 우주와 생명의 실상을 깨닫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싯달타가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든 지 7일이 되었다. 이 삼매는 보살이 최후에 부처가 되는 단계에서만 얻는 선정이다.

이러한 선정에 들어서 삼매의 위신력으로 두 눈썹 사이 흰 터럭(미간백호 眉間白毫)으로부터 광명을 놓아 아래로 6욕천(六欲天)에서부터

위로는 색계 18천까지 다 비추었다.

제6천인 타화자재천궁(他化自在天宮)을 비추시니 마왕 파순은 서른두 가지 악몽을 꾸고 크게 놀라 태자의 성불을 결사적으로 방해하기로 했다.

먼저 마왕의 네 딸을 시켜서 갖가지 유혹을 한다.

 

5비구의 귀의와 녹야원 설법 - 녹원전법상(鹿圓轉法相)

 

부처님은 범천의 권청을 받아들이시고 먼저 이 땅 위에서 법을 듣고 깨침을 얻을 사람을 관(觀)했다.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라마풋타를 찾고자 ‘천안(天眼)’으로 관해 보니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 두 선인은 인연이 없어서 서로 만나지 못함을 탄식하고, 다음으로 과거 함께 고행하였고 현재는 바라나시 녹야원에서 수행하고 있는

다섯 사람(콘다나(=고진여), 바파, 바디야, 앗사지(마승), 마하나마)을 관하여 보시고 천여리가 되는 그곳에 이르시어 4성제(四聖諦)와

중도(中道)의 법문(法門)을 말씀해 주시는 첫 법문을 하셨으니 이것이 유명한 녹야원의 초전법륜입니다.

 

이것이 승가(僧伽)의 성립입니다. 교진여(=콘다나) 등의 다섯 사람은 본래 정반왕이 명을 받고 출가하여 고행하며 태자를 잘 모시도록 했으나

고행 도중 수자타(선생녀)의 공양을 받은 태자를 보고는 타락했다 하여 녹야원으로 자리를 옮기었던 이들이었다.

 

사라쌍수하(沙羅雙樹下) 곽시쌍부(槨示雙趺)다 = 부처님 두발에 절을하는 가섭존자.

 

가섭존자는 500명의 많은 비구들과 함께 빠와(Pavā)에서 꾸시나라에 이르는 큰 길에서 만다라 꽃을 든 아지와카(Ājīvaka) 교도를 만났다.

그로부터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편 꾸시나라에서는 네 명의 말라족 수장들이 부처님의 유해를 화장하기 위해 모였다.

그들은 머리를 깎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채 화장용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유해에는 불이 붙지 않았다.

말라족 사람들이 아나율 존자에게 그 이유를 묻자 그가 대답했다.


“가섭존자가 지금 500명의 비구들과 함께 빠와에서 이곳으로 오고 있는 중이다.

그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 발에 절하기 전까지 부처님의 유해가 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잠시 후 가섭 존자와 비구들이 꾸시나라의 마쿠타반다나 사당에 도착했다.

그들이 부처님을 다비하기 위한 장작더미로 가서 부처님 유해에 절을 마치자, 장작더미는 저절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가섭 존자는 부처님의 황금관을 자세히 보면서 스스로 생각하되, ‘내가 너무 늦게 와서 스승님이 먼저 가셨도다.

부처님의 머리와 발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겠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두 발을 쌍으로 내밀었다.

가섭 존자는 즉시 머리를 부처님의 발에 대고 부처님의 공덕을 게송으로 읊었다.”


독일 베를린 인도미술관에 현재 소장된 간다라 불전도는 이들 경전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꽃으로 장엄된 관(棺)과 대좌가 있고 관 밖으로 부처님께서 두 발을 내밀고 있다.

 

가섭존자가 부처님 두 발에 절을 하고 찬탄을 마치자 다비가 시작되었고, 이때 하늘에서 꽃과 향을 뿌렸다는


 

열반에 드시다 : 쌍림열반상 (雙林涅槃相)

 

부처님은 45년간의 설법을 마치시고 80세를 일기로 쿠시나가라성 사라쌍수 사이에서 대 열반에 드시었다.

열반에 드시기 3개월 전에 미리 예언하시고 제자들에게 법을 묻게 하시었다.

부처님은 무수히 모여든 제자들을 돌아보시면서 다정한 음성으로 “그동안 내가 한 설법의 내용에 대해서 의심나는 점이 있거든 묻도록 하여라.

승단이나 계율에 대해서도 물을 것이 있으면 물어라.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입니다.”

아난존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의문을 지닌 사람이 없다고 아뢰자 부처님은 마지막 가르침을 펴시었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내가 열반에 든 후에는 내가 말한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부처님과 가섭존자의 삼처전심(三處傳心)

 

선가(禪家)에서 법(法)을 전할 때 스승은 제자에게 문자나 말의 이치적인 것을 떠나서 마음과 마음의 법으로써 전한다.

그것을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도를 깨우치신 뒤 49년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8만4천의 법문을 설해 오셨는데,

이것은 모두다 부처님의 말씀으로 전해진 교문(敎門)이고 이론과 사량을 바탕으로 한 것이므로

마음과 마음을 통해 직접 전달하는 선(禪)의 원리와는 큰 차이가 있다.

 

말없는 가운데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라야 진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선법(禪法)을 세 차례에 걸쳐 상수제자(上首弟子)인 마하가섭에게 전하신 바 있다.

세 장소에서 마음을 전했다고 하여 삼처전심이라고 한다.  

 

 

첫 번째가 영산회상(靈山會上) 염화미소(炎火)다.

 

부처님께서는 재세 시에 영축선(靈鷲山)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법을 설하셨다.

취봉(鷲峯)이라고도 하는 영축산은 중인도 마가다의 수도 왕사성(王舍城) 동북쪽에 있었으며,

그 모양이 독수리처럼 생겼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축 또는 취라고 발음하는 鷲 자는 독수리 취자다.

따라서 영산회상이라는 말은 독수리같이 생긴 영축산에서 부처님께서 직접 행하신 법회를 이르는 말이다.

 

어느 날 바로 그 영취산에서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는데, 이때 대범천왕(大梵天王)께서 허공중에서 연꽃잎을 비처럼 내리셨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그 중에 한 잎을 집어서 설법을 들으려고 모인 대중에게 쳐들어 보이셨다. 그러면서 얼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염화미소(拈華微笑)란 꽃을 집어 들고 미소를 띠우신 것을 말하며 염회시중(拈華示衆)이란 꽃을 집어 대중에게 들어 보이신 것을 말한다.

 

염화시중은 부처님께서 '이 도리를 아느냐?'고 묻는 화두를 던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많은 제자들 중에서 누가 정법을 바로 아는가를 대중 앞에 점검하여 확인시켜 보기 위한 것이었다.

구름같이 몰려든 청법대중(請法大衆) 가운데 누구 하나 그 뜻을 아는 이가 없었고 모두 귀먹고 벙어리가 된 듯 멍청하게 앉아만 있었다.

그런데 오직 마하가섭 존자 한 사람만이 부처님의 참뜻을 알아차리고 빙긋이 웃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심전심으로 마음이 통한 것을 알고 다음과 같은 법문을 대중에게 하셨다.

 

"나에게 있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의 열반묘심(涅槃妙心)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

이렇게 말없는 무언(無言) 중에 이심(以心)에서 서로 통하여 깨달음이 전심(傳心)이 된 것을 이심전심이라고 한다.

이것이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전해지는 선의 시발점이다.

이때부터 선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이것을 화두의 출발점으로 삼기도 한다.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둘째는 다자탑전(多自塔前) 분 반좌(分半座)다.

 

다자탑은 중인도 비사리 서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아들을 60명이나 둔 한 장자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탑이라고 한다.

어느 날 제자들과 대중들로부터 청법을 받은 부처님께서 이 다자탑 앞의 법상에 오르셨다.

이때 가섭존자는 사위국(舍衛國)의 고요한 숲 속에 오랫동안 머물며 만행을 하다가 부처님을 뵈오러 왔었다.

그의 수염과 머리는 길게 자라 텁수룩하였고, 헌옷에서는 세탁을 한지 오래 되어 냄새가 났다.

이런 차림을 한 가섭존자를 사람들은 어른을 만나러 오면서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고 여겨 경멸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의자 절반을 가섭에게 내주어 앉게 하였다.

거지같은 모습의 가섭존자를 불러 자신의 옆자리에 앉도로 한 것은 대중들이 예상하지 못한 파격이었을 것이다.

 

외모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아무리 깨끗하고 고상하게 차려 입어도 속에 든 것이 없다면 경박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법을 전하는 것은 그 사람의 깨침 정도에 있는 것이지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해 놓으셨다.

대중들은 어째서 부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지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째서 사이좋게 반씩 자리를 차지하고 앉게 했는지에 대한 생각은 대중들에게 의정을 일으키게 만든 두 번째 화두로 제시된다.

 

 

 세 번째는 사라쌍수하(沙羅雙樹下) 곽시쌍부(槨示雙趺)다.

 

부처님께서는 구시나가라성 밖 사라나무 이래서 열반 하셨다.

사라수 여덟 그루가 둘씩 마주 서 있는 사이에 자리를 깔게 하고 열반에 드시니, 그 숲이 하얗게 변하여 학이 앉아 있는 듯 했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그 곳을 '학의 숲'이라고 하기도 하고, 사라수가 둘씩 서 있었다고 해서 사라쌍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라쌍수하 곽시쌍부라는 말은 사라나무 아래에서 임종한 부처님께서 관에서 두발을 내보여 주었다는 뜻이다.

혹은 쌍림열반 곽시쌍부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쌍림 숲에서 열반에 드셨던 부처님께서 가섭이 찾아오자 관에서 두 발을 내어 보여주다’

는 뜻이다.

 

가섭존자는 비사성에 머무르고 있다가 부처님이 열반하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그 직시 출발하였지만 가섭이 오는데는 교통이 발달돼 있지 않아 6일이나 걸렸다고 한다.

가섭이 오기를 기다리던 제자들은 무더운 날씨에 법신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다비식을 거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불을 붙여도 불이 붙지 않았다.

 

가섭존자는 부처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인도에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들을 불효자라고 본다.

부처님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가섭이 스승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도 지탄받아 마땅한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윽고 임종을 지키지도 못한 가섭이 나타나 부처님의 관 앞에 이르러,

오른 쪽으로 세 번 돌고 난 뒤 부처님의 발 앞에 세 번 절하고 엎드려서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어찌 이렇게 빨리 열반에 드셨나이까?"

비통에 잠긴 가섭이 슬피 울고 있을 때 관 밖으로 세존의 두 다리가 뻗어 나왔다. 이것을 사라쌍수하 곽시쌍부라고 한다.

이후 제사를 지낼 때나 고인을 추모할 때는 오른쪽으로 세 번 도는 관습이 생겼다.

제사 때는 돌 수 없으니까 대신 술잔을 향로에 세 번 돌리는 것으로 추도의 예를 갖춘다.

 

인도에서는 스승이나 부모에 대한 최대의 공경이 바로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이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자식들이 부모의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이 마지막으로 고인을 보내드리는 예식이다.

부처님께서 가섭존자가 오자 발을 내 놓은 것은 사람들이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고 비난을 해도

가섭이 자신의 법통을 이은 사람이라는 것을 열반하신 몸으로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부처님 발에 가섭이 입 맞추고 마침내 다비식을 거행하자 비로소 불이 붙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죽어서 까지도 가섭을 인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랬을까. 이것이 세 번째의 화두다. 

 

 

부처님이 떠나신 후 가섭존자는 500명의 아라한들을 모아 그 수장이 된 다음 아난(阿難)과 우바리(優婆離)로 하여금 경(經)과 율(律)을

결집하도록 하였다.

가섭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불교 교단을 이끌어 가는 영도자가 되었고,

선가(禪家)에서는 가섭존자를 제1대 조사로 받들고 있다.

그러므로 삼처전심은 곧 선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이때부터 화두의 참구가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옛 모습의 건물은 이집뿐인것같다

 

         

                                                                                                                                    

시주공덕비  위 임포항                                              

 

 향일암으로 올라가는 관문인 첫번째 돌문이 시작되었다

 

 

▶ 향일암은 기암괴석과 절벽이 절경입니다. 여기에는 7개의 돌문이 있습니다. 북두칠성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7개의 돌문을 확인해보십시오.

▶ 향일암 전각들은 모두 다 바위 위에 있습니다. 유일하게 관음전만 황토위에 건립되었습니다. 눈으로 직접 보시기 바랍니다.

▶ 금오산 정상에 올라가서 남해바다가 연출하는 절경을...

▶거북이 등 줄무늬처럼 금이 간 수많은 바위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