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동대문 밖 탑골승방의 비구니 청정도량, 미타사

백련암 2013. 12. 23. 01:22

동대문 밖 비구니 수행도량 - 미타사(彌陀寺)에는 한가지 별칭이 있다. 

 

그 대표적인 이름은 탑골승방으로 서울의 낙산 아래 동망봉을 경계로 청룡사, 보문사, 미타사 등 비구니 도량이 군집해 있어 생긴 이름이다.

하지만 탑골승방은 미타사 뒤편에 자리한 탑과 관련 있는 듯하며, 고려시대 혜거국사 이후 혜감국사에 이르기까지 고려 국사와 왕사가 창건한 사찰로

그 사맥을 이어 왔다. 

 

특히 미타사는 조선시대에 탑골 승방이라 불리는 옥수동의 두뭇개 승방, 석관동의 돌곶이 승방, 숭인동의 새절 승방(청룡사)과 함께 여승들이 거처하는 성 밖

의 네 이사 중의 하나로 꼽혔는데, 단종의 왕비 송씨와 연관된 동망봉과 청룡사가 이웃해 있어 이 곳이 왕비와 후궁들의 기도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옛날 멀리 단종을 영월로 유배 보낸 왕비 정순왕후 송씨가 청룡사에 머물며, 미타산의 남산인 낙산에 올라 하염없이 그리움으로 세월을 낚은 곳. 또 그

그리움으로 단종의 축원을 위해 시주한 곳.  탑골승방이 자리한 이 곳 미타사와 청룡사에는 그녀의 그리움과 불심이 묻어 있다.

 

또 동문 밖, 비구니 도량으로 왕을 여의거나, 나이가 찬 후궁들이 갈곳 없이 방황할 때 이곳 탑골승방의 문은 활짝 열려 그녀들의 지친 마음을 감싸 주었을

것이다.

서울 지역에 몇몇 남지 않은 비구니 도량인 미타사. 지금은 그녀들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지만, 대웅전과 삼성각에 남아 있는 그녀들의 불심어린 시주로

조성된 탱화를 보며, 내세의 기복과 왕에 대한 사모의 마음을 느낄 수있다.

 

미타사 - 그 사명처럼 아미타부처님이 상주하는 가람으로, 그녀들이 바라는 내세와 그녀들과 인연이 닿은 왕들의 축원이 조선시대 이래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는 그런 역사적인 배경을 담은 듯 비구니 스님들이 상주하며, 정갈하고 단아한 가람, 그리고 정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수행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각(三聖閣)

어칸에는 흑색바탕에 금니로 양각한 편액 1기와 주련 4기가 걸려 있다.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 그리고 높이 33㎝의 소조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다.

특히 칠성탱은 19세기 말 미타사의 연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1874년에 서울 지역 대화사인 경선응석에 의해 조성되었으며,

독성탱과 산신탱은 1915년에 서울지역에서 활약한 초암세복(草庵世復)에 의해 조성되었다.

 

 

칠성탱화= 칠원성군

 

산신과 호랑이의 또 다른 모습

 

 독성탱화와 독성상

 

 

 

 삼성각 탱화(산신과 동자)

 

나한(독성)과 동자

 

 칠원성군과 어부

 

 칠원성군에게 치성들이는 부부

 

 비천상

 

 비천상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에 써 있는 글 = 무득교(無得橋)

 

무득교 맨 위에 보면 석등안에 모셔져있는 약병을 든  관세음보살 상

 

 

무득교 맨 위에 보면 석등안에 모셔져있는 삼존상 

 

 

 

1992년에 자운스님이 조성한 자그마한 미타사사적비

 

서울 보문동 미타사 사적기

미타사기(원문 해석해서 써 놓았음) 

1. 고려 광종 원년(서기 950년)에 혜거 국사가 본사를 창건하고 미타사라 칭했음

2. 고려 문종 원년(서기 1047년)에 석탑을 조성봉안했으며 이로 인해 일명 탑골승방이라 전래함

3. 고려 충숙왕 원년(서기 1314년)에 혜감국사가 제 2차 중수함

4. 단종대왕(서기 1459년)에 왕비 송씨와 권씨에 3차 중수함

5. 순조원년(서기 1801년)에 4차 중수함

6. 헌종 2년 병신년(서기 1836년)에 증사진 허당 인일선사 주지 비구니 상심사가 5차 중수함

7. 서기 1969년에 증사 고봉대선사 주지 비구니 송계주사가 6차 중수함

 

=혜감국사 만항(慧鑑國師 萬恒)=

 

스님의 휘는 만항(萬恒)이고 속성은 박씨(朴氏)이며, 아버지는 경승(景升)이니 진사(進士) 벼슬을 했고, 어머니는 정씨(鄭氏)니 고종 36년 (1249) 기유(己酉)

8월 6일에 웅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정씨가 한 꿈을 얻었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취막(翠幕)속의 옥동자가 문득 품안으로 뛰어드는 기이한 조짐을 감득(感得)

하고 그로 인하여 임신을 하게 되었으므로 아명을 막아(幕兒)라고 하였던 것이다.

 

스님의 가문은 유가(儒家)의 집안이어서 본시 영특한 스님은 어려서부터 학업에 힘쓰더니 차츰 세속을 버릴 마음을 굳히다가 원종 3년 열네살의 나이에

원오국사에게 득도하였다.

출가하여서도 내전(內典)에 마음을 쏟아 일대시교(一大詩敎)를 두루 이수한 후 구산선(九山選)에 나아가 괴과(魁科)를 마치시고는 석장을 떨쳐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하안거를 마쳤다. 스님은 다시 남방 지리산으로 내려와서 용맹정진 하는데 배가 고파도 거듭 먹지 않고 겨울 추위가 매섭되 솜옷을 입지 않았으며

몸이 피곤하여도 자리에 눕지 않고 장좌불와(長坐不臥)로서 여러 해를 지내며 이름과 자취를 감추었지만 오히려 스님과 이름은 널리 나타났다.

 

나라에서도 스님의 도풍을 들으시고 보양(普陽)땅의 삼장사(三藏寺)에 주지하기를 명하시고 스승 원오국사께서도 은근히 권유하시므로 마지 못하여 입원

(入院)하여 개당(開堂) 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로 랑월(郞月)·운흥(雲興)·선원(禪源)·등사 법주(法主)를 역임하였는데 매양 7백여 납자를 대상으로 내전을

가르치면서 제자들의 훤잡한 잡담에는 귀먹은 척 하고 매사에 어두운 척 하되 마음은 늘 맑은 하늘과 같았다.

이에 스님의 도예는 날로 널리 퍼져서 사대부로서 구의의 예로써 사내에 들어온 이를 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스님이 주석한 절의 산문은 늘

문전성시를 이뤘다.

 

중국의 오리(吳異) 몽산(夢山)이 스님의 시문을 보고 탄상(歎賞)을 마지 않으시며 시 10수를 화답하고 스님에게 고담(古潭)이라는 호를 지어 바치기도 하였다.

충선왕 5년(스님의 나이 65세) 12월 11일에 영안궁(永安宮)에서 이틀동안 2천명의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2천 등을 켜고 선교의 고승을 뽑아 강론토록

했는데 이에 스님에게 특강을 청하니 스님은 법회장에 이르러 사자후를 하니 봉갈(棒喝)에 선풍(旋風)이 일고 변설(辯舌)에 선음(仙音)이 떨치는 것이었다.

이에 왕이 심히 기뻐하여 스님의 절로 돌아갈 적에 어교(御轎)를 보내셨으며 이튿날에도 영안궁에서 반승점등(飯僧點燈)을 계속하였는데 왕은 스님과 함께

연을 타고 연복사(演福寺)에 행행, 8일 동안 점등하였다.

이 법회에 스님이 성연을 베푸시니 왕께서 매우 기뻐하시며 스스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셨다. 이 성대한 법회에 왕래하는 동안 왕은 스님과 함께 연에 오르시

고 공양함에 있어 찬을 친히 올리셨다.

 

법회가 끝나자 왕은 스님에게 법호를 더하여 별전종주중속조등(別傳宗主重續祖燈) 묘명존자(妙明尊者)라 하시고 가사·의군·모·말 및 은폐 50일(鎰)로써 전별

하셨는데 스님은 산사로 돌아온 후에 모두 사중의 상주에 부치도록 분부를 내리셨다.

 

충숙왕 원년 정월 2일에는 왕께서 은자원(銀字院)으로 스님을 방문하셨으며 초이렛날에는 상왕 충선왕(忠宣王)이 원나라로 행차하시는 길에 연경궁(延慶宮)

의 만승회(萬僧會)에 들리셔서 백금 백삼십근을 스님에게 하사하시었다.

 

충숙왕 6년 7월에 삼장사에 주석하고 계시던 스님은 처음으로 미질을 보이시니 대중들은 모두 근심에 차는 것이었다. 8월 18일에 이르러 스님은 머리를

깎으시고 목욕하신 후 새 옷으로 갈아 입으시더니 나라에 유서를 쓰시고 밤이 깊자 시자를 불러 법고를 울리게 하신 후 가사를 입으시고 선상(禪床)에 앉으사

게송을 읊어 고별하시니,

 

확청오온(廓淸五蘊) 진조무궁(盡照無窮)

생사출몰(生死出沒) 월전공중(月轉空中)

오금하각(吾今下脚) 수변현종(誰辨玄宗)

고이제자(告爾弟子) 막만문공(莫謾捫空)

 

오온을 확연히 맑히니

참으로 비춤이 무궁하도다

죽고 태어나며 출몰함은

달이 공중에 굴름이로다.

내 이제 떠나가면

그 뉘가 진리를 분별 하겠는가?

너희 등 제자에게 고하노니

부질없이 공을 더듬지 말라.

 

스님의 이같은 고별의 장면을 지켜보던 경호(景浩)라는 선객이 큰소리로 여쭙기를 “큰스님께서 이제 고별하시니 장차 어디로 가시렵니까?”

스님은 다시 게송으로써 답하였다.

 

하처불상봉(何處不相逢) 도하불용벌(渡河不用筏)

어느 곳에서 상봉하지 않으랴?

강을 건넘에는 뗏목을 쓰지 앉노라.

 

이 게송을 낭랑한 음성으로 길게 읊으시며 무릎을 쳐 박자를 맞추시더니 두손을 마주 잡고 빙그레 웃음을 띠신 채 엄연히 대적삼매(大寂三昧)에 드시는

것이었다.

스님의 세속 수명은 71세셨고 법랍은 58세 였으며 문도들이 다비를 모신 뒤 삼장사의 양방언덕에 탑을 세웠다.

 

왕께서 부보(訃報)를 들으시고 매우 슬퍼하시고 시호(諡號)를 혜감국사(慧鑑國師)라 하시고 탑액(塔額)을 광조(廣照)라 내리셨다.

스님의 비문은 삼장사의 법도들이 주관하여 삼장사 경내에 세웠는데 스님께서 조계산 수선사의 주지로 부임하신 사실을 싣지 않아 매우 유감스럽다.

그러나 그 비제(碑題)에는 ‘조계산(祖溪山) 수선사(修禪寺) 제십세(第十世)’라고 분명히 기록하였으며 또 그 명에 ‘조계기임(祖溪其任)’이라 하여 조계산으로

그 소임을 삼았음을 밝혔으므로 스님이 조계산 수선사의 제십세 법주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겠다.

 

그리고 고려사에도 “충선왕 오년 계축 십이월 경오 내지 소송광사(召松廣寺) 승 만항부회(萬恒赴會) 충선왕 5년 계축 12월 경오에 내지 송광사 스님 만항을

불러 법회에 다다르게 하였다. “ 하는 기록이 있음을 보아 스님께서 충선왕·충숙왕의 시기에 수선사의 주지로 계셨음을 입증하고 있는것이다.

스님의 법계는 다음과 같다.

 

혜감만항(慧鑑萬恒)

●●소지(●●小止)

경호(景浩) 등 칠백여명

 

스님께서 시적(示寂)실적에 대방군(帶方郡)에 사는 백태(白太)라는 사람이 한 꿈을 꾸었는데 스님께서 취막(翠幕)에 올라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꿈이 너무도 괴이한 지라 이튿날 스님이 계신 삼장사로 달려 갔더니 과연 스님께서 이미 서거하셨더라고 한다.

 

혜거국사(惠居國師) ; 899년(신라 효공왕 3년)~974년(고려 광종 25년)

속성(俗姓)은 박씨(朴氏). 초명은 지회(智回). 명주 출신의 승려로, 생애에 대해서 그 동안 자세한 내용이 전해지지 않았으나, 최근에 그의 비문 내용이

새롭게 주목되면서 그 생애를 대강 알 수 있게 되었다.

스님은 899년 4월 4일 부친 박윤영(朴允榮)과 모친 명주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6세가 되던 914년(신덕왕 3) 봄에 우두산 개선사 오심장로(悟心長老)에게

출가하고, 917년(경명왕 1) 금산사의 의정율사(義靜律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며 고승들을 만나 지식을 넓히다가,

922년(태조 5) 미륵사 개탑(開塔)을 계기로 열린 선운산의 선불장(選佛場)에 참석하여 크게 이름을 날렸다.

점차 스님의 명성이 높아지자 신라의 경애왕은 분황사(芬皇寺)의 주지를 맡아달라고 요청하였고, 경순왕은 영묘사(靈妙寺)의 주지로 스님을 임명하였다.

929년 절의 주지로 부임한 스님은 이곳에서 많은 불사를 진행하였는데, 특히 계단을 정비한 점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후 신라의 왕실이 망한 후, 939년 태조의 초정을 받으나, 세 번이나 거절하는 등 한동안 고려왕실과는 단절된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947년(정종 2) 정종의 왕사로 봉해지면서 고려왕실과 깊은 교분을 맺게 된다.

 

이후 스님은 948년에 홍화사(弘化寺)에서 대장경을 완성을 기념하며 전장법회(轉藏法會)를 주관하고, 962년 광명사(光明寺)로 거처를 옮겨 7일간 인왕반야회

를 개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루었다. 그러나 968년(광종 19)에 국사의 자리에 올라, 왕으로부터 변지무애(辯智無碍)라는 호를 받았다.

 

이후 경운전에서 백좌회를 열어 〈원각경〉을 강설하였으며, 그해 6월 승경전에서 기우제를 주관했는데, 향로를 잡고 〈대운륜경〉을 외우자 큰 비가 쏟아졌

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후 20여년이 넘는 개경 생활과 연로한 나이로 인해 스님은 여러 차례 하산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하산소로 선정한 수주(水州) 갈양사의 공사가 마무리 되자, 972년 갈양사로 하산하였다.

 

이후 왕실에서는 갈양사를 특별하게 지원하였으며, 스님은 이곳에서 선풍을 드날리다가 974년 2월 15일 승랍 61세, 아니 76세의 일기로 입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