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림사에는 명문기와가 현재 보관중이며 익산 지역의 대표사찰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보광전’만 남고 불타버렸으며
이후 1697년(숙종 23년) 우화루와 영원전을 새로 창건하고 이후 나한전을 지었으며,
1987년에 주지로 부임한 지광스님께서 범종각, 산신각, 일주문 요사인 안심당과 해탈교, 세심교를 신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숭림사’라는 이름의 연원은 남천축의 달마대사가 중국의 숭산 소림사에서 면벽9년의 좌선을 행한 고사를 기리는 뜻에서
숭산(崇山)의 숭(崇)과 소림사(少林寺)의 림(林)자를 따서 선종사찰인 ‘숭림사’라 하였다고 한다.
숭산과 소림사가 만난 사찰, 숭림사 숭림사(崇林寺)는 신라 경덕왕(742~764) 때에 진표율사가 금산사와 함께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익산지’에 보면 고려 충목왕 원년(1345년) 을유년에 행여(行如)선사가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창건 이후 숭림사에 대한 기록은 『익산구지(益山舊誌)』에 ‘고려 충목왕 원년인 1345년에 보광전을 건축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에도 법등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보광전에서 발견된 명문와(銘文瓦)에도 ‘지정(至正) 5년인 1345년에 행여선사(行如禪師)가 기와를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 때 숭림사의 역사를 입증하고 있다.
숭림사의 설화!
1345년 고려 충목왕 때의 일이다. 왕궁에서는 충목왕의 왕비 몸에 난 등창으로 근심이 가득하였다.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여러 의원들이 병을 고치려 했으나, 등창은 갈수록 심해지고 왕비의 몸은 점점 야위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왕비는 지난날의 일들을 회상하며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잠이 들어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어느 사찰에 자신이 머무는
동안 병이 씻은 듯이 낫게 되었고, 꿈에서 깨어난 왕비는 그 사찰의 모습과 산세를 일러주며 절을 찾게 하였다.
마침내 찾게 된 절은 지금의 숭림사였으며, 왕비는 숭림사에서 자신의 몸을 바쳐 관음보살에게 일주일간 기도를 드렸다.
마지막 기도를 드리던 날, 기도 중 향긋한 향기에 취해 잠시 잠에 빠져든 왕비는 꿈속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자신의 몸에 난 등창을 핥아주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잠에서 깬 왕비는 몸이 날듯이 가벼워졌음을 느끼고 등창을 살펴보니 깨끗이 나은 채 미묘한 향내음이 풍기는 것이었다.
이에 왕비는 관음보살께 눈물로 기도를 드렸으며, 병이 완치되어 궁궐로 돌아간 왕비는 그 이후 숭림사에 전답을 하사하고
왕실의 원찰로 삼아 관음기도의 도량으로 삼게 되었다.
보광전(普光殿) 보물 제 825호
숭림사는 고려 충목왕 원년(1345년) 선종(禪宗) 사찰로 창건되었다고 전할 뿐 그 뒤의 변천은 확실하지 않다.
보광전 중수기(重修記)에 따르면 조선 순조 19년(1819년)에 중수되었다고 하며 다포계양식(多包系樣式)으로 건립된 맞배집이다.
건물안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木造釋迦如來坐像)을 안치 하였는데 복장기문(腹藏記文)에 따르면 조선 광해군 5년(1613년)에 조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불상 위에는 용과 구름이 조각된 섬세한 닫집[보개(寶蓋)]이 설치되어 있다.
숭림사는 중국 허난성(河南省) 쑹산(崇山) 샤오린스(少林寺)에서 따마대사(達磨大師)가 9년 만에 득도하여 최초의 선종사찰(禪宗寺刹)이 되었으므로
숭산의 "숭(崇)"字와 소림사의 "림(林)"字를 따서 지은 것이라 한다.
※이 건물은 1345년(충목왕 1)에 창건되었고 광해군 5년에 중수하였다. 그리고, 1628년(인조 6)에 기와를 새로 얹었으며, 1682년(숙종 8)에 다시 중수하였다.
보광전 편액(普光殿 扁額)
비로자나를 모시고 있는 전각을 대적광전(大寂光殿), 비로전(毘盧殿)이라고 한다.
비로자나는 Vairocana의 음역(音譯)으로 모든 곳에 광명(光明)이 두루 비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숭림사 보광전 앞에는 보물 제 825호 비가 서있음
보광전 내부 삼존상 대세지보살, 목조석가모니불, 관세음보살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88호
이 불상은 보광전 중앙에 모셔져 있는데 원래는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헙시로 봉안하였으나 현재는 석가여래좌상만 남아있다.
불상은 결가부좌를 하고 머리에는 나발과 육계가 있으며 이마에 백호가 있다. 법의는 통견이며 가슴 밑에 군의대가 있고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불상의 복상 기문에 따르면 만력(萬曆) 41년(광해군 6년 1614)에 조성되었다고 하며 일반적인 목조 불상과 달리 크게 조성한 조선 시대 후기에 대표적인 불상이다.
◈목조석가여래상(崇林寺 寶光殿 木造釋迦如來坐像) 상세정보◈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이 아닌 석가불좌상이 주존으로 봉안하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을 모시고 왼쪽에는 약사불이 아닌 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불상의 얼굴은 둥근편이며, 팔과 옷주름 등의 표현이 어색하게 처리하여 조성되어 있다.
◈뒤에는 한 폭에 삼세불(三世佛)을 그린 삼불회도(三佛會圖)가 후불탱으로 걸려 있다.
숭림사 보광전에 모셔진 석가여래좌상으로, 1613~1614년에 만들어졌다. 전체높이 110㎝, 어깨폭 48㎝, 무릎폭 77㎝로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숭림사재산대장(崇林寺財産臺帳)』 「보광전석가모니불상복장기문(寶光殿釋迦牟尼佛像腹藏記文)」에 의하면 1613년(광해군 5) 겨울 초파일에 조성하기 시작하여
다음해인 1614년 봄 초파일에 완성했으며, 왕과 왕비, 왕세자의 만수무강을 위해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대장에는 박주질이 시주했으며, 당지 주지와 화주, 별좌 등 조성불사에 참여하였던 스님의 직급과 명칭이 나열되어 있다.
원래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함께 있는 삼세불이었으나 1986년 이후 도난당하여 현재는 석가불만 전한다.
석가불은 매우 큰 규모로 안정감 있고 중후한 느낌을 주며, 방형의 얼굴에 눈이 작고 미소를 머금은 인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나발 위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를 두어 원만한 느낌을 준다. 비교적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는 다소 안쪽으로 몰린 듯하지만,
두툼한 눈두덩이, 짧은 두 귀, 오뚝한 콧날 등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신체는 얼굴에 비해 큰 편으로, 결가부좌한 두 무릎이 넓게 표현되어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으면서도 균형 잡힌 모습을 보여준다.
법의는 우견편단에 오른쪽 어깨만 덮는 착의형식으로, 목뒤로 두른 옷자락이 너무 두꺼워 몸에서 분리된 듯한 느낌을 주며,
대의는 U자형으로 군의는 가슴까지 올라가 있다. 손은 작고 섬세하며,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왼손은 오른발 위에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17세기 전반기의 불상양식을 따르는 삼세불형식의 대표작으로, 안정감 있는 신체에 균형잡힌 자세,
사실적인 옷주름의 표현 등 조선 후기 불상연구의 좋은 자료로서 평가받고 있다.
보광전 천정 = 불상 위에는 용과 구름이 조각된 섬세한 닫집[보개(寶蓋)]이 설치되어 있다.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 나한상과 나한도가 있습니다.
보광전 안에 모셔져 있는 칠원성군이라고 하시네요 손에 법륜이없어 아닌줄 알았습니다.
보광전 신중탱
오층석탑(五層石塔)
오층석탑은 보광전 앞마당인 중정 동쪽에 치우쳐 있다. 단층기단으로 기단부에 다양한 수인을 취한 사여래(四如來)가 시문되어 있으며,
그 위로 탑신과 옥개, 상륜부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보광전 축대의 바로 앞에 붙어 있을 뿐만 아니라 탑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탑을 둘러 싼 작은다라이는 아마도 여름에 탑을 장식하는 마음으로 연꽃을 심지안았나 싶네요
정혜원(定慧院)
정혜원상량기문(定慧院上梁記文)』에 따르면 1591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44년(인조 22)에 중건한 것이라 합니다.
영원전(靈源殿)
1697년(숙종 23)에 서립된 영원전은 숭림사 북쪽 화산기슭에 있던 성불암(成佛庵)의 칠성각을 1926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자연석 두벌대의 기단에 막돌초석을 얹고 원기둥을 사용하여 다포를 올린 모습이다.
건물의 어칸에는 서연민(徐延珉)이 쓴 ‘영원전’ 편액과 1960년대에 쓴 ‘‘영원전건축연대’ 현판이 걸려 있으며,
건물 외부에는 차분하고 단정한 황색, 청색의 단청이 장엄되어 있다.
영원전이라는 전각이름은 명부전, 지장전, 시왕전의 별칭이며, 조상의 천도를 위한 근본도량으로서 다른 사찰의 명부전과 같이 목조의 지장보살상을 주불로 봉안하고
있다.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뒷벽에 맞대어 'ㄷ'자형 불탁을 가설해 놓았다.
불탁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 보처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를 모셨으며, 그 주위에 시왕과 판관, 녹사, 동자, 인왕상을 봉안하였다.
조각수법은 지장보살상과함께 모두 1634년(인조 12)에 조성된 것이며,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나한전 나한상과 함께 옥구 보천사(普天寺)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건물의 초창은 1697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공포의 양식이나 부재 특징이 조선후기 목조건물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어 중수 및 이건과정에서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영원전 권속들(靈源殿 眷屬)
영원전 지장보살 및 권속(靈源殿 地藏菩薩 及 眷屬) =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89호
이 불상은 영원전에 봉안된 지장보살상과 주변에 있는 도명존자, 무독귀왕, 시왕상, 시자, 동자상, 금강역사 등 24구의 권속을 이룬다.
지장보살은 목조의 결가부좌를 한 좌상이며, 권속은 나무 뼈대 위에 흙을 붙여 만든 소조상으로 좌상과 입상이 있다.
지장보살은 숭정 7년(인조 12년 1634년)에 조성되었다고 하며 권속도 같은 시기에 조성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숭림사 지장보살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대표적인 지장보살상이며 주변의 권속이 완전하게 남아있는 좋은 예이다.
◈상세정보◈
영원전에 모셔져 있는 지장보살상과 시왕 및 그 권속들로, 중앙의 목조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 무독귀왕 및 시왕, 판관, 사자, 동자, 인왕 등
모두 25구의 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숭림사재산목록대장(崇林寺財産目錄臺帳)』에 의하면 1634년(인조 12)에 조성되었으며, 모두 전북 옥구에 있던 보천사(普天寺)에서 1925년에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이 상들이 봉안된 영원전 역시 성불암의 칠성각으로 사용되던 것을 1926년에 이건한 것으로, 보천사의 불상들을 봉안하기 위해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재료는 중앙의 지장보살은 목조상이나 지장권속은 소조상으로 조선후기 불상 조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지장보살은 전체높이 104㎝, 무릎폭 71㎝의 목불로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크다. 얼굴은 원만하고 머리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민머리 형태이며,
유려한 옷주름의 표현과 균형잡힌 자세 등 안정감있는 신체를 보여준다.
얼굴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방형으로 이목구비에 비해 눈이 작은 편이며, 이마의 백호 및 목의 삼도를 표현하였다.
법의는 통견으로 오른쪽 어깨에서 길게 늘어진 옷자락을 왼쪽 법의 안으로 끼워 넣고 있어 조선후기 불상의 착의법 형식을 따르고 있다.
무릎은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 높이로 들어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 대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지장보살 좌우에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무독귀왕, 도명존자, 시왕 및 권속들 역시 지장보살과 같은 시대에 조성되었으며,
지장보살좌상과는 달리 흙으로 만들고 베를 붙여 완성한 소조불이다.
시왕은 모두 의자에 앉아 있고 향우측에 제1, 3, 5, 7, 9왕이, 향좌측에 2, 4, 8, 10왕이 배열되어 있으며, 각자 홀, 붓, 경전 등을 들고 있다.
지장보살과 마찬가지로 권속들의 얼굴과 이목구비는 얕게 부조되어 있다.
지장보살좌상을 비롯한 25구의 불상들은 복장기문을 통해 1634년에 일괄 조성된 연대가 확실한 불상으로, 조선시대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원전 권속들(靈源殿 眷屬)
나한전 소조 16나한 및 권속(羅漢殿 塑造 十六羅漢 及 眷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219호
나한전에 봉안된 이 불상들은 아난존자와 가섭존자, 16나한과 사자상, 신중상(제석천, 범천), 동자상, 인왕상등 29구의 소조상이다.
16나한 및 권속들은 나무 뼈대 위에 흙을 붙여 만든 소조상으로 좌상과 입상이 있다.
부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나한전의 일반적인 불상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조선 후기 소조 제작 기법과 도상 형식, 조형 감각이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상세설명◈
보광전 좌측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나한전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1928년에 주지 황성열 스님이 지은 건물이다.
공포를 사용하지 않은 민도리집 형식으로, 자연석을 다듬어 두벌대로 쌓아 기단을 조성하고 막돌초석에 각주를 세웠다.
건물 외부에는 1929년 추당 박호동이 쓴 영원전 편액과 『나한전건축연대』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 내부에는 후벽에 맞대어 'ㄷ'자형 불단을 놓고 그 위로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으며, 좌우에는 가섭과 아난을 비롯하여 16나한, 녹사, 동자상과
석가모니후불탱을 배치하였다.
바닥에는 영원전과 마찬가지로 장군상을 두었는데, 녹사, 동자상, 장군상은 원래 영원전의 지장권속이었으나 영원전이 협소하여 이곳에 나누어 모신 것이다.
※나한상은 1910년 옥구 보천사(普天寺) 성불암에서 모셔온 것으로, 일제강점기 때 일인들에 의해 일본으로 옮겨지다가 풍파로 인해 건너가지 못하고
이곳에 자리잡게 된 것이라 전한다. 1930년대에 개체, 개금되었으나, 조선후기 나한상의 부드러운 미소와 인자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소조 16나한 및 권속(塑造 十六羅漢 及 眷屬)
소조 16나한 및 권속(塑造 十六羅漢 及 眷屬) = 가섭존자, 석가모니불, 아난존자
소조 16나한 및 권속(塑造 十六羅漢 及 眷屬)
산신각(山神閣)
건물 내부에는 불단을 마련하여 산신탱과 산신상을 모셨다. 산신탱은 2폭으로 1952년 화사 남인식이 그린 것과 1998년 금니로 장엄한 것이 있으며,
산신상은 1887년에 석고로 만든 것이다.
산신탱은 2폭으로 1952년 화사 남인식이 그린 것과 1998년 금니로 장엄한 것이 있으며...
산신탱화
건물 내부에는 불단을 마련하여 산신탱과 산신상을 모셨다. 산신탱은 2폭으로 1952년 화사 남인식이 그린 것과 1998년 금니로 장엄한 것이 있으며,
산신상은 1887년에 석고로 만든 것이다.(왼쪽으로 모셔놓았네요)
용석상의 수각
보광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뒤로 적묵당(寂默堂)이 보이네요
뒤로 향적당(香積堂)이 보이고 앞에는 전통음식 문화체험관 입니다. 공양간이기도 합니다.
범종각(梵鐘閣)
범종각은 사모지붕의 단칸 건물로 1991년 새로 지었다. 장방형의 화강암을 판석으로 다듬은 기단 위에 고복형 초석을 얹고 원기둥을 세운 모습이다.
기둥 위로는 이익공을 올려 처마를 높게 치솟게 하였으며, 부연을 단 겹처마에 막새기와를 얹었다.
건물 외부는 사방으로 중방을 돌리고 홍살로 마감하였으며, 동쪽으로 어칸을 두어 가천(可泉)이 쓴 범종각 현판을 걸었다.
범종각 내부에는 1993년에 조성된 자비의 종이 봉안되어 있다.
우화루(雨花樓)= 보광전 앞에서 보면 우화루라고 적혀있음
우화루는 보광전으로 진입하는 정문으로, 숭림사의 중심구역 전면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집으로 『우화루중수기』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석덕 스님이 창건한 후, 1819, 1855, 1964, 1992년에 각각 중건되었다고 전한다.
건물은 밖에서 보면 짧은 동자주를 받친 이층의 누각형식이지만, 안쪽은 중정과 높이가 같은 단층으로 개방되어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이는 숭림사의 대지가 협소하고 경사가 완만한 편이어서 전면 누각을 높게 만들어 누하로 진입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후면이 다른 누각형식과 진입방식은 조선중기에 중창된 대부분의 산지가람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방식으로,
누각형식이 갖는 외관의 장대함과 실질적인 쓰임새를 중시한 당시 건축미감을 느낄 수 있다.
건물의 구조는 익공계 형식이며, 건물 외부에는 각 칸에 두 짝씩 널문을 달고 중앙 어칸에는 하당(荷堂)이 쓴 숭림사 편액과 우화루 편액을 걸었다.
건물 내부는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는 연등천장으로 마감하였으며, 삼면의 벽에는 숭림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숭림사법당중수기』를 비롯하여
12기의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외에 비교적 조각이 잘된 정감있는 목어(木漁)와 길이 3.56m, 높이 70㎝인 목구시 하나가 보존되어 있다.
숭림사 전경
부도전(崇林寺 浮屠田)
총 4기의 부도로서 모두 조선후기 및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기대와 지붕을 갖춘 보주형이며, 비석지붕을 올려놓은 것도 있고 제대로 짝을 갖춘 것이 드물어
주목할 만한 특징은 없다.
2기의 부도에는 명문과 조성연대가 새겨져 있는데, 하나는 무애당 선사 곧 황성렬스님의 부도이며, 또 하나는 유심당 일훈 대사의 부도이다.
명문이 없는 부도 2기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일명부도들로, 하나는 『강희이십삼년갑자입』이라는 절대연대가 새겨져 있어
1684년(숙종 10)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높은 대좌 위에 구형의 탑신과 사각당형의 옥개석을 올린 모습이며 1684년에 조성된 것과 흡사한 모습이다.
무애당 선사 즉 황성렬스님의 부도 입니다.
일주문을 나서기 전에 부처님의 입상이 있습니다.
숭림사에서 나서기 전에(안쪽에서)본 일주문
일주문(崇林寺 一柱門)
숭림사 가람의 초입에 자리한 일주문은 2003년 지광스님이 건립하였다. 어칸에는 권갑석(權甲石)이 쓴 『함라산숭림사(咸羅山崇林寺)』편액이 걸려 있다.
숭림사 표지석
절의 진입로에서 볼 수 있는 잡목들과 새소리, 촉촉이 오솔길을 적셔주는 작은 계곡의 깨끗함과 아늑함은 절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심신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예전에 나주 불회사에 갈 때도 이런 느낌이 들은 적이있었다. 입구에서 부터 불회사까지 정말 행복하게 걸었던 기억이 난다.
◈숭림사에 대한 상세정보◈
창건 이후 숭림사에 대한 기록은 『익산구지(益山舊誌)』에 ‘고려 충목왕 원년인 1345년에 보광전을 건축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에도 법등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보광전에서 발견된 명문와(銘文瓦)에도 ‘지정(至正) 5년인 1345년에 행여선사(行如禪師)가 기와를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 때
숭림사의 역사를 입증하고 있다.
그밖에 숭림사 연혁에 관한 자료로는 「숭림사법당중수기(崇林寺法堂重修記)」,「정혜원상량기문(定慧院上樑記文)」,「숭림사공불계서(崇林寺供佛稧序)」
등의 우화루에 걸려 있는 현판과, 정혜원, 영원전, 나한전에 걸려 있는 현판, 불상복장기문과 명문와를 기록한 「숭림사재산대장(崇林寺財産臺帳)」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1554년(명종 9) 화재로 소실된 보광전을 중건하고, 1589년(선조 22)에는 정혜원이 산불로 소실된 것을 1591년(선조 24)에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보광전만 남긴 채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드넓은 호남평야를 눌러준다는 진압사찰로서 뇌묵당 처영대사가 숭림사와 금산사를
중심으로 승병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후 1613년(광해군 5)에 보광전 불상을 조성하고 1634년(인조 12) 영원전에 봉안된 지장보살을 조성하여 임란 이후의 사찰 중수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1642년(인조 20) 정혜원을 삼중창하고 1697년(숙종 23)에 현재 영원전 건물로 사용되는 성불암의 칠성각을 건축하였다.
1706년(숙종 32)에는 주상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비는 전패가 조성되었으며, 1713년 성불암 법당을 새로 건축하여 불상을 개금하였다.
1737년에 임치번(林致蕃)이 약 100명의 인원과 함께 공불계(供佛稧)를 조직, 여기서 나온 이익으로 부처님 앞에 늘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도록 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는 1819년(순조 19)에 법당인 보광전을 중창하고 1855년(철종 6)에 우화루를 4중창하였으며, 1857년(철종 8) 보광전과 우화루를 각기 중수하여 법당 및 가람의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1887년(고종 24)에는 한 스님이 『화엄경(華嚴經)』 81권을 짊어지고 와서 절에 맡기고 가므로 조희호, 김종규가
화주가 되어 서가를 갖추고 노전(爐殿)에 보관하였다. 이때 법당을 중수하면서 현수(賢首)가 소(疎)한 화엄경을 유전하는 「화엄경유전서(華嚴經留傳序)」를
남겨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1888년(고종 25)에는 당시 숭림사의 산내암자였던 화산 성불암을 중수하고, 1895년(고종 32)에 법고를 조성하였다.
근대기에는 1912년 금산(錦山) 스님이 신도들의 도움으로 법당을 중수하였고, 보광전 내 삼세후불탱도 1913년에 조성하였다.
1914년에는 영원전이 소실되어 1926년에 주지 황성렬이 성불암의 칠성각을 이곳으로 옮겨 영원전으로 삼고,
1928년에는 나한전을 새로 지어 영원전을 중수하였다. 1930년 성불암에서 옮겨온 시왕상, 나한상을 개체하고 지장보살을 개금하였으며,
독성상 2위(二位)를 봉안하였다. 1952년에는 보광전의 칠성탱, 독성탱을 조성하고 1957년에 영원전과 나한전을 중수하였으며, 1964년 우화루를 중수하였다.
최근에는 1987년 주지로 부임한 지광스님에 의해 우화루 단청을 비롯하여 보광전 중수, 범종각, 산신각 신축 등의 가람정비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태고사법에 의하면 위봉사의 말사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로 등록되어 있으며, 산내암자로는 성불암(成佛庵)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으며, 산외암자로는 자명사(自鳴寺)가 있다.
※숭림사라는 절을 처음으로 가보았습니다 생각보다 보광전이 너무 가슴이 벅찼습니다 한 번쯤 꼭 가서 법당을 세밀히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한가지 지켜야할 것은 이 절은 이용시간이 있습니다. 오전 9시 부터 ~ 오후 6시까지만 있을 수 있습니다.
◈찾아가는 길 = 기차, 버스 혹은 택시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웅포면 송천리 5번지
익산역 기준입니다. = 함열(무궁화 요금 \2600원)까지가서 택시(요금 \7~8000원 10분거리)를 타고 숭림사까지 들어가는것이 제일 편하게 가는 것입니다.
전 버스를 기다리다 할 수 없이 택시를 불러타고 함열까지 왔습니다.
버스는 배차시간이 1시간 간격이라는데 그도 시원치가 않습니다. 버스 46번입니다. 익산에서는 버스 42번도 가는데 돌아갑니다.
자가용이 있음 아주 편하게 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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