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 = 心 산사 길없는길

익산시 금마면 미륵산 사자암(사자사지)

백련암 2014. 2. 21. 00:56

◆서동과 선화공주 설화의 근거지 사자사

 

백제의 고찰인 사자사는 미륵산 정상부 능선자락에서 탁 트인 앞을 내다보는 천혜의 절경에 자리잡고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익산 미륵사지’로 유명한 미륵사가 이곳 미륵산 기슭에 창건되기 이전부터 사자사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자사는 말법의 시대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출현하는 미륵부처님처럼, 백제 쇠퇴기에 백제의 부흥을 꿈꾸던 무왕(武王)의 근거지로

서동요(薯童謠)의 주무대이기도 하다.

 

선화공주(善化公主)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薯童房)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인 서동(薯童)과 신라공주 선화(善化)의 설화 속에는, 사자사에 주석하고 있던 지명법사(知命法師)의 도움으로

미륵사를 창건한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사자사는 미륵사와 함께 백제시대에 창건된 이래 조선 초기까지 사세를 유지해왔음이 1993년에 발굴조사된 유물들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통일신라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출토유물에는 기와와 토기를 비롯하여 도자기, 불상 및 금속류, 목재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현재의 사자사는 발굴조사 이후 대웅전과 삼성각 등 2동의 건물을 새로 지은 뒤 계속해서 가람이 재정비되고 있는 상태이다.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는 사자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므로 사자암과 함께 관람하기를 권한다.

유물전시관에서 미륵산 정상과 사자암을 거쳐 돌아오는 등산코스는 약 1시간이 소요된다.

 

 

미륵산에서 내려다 보면 우리나라 지도를 닮은 저수지가 보인다.

 

 

스님이 기거하시는 요사채

 

▶사자암 창건배경

 

사자암은 백제시대에 창건된 고찰로, 절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무왕조(武王條)에 처음 등장하고 있다.

이 기록에는 백제 30대 무왕(재위 600~641년)이 부인인 선화공주(善化公主)와 함께 지명법사(知命法師)가 머물고 있는

용화산(지금의 미륵산)의 사자사(師子寺)로 행차하다가, 미륵삼존을 알현하고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게 된다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미륵사 창건연기설화는 지금까지 알려진 백제의 대표적 사찰인 미륵사의 창건이 사자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또한 사자사의 창건이 미륵사보다 앞선 시기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미륵사가 창건되기 전에 사자사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하고는 있지만 사자사의 창건이나 이후의

연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 등에서도 사자사의 사찰명칭은 발견되고 있으나 연혁을 알려줄 만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문헌에 등장하는 사자암의 명칭은 아래와 같다.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려시대 =   사자사,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   조선시대 =   사자암

                             ♠와유록(臥遊錄) =   조선 영조(1725년~1730년경) =  사자암           

           ♠금마지(金馬誌) =   조선 영조 32년(1756년) =   사자암

♠호남읍지(湖南邑誌) =   조선 영조(1754년~ 1758년 경) =   사자암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창건시기인 백제 때부터 고려말경까지는 사자사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사자암으로 고쳐

부른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1993년 사자사 일대를 발굴조사할 당시 백제에서 조선시대에 걸친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암막새에서 ‘至治二年 師子寺造瓦’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위 문헌들의 내용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볼 때 백제시대에 창건된 사자암는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사세를 유지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세가 약해지면서 건물이 축소되고 명칭 역시 암자라 칭해지기도 했지만 꾸준히 법등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사자암은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일본군에 의해 폐허화되었다가

현재의 가람은 발굴조사 후 정비되었다.


현재 사자암에는 발굴조사 이후 새로 지은 대웅전ㆍ삼성각을 비롯하여 삼층석탑 1기와 요사채 2동이 있으며,

1993년 발굴 당시 수습된 유물들은 미륵사지유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자암 대웅전(獅子庵 大雄殿)

 

사자암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 104호 사자사지 미륵산 정상 부근에 있는 사자사터(師子寺址)이다.

이 곳은 백제시대 사자사가 있던 곳으로 전해지는 절터이다. 사자사는 미륵사보다 앞서 세워진 익산지역의 백제 초기 사찰이다.

사자사는 미륵사 창건의 계기를 마련한 사찰이다. 즉「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 무왕과 선화왕비가 이사자사로 행차하던 도중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출현한 것을 보고, 그 인연으로 미륵사를 세웠다고 한다.

사자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1993년 발굴조사에서『사자사』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이 곳이 사자사 터 임이 밝혀졌다.

 

                      

대웅전 내부 = 지장보살, 석가모니불, 관음보살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1993년 발굴조사 이후 새로 지은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겹처마로 된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건물의 내부에는 목조로 조성된 석가여래좌상을 비롯하여 좌우에 관음보살좌상과 지장보살좌상을 봉안하고 있으며,

탱화는 석가모니후불탱과 신중탱ㆍ지장탱을 봉안하고 있는데, 모두 1994년에 조성된 것이다.

 

 

지장보살, 석가모니불, 관음보살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신중탱(神衆壇)

 

 

법당용 범종

 

 

관세음보살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동쪽 뒤편 언덕에 위치한 삼성각은 최근에 지어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전면에 2분합의 문을 각 칸에 설치하였으며, 법당의 내부에는 건물의 건립연대와 같은 시기의 작품으로 보이는

칠성탱ㆍ독성탱ㆍ산신탱ㆍ용왕탱 등 4점의 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용왕탱화

이곳은 미륵산내에 있는 사자암이다. 그러나 다른곳에서는 볼 수 없는 용궁의 용왕신이 모셔져있다.

 

 

산신탱(山神撑)

 

 

칠원성군(칠성)

 

 

나한존자(독성)

 

 

오층석탑(五層石塔)

 

 

 

 

정자의 옆모습

 

 

오층석탑(五層石塔)

 

 

삼층석탑과 석등

 

 

삼층석탑 (三層石塔)

 

현재 사자사의 앞마당에는 높이가 대략 3m 정도 되는 석탑 1기가 있다. 이 석탑은 원래 남쪽으로 30여m 쯤 떨어진 곳에 있던 것인데

근래에 옮겨온 것이라 한다. 현재 석탑은 크게 기단부와 탑신부만 남아 있는데, 석재의 크기나 양식 등으로 보아

서로 이질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어 순수한 탑재만으로 구성된 것 같지는 않다.


특히 기단부는 탑의 부재로 볼 수 없는 경우로서 지대석, 꽃잎의 끝을 아래를 향해 오므린 형태의 복련대좌, 간석(竿石),

꽃잎의 끝을 위로 향한 앙련석의 부분까지는 석등(石燈)의 구조 및 양식과 흡사하다.


그리고 앙련석 위로는 탑신석 3기와 지붕돌 2기가 올려져 있으나,

맨 윗쪽 2기의 탑신석은 적당히 깬 돌을 탑신석용으로 끼워 사용하였고, 맨 위의 지붕돌은 상하가 뒤바뀐 채 거꾸로 놓여 있다.

 

 

사자암 석등

 

 

사자암 전경

 

 

커다란 바위에 사자동천(師子洞天)이라고 새겨져 있음

 

 

토요일에는 시민을 위한 선방이 열리나 봅니다.

 

 

미륵산 정산

 

▶미륵산성(彌勒山城) 전라북도 기념물 제 12호

소재지 = 전북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미륵산성(彌勒山城)은 해발 430m 미륵산(일명 용화산(龍華山)) 최고봉인 장군봉과 동쪽 계곡을 둘러 쌓은 석성(石城)으로 기준성(箕準城)

또는 백제(百濟) 무왕대(武王代) 창건(創建)된 성(城)으로 전해지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고조선(古朝鮮) 王 준(準)이 금마(金馬)땅에 내려와 마한(馬韓)을 개국하고 성을 쌓았다 하여

기준성(箕準城)이라 불리운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내(城內)에서는 무문토기편(無紋土器片)과 청동기(靑銅器), 백제토기편(百濟土器片) 및 기와편(기瓦片)이 출토(出土)되고 있으나

1990년 원광대학교(圓光大學校) 마한(馬韓) · 백제문화연구소(百濟文化硏究所)의 동문지(東門址) 발굴조사(發堀調査)결과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축성(築城)되어 조선초기(朝鮮 初期)까지 4차(四次)에 걸쳐 개축(改築)된 사실이 확인(確認) 되었다.

 

성(城)의 길이(長)는 1.822m로서 익산지역 최대규모의 산성(山城)이다.

城은 산경사면(山傾斜面)에 쌓았는데, 성벽(城壁)의 높이(高)는 4~5m이며, 폭(幅)은 6m정도 이다.

 

성내(城內)에는 건물지(建物址) 장대지 우물터가 남아 있다.

현제 동문지(東門址), 남문지(南門址)와 10개의 치(雉)가 남아있고 동문지(東門址)와 주변 성벽(城壁)을 정비(整備)하고 있다.

 

 

삼각점에 대해서

 

 

미륵산 정상 삼각점 표지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가 전해오는 아름다운 사찰, 익산 용화산 사자암

익산은 서동으로 기억되는 백제 무왕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사자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미륵사와 함께 이곳에도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의

아름다은 사랑이야기가 전해온다.

 

무왕과 결혼한 선화공주가 어느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출현한 미륵삼존을 뵙는

인연으로 미륵사를 창건하였고,

미륵사 창건과정에서 지명선사는 신통력을 발휘하여 하루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못을 메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사자사의 창건은 백제시대 미륵사의 창건보다 앞선 백제의 고찰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선화공주에 대한 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龍)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던 것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이름지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가서

마을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이내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그것은 이러하다.

 

선화공주(善化公主)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薯童房)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가 서울에 가득 퍼져서 대궐 안까지 들리게 되자 백관들이 임금에게 고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하여 장차 떠나려 하는데,

왕후(王后)는 순금 한 말을 주어 노자로 쓰게 했다.

공주가 장차 귀양지에 도착하려는데 도중에 서동이 나와 공주에게 절하면서 모시고 가겠다고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저 우연히 믿고 좋아하여, 서동을 따라가면서 비밀리에 정을 통했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았고, 동요가 맞는 것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모후(母后)가 준 금을 꺼내 놓고 살아나갈 계획을 의논하자 서동이 크게 웃고 말했다. “이게 무엇이오?”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이니 이것을 가지면 백 년의 부를 누릴 것입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덩이처럼 쌓아 두었소.” 공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그것은 천하의 가장 큰 보배이니 그대는 지금 그 금이 있는 곳을 아시면 우리 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소이다.”

이에 금을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이것을 실어 보낼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말하였다. “내가 신통한 힘으로 보낼 터이니 금을 이리로 가져오시오.”

이리하여 공주가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금을 사자사 앞에 갖다 놓았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동안에 그 금을 신라 궁중으로 보내자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서동을 존경해서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서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어느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한다.  “모름지기 여기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곧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의 상(像)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이름을 미륵사(彌勒寺)라 했다.

 

‘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한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들을 보내서 그 역사를 도왔는데 그 절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삼국사(三國史)에는 이 분을 법왕(法王)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찾아가는 길

소재지 = 사자사는 이곳에서 사자암으로 불렀습니다.  전북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609-1번지 미륵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 17교구본사 금산사의 말사입니다.

 

대중교통 = 익산역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버스정류장 있음 버스 62-2번 승차하여 미륵산입구 하차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