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궁사(龍宮寺) : 인천광역시지정문화재 제15호 시대 = 조선철종5년(1854년) 소재지 =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동667
용궁사는 영종도 백운산 기슭 평평한 대지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백운사(白雲寺)라 하였다고
전하며 일명 구담사(瞿曇寺) 라고도 한다.
조선조 철종 5년(1854)에 흥선대원군이 중창하여 용궁사라 개칭하고 고종이 등극할 때까지 이 절에서 칩거하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영종도 중산 월촌에 사는 윤공이란 어부가 꿈을 꾼뒤 바다에서 작은 옥불을 어망으로 끌어올려 이 절에 봉안하였다고 하며
현재 그 옥불은 없고 모조 옥불을 모시고 있다.
경내의 관음전(觀音殿)은 맞배 지붕, 홑처마 건물로서 옥석(玉石)으로된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으나 일제때 도난당하고
현재는 후불탱화를 배경으로한 관음상이 걸려 있으며 건물 전면에는 해강(海岡)김규진이 쓴 4개의 주련(住聯)이 걸려있다.
대원군의 친필인 용궁사(龍宮寺)란 현판 현재는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다.
중구 영종도에 고기잡이로 근근이 살아가는 한 어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바다에 쳐 놓은 그물을 걷어 올렸는데 조그만 옥부처 하나가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그러자 어부는 "뭐 이런것이 걸렸지"라고
투덜대며 바다에 던져 버리고 다시 그물을 던진 후 건져 올렸더니 이번에도 먼저 건져 올렸던 옥부처가 걸려 올라왔다.
이러한 일이 몇차례 반복되자 어부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옥부처를 바다에 던지지 않고 백운사(용궁사의 옛 이름) 관음전에 모셨다.
그 후 백운사 앞을 말이나 소를 타고 지나면 발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못한 채 서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이 앞을 지날때에는 내려서 지나곤 하였고 백운사가 영험한 절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되었으며
어부도 고기를 많이 잡아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흥선대원군이 이 절에 왔다가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봉안한 불상이 용궁에서 나왔으니
사찰의 이름을 "용궁사"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옥부처는 일제강점기에 도난당하고 현재는 청동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석파(石坡)란 호는 흥선대원군의 호이다. 흥선군이 썼다는 현판
용궁사(龍宮寺)
용궁사는 한국 불교 태고종 사찰로 절의 창건에 대해 분명한 기록은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670년(문무왕10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뒤
백운사(白雲寺) 또는 구담사(瞿曇寺)라 불리던 절이었는데 근세 이후 거의 폐허가 되었던 것을
1864년(고종1년)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중건하면서 지금의 용궁사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절의 중건에 관한 기록으로는 <영종백운산구담사시주(永宗白雲山瞿曇寺施主)>, <용궁사현판송문(龍宮寺懸板頌文)>이라는 것이 있다.
<영종백운산구담사시주>는 시주기(施主記)의 일종인데, 글 가운데 '대왕대비전하무진생조씨(大王大妃殿下戊辰生趙氏)'라는 말이 있어 주목된다.
여기에서의 대비조씨는 곧 신정왕후(神貞王后,1808-1890)를 말하는데 신정왕후가 대왕대비에 오른 것은 1857년(철종8년)이었고,
구담사가 용궁사로 바뀔 때는 앞에서 말한 대로 1864년이었으므로 곧 1857∼1864년의 어느 사이에 왕실의 시주로 중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시주기에는 또 '왕대비전하신묘생홍씨(王大妃殿下辛卯生洪氏)'와 '경빈전하임진생김씨(慶嬪殿下壬辰生金氏)'의 시주자 명단이 더 있다.
왕대비는 헌종(憲宗)의 비인 명헌왕후(明憲王后, 1831-?)를 그리고 경빈은 현종의 후궁을 각각 가리킨다.
<용궁사 현판송문>은 1922년에 작성된 것인데, 여기에는 대원군이 이 절을 중건하면서 절 이름을 구담사에서 용궁사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다.
아직 대웅전은 정확히 없고 가 법당에 모셔져 있다. 지장보살(地藏菩薩)
대웅전의 삼존상
신중전 (신중탱화)
관음전(觀音殿)
관음전(觀音殿)은 맞배 지붕, 홑처마 건물로서 옥석(玉石)으로된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으나 일제때 도난당하고 현재는 후불탱화를 배경으로한
관음상이 걸려 있으며 건물 전면에는 해강(海岡)김규진이 쓴 4개의 주련(住聯)이 걸려있다.
현존하는 건물 중에서 용궁사의 주불전이라고 할 수 있는 관음전과 요사채는 1864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면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대웅보전은 근래에 합판으로 임시법당처럼 새로 지은 것이다. 용궁사는 관음도량이므로 관음전이 주불전임이 합당하다.
관음전(觀音殿)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비교적 작은 규모이며 맞배 지붕에 홑처마 건물로서 옥석(玉石)으로된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었다고하나
일제시대 때 침탈당해 지금은 볼 수 없다.
관음전 4개의 기둥에는 근대의 명필인 해강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썼다는 주련(住聯)이 걸려 있다.
서산 개심사의 '象王山開心寺'라는 편액이 눈에 익기도 하거니와 예서체의 그 아름다움과 필체가 뛰어나다.
관음전(觀音殿) 관세음보살 법륜받침을 한 법상이다.
목조 위에 칠을 한 건칠불(乾漆佛)로서 원형대좌 위에 앉아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을 올리는 아미타인을 하고 있으며,
머리 위에 보관을 쓰고 또 오른손에는 보병(寶甁)이 들려 있다.
얼굴은 대체적으로 원만하면서도 두 눈은 가늘고 길게 뜨고 있고 머리 위의 보관은 매우 화려하게 표현되었다.
관음전에 관음상과 용왕, 남순동자가 있다.
관음전 용궁의 용왕님 남순동자와 관세음보살
관음전 내 벽화(저승길을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관음전 내의 벽화 <삼존상, 석가모니불,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칠성각(七星閣)이라써 있으나 삼성각(三聖閣)이다.
칠성각은 1944년에 세워졌으며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으로 지붕 곡선이 유려하다.
칠성은 본래 도교의 신앙이 불교에 수용되어 사찰 안에 칠성각을 짓고 칠여래(七如來)와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을 탱화로 그려
봉안하고 있다.
관음전과 칠성각 뒤쪽 언덕에 자비로운 미소를 띄고 있는 미륵부처님이 지긋한 눈빛으로 세상을 관조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산신과 호랑이(山神과 虎)
칠성각(七星閣)의 칠원성군
나한혹은 독성(羅漢, 獨聖)
관음전과 칠성각 뒤쪽 언덕에 자비로운 미소를 띄고 있는 미륵부처님이 지긋한 눈빛으로 세상을 관조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범종각(梵鐘閣)의 옆모습
범종(梵鐘)
범종각(梵鐘閣)
용황각(龍皇閣)
용궁사 경내에 들어서면 다른 절들과 달리 객들을 맞이하는 첫번째 건물은 용황각과 그 옆으로 스님들이 수행, 참선하며 기거하는 요사채가 있다.
대개의 절들이 전면에 법당이 있고 한쪽으로 요사가 있는 것과는 다른 독특한 구조다.
용황각은 1966년에 세워진 건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매우 작은 건물이다.
기단은 없으며 경사지 축대위에 지어져 전면 기둥은 축대아래 놓였기 때문에 정면에서 보면 누각건물처럼 보인다.
기둥은 원기둥으로 직경이 작고 비례에 맞지 않아 매우 왜소해 보인다.
요사채는 고종이 등극하기 전 서슬퍼런 세도정치의 풍랑속에서 흥선대원군이 때를 기다리며 이곳에 은거하면서 소원성취를 기도하던 곳으로
옥돌부처에 얽힌 전설을 전해 듣고 용궁사로 이름을 바꾸고 친필 편액을 써주니 그 편액이 요사에 걸려 있다.
'갑인정월일중건(甲寅正月日重建)' 이라는 간지와 함께 '석파(石坡)' 라는 흥선대원군의 호가 있어 눈길을 끈다.
용의 호위를 받는 바닷속 용왕
청용 황용을 타고 계신 관세음보살과 동자들
용황각 외벽 벽화
심사굴(深蛇窟) = 깊은 사유에서 중생의 속정과 망념을 버리고 용이 되려고 하는 처소 =<운서역 백운산 용왕사>
이 처소가 어디일까요 혹시 心 … 이도량에는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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