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여주 신륵사 = 극락보전, 삼층석탑 삼화상= 지공, 나옹, 무학

백련암 2014. 6. 3. 12:49

창건과 사찰명의 유래

예로부터 경관이 뛰어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신륵사의 창건시기는 불확실하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 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 설에 대해 창건설화가 전하는데, 원효 대사의 꿈에 하얀 노인이 나타나 절터로 연못을 가리켰다.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잘 되지 않다가 7일 기도를 마치자 9마리의 용이 승천하고서야 절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륵사의 절 이름과 관련한 전설도 몇 가지가 있다.  

아무튼 신륵사의 절 이름과 관련해서, 신륵사는 용과 물에 관계가 깊은데, 이는 절이 여강 가에 있음으로 해서 생겨난 전설로 그 형성 시기는

신라 말엽이나 고려시기로 추정된다.

이러한 것은 신륵사 경내 동대(東臺) 위에 있는 전탑(塼塔)이 신라 또는 고려시기에 조성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탑 전체를 벽돌로 쌓은 전탑으로 인하여 신륵사는 "벽절(壁寺)"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신륵사극락보전 (神勒寺極樂寶殿)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28호

 

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 때 원효가 지었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나옹화상이 오면서 크게 번창하였고, 성종 3년(1472)부터는 대규모로 확장시켰다. 성종 4년에는 절의 이름을 ‘보은사’라 하였다.

절 이름을 ‘신륵’이라 한 것은 미륵 또는 나옹이 신기한 굴레로 말을 막았다는 설과 고려시대에 마을에 나타난 사나운 말을 인당대사가

神의 힘으로 제압했다하여 마을 사람들이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신륵사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경내에서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숙종 4년(1678)에 지어진 후 정조 21년(1797)에 수리되기 시작해서 정조 24년에 완공되었다.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다. 내부에는 불단 위에 나무로 만든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위에 화려한 닫집이 꾸며져 있다. 또한 영조 49년(1773)에 제작한 범종과 후불탱화가 있다.

극락보전의 정문 위에는 나옹이 직접 쓴 것이라고 전해오는 ‘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입체감 있게 쓰여져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驪州 神勒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 : 보물  제1791호   시대 = 조선시대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보살상의 보관과 대좌가 후보(後補)된 것을 제외하곤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주존인 불상을 좌상으로 하고 협시상을 입상으로 한 구성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전통이다. 불상과 보살상들은 모두 상호와 상체가 긴 편인데,

특히 불상의 육계는 유난히 길게 조성되어 이색적인 느낌마저 들게 한다. 불상의 큼직큼직한 나발과 단순하게 처리한 법의 자락은

조선초기부터 내려오던 특징이다.

불상의 눈언저리에 보이는 다크서클 같이 처리한 음영 기법이나 아래 입술을 도톰하게 만들어 처지게 표현한 것 등은

조각승 인일(仁日)과 수천(守天)의 조형 미감과 관련될 가능성이 있다. 보살상들은 조성발원문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조선시대 1610년에 조성되었는데,

1620년의 약수선원 보살입상(현 동국대박물관 소장)과 전체적으로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들 보살상 중 좌협시보살상은 천의식으로, 우협시보살상은 대의식으로 법의를 착용하고 있다.

한편 좌협시보살상의 양쪽 어깨 위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의 표현법과 하반신 중앙에 타원형을 그리며 드리워져 있는 화려한 장엄,

우협시보살상의 보발이 귀 밑에서 정리되는 표현법 등은 가장 중요한 특징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협시보살상의 보발 장식은 경기도 광주 수도사 보살상과 서울 보문사 관음보살상과 유사한데, 이들 보살상 역시 17세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조성자와 조성시기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인일이라는 새로운 조각승의 이름이 확인되어 향후

조선시대 불상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기준작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좌우 협시보살들의 관의 모습 세밀도

 

 

석가탄신일에 쓰이는 관욕식 용 아기부처

 

 

얼굴을 똬리를 튼 몸통속으로 숨기고 여의주는 내 보이는 모습

 

 

 

 

신중단  정면

 

 

 

 

三藏菩薩圖(삼장보살도)

 

 

극락보전 (神勒寺 極樂寶殿)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驪州 神勒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 : 보물  제1791호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驪州 神勒寺 多層石塔) : 보물  제225호   시대 = 조선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신륵사 다층석탑 (驪州 神勒寺 多層石塔)

 

 

이 탑은 우리나라에 있는 대부분의 석탑이 화강암으로 만들어진데 비하여 특이하게도 흰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높이은 3m에 이른다.  이 탑은 기단에서 모돌에 이루기까지 각각 하나의 돌로 조립되었다.

4각형의 지대석 위에 2층 기단을 놓았다. 하층 기단의 하대석에는 연꽃문양이, 중대석의 각 면에는 파도 문양이, 모서리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상층 기단 각  면에는 용과 구름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탑 몸돌에는 각 층마다 모서리 기둥[우주 : 隅柱= 모퉁이 우]이 새겨져 있으며, 각 층의 줄어드는 비율이 완만하다.

지붕돌의 추녀는 수평으로 흐르다가 전각(轉角)에 이르러 반전(反轉)을 보인다.

팔층 지붕돌 위에 작은 탑 몸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더 많은 층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가 세워진 시기는 신라시대까지 올라간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존하는 유물이 모두 고려 중엽 이후의 것이고

성종 3년(1472년)에 여러 건물이 다시 건립된 것으로 보아 이 석탑도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 안내 글>

 

 

앞에 보이는 건물이 심검당(尋劍堂)

 

 

앞에보이는 건물은 들어오는 앞에서 보면 구용루(九龍樓)이며 탑쪽에서 보면 용미산 신륵(鳳尾山 神勒寺)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템플스테이 관이 따로 되어 있다.

 

 

통도사 삼화상 진영 경남유형문화재 제277호로 지정 

 여주 신륵사 삼화상진영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167호

 

본 삼화상 진영은 신륵사의 중요 인물인 나옹화상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주요한 작품으로 현재 전국 사찰에 전하는 1,000여점의 진영 가운데 

삼화상 진영은 매우 드물어 자료적인 측면에서는 희귀하나, 조사들의 성품을 부각시키는 전신성이 약하고 제작연대도 불분명하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한 대상이 되어 여러 곳에 그들의 초상화를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3폭의 초상화는 지공의 상을 중앙에 안치하고 그 오른쪽에 나옹을, 왼쪽에 무학을 안치하였는데 세 분 모두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좌상이다.

 

고려 후기의 개혁파로 잘 알려진 승려들이다.

모든 불사에 증명법사로 모시는 인도의 지공, 고려 공민 왕사 나옹, 조선 태조 왕사 무학『통도사 삼화상진영

다른 사찰에 봉안되어 있는 지공화상·나옹화상·무학화상의 진영 등에 비해 제작연대가 확실하고 작품의 품격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지공대 화상(指空大和尙)

 

                                  화면 향좌측 상단에는 ‘서천국박달탄존자지공대화상(西天國搏達坦尊者指空大和尙)’이라는 화제명이 적혀 있다.

지공은 머리에 금색 관을 쓰고 오른손에는 아홉 알의 굵은 염주를 쥐고 있으며 약간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왼손으로 긴 불자를 들고 있으며 얼굴은 인자한 모습이다.

 

인도 출신의 승려로서 고려 말에 활동한 지공화상(指空和尙 ?- 1363년) 의 진영이다.

상단에 기록된 "서천 108대 조사 지공대화상(西天百八代祖師指空大和尙)"는 지공화상이 가섭존자(迦葉尊者)로부터 시작되는

인도 선종 계보에서 108대 조사임을 가리킨다.

 

지공화상은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 1376년)에게, 나옹은 다시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가 되어 조선 건국에 기여한

무학자초(無學自超, 1327- 1405년)에게 법을 전수하였는데 이후 지공, 나옹, 무학의 삼화상 진영은 하나의 세트로 그려지는 경향이  생겨났다.

 지공화상은 머리에 관을 쓰고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 특징이다.

 

나옹 대화상(懶翁大和尙)

 

의자에 앉아 우안칠분면의 모습을 하고 있다. 붉은 가사에 녹색 장삼을 착용하였으며, 왼손에는 목장자를 쥐고 오른손은 의자를 잡고 있다.

화면 향좌측 상단에 ‘고려공민왕사보제존자나옹대화상(高麗恭愍王師普濟尊者懶翁大和尙)’이라는 화제명이 적혀 있다.

 

나옹은 얼굴과 몸을 왼쪽으로 돌려 중앙을 향하고 있는데 왼손으로 긴 주장자를 비껴들고 먼 곳을 주시하면서 사색에 잠겨 있는 듯하다.

 

무학대화상(無學大和尙) 

 

반면 무학화상 진영은 좌안칠분면의 모습으로, 붉은 가사에 녹색 장삼을 착용하였다.

왼손은 의자를 잡고, 오른손에는 목장자를 쥔 모습이 나옹화상 진영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역시 화면 향좌측 상단에 ‘한양태조왕사묘엄존자무학대화상(漢陽太祖王師妙嚴尊者無學大和尙)’이라는 화제가 적혀 있다.

 

무학은 얼굴과 몸을 오른쪽으로 돌려 지공이 있는 중앙을 바라보게 하였으며, 오른손으로 주장자를 비껴들고 왼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잡고 있다.

예리한 두 눈과 꼭 다문 입에서 수행자의 면모를 보이고 있는 작품으로, 1807년(순조 7)에 제작된 것이다.

각 폭은 길이 146㎝, 폭 75㎝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렸다.

 

다른 사찰에 봉안되어 있는 이들의 상에 비해 제작연대가 확실하고 작품의 품격도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2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주 신륵사=◈ 

나옹선사와 회암사 이야기

 

무학대사는 잘 알아도 나옹선사는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다음 시의 작자가 나옹선사라고 하면 “아하! 그렇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 가라하네

 

나옹(懶翁1320-1376)선사는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그는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 불미골 또는 불모동에서 고려 공민왕 때 태어났다.

지금은 불모사도 없어지고 여기 살던 사람들도 이주하여 불미골이란 이름만 남아 있다.

나옹의 이름은 원혜(元惠)이고, 호는 나옹(懶翁)이다. 법명은 혜근(惠勤)이며, 속성은 아씨(牙氏)이다.

 

가산리에 ‘까치소’라는 연못이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곳 가산리 불미골에 가난한 농부가 살았다. 고려 말 세상이 혼란하여 가렴주구가 극을 치달을 때였다.

 마른 나무에 물 뽑듯이(乾木水生) 쥐어짜자 나라에서 정해진 세금을 내지 못한 농부는 그만 겁이나 도망가고 그 부인 정씨 혼자만 있었다.

그 때 세금을 받으러온 관리들이 해산 날짜가 임박한 부인을 남편 대신 관아로 끌고 가는데, 부인이 한 연못을 지날 때 갑자기 아이를 낳았다.

 

무도한 관리들 때문에 해산한 아이는 그 곳에 버려두고 그대로 관가에 도착하였다. 영해 부사가 부인을 보니 치마에 온통 피가 묻어 있으므로

사연을 묻게 되었다. 관리들이 도중에서 해산한 이야기를 하자, 부사는 관리들을 꾸짖고 부인을 돌아가게 하였다.

부인이 아이 있는 곳으로 가보니 수 없이 많은 까치들이 날개를 펴서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다.

이 아이가 나옹이다. 그 후 연못을 까치소 혹은 작연(鵲淵)이라 하였다.

 

신기리에는 굉장히 크고 오래된 반송 한 그루가 있었는데 나옹이 원나라로 유학 갈 때 심었다 한다.

6백여 년 세월동안 버티다가 지난 1960년에 고사하였다. 창수치안센터 뒤편 소나무가 있었던 터에는 ‘나옹선사 반송유적지’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이 나무가 살아 있을 때는 반송마을 당(堂)나무로써 매년 음력 정월 보름이면 제사상을 받았다.

 

고사한 뒤에도 죽은 나무에 동제를 지내왔었다. 그러다가 1970년 장육사에서 나옹선사 영정을 복사하여 반송 자리에 나옹의 영각사(影閣祠)를 세워

봉안하였다. 그 뒤로는 동재를 지내지 않는다. 2008년 10월에는 이곳에 무게가 무려 47톤, 높이가 5미터나 되는 나옹사적비를 세웠다.

 

나옹은 열두 살에 친구의 죽음을 보고 어른들에게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물었으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므로 비통한 생각을 품고,

문경 공덕산 묘적암의 요연(了然)에게 가서 승려가 되었다.

 

요연이 나옹에게 “여기 온 것은 무슨 물건이냐?” 하니 나옹 대답이 “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 왔거니와 보려하여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하여도 찾을 수 없나이다. 어떻게 닦아야 하겠나이까? 하였다.

그러자 요연은 ”나도 너와 같아서 알 수 없으니, 다른 스님에게 가서 물어라.“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고려 충목왕 4년1347 원나라로 건너가 12년간 불법을 수학하고 돌아왔다.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고, 조선조에 들어와 태조의 왕사가 되기도 했다.

나옹과 무학(無學1327~1405)은 원나라에 유학 할 때 같이 공부했다. 그 인연으로 무학이 나옹의 의발(衣鉢)을 이어 받았다.

지공(指空), 무학과 함께 3대 화상이라 한다. 그는 57세에 입적하니 친구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이 비문을 지었다.

부도와 비문은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에 있다. ‘교쇄(交鎖) 명당’으로 알려진 그곳은 지공, 나옹, 무학 세 분의 부도가 나란히 있다.

 

나옹은 불사를 일으키기 위해 한 때 전라북도 남원에 머문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커다란 기러기가 울음을 울며 바람을 만나 날아간다는 뜻의 ‘명홍조풍형(鳴鴻遭風形)’ 명당 터를 발견하였다.

마침 남원의 터주 대감인 윤진사로부터 좋은 묘 터를 구해 달라는 청탁을 받아 놓은 지라,

이 터를 윤진사에게 양도하기로 약조하고 선금조로 3백 냥을 받아 불사를 일으켰다.

 

절을 다 지은 후 나옹은 미리 봐 둔 명당 터를 찾기 위해 답산 길을 나서 주변을 샅샅이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

다시 밖으로 나오면 보이고 답산 길에 들면 감쪽같이 사라졌다. 여러 번이나 그렇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눈조차 캄캄하여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윤진사의 독촉은 날로 더해갔다.

 

이즈음 나옹의 딱한 사정을 안 황군서(黃君瑞; 황희정승의 아버지)가 선뜻 3백 냥을 내어주어 나옹의 빚을 갚아 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일까? 이제야 나옹의 눈이 밝아지면서 점찍어 둔 그 터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나옹은 “명당 터는 임자가 따로 있는 법이로고.” 하며

황군서에게 “이 자리는 일국의 재상이 2대에 연이어 나오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재상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얻은 자리가 바로 남원시 대강면 신촌리에 자리한 황희정승의 조부 황균비(黃均庇)의 무덤이다.

 

이 무덤을 쓰고 난 후 황군서의 아들 희(黃喜1363~1452)가 조선 제일의 재상으로 청백리에 녹선 되었고,

황희의 맏이 치신(黃致身1397~1484)은 판중추부사를 지낸 뒤 우의정에 추증 되었으니 정승반열이고,

셋째 수신(黃守身1407~1467)은 세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사람들은 황희 정승의 조부 묘 발음으로 2대를 내리 정승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나옹선사가 태어났다는 불미골은 창수면 소재지 북쪽 가산교를 지나 69번 도로를 따라 1킬로미터 정도 올라가면 길 우측에 가산지가 있다.

이 못 끝에서 동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또 1킬로미터 정도 가면 깊은 골짜기 안에 재실 한 채가 있다. 이 골짜기가 불미골이다.

 

골짜기 안에는 허물어진 집과 잡초가 무성한 논밭 터의 흔적을 보아 오래전에 사람이 살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퍼온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