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양평 운길산 수종사 : 서거정은 수종사를 ‘동방에서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하였답니다.

백련암 2014. 6. 24. 16:32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 일원 (南楊州 雲吉山 水鍾寺 一圓)  : 명승  제109호

 

수종사에 대한 유래는, 1458년(세조 4) 세조가 금강산(金剛山) 구경을 다녀오다 이수두(二水頭 : 兩水里)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난데없는 종소리에 잠을 깬 왕이 부근을 조사하자, 주변에 바위굴이 있고, 굴 안에 18나한(羅漢)이 있었으며,

굴 안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울려나와 이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고 하였다고 전해온다.

운길산 수종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 전망지점으로 자연경관 가치가 높은 곳이다.

예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의 풍광을 시 · 서 · 화로 남겼으며, 서거정(1420~1488)은 수종사를 ‘동방에서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하였으며,

봄 · 여름 · 가을 · 겨울 연중 내내 신록 · 단풍 · 설경이 신비스러우며, 일출 · 일몰 · 운해 등

어느 시간의 풍광이라도 대단히 아름다운 전망을 지니고 있는 조망지점으로서 경관가치가 큰 곳이다.

정약용은 일생을 통해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에 비교할 만큼 좋아 했던 곳으로 역사문화 가치가 높은 곳이며,

또한 다선(茶仙)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가 정약용을 찾아와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차를 마신 장소로서,

차문화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며,

현재 수종사는 삼정헌(三鼎軒)이라는 다실을 지어 차 문화를 계승하고 있어 차 문화를 상징하는 사찰로 이름이 높다.

겸재 정선(1676~1759)의 경교명승첩(한강의 북한강·남한강 주변경관과 한강과 서울의 인왕산, 북악산 등의 경관을 그린 화첩으로 총 33점으로 이뤄짐)중

독백탄(獨栢灘)은 현재의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의 경관을 보여주는 고서화로서

그 시대의 명승지 경관과 현재의 경관을 비교 감상할 수 있어 회화 가치가 높다.

 

 

운길산 수종사(雲吉山 水鐘寺)란 현판이 걸려있는 일주문(一柱門)

 

7~8년전에만 하더라도 일주문과 미륵부처 상은 없었다 어느날 찾아오니 일주문이 서 있으면서 수종사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어

좋았다. 그 당시에 찾아왔을 때 대웅전과 요사채에 비가 새 안타까웠다.

이렇게 훌륭하게 되어있으니 기쁠 수 밖에..._()_

 

운길산 수종사 일주문

 

 

 

 

 

 

 

 

불이문(不二門)

천왕문이 없이 바로 불이문이며 불이면에 불법을 보호하는 네 천왕들이 그림으로 그려져있다.

 

 

서방 광목천왕 (西方 廣目天王)

 

서방의 광목천왕은 수미산 중턱의 서쪽의 주처(住處)가 있어 천왕(天王)입니다.

 

북방 다문천왕(北方 多聞天王)

 

북방 다문천왕은 수미산 중턱의 북쪽에 살며 야차와 나찰을 권속으로 하여 북방을 수호하는 선신이다.

갑옷을 입은 무장의 형상을 하고 있다. 지물로는 오른손에 긴 보탑(寶塔)을 자고 있으며, 왼손에는 작은 보당(寶幢)을 올려놓고 있다.

항상부처님의 도량을 수호하여 설법을 듣고 재복부귀를 맡다 불법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동방 지국천왕(東方 持國天王)

 

수미산 중턱의 동쪽에 살며 동방을 수호하는 선신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중생을 안온케 한다는 안민(安民), 나라를 지킨다는

지국(持國)의 의미를 담고 있다 지물로는 7현의 비파를 들고 있는데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자고 왼손으로 연주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부처님의 정법을 받들어 삼악도를 없애고 삼선도를 조장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천왕이다.

 

남방 증장천왕(南方 增長天王)

 

증장천왕은 수미산 중턱 남쪽에 살며 항상 염부재(閻浮提)의 중생을 관찰하고 남방을 수호하는 선신이다.

왼발아래에 악귀를 밟고 있으며, 지물로는 오른손에 칼을 빼어들고 있는데 이것은 사악한 것을 단호히 제거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중생의 이익을 더욱 길고 넓게 증장시켜준다는 증장, 또는 증광의 의미를 지닌다.

 

불이문을 지나면 얼마 안가 거대한 석불이 보입니다. 10년전에는 이 석불이 없었습니다.

 

        

  석불의 다양한 모습

 

석불 정면모습

 

나한전에서 내려다 본 수종사 전경

 

남양주수종사부도 (南楊州水鍾寺浮屠) 세조의 고모인 정의옹주의 부도탑

 

태종의 다섯째 딸인 정의옹주의 부도로 알려진 소종사 부도, 두 마리 용이 구름 위에서 여의주를 움켜잡고 비상하려는 용트림이 새겨져 있는

이 부도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운룡문 만으로도 장엄함을 엿볼 수가 있다.

 

왕명의 의하여 세워진 수종사에 남아 있는 팔각원당형 부도 이다. 팔각원당형 부도는 기단 ·  탑신 · 지붕이 모두 8각형이고

단층인 부도로 지붕과 기왓골 등 세부는목조건물의 양식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지붕돌 낙수면에 "태종태후정의옹주 사리조탑시주 △△유씨금성대군정통사년기미십월일입<太宗太后貞懿翁主 舍利造塔施主

△△柳氏錦城大君正統四年己未十月日立>"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세종 21년(1439년) 왕실의 명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종사의 글>

 

남양주수종사부도 (南楊州水鍾寺浮屠)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7호   시대 = 조선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이 부도는 운길산에 자리한 수종사에 있는데,

수종사는 조선 세조 4년(1458)에 왕명에 의해 중창된 사찰이다.

전체적으로 8각을 기본으로 하여, 2단을 이루는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부는 일반적으로 상 · 중 · 하의 3단으로 구성되는데 이 부도는 간략하게 2개의 돌로만 마련한 것이 특이하다.

탑신의 몸돌은 둥근 형태가 변하여 거의 사각형에 가깝고, 용의 모습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겼다.

구름과 함께 새긴 용은 섬세하지는 않으나 그래도 장중함을 더하고 있다.

지붕돌은 두꺼운 편이고, 처마는 느린 U자형을 이룬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위로 보주(寶珠:구슬모양 장식),

보륜(寶輪:수레바퀴모양 장식) 등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지붕돌 윗면에 남아 있는 기록에
태종태후정의옹주 사리조탑시주 △△유씨금성대군정통사년기미십월일입<太宗太后貞懿翁主 舍利造塔施主

△△柳氏錦城大君正統四年己未十月日立>이라 적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조선 세종 21년(1439년) 왕실에서 뜻을 모아 이 부도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부도 안에서 고려시대 청자로 만든 항아리와 은으로 만들어 금을 입힌 6각의 단지(보물 제259호)를 발견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문화재청의 글>

 

 

이 탑의 설명은 아무곳에도 없음

 

 

   

 팔각오층석탑의 부분도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南陽州 水鐘寺 八角五層石塔) : 보물  제1808호

 

수종사는 조선 세조 6년(1460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이 탑은 현재 대웅전 옆에 있지만 원래는 경내에서 동쪽으로 벗어난 곳에 있었다.

기단으로 부터 탑신에 이르기까지 팔각형의 평면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지대석과 기단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 틀안에 안상이 새겨져 있다.

3차례에 걸쳐 이전과 해체 복원되었는데 그때마다 많은 사리구가 출토되었다.

1939년에는 사리장치인 고려청자 안에서 금동구층탑, 은제도금육각감이 각 1점씩 나와 보물 제259호로 지정되었다.

1957년과 1970년 탑을 다시 옮겨 세우는 과정에서 모두 18구의 불상이 발견되었다.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던 팔각다층석탑의 양식을 계승한 조선 전기의 석탑으로 안정된 균형미를 갖추고 있으며,

당시 한강을 통한 문화 전파 경로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탑내에서 출토된 불상 등 관련자료들 볼 때  이 석탑은 조선 성종 23년(1493년)을 건립 하한으로 볼 수 있으며,

그 후 조선 인조 6년(1628년)에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

<수종사의 글>

 

 

조선시대 금동불감(金銅佛龕)과 금동불 · 보살상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된 수종사다보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호)이 있다.

1957년 이 탑속에서 작은불상이 열여덟점이 나왔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사진>

 

 

 탑속에서 나온 작은불상

 

   

 탑속에서 나온 작은불상

 

 

1957년 이 탑속에서 작은불상이 열여덟점이 나왔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사진>

특이하게도 상이 모두 웃는 얼굴이다.

 

 

남양주 수종사 부도 사리장엄구 (南陽州 水鐘寺 浮屠 舍利莊嚴具) : 보물  제259호   시대 = 미상

 

남양주 수종사 부도 사리장엄구-금제구층탑(南陽州 水鐘寺 浮屠 舍利莊嚴具-金製九層塔)

 

금제구층탑(金製九層塔)은 높이가 12.9㎝인 작은 탑으로, 정사각형으로 된 평상 모양의 기단 위에 있다.

1층 탑 몸체에는 한 면에 꽃잎 모양의 출입구가 3개 있고, 나머지 면에는 격자무늬 창문이 표현되어 있으며,

2층 이상에는 정면에만 출입구가 하나씩 있다.

각층 지붕의 네 모서리에는 사슬을 꼬아 달고 탑의 맨 꼭대기에는 덩굴무늬 장식이 있다.

 

 

남양주 수종사 부도 사리장엄구 (南陽州 水鐘寺 浮屠 舍利莊嚴具) : 보물  제259호   시대 = 미상

 

남양주 수종사 부도 사리장엄구-청자유개호(南陽州 水鐘寺 浮屠 舍利莊嚴具-靑磁有蓋壺)

남양주 수종사 부도 사리장엄구(南陽州 水鐘寺 浮屠 舍利莊嚴具)

남양주 수종사 부도 사리장엄구-은제 도금 사리기(南陽州 水鐘寺 浮屠 舍利莊嚴具-銀製鍍金舍利器)

 

   

①②                                                                                                         

남양주 수종사 부도 사리장엄구 (南陽州 水鐘寺 浮屠 舍利莊嚴具) : 보물  제259호   시대 = 미상

 

남양주 수종사 부도 사리장엄구-은제 도금 사리기(南陽州 水鐘寺 浮屠 舍利莊嚴具-銀製鍍金舍利器)

남양주 수종사 부도 사리장엄구(南陽州 水鐘寺 浮屠 舍利莊嚴具)

남양주 수종사 부도 사리장엄구-청자유개호(南陽州 水鐘寺 浮屠 舍利莊嚴具-靑磁有蓋壺)

 

남양주 수종사 부도 사리장엄구(南陽州 水鐘寺 浮屠 舍利莊嚴具)는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수종사 석조 부도를 고쳐 세울 때 발견된 유물들이다.
청자유개호(靑磁有蓋壺), 금제구층탑(金製九層塔), 은제 도금 사리기(銀製 鍍金 舍利器)가 발견되었고,

당시 금제구층탑과 은제 도금 사리기는 청자유개호 안에 들어 있었다

청자유개호(靑磁有蓋壺)는 높이 31.2㎝, 아가리 지름 26㎝로 세로로 골이 파진 것처럼 몸 전체가 장식되었고,

뚜껑은 아름다운 꽃 덩굴무늬가 전체적으로 새겨져 있다. 뚜껑의 가장 가운데에는 모란 꽃송이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청자호의 색깔은 몸체와 뚜껑의 색이 다른데, 몸은 녹청색이고 뚜껑은 녹황색을 띠고 있다.

청자유개호(靑磁有蓋壺) 안에 금제구층탑(金製九層塔)과 함께 들어 있었던 은제 도금 사리기(銀製 鍍金 舍利器)는 높이 17.3㎝로,

이 중 의 연꽃무늬가 있는 기단에 연꽃 무늬와 칠보 무늬를, 면마다 번갈아 뚫어 조각한 6각의 몸체 위에 6각의 지붕을 얹은 형태이다.

지붕 꼭대기에는 연꽃 모양 위에 보주가 장식되어 있다.

이 은제 도금 사리기(銀製 鍍金 舍利器) 안에는 수정으로 만들어진 공모양의 사리병이 들어 있는데, 여기에 구멍을 뚫고 사리를 모셨다.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南陽州 水鐘寺 八角五層石塔) : 보물  제1808호   시대 = 조선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 중턱에 위치한 수종사에 전해오는 조선시대의 석탑이다.

수종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로 조선 세조 5년(1459)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온다.

석탑은 원래 사찰 동편의 능선 위에 세워져 있었다고 전하며, 이 위치에서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모이는 양수리 지역이 훤히 내려다보여

경관이 우수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현재는 석조부도, 소형석탑과 함께 대웅전 옆에 옮겨져 있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나 북한지역 향산 보현사 팔각십삼층석탑과 같은 고려시대 팔각석탑의 전통을 이으면서

규모가 작아지고 장식적으로 변모한 조선초기 석탑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이 탑에서는 1957년 해체수리 시에 1층 탑신과 옥개석, 기단 중대석에서 19구의 불상이 발견되었고,

1970년 이전 시에는 2층, 3층 옥개석에서 12구의 불상이 발견되었다.

함께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서 이 불상들 가운데 태종의 후궁이었던 명빈 김씨(?-1479)가 발원조성하고,

성종의 후궁들이 홍치 6년(1493)에 납입했다고 하는 불상 2구(석가여래 1구와 관음보살 1구)와

인목대비(정의대왕대비)의 발원으로 조성된 금동불·보살상들,

숭정원년(1628)에 화원[조각승] 성인(性仁)이 조성한 금동비로자나불좌상(대좌바닥에 명문음각)이 확인되어,

석탑 건립의 하한은 1493년이며 1628년에 중수된 것을 알 수 있다.

탑의 형태는 지대석 위에 팔각의 대석을 올리고 그 위에 불상의 팔각연화대좌와 같은 형식의 기단이 올려져 있다.

팔각 대석의 각 면을 2등분하여 장방형의 액(額)을 새기고 그 안에 안상(眼象)을 표현하였다. 같은 형태의 안상은 기단의 받침과 탑신 받침에도

통일되게 새겨져 있다. 기단부는 상대 앙련석과 하대 복련석에 16엽의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는데,

연판(蓮瓣)에는 고려중기부터 유행했던 화려한 꽃머리 장식이 새겨져 있고, 팔각 중대석에는 각 모서리에 원형의 우주(隅柱)가 입체적으로 조각되었다.

5층의 탑신 역시 팔각 모서리에 원형의 우주가 새겨져 있고 옥개석에는 각각 3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다.

옥개석 처마의 부드러운 곡선과 원형 기둥, 옥개받침 등은 목조 건축을 석재로 옮긴 모습을 잘 나타낸다.

정상부에는 합각지붕 형태의 삼각형 문양이 조각된 복발과 보주가 올려져 있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고려시대 팔각석탑의 전통을 이어 조선시대에 건립된 석탑으로 출토된 사리장엄과 명문을 볼 때,

건립연대는 늦어도 1493년에 건립된 이래 1628년에 중수했음을 알 수 있으며, 왕실 발원의 석탑임도 확인된다.

또 양식을 보면 기단부는 불상대좌의 양식이고, 탑신부는 목조건축의 양식이며, 상륜부는 팔작기와지붕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형식은 현재까지 조사된 조선시대에 조성된 석탑 중 유일한 팔각오층석탑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건립연대가 확실하고, 각부의 부재가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된 조선시대 유일의 팔각오층석탑으로서

역사적·학술적으로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평가된다.

<문화재청의 글>

 

대웅전 옆에 나란히 있는 부도와 탑

 

 

 

 

 

 

選佛場(선불장) 옆으로 종무소가 함께 있다.

 

 

대웅전 벽화

 

 

 

부모은중경 이야기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왕사성에 있는 기원정사에서 대비구 3만 8천인과 그 밖에 많은 보살 마하살들과 함께 계셨다.

그 때에 세존께서 대중을 거느리시고 남방으로 나아가시다가 뼈 한무더기를 보시더니 오체를 땅에 붙이시어 그 마른 뼈에 정중히 예배를 하셨다.

이를 본 아난과 대중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바로 삼계의 큰 스승이시며 사생(四生)의 어버이시라 여러 사람들이 귀의하고 공경하옵거늘

어찌하여 이름 모를 뼈 무더기에  친히 절하시옵니까? 』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셨다. 『네가 비록 나의 상족제자(上足第子)이며 출가한지도 오래 되었지만 아는 것은 넓지 못하구나.

이 한 무더기의 마른 뼈가 어쩌면 내 전생(全生)의 조상이거나 여러 대(代)에 걸친 부모일 것이므로 내가 지금 예배한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이르셨다.

『네가 이 한 무더기의 마른뼈를 둘로 나누어 보아라. 만일 남자의 뼈라면 희고 무거울 것이며, 여인의 뼈라면 검고 가벼우리라.』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석존이시여 남자는 세상에 있을 때 큰 옷을 입고 띠를 두루고 신을 신고 모자를 쓰고 다니기에 남자인줄 아오면 여인은 생전에 갖은 방법으로

치장하고 다니므로 여인인줄 알게 되오니다.  그러나 죽은 후의 백골은 남녀가 마찬 가지이옵고늘 어떻게 그것을 구별해서 알아보라고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이르셨다. 『만일 남자라면 세상에 있을 때에 마소를 부리기도 하고 사람을 부려 크게 고행함이 없이 지내기도 할 뿐아니라

때때로 가람에서 경을 외우고 법문을 들은 까닭으로 남자의 벼는 희고 무거울 것이요, 여인은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자녀를 낳고 기름(육)에 있어 한번

아이를 낳을 때에 서말이나되는 피를 흐리며 아기는 어머니 젖을 여덟 섬 너말이나 먹느리라. 그런 까닭에 뼈가 검고 가벼우니라.』

 

아난이 이 말씀을 듣고 가슴이 터질 듯 하여 눈물을 흘려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머님의 은덕을 어떻게 하면 보답할 수 있아오리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내가 너를 위하여 분별하게 설하리라. 무릇 사람이 이 세상에 있게 됨은 부모를 인연하기 때문이니라.

   아버지가 아니면 나지 못하고 어머니가 아니면 자라지 못하나니 어머니의 몸 속에 의지하여 달이 차면 이 따에 태어나게 되느니라.

   이로부터 어머니는 여덟섬 너말의 젖을 자식에게 먹이니 어머니의 은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느리라. 어머니가 아이를 가지면 열달 동안의

   신고(辛苦)는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다』고 <부모은중경>에 설하고 잇으며 어머니의 크나 큰 은혜를 크게 열 가지로 나누어 설하고 있다.

 

첫째. 아이를 잉태하여 열 달 동안 온 정성을 기울여 지키고 보호해 준 은혜,

둘째. 해산할 때 괴로움을 겪는 은혜.

셋째, 자식을 낳고 모든 근심을 잊는 은혜.

넷째, 입에 쓴 음식은 삼키고 단 음식은 아기에게 먹여주는 은혜, 

다섯째, 마른자리 골라 아이를 눕히고 젖은 자리에는 자신이 눕는 은혜,

여섯째, 때 맞추어 젖을 먹여 길러준 은혜.

일곱째, 똥 오줌 가려 더러운 것을 씻어주는 은혜,

여덟째, 자식이 먼 길을 떠나면 생각하고 염려하는 은혜,

아홉째, 자식을 위해서는 나쁜일도 마다하지 않는 은혜.

열째, 늙어 죽을 때까지 자식을 사랑해 주는 은혜.

 

고래(古來)로 동양에서는 백행(百行)의 근본을 효(孝)에 두었고 효의 사상은 인륜(人倫)의 근본이었다. 부처님께서는 태어나신지 7일만에 모친을 잃은 까닭에 부친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지극한 애정을 부모은중경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원효대사이야기

 

원효대사(617~686)는 신라말기의 고승으로 압량군(押梁郡) 남불지촌(南佛地村) (지금의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속명(俗名)은 설 서당(薛 誓幢)대사는 출가한 이후 특별한 스승이 없이도 쉽게 경전에 통달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찍이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구법의 길을 떠났다. 어느 날 날이 저물어 산중의 무덤사이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원효는 잠을 자다 몹시 갈증이 나서 일어나 물을 찾던 중 바가지에 물이 있어 단숨에 마시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어젯밤에 마셨던 물을 찾으니 물바가지는 보이지 않고 사람의 해골이 있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해골을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썩은 빗물이 고여 있었다.

 

원효는 어제 밤에 달게 마셨던 물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져 토하고 말았다.

‘모르고 마실 때에는 달콤했던 물맛이 해골에 고인 빗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더럽다고 구역질을 느끼다니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구나

 ’ 이렇게 생각하다 활연 대오하였다.

 

心生則種種法生 (심생칙종종법생)    心滅則髑髏不二 (심멸칙촉루불이)
三界唯心萬法唯識 (삼계유심만법유식)    心外無法胡用別求 (심외무법호용별구)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의 물과 깨끗한 물이 둘이 아닌 법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인식임을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진리를 구하리요.

 

다음날 “이미 道를 구하였으니 당나라까지 가서 법을 구할 것이 없다”라고 하며 의상대사와 헤어졌다.

신라로 돌아온 원효는 세상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며,

요석공주와의 인연으로 설총을 낳은 이후 환속하여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이르며 대중교화에 나섰다.

 

불쌍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믿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저자거리를 떠돌며 노래와 춤으로 중생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었는데 이는 중생을 위한 무애(無碍)행이었으며 자비를 실천한 보살행이었다.

 

 

選佛場(선불장)

 

經學院(경학원)

 

 

새로지을 범종불사를 하고 있다. 범종모형도

 

용뉴와 음통

 

나한신종불사

 

 

종각(鐘閣)

 

범종(梵鐘)

 

용뉴와 음통

 

 

淸水茶香 水鐘寺 三鼎軒(청수다향 수종사 삼정헌)

 

차향으로 추앙 받는 초의선사께서 양주에 낙향한 다산 정약용을 찾을때면 항상 수종사에서 자리를 함께하며 차를 마셨다 전해지듯이

"보성들녘 자란차로 수종에서 향을 내다." 라는 말은 차향의 산실로서 수종사가 예로부터 이름이 있었음을 일러준다.

 

수종사하면 가장 먼저  초의스님, 추사 김정희, 정약용, 그리고 정약용의 두 아들 정학연,정학유 등 조선의 지식인들이 모여 차를 마시고

시를 읊고 학문을 논하고 세상을 이야기 하며 보냈던  곳이지요 

다산과 초의스님이 처음 만난것은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초의스님 24세 되던 해였습니다.

 

다산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초의스님이 다산의 제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절대 다산의 제자는 아니고 다산의 둘째 아들과 나이가 같아 벗이 되어

다산을 자주 찾아 아버지처럼 모셨다고 합니다.

 

김정희와의 만남은 전생의 인연으로 밖에 설명할수 없을 정도로 30살 되던 시기부터 사귀기 시작하여

추사가 7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평생지기로 지냈던 사이였다고 하네요

 

 

수종사 절마당에서 내려다 보는 풍경 흐릿한 구름아래에 보이는 양수리 철교와 마을들 그리고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까지

 

 

수종사 삼정헌 건물 지하층이다. 물이 말라 나오지를 않는다.

 

 

解脫門(해탈문)

 

경내에서 은행나무쪽으로 나가는 解脫門(해탈문) 안쪽의 그림

 

수령이 500년된 은행나무

세조는 폐허가 된 수종사를 중창한 후 5층석탑을 세우도록 명하고 또 은행나무 두그루를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있다.

 

수령이 500년된 은행나무

 

 

 

운길산 수종사와 한음 이덕형 선생

하음 이덕형(1561년~ 1613년) 선생은 산수가 빼어난 운길산을 사랑하시어 바쁜 중앙정치의 와중에도 여가를 내어 사제촌에서

수종사로 이어지는 돌길을 따라 자주 걸으셨다.

수종사의 주지가 되어 사제촌(莎堤村)의 한음선생을 인사차 찾아 온 덕인(德仁)스님에게 준

시에서 선생과 스님과 사제촌을 둘러싼 겨울 풍광이 그대로 들어난다.

 

운길산 스님이 사립문을 두드리네 (僧從西崦扣柴關) = 승종서엄구시관

앞 개울 얼어 붙고 온 산은 백설인데 (凍合前溪雪滿山) = 동합전계설만산

만첩청산에 쌍련대(雙練帶) 매었네 (萬疊靑螺雙練帶) = 만첩청라쌍련대

늘그막의 한가로움 누려봄 즉 하련만 (不妨分占暮年閑) = 부방분점모년한

 

선생은 7년여의 임진외란을 수습하는데 큰 공훈을 세웠으나 극심한 정쟁에서 오는 국정의 혼미에 몹시 상심하셨다.

봄날이 가는 어느 초여름 선생은 이곳 수종사를 찾아 주지 스님에게 우국충정에서 오는 자신의 괴로운 심경을 드러내는 시를 지어 주셨다.

 

산들바람 일고 옅은 구름비는 개었건만 (風經雲淡雨晴時) = 풍경운담우청시

사립문 향하는 걸음걸이 다시금 더디네 (起向柴門步更遲) = 기향시문보갱지

구십일의 봄날을 시름 속에 보내며 (九十日春愁△過) = 구십일춘수△과

운길산 꽃구경은 시기를 또 놓쳤구나 (又孤西崦賞花期) = 우고서엄상화기

 

오른편 사제촌(송촌리) 한음마을에는 500년 조선역사상 최연소로 31세에 대제학에 오르고 42세에 여의정에 오르신 선생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후

삶을 마감하신 별서(別墅)터 및 하마석(下馬石) 등의 유적이 그대로 있어 아련한 선생의 발자취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다람쥐 입에서 뿜어져 나와야할 약수가 지금은 물이 말라 나오지를 않네요 아니면 물길을 다른쪽으로 돌렸던지요

예전엔 이 약수는 정약용이 강진 유배지에서 돌아온 후  노후에 가끔 찾아와 마시곤 했던 물이라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