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광탄 봉덕사 (비구니 사찰), 천주교 애덕의 집, 헤일리

백련암 2014. 6. 26. 19:31

광탄 보광사를 들러보고 옛날에 와본 이 봉덕사를 찾았다. 역사는 얼마안되었지만 당시에 비구니 스님의 도량으로 깨끗하고 예쁜 정원같은 도량을 보고

너무 좋아했던 생각이 나 들러보았다. 세월이 흐른 만큼 도량은 옛도량이 아니고 내가 그렇게 그리워하던 도량도 아니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하는 마음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아 나왔다.

 

 

대웅전 건물

 

 

대웅전 꽃문살

 

경내에 대웅전 옆에 모셔져 있는 석불입상

 

 

무착거사와 문수보살 벽화이야기

중국 오대산 중턱의 외딴 암자 금강굴에서 한 스님이 손수 밥을 해먹으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스님은 어려서 출가하여 무착(無着; 821년-900년)이라는 법명을 받아 계율과 교학을 공부하다가 문수보살의 영지(靈地)인 오대산에 참배하고

문수보살을 친견(親見)하고자 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하루는 식량이 떨어져 산 아래 마을에 내려가 양식을 탁발해 올라 오다가 소를 몰고 가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노인의 모습이 범상치 않음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뒤를 따르게 되었다.

 

한참을 뒤쫓아 가다 보니 전혀 보지 못했던 웅장한 절 한 채가 나타났다.

노인이 문 앞에서 “균제야! ” 하고 부르니 한 동자가 뛰어나와 소고삐를 잡아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따라 들어가 노인에게 인사를 드렸더니,

 

동자가 아주 향기로운 차를 한 잔 내왔다. 노인이 묻기를자네는 오대산에 무엇하러 왔는가?저는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그 가호를 얻고자 찾아왔습니다.

 

자네가 가히 문수를 만날 수 있을까? 자네 살던 절에는 대중은 얼마나 되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300여명 되는 대중이 경전도 읽고 계율도 익히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곳은 어떠한지요?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이요, 용과 뱀이 뒤섞여 산다네.(龍蛇混雜 凡聖交參)무착은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새 밖은 어두워져서 무착은 노인에게 하룻밤 쉬어갈 것을 청하였더니 『애착이 남아 있는 사람은 이곳에서 자고 갈 수 없네.』

하고는 동자에게 배웅하게 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어둑해진 길가에 나와서 무착은 동자에게 물었다.

아까 노인에게 이곳 대중의 수를 물었더니 전삼삼 후삼삼이라고 하시던데 도대체 무슨 뜻인가? 하고 물으니,

『동자가 큰 소리로 무착아!』 하고 부르니 엉겁결에 네. 하고 대답하자,그 수효가 얼마나 되는고?』 하며 동자가 다그쳐 묻는 것이었다.

 

무착은 또 다시 말문이 막혀 동자를 쳐다 보며 이 절 이름은 무엇입니까?

『반야사(般若寺)라고 합니다.』 하며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웅장하던 절은 금시에 간 곳이 없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동자도 사라지고 없는데, 허공에서 한 귀절 게송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面上無瞋供養具)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요한 향이로다(口裡無瞋吐妙香)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心裡無瞋是眞寶)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無染無垢是眞常)

 

이렇게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서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무착은 더욱 수행에 힘써 앙산 선사(仰山; 840년~916년)의 법(法)을

이어받아 어디에도 거리낄 바 없는 대자유인이 되었다.

 

어느 해 겨울, 동짓날이 되어 팥죽을 쑤고 있는데 김이 무럭무럭 나는 죽 속에서 거룩하신 문수보살이 장엄하게 나타나서는

『무착은 그 동안 무고한가?』 하며 옛날 오대산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시키며 먼저 인사말을 건냈다.

 

그런데 무착스님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팥죽을 젓던 주걱을 들어 문수보살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문수보살은 놀래어 『어이, 무착 내가 바로 자네가 그렇게도 만나고 싶어하던 문수일세 문수야!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받은 무착스님은 『문수는 문수요, 무착은 무착이다.』

만일 문수가 아니라 석가나 미륵이 나타날지라도 내 주걱 맛을 보여주리라. 하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문수보살은

『 쓴 꼬두박은 뿌리까지 쓰고 단 참외는 꼭지까지 달도다. 내 삼대겁(三大劫)을 수행해 오는 동안 오늘에사 괄시를 받아 보는구나.

하는 말을 마치고 슬며시 사라져 버렸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 금강굴에서 3년 간이나 기도를 하고, 또 문수보살을 원불(願佛)로 모시고 다녔던 무착이었건만

깨달음을 성취한 뒤에는 문수보살이 스스로 나타나셨어도 도리어 호령을 하고 주걱으로 얼굴을 갈긴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체득한 선사들의 기백이요 실력인 것이다.

 

 

 

아이들이 흙을 쌀로 생각하여 공양하자 부처님께서 이를 탑으로 바꾸는 장면의 벽화

 

 

사라쌍수나무밑에서 대 열반에 드셨다.

 

 

초전법륜, 녹야원에서 오비구에게 첫 설법을 하시는 장면

 

 

마왕 파순이 딸들<열비(悅妃), 희심(喜心), 다미(多媚)>로 하여금 마녀로 변신케 하여 부처님을 유혹하는 모습

 

 

 부모은중경에 이야기

 

 

설산에서의 6년 고행

당시의 수행자였던 박가바와 알라라 칼라마 그리고 웃다카라마풋타 등을 찾아보았으나 그들의 수행의 목표가 천상에 태어나고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증득(證得)하여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 목표이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하여 궁극적인 고통의 해결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태자는

 

마가다국 니련선하(尼連禪河:네란자라 Nairanjara) 동쪽 가야산(伽耶山) 깊은 곳 나무 아래에 자리하여 고행을 시작했다.

 

싯달타는 그 당시 인도의 고행자들이 수행하는 가운데 가장 어려운 고행만을 골라 수행했다. 몇 톨의 낟알과 한 모금의 물로 하루를 보내어

눈은 해골처럼 움푹 들어가고 뺨은 가죽만 남았다. 몸은 뼈만 앙상한 몰골로 변해갔다.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싯달타는 아직도 완전한 번뇌를 끊지 못했으며 삶과 죽음을 뛰어 넘지도 못했다.

 

 

 

 

 

한밤에 성을 넘어가는 태자

정반왕은 태자의 마음이 오직 구도 일념으로 뭉쳐 있음을 짐작하고 크게 걱정한 나머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장수와 군사들로 궁성 안팎을 철저히

지키록 했다. 그렇지만 싯달타 태자는 생의 본래 면목을 밝혀서 생로병사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인생의 참다운 행복이란 존재할 수 없음을

통감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위한 구도의 출가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2월 8일<출가제일> 한밤중에 부왕의 간절한 애정과 아름다운 세 명의 태자비와 이별하고 애마(愛馬) 간타카를 타고

마부 차익(車匿: 찬다카chandaka) 한 사람만을 데리고 성을 뛰어 넘어 출가한다.

 

 

앙굴라말라 이야기

바라문 외도를 섬기던 아힝사카는 뛰어난 실력 때문에 사람들의 질투를 얻게 되고 사람들이 엉뚱한 소문을 퍼트리게 된다.

소문을 믿은 스승은 아힝사카에게 사람 천 명을 죽여 천 개의 손가락을 가져오면 道를 가르쳐 준다고 한다.

" 스승의 말을 따른 아힝사카는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녔는데 손가락 목걸이를 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앙굴리마라'라고 불리게 되었다.

앙굴리마라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모두 피해 달아나므로 천 명째 사람은 만날 수가 없으므로 어머니를 죽이려 했다.

때마침 앙굴리라마는 부처님이 지나가심을 알고 부처님을 해치려 하는데 있는 힘을 다해 뛰었으나 이상하게도 부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었다.

 

“사문아, 거기 섰거라!”부처님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앙굴리마라에게 “앙굴리마라여, 나는 여기 이렇게 멈추어 있다.

너는 어리석어 무수한 인간의 생명을 해쳐왔고 나를 해치려 하지만 나는 여기 이렇게 멈추어 있어도 마음이 평온하다. 너를 가엽게 여겨 여기에 왔다.”

말을 들은 앙굴리마라는 문든 악몽에서 깨어나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마치 시원한 물줄기가 훨훨 타오르던 불길을 꺼버린 듯 하였다. 그는 칼을 내던지고 꿇어 엎드렸다.

“부처님,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오늘부터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그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후에 아라한과를 얻었다.

 

 

사문유관

싯달타태자는 어느 날 궁궐의 사대문 밖으로 나아가 백성들이 살고 있는 민정을 시찰하게 됐다.

그 때 동문으로 나아가 머리에는 흰 서리를 이고 활등같이 굽은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가는 노인을 보았고,

다시 남문으로 나아가 살가죽은 말라붙고 뼈만 앙상한 것이 길가 더러운 땅에 쓰러져 ‘나를 좀 일으켜 달라’고 목 메인 소리로 외치는 병자를 만났다.

그리고 다시 서문에서는 한 시체를 상여 위에 메고 가는 처자와 권속이 그 뒤를 따르며 가슴을 치며 목메어 울부짖는 처참한 광경을 보았다.

다시 북문으로 나아갔는데 그곳에서 어떤 사문(沙門)을 만났다.

그것을 본 태자는 궁궐로 돌아와서 7일 동안 명상에 잠겨 있었다.< 본행경>

인생의 허무와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인생의 근본 고(苦)를 깊이 관찰하고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인생의 행락은 불타는 집 안에서의

놀이일 수밖에 없다고 크게 비관하고 개탄하였다.

 

 

 

♠세조와 문수동자의 벽화이야기♠

 

이조 7대 임금인 세조는 그의 조카인 나이 어린 단종을 패하고 왕이 되었기 때문에 그 죄악의 응보였는지,

아니면 단종의 모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서 힐책하되 「여보시오 내 말 들어보시오. 아들이 나이가 어린 탓으로 당신이 섭정을 하고

있었으니 왕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을 터인데, 무엇이 부족하여 왕위를 빼앗고 영월로 귀양까지 보내더니,

다시 그렇게도 무참하게 죽여버렸단 말이요.

왕위가 그렇게도 탐이 나던가요? 이 더러운 양반아」하고 침을 뱉었는데, 이런 까닭인지 세조는 이해로부터 온 몸에 등창이 생겨서

고통을 형언할 수가 없었다.

용하다는 의원도 신비한 영약도 아무런 효험이 없자, 세조는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지난 일을 진심으로 참회하고,

강원도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상주도량으로 영험하다는리를 듣고, 상원사에 가서 문수보살님께 지극정성으로 백일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백일째 되는 날 몸이 가렵고 견딜 수가 없어서, 기도를 모두 마치고 개울로 나아가서 옷을 벗어 걸어놓고 목욕을 하게 되었다.

 

혼자서 몸을 씻으면서 누가 등 좀 밀어 줬으면 하고 생각하는데, 마침 개울 옆 작은 샛길로 한 동자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세조 임금은 동자를 손짓해 불러 자기의 등을 좀 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동자가 그러마고 부드러운 손으로 등을 밀어 주는데, 가려운 부분들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목욕을 마친 후, 세조 임금이 동자를 향하여 칭찬을 하고 다시 이르기를 “네가 나가서 행여나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감 옥체에 손을

대고 흉한 종기를 씻어드렸단는 얘기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더니 동자가 미소를 지으며 “잘 알겠습니다.

상감께서도 후일에 누구를 보시던지 오대산에 가서 문수동자를 친견했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세조의 생각에는 이 어린 것이 자기의 종기를 씻어주고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릴까 염려하여 부탁한 것인데,

문수보살이 나타나서 자기 병을 고쳐주고 성인(聖人)을 만났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부탁을 받았으니 도리어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후로 세조의 불치 종기는 씻은듯이 나아버렸으므로 환희와 감사한 생각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라에서 제일가는 화공(畵工)을 불러서 자기가 본대로 문수동자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 또 조각하여 모시었으니,

지금의 상원사 선원에 모셔진 문수 동자상이 곧 그것이다.

 

이 밖에도 세조가 상원사에 있을 때의 이야기가 하나 둘이 아니지만, 그 중에 한 가지는 세조 임금이 상원사에서

여러 대중 스님네와 같이 대중공양을 하는데에 참례하여, 같이 공양을 받고 식사를 할 때이다.

 

세조 임금도 승려들이 사용하는 발우(鉢盂)라는 식기 4개를 펴놓고 음식을 받아서 공양하였다. 이 때 공양을 받기 전에 미리

천수물을 받아 놓았다가, 식사를 끝낸 뒤에 반드시 이 물로써 발우를 씻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사미승 아이가 천수물을 돌리면서 “거사님 어서 물 받으십시오하고 말하자, 큰방의 대중스님네와 따라와 있던

신하들까지도 크게 두려워하며 곧 벌을 받을 줄로 알았는데, 세조는 사미승이 자기를 처사라고 불러준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기며

사미승을 칭찬하고,“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누구에세 거사란 말을 들어보겠느냐하며 오히려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또 한번은 세조가 법당에 올라가서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려 하는데 문득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세조의 곤룡포자락을 잡아 끌면서

절을 하지 못하게 했다. 세조가 이상하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 법당을 살펴보게 하니, 탁자밑에 자객이 세조가 엎드려 절할 때

죽이려고 칼을 품고 노리고 있었다. 곧 자객을 붙잡아 내고 양묘전(養猫田)을 상원사에 하사하여 고양이를 기르게 하였다. 

 

그러고 보면 세조 임금은 오대산에 들어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온몸의 고질종기병을 완치하였고,

고양이 덕택에 죽을 목숨을 건졌으니 부처님의 은혜를 두텁게 입은 왕이라 하겠다. 

그러기 때문에 세조는 불교의 탄압으로만 일관한 조선불교에 많은 공적을 이루기도 하였다.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올라 오다가, 주차장에서 상원사 표지석 좌측에 버섯모양의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이 바로 "세조대왕"께서 목욕을 할 때 옷을 걸어 두었던 곳이다.

 

 

룸비니 동산에서 아기태자가 탄생하다.

태자를 잉태한 정반왕비는 산달이 되자 당시의 풍속대로 친정에 가서 순산하기 위해 화창한 봄날 룸비니 동산을 지나던 중 잠시 연(輦)에서 내리어

백화만발한 꽃동산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 동산 한복판에 무우수(無優樹:바라차 나무)가 있었는데 오른손을 들어 나뭇가지를 잡았다.

그 때에 뱃속의 아기가 태동하여 아는 듯 모르는 듯 태자를 탄생했다.

태자가 한손으로 하늘을, 한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옮기는데 땅에서 연꽃이 솟아 올라와 태자를 떠받들었다.

태자는 낭랑한 음성으로 갓난아이답지 않게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높다. 삼계가 모두 고통이니 내가 편안케 하리라.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고 외치었다.

<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 < 보요경(普曜經)>, < 태자서응경(太子瑞應經)>,

<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석가세존의 전신(前身)인 호명보살(護明菩薩)이 보살만행을 닦아서 갖가지 공덕을 만족하게 이루어 한 생 있다가 부처를 이룰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의

몸으로 도솔천 내원궁에서 하늘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었다.

그때 호명보살은 사바(沙婆) 중생을 제도할 인연이 왔음을 관찰하시고 여러 하늘 임금에게 여래의

부모 될 사람을 물색하도록 명하신 바, 금단천자가 카필라국의 석가족은 대대로 성왕(聖王)이 나타나 백성을 덕으로 교화하였고,

현재는 사자협왕(獅子頰王)의 아들인 정반왕(淨飯王)이 백성을 통치하고 왕후는 마야부인인데 매우 현명하고 단정하신 분이니

그를 부모로 정하심이 어떠한가 하고 아뢴다.

그러자 호명보살은 일생보처보살이 태어날 곳은 60가지 공덕이 구족되어야 하고 어머니 되실 분은 32가지 공덕을 갖추어야 하는데

정반왕과 마야부인이 마땅하니 부모로 선택할 것을 결정하신다.

 

 

혜능대사 이야기

 

 

대웅전인 법당안에는 삼존상이 모셔져 있는데 지장보살, 석가모니불,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신중탱 신중단

 

 

 

 

 

 

 

삼성각

 

산신단 산신탱

 

 

칠성단 칠성탱화

 

칠성탱화 부분 세밀도

 

   

칠성탱화 부분 세밀도

 

독성탱화(나한)

 

 

 

 

 

 

 

 

 

한 담장을 두고 한쪽엔 불교가 또 다른 쪽엔 천주교가 나란히 같이 하고 있다.

 

 

애덕의 집 성모상

 

 

파주 헤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