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북도 = 나를 찾아서...

금산 보석사 숲 길이 아름다운 그 곳

백련암 2014. 7. 15. 04:30

보석사

신라 헌강왕 12년(886년) 때 조구대사(祖丘大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합니다.
처음 세울 당시 절 앞에서 캐낸 금으로 불상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보석사라 하였는데

본래의 건물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것을 명성황후가 중창하여 원당으로 삼았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후기에 다시 지어졌다는군요.
현재의 도량은 규모가 작지만 한 때는 강원(講院)이 있어서 많은 학승이 배출되었다 합니다.

 

◈보석사(寶石寺)◈ 전통사찰 제 5호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진악산(進樂山) 남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보석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이다.

현재의 도량은 규모가 작은편이지만 한 때는 이곳에 강원(講院)이 있어서 많은 학승이 배출되었으며

31본산 중 하나로 전라북도 일원의 33개 말사를 통괄한 사찰이였다.

 

조구스님의 창건 당시 절 앞산의 금광에서 채굴된 금으로 불상을 조성하였다하여 절 이름을 보석사라 하였다. 

현재 보석사에는 1990년 천연기념물 제 365호로 지정된 은행나무와 유형문화재 143호로 지정된 대웅전,

문화재자료 제 29호인 의선각을 비롯하여 등운선원, 기허당, 산신각, 범종루, 일주문, 요사채, 주지실 등이 있다.  

<보석사의 글>


 

 

길이 시작되는 초입,  일주문 앞에 서니 마치 한폭의 그림처럼 숲길이 담겨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길의 숲의 대열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은행나무 뒤로 숲은 듯 지금은 자기 모습을 잘 나타내지 않고 있는 빨간 단풍나무들

그리고 지금은 짙은 녹색이지만 가을이되면 노랗게 물드는 은행나무들이 줄을지어 있다. 

 

 그리고 길을 나누어 그 건너편에 즐비하게 서 있는 전나무들

평창 월정사 숲처럼 전나무길이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나무숲의 운치를 충분히 자랑할만하다.

 

그 길을 따라 쭉~~가다보면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다 건너편으로는 보석사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이고

천년도 넘게 그 자리를 지키며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은행나무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와는 모양이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보석사를 잠시 뒤로 미루고 일단은 진악산 숲을 걸어보기로 하였다. 정상까지는 갈 수없지만 조금이라도 이 숲길을 느끼고 싶어 걸어본다.

 

 시멘트 길이 아닌 약간 돌아 숲의 오솔길로 걸어보니 정자도 있고 시도있고 계곡의 물소리는 졸졸..

 

잔뜩 이끼를 품은 바위와 나무들... 지금 나는 어디에 와 있는 것일까 라는 착각이 든다.

이 곳 이 숲길 많은 이들의 손과 발길이 닿지 않은 듯 우거진 숲길 그러면서도 정리가 되어있는 길 둘도아닌 혼자만이 걸을 수 있는 좁은 오솔길

이런 숲길을 지금 난 걷고 있다.  그리고 취해있다. 너무도 조용한 길 이자리에 자릴 깔고 앉아 명상에 들고 싶은 나의 마음

이것만으로도 난 행복하고 아무 잡념이 없다.  

 

그러나 난 여기서 꿈을 깨야한다. 이제는 다음을 기약하며...

가을만 되면 TV속에서 내고향이란 프로그램에서 이곳의 숲과 은행나무를 위주로 많이 보여준다 그 땐 그냥 그런가보다라고 생각을 했다.

이제는 알것같다 사람들이 가을날에 이곳을 찾고 보석사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난 다시 찾아올 것이다 빨갛게 단풍이든 나무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의 장관을 

또한 변함이 없는 전나무숲길을 보러 이곳을 찾을 것이다. 그날에도 오늘같은 감동 있을까? ...

 

1,000년도 넘게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은행나무가 모습을 드러낸다. 크기로 짐작하건대 여섯 그루의 은행나무가 하나로 합쳐졌다는 전설이 그럴 법하다.

보석사는 역사만큼의 큰 사찰도 아니고 보물이 있는 사찰도 아니다.  그러나 조용하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비구니 사찰이다.


 

진악산 보석사란 현판이 걸려있는  일주문

 

 

 

이제 저 문을 나서면 이 조용한 숲은 간데없고 시끌벅적한 또 다른 세상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활발한 삶이 또 다시 시작된다.

이것이 인생이다. 그렇게 힐링하면서 또 다시 힘차게 살아가는 것이다.

 

 

들어서다보면 왼쪽으로는 은행나무 오른쪽으로는 전나무가 즐비하게 서있다.

 

일주문을 지나 서서히 걷다 보면 왼쪽에 기허당 영규 대사의 의병승장비각이 있다. 

 

 

의병승장비 (義兵僧將碑)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 

임진왜란 때 승병장이 되어 나라를 구하려다 전사한 영규대사의 충혼을 기리고 있는 비이다.

영규대사(?∼1592)는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일동안 통곡한 후 스스로 승병장이 되었다.

승병 수백명을 모아 관군과 더불어 청주성의 왜적을 쳤고, 이어 조헌과 함께 금산전투에 참가하여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 일은 이후 전국적으로 승병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숙종 5년(1839) 5월 금산군수 조취영이 세운 비로, 일제가 1940년 비를 보호하던 비각을 부수고 비를 묻어놓았던 것을,

해방 후 다시 꺼내 세워놓은 것이다.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

의병승장(義兵僧將)으로 금산전투에서 중봉 조헌(重峰 趙憲)과 함께 순절한 기허당 영규대사(騎虛堂 靈圭大師)의 순절사적비(殉節史跡碑)로서

1840년(헌종 6년)에 보석사(寶石寺) 입구에 건립되었다.

 

비문을 지은이는 우의정 조인영(趙寅永)이며, 금산군수 조취영(趙冣永)이 글씨를 썼고, 비는 비각(碑閣) 안에 있다.

비의 앞면에는 큰 글자로 "의병승장(義兵僧將)"이 새겨져 있으나 자획(字劃)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다.

왼쪽 면에는 창건화주(創建化主) 낙봉대인(樂峯大仁)등 건립 당시의 관계 인물의 이름을,

오른쪽 면에는 앞면의 "의병승장(義兵僧將)"을 창녕위 김병주(昌寧尉 金炳疇)가 썼음을 기록하였다.

 

1940년 일본 경찰이 이 비각을 헐고 자획을 훼손하여 땅에 묻혔던 것을 광복 후에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 (錦山 寶石寺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제365호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000살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34m, 가슴높이의 둘레 10.72m의 크기로 뿌리부분에 2∼3m 높이의 새로 난 싹이 수없이 돋아나 신기하게 보인다.

이 나무는 마을에 큰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소리를 내어 미리 알려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마을을 지키고 보호해주는 신성한 나무로 여기고 있다.

조구대사가 보석사 창건(886년) 무렵 제자와 함께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1945년 광복 때와 1950년 전란 때, 1992년 극심한 가뭄 때 소리내어 울었다고 전해진다.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민속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문화재청 글>

 

◈금산 보석사의 은행나무(金山 寶石寺의 銀杏나무)

보석사(寶石寺)입구에 서 있으며, 높이 40m, 흉고둘레 10.4m로 나무의 나이는 1,0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나무가 오래되어 위로 뻗은 가지가 땅으로 뻗었고, 다시 그 곳에서 가지가 자라 오르고 있으며, 뿌리가 100여 평에 걸쳐 땅속에 퍼져 있다.

장엄하고 위압적인 외형을 갖추고 있으며, 중심가지는 부러지지 않고 남아 있어 높이를 자라랑하고 있다.

 

조구대사가 보석사 창건(886년)무렵 제자와 함께 심었다고 전해지며 이 은행나무는 마을에 변고가 있거나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에는

소리를 내어 울음으로서 재난에 대비하도록 알려주는 마을의 수호신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매년 음력 2월 15일(경칩)에 보석사 신도들이 은행나무앞에서 대신제를 지낸다.

 

 

은행나무를 살짝 지나면 계곡이 시작된다. 시멘트길이 아닌 오솔길로 접어든다.

 

 

오솔길을 걷다보면  시가 적혀있다.

 

미니 산나리꽃

 

 

 

정자 옆에 있는 시 귀절

 

 

보석교 이 다리를 건너면 옛길인 보석사로 들어가는 문이 나온다.

 

이 다리는 현재 은행나무에서 들어가는 문이다. 봉황문

 

 

 

 

봉황이 있는 수각(甘露水) 뒷편에 건물이 진영각이였으나 지금은 보수중임

 

감로수 뒷편에 새로 보수중인 건물이 진영각 기허당(騎虛堂)입니다.

기허당은 영규대사의 진영을 봉안해 두었다고 하여 그렇게 불리는데 기허당은 의병장 영규대사의 호입니다.

 

휴정대사의 제자로서 공주갑사 청연암과 금산보석사에서 수도 선장으로 무예를 익혀 그 재능을 따를 자가 없엇으며

평소에 무기를 장만하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200명의 승병을 거느리고 의병장 조헌과 함께 청주를 수복하고

이어 금산의 왜병과 격전을 벌려 조헌등 700의사와 함께 장렬히 전사, 종용사에 배향법도 대인등에 의하여

진악산 남쪽 보석사에 영각이 건립되었고  의선(毅禪)이란 편액이 하사되었다.  

 

 

 기허당대사(騎虛堂大師) : 朝鮮後期

기허영규(騎虛靈圭, ?-1592년)는 조헌(趙憲)의 군대와 함께 금산 전투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한 의승장이다.

지공, 나옹, 무학의 삼화상 진영이 조선 건국과 관련하여 형성된 것아라면,

청허(淸虛). 사명(四溟). 기허(騎虛)삼화상진영은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3대 의승장의 진영이다.

 

조선 후기 사찰에서는 이 3대 의승장의 진영을 모시는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근엄한 표정에서 의승장의 위엄이 잘 드러난다.

 

 

 

 

보석사 의선각(毅禪閣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호)이 먼저 보입니다.

 

의병승장 영규대사가 머물던 곳입니다. 영규대사는 공주 계룡면 출신으로 계룡산 갑사와 보석사를 왕래하며 수도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의선각에는 창녕위 김병주의 글씨로 된 '의선각(毅禪閣)'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바닥에 소복히 쌓인 눈에 찍힌 발자국이 한편의 그림을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다른것이 무릉도원인가요 이곳이 무릉도원입니다.

<문화재청의 글>

 

의선각(毅禪閣)은 의병승장 영규(靈圭)가 계룡산 갑사와 보석사를 오가며 수도할 때 머물던 건물이다.

영규대사는 조선선조 25년(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아 조헌(趙憲)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웠다.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에 이르렀으나 8월 18일 왜군과 격전 끝에 순절하였다.

 

의선각(毅禪閣)은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로 창녕위 김병주(昌寧尉 金炳疇)가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보석사 글>

 

 

   

의선각(毅禪閣) 에 써 있는 글 해석

 

제 보석사

소나무 전나무 녹음 속에 법당이 서늘한데 흰 머리 야윈 체로

앉아 향을 사르노라.

공산에 아직도 있는 마고석은 몆번이나 인간세상의 변화를 겪었던가

1928년 단오절,   운포 김찬식

 

등운선원(騰雲禪院) 옆면

 

 

등운선원(騰雲禪院)이라 편액이 있는데 이곳에 종무소를 겸하고 있다.

 

 

의선각(毅禪閣 ) 건물 뒤편 양쪽 문을 열어놓으니 바람길이되어 너무 시원하다.

 

 

 보석사(寶石寺) 전경 저 앞으로 보이는 건물이 등운선원(騰雲禪院)임 

 

 

보석사대웅전 (寶石寺大雄殿)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보석사는 신라 헌강왕 11년(885)에 조구선사(祖丘禪師)가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 절 앞에서 캐낸 금으로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절 이름을 보석사라고 하였다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고종 19년(1882년<1863년∼1907년>) 때 명성황후가 다시 세웠다.

보석사 대웅전은 정면 3칸 · 측면 2칸의 규모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고풍스런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전내에는 주존인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시도유형문화재 제143호 보석사대웅전 (寶石寺大雄殿).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다포식(多包式) 건물입니다.
대웅전 내부에는 본존불인 석가모니불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로 모셔져 있는 삼존불이 있는데 수법이 섬세합니다.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석가불과 같이 당당하고 균형 잡힌 신체를 하고 있는데
다만 문수보살은 어깨에 천의를 걸치고 보현보살은 편삼에 대의를 걸친 착의법을 하고 있으며,

서로 반대반향으로 연꽃 가지를 들고 있는 점 등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17세기 석가여래삼존불의 특징을 보이는 작품으로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힘이 있으면서도 우수한 조형성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꼽힙니다.

 

 

금산 보석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錦山 寶石寺 木造釋迦如來三尊坐像)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14호

 

삼존좌상 모두 둥글넓적한 얼굴, 반듯한 코에 반개한 눈과 입매가 살짝 올라간 입술 등이 조화를 이룬 단정한 인상을 하고 있으며,

어깨가 폭이 넓고 허리가 길며, 무릎 폭이 넓어 전체적으로 균형있고 안정감이 있다.

석가불은 변형우견편단을 입고,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으며 옷주름 표현도 유연하면서 힘이 있음.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석가불과 같이 당당하고 균형 잡힌 신체를 하고 있다.

다만 문수보살은 어깨에 천의를 걸치고 보현보살은 편삼에 대의를 걸친 착의법을 하고 있으며,

서로 반대반향으로 연꽃 가지를 들고 있는 점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문수보살은 배부분에 화문장식이 있고 양 무릎에는 장식구가 있는데 이는 복갑과 갑대의 단순한 형태로 여겨진다.

보석사 석가여래삼존좌상은 복장물이나 발원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전형적인 17세기 석가여래삼존불의 특징을 보이는 작품으로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힘이 있으면서도 우수한 조형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문화재청의 글>

 

금산 보석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錦山 寶石寺 木造釋迦如來三尊坐像)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14호

 

보석사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은 중앙의 석가여래불과 좌우 협시보살(挾侍菩薩)로 이루어진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이다.

이 불상은 전형적인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이는 작품으로 단정한 인상에 신체는 균형 있으면서 안정감이 있다.

석가여래불은 오른쪽 어깨를 살짝 덮은 편단우견(偏袒右肩)의 법의(法衣)를 입고 있으며,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맺고 있다.

 

협시보살인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은 모두 손에 연꽃 가지를 들고 있으며,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서로 다르다.

문수보살의 배 부분과 양 무릎에는 장식이 새겨져 있다.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석가불과 같이 당당하고 균형 잡힌 신체를 하고 있다.

 

보현보살(普賢菩薩)은 편삼에 대의를 걸친 착의법을 하고 있으며,

서로 반대반향으로 연꽃 가지를 들고 있는 점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삼존좌상 모두 둥글넓적한 얼굴, 반듯한 코에 반개한 눈과 입매가 살짝 올라간 입술 등이 조화를 이룬 단정한 인상을 하고 있으며,

어깨가 폭이 넓고 허리가 길며, 무릎 폭이 넓어 전체적으로 균형있고 안정감이 있다.

 

석가불은 변형우견편단(偏袒右肩)을 입고,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으며 옷주름 표현도 유연하면서 힘이 있음.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석가불과 같이 당당하고 균형 잡힌 신체를 하고 있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은 어깨에 천의를 걸치고

배부분에 화문장식이 있고 양 무릎에는 장식구가 있는데 이는 복갑과 갑대의 단순한 형태로 여겨진다.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들 탱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들 탱화

 

신중단(神衆檀 神衆撑畵)

 

신중단(神衆檀 神衆撑畵) 아래에서 위로

 

 

대웅전 연등위로 보이는 관음보살(觀音菩薩)

 

 

보석사 대웅전 들보에는 거북등에 용의 얼굴을하고 꼬리는 거북이 꼬리로는 좀 긴듯하고 여의주는 허공에 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감로도(甘露圖)

 

 

진악산 보석사(進樂山 寶石寺)라는 글이 정확히 써 있는 법당예불 종

 

 

대웅전 연등속 또 다른 반대 방향에는 나한이 그려져 있음

 

이곳엔 또 물고기입에 용이 잡혀먹히네요 여의주는 또 물속에 놓쳤네용 보석사에는 다른곳과는 다른 그림이 재미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대웅전 상량문(大雄殿 上樑文)이다.

 

 

산신각(山神閣) 현판은

중창때 시주를 하였던 민씨 세도의 중추이며 순종의 장인인 민태호(閔台鎬: 민영익의 생부)의 글씨입니다.

 

아주 작고 낮은 건물 정말 옛스런 산신각(山神閣)임 허리를 구부려야만 들어설수있는

 

 

산신각안에는 호랑이가 두마리 그려져 있는데 한마리는 몸체 일부가 인등에 가려져 있다.

 

 

산신각안(山神閣)에 칠성도(七聖圖)

 

 

산신각 풍경

 

대웅전 벽화

 

 

 

 

 

 

 

 

 

 

 

 

 

 

 

 

 

봉황문(鳳凰門)과 봉황이 있는 감로수

 

봉황문(鳳凰門) 이 문을 나서면 보석사 명물인 은행나무가 ()
이제 이 봉황문을 나서면 천연기념물 제365호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를 볼수 있습니다.

 

 

범종루(梵鐘樓) 여기가 옛 문인 셈이다.  봉황문은 작은 후문임

앞에는 보석사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보석사 범종(寶石寺 梵鐘)

 

 

범종루(梵鐘樓) 건물 앞면에는 보석사(寶石寺) 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법당인 대웅전 앞 스님이 기거하시는 요사채 앞에 핀 수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