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천사 십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
경천사지 십층석탑 : 국보 제 86호, 시대 = 고려 1348년, 재질 = 대리석, 높이 = 13.5m.
부처, 보살, 사천왕과 신중들, 나한. 이들을 한자리에 모아 부처의 세계를 그려낸다면 어떻게 표현해볼 수 있을까요?
수평적인 모습일까, 아니면 수직적인 모습일까요? 시대마다 국가마다 사람들이 생각했던 불국토의 모습은 달랐을 것입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한 국보 86호 경천사 십층석탑은 약 13.5m의 웅장한 규모의 석탑으로, 석탑 전체에 불, 보살, 사천왕, 나한,
그리고 불교 설화적인 내용이 층층이 가득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는 모든 불교의 존상을 모은 일종의 불교적 판테온으로 고려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3차원적인 불국토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경천사 십층석탑의 조성배경
경천사 석탑은 1348년(충목왕 4) 건립된 석탑으로 원래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중연리 부소산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고려사』기록에 따르면 경천사는 고려 왕실의 기일에 종종 추모제를 지냈던 곳으로 왕실의 왕래가 잦았던 사찰입니다.
경천사가 폐사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20세기 초에는 이미 폐사되어 석탑만 남아 있었습니다.
비록 일부 글자가 파손되거나 마모되었지만, 석탑의 1층 탑신석 상방에는 건립 연대와 발원자,
그리고 조성배경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있습니다.
명문에 따르면 석탑은 대화엄 경천사에서 1348년 3월 조성되었고, 발원자는 대시주 중대광 진녕부원군 강융(姜融),
대시주 원사 고룡봉(高龍鳳), 대화주 성공(省空), 시주 법산인 육이(六怡)였습니다. 이들은 왕실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기원하고
불법이 빛나고 석탑 건립의 공덕으로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하게 되기를 기원하였습니다.
강융은 원래는 관노 출신으로 충선왕의 측근이 되어 공을 세운 인물이며, 그의 딸은 원(元)의 승상 탈탈(脫脫)의 애첩이 되어 권세를 누렸습니다.
고룡봉은 고려 환관으로 원에 가서 황제의 신임을 얻어 출세한 인물입니다.
그는 충혜왕 대에 공녀로 간 기자오의 딸이자 기철(奇轍)의 여동생을 원의 황제인 순제에게 선보여 황후에 오르게 한 인물입니다.
자정원사(資政院使)로 봉해졌는데 자정원은 기황후의 부속관청이었기에, 그는 고려에서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이처럼 석탑 발원자의 면모를 보면 친원 세력이 석탑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
발원자의 성격 때문인지 공교롭게도 경천사 석탑의 형태는 기존의 간결한 전통적인 석탑의 외형과는 매우 다릅니다.
석탑의 기단부와 탑신석 1층에서 3층까지의 평면은 소위 한자의 아(亞)자와 같은 형태로, 사면이 돌출되어 있습니다.
(하단 사진 참조)
경천사 석탑 기단부의 모습. 기단부와 1층에서 3층까지는 몽골, 티베트계 불교에서 영향 받은 형태,
이후 4층에서 10층까지는 전통적 형태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평면은 원대에 유행한 몽골, 티베트계 불교인 라마교 불탑의 기단부나 불상 대좌 형태와 유사한 외래적 요소입니다.
반면 탑신부 4층부터 10층까지의 평면은 방형 평면으로, 경천사 석탑은 전통적인 요소와 외래적 요소의 조화 속에 탄생한
이형 석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경천사에 관한 몇몇 조선시대 문헌 기록에는 원의 승상 탈탈이 경천사를 원찰로 삼고
강융이 원에서 공장(工匠)을 뽑아 탑을 만들었다고 전하며, 당시에도 승상 탈탈과 강융의 초상화가 남아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비록 이를 모두 그대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발원자의 성향이나 석탑의 형태로 미루어 볼 때 원대 장인이 참여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석탑 전체에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불보살이 백미
경천사 석탑에는 목조건축의 기둥과 공포, 난간과 현판이 잘 표현되어 있고,
특히 기와가 정교하게 표현된 옥개석은 마치 고려시대 목조건축의 생생한 모습을 반영한 듯합니다.
그러나 경천사 석탑의 백미는 역시 석탑 전체에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불보살의 모습입니다.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기단부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들, 즉 밑에서부터 사자, 용, 연꽃, 소설 『서유기』의 장면,
그리고 나한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1층부터 4층까지의 탑신부에는 부처의 법회장면, 즉 불회(佛會) 장면이 총 16장면으로 새겨져 있고
그 사이사이 불교 존상들이 새겨져 있으며, 5층부터 10층까지는 선정인 또는 합장을 한 불좌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불교의 존상들을 불교적 위계에 따라 층층이 표현한 것입니다.
경천사 석탑 탑신부의 모습, 상단부로 올라갈수록 불교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존상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기단부에 새겨진 『서유기』는 송대에 이미 설화가 된 중국 당대 승려 현장(玄奘)의 인도로의 구법행이 명대에 소설로 간행된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기단부 부조 20장면을 살펴보면 이미 원대에 명대 『서유기』에 사용되었던 판화와 유사한 장면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유기』 장면은 이를 바라보는 불자들에게는 현장의 구법행을 통해 공덕과 깨달음에 대한 불교적인 교훈을 전하고,
『서유기』의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내부에 안치된 사리를 수호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기단부에 새겨졌다고 추정됩니다.
탑신부의 조각은 1층부터 3층까지의 불회(佛會) 장면만을 일컬어 12회라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4층의 불회 장면을 포함하여
16회로 보기도 합니다.
불회 장면 위에는 현판 모양에 각 불회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는데, 현판의 명칭과 도상을 정리해보면 아래의 표와 같습니다.
남 | 서 | 북 | 동 | |
---|---|---|---|---|
4층 | 원통회 | (지장회) | (열반회) | (석가회) |
3층 | 소재회 | 전단서상회 | 능엄회 | 약사회 |
2층 | 화엄회 | 원각회 | 법화회 | 다보불회 |
1층 | 삼세불회 | 영산회 | 용화회 | 미타회 |

이러한 불회 부조의 조성 배경으로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습니다. 우리 전통 불교와 관계 깊은 경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층별로 도상의 특징을 구분하여 1층은 우리나라 불교 신앙을, 2층은 사상을, 3층은 밀교 관련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한 사방불회로 추정하기도 하고 1층 남면의 삼세불회에 주목하여 새로운 개념의 삼불 도상이 출현한 것에서 도상적인 의의를 찾는 연구도
있습니다. 경천사 석탑의 정교한 조각 표현이 가능했던 이유는 경천사 석탑이 전통적인 불상이나 석탑의 재질인 화강암이 아니라
조형 작업이 쉬운 무른 재질의 대리석이기 때문입니다. 경천사 석탑이 건립된 뒤 약 120여 년이 흐른 후,
조선 왕실 발원으로 만들어진 원각사지 십층석탑에는 경천사 석탑의 형태와 도상이 그대로 재현되기도 하였습니다.
석탑 2층과 3층에 새겨져 있는 불회 장면의 모습, 2층 탑신석 남면 '화엄회'(왼쪽)과 3층 탑신석 남면 '소재회'(오른쪽)
경천사 십층석탑의 수난사
약탈과 반환의 과정을 거치면서 100여년 만에 비로소 터전을 잡았습니다.
경천사 석탑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석탑 자체가 한국 문화재 수난사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1907년 순종의 가례에 일본 특사로 온 궁내대신 다나카 미스야키(田中光顯)가 석탑의 무단반출을 시도했습니다.
당시 주민들이 이를 저지했으나 헌병들이 총칼로 위협하여 수레로 부재들을 반출하였고, 다시 군수가 이를 제지 했지만 결국 한밤중에 밀반출되었습니다.
석탑 반출은 즉시 문제가 되어 <대한매일신보>에는 10여 차례 이상의 기사와 논설이 게재되어 석탑 반출의 불법성을 알려졌습니다.
석탑 반환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월간지 <코리아 리뷰(Korea Review)>의
발행인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의
발행인인 영국인 베델(Ernest T. Bethell)의 지속적인 기고 덕분이었습니다.
특히 베델은 일본의 영자 신문과 <뉴욕 포스트(New York Post)>에도 불법 약탈을 알렸으며,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도 현지 신문에 석탑 밀반출을 폭로하였습니다.
결국 계속된 반환 여론 조성에 1918년 11월 15일 석탑은 국내로 돌아오게 되어 1919년 박물관에 귀속되었습니다.
국내에 반환된 경천사 석탑은 당시 기술로는 재건립이 어려웠기에 1960년까지 경복궁 회랑에 보관되었습니다.
1960년 국립박물관의 주도하에 경천사 십층석탑의 훼손된 부재가 수리되어 경복궁에 세워졌고,
1962년 국보 8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정밀한 보존처리가 요구되었기에 1995년 석탑은 다시 해체되었고
문화재연구소에서 약 10여 년에 걸쳐 보존처리 되었습니다.
이후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산 재개관 시 현재의 전시실에서 재조립되어,
100여 년 만에야 비로소 석탑의 그 웅장한 위용을 다시 드러낸 것입니다.
경천사 석탑은 전통과 외래적 요소를 조화롭게 만들어 새로운 양식을 만든 우리 문화사의 기념비적 석탑이며,
동시에 굴곡진 우리의 근대사를 반추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재개관 시에 재조립된 석탑의 모습.
약탈과 반환의 과정을 거치면서 100여년 만에 비로소 터전을 잡았습니다.
◈물가풍경 무늬 정병◈
물가풍경 무늬 정병: 국보 제 92호, 시대 = 고려 12세기, 높이 37.5cm
고려시대인 12세게에 만들어진 물가풍경 무늬정병으로 표면의 초록색은 청동이 부식된 녹의 색깔입니다.
정병은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해 사용한 승려들의 필수품이었습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국보 92호 물가풍경 무늬 정병을 처음 보게 되면, 정병 전체를 뒤덮고 있는 초록색 표면에 먼저
눈길이 가게 됩니다.
금속 재질의 특성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원래부터 그런 색이었다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문화재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 중에서도
언뜻 색깔만 보고 청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 눈에 띄는 초록색은 세월이 남긴 흔적으로,
바로 청동이 부식된 녹입니다.
바탕 재질인 금속을 부식시키는 녹이 이 정병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도록 한다는 점은 사실 모순입니다.
정병 몸체를 보면 버드나무나 갈대가 자라는 섬들이 점점이 놓여 있고, 섬 주변 물가에는 새들이 여기저기서
헤엄치고 있습니다. 또한 새들 사이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있으며,
저 먼 하늘에는 줄지어 어딘가로 날아가는 새들이 보입니다.
마치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이 장면들은 몸체에 홈을 낸 다음 0.5밀리미터 굵기의 얇은 은사를 그 안에 끼워 넣어
장식하는 은입사 기법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지금은 은사도 녹이 슬어 검게 보이지만, 처음 만들었을 때는 어두운 바탕 위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은사가 이 무늬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과연 고려시대를 대표할 만한 섬세한 금속공예품입니다.
정병, 승려의 필수품
인도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정병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수행생활을 하는 승려가 마실 물을 담았던
휴대용 용기였습니다.
현존하는 인도의 정병은 첨대가 짧은 꼭지처럼 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정병과는 모양이 조금 다릅니다.
지금 주로 볼 수 있는 고려시대 정병의 형태는 당나라 구법승 가운데 하나인 의정(635~713)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성행한 중국 당나라 때는 인도로 가서 붓다의 성지를 순례하고 불전을 구하려는 승려들이 많았습니다.
의정은 10여 년 동안 인도에 체류하면서 본 인도와 남해 여러 나라의 불교 현황과 계율 등을 자세히 기록한
『남해기귀내법전』을 남겼습니다.
의정은 이 책의 여섯 번째 항목에서 물을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물을 언제,
또 어떻게 사용하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물을 담는 병을 어떻게 만드는지도 자세히 묘사하였는데, 이 방법대로 만들어진 병의 형태가
지금의 정병과 유사합니다.
이런 형식의 정병은 중국의 구법승들이 인도를 방문하기 시작한 기원후 3세기 이후부터 중국에 알려졌을 것입니다.
구마라집이 한역한 『범망경』에 수행 생활을 하는 승려들은 병과 발, 석장, 향로, 녹수낭 등 18가지의 물품을 항상
지녀야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 중 녹수낭은 물을 거를 때 사용하는 것으로 품질이 좋은 명주나 무명으로 된 천을 사용합니다.
올이 성긴 천은 벌레가 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 천을 주구에 씌워 묶은 후 물 속에 넣으면 계율에 맞는 정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해 사용된 승려의 필수품이 바로 정병입니다.
정병과 수병
1123년 6월 중국 송나라 휘종이 보낸 사절단이 고려의 수도 개경에 도착했습니다. 전해에 돌아가신 예종을 조문하고
휘종의 조서를 인종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절단의 예물 등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은 서긍은 체류 기간 동안 고려의 건축, 의식, 풍속 등을 살펴본 후
『선화봉사고려도경』을 저술했습니다.
아쉽게도 그림 부분은 현재 전하지 않지만, 12세기 전반 고려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기명의 명칭과 모양, 용도 등을 자세히 담고 있는데, 물을 담는 용기로 정병과 수병을 언급하였습니다.
서긍이 묘사한 정병의 모양은 여기에서 소개한 국보 92호 물가풍경 무늬 정병의 형태와 매우 비슷합니다.
즉 몸체의 어깨에는 두 마디로 이루어진 짧은 주구가 붙어 있고, 병목 위에는 대롱 모양의 가늘고 긴 첨대가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물만 담을 수 있는 이런 형태의 수병, 즉 물병을 특별히 ‘정병’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정병과 수병 모두 물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별다른 구분 없이 혼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공예품에서
모양은 중요한 형식의 하나이고,
고려시대에 이러한 모양의 병을 정병이라고 했으므로 두 용어를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버드나무와 갈대가 자라는 섬, 헤엄치는 새들이 묘사된 풍경화 같은 장면은 몸체에 흠을 낸 다음 얇은
은사를 그 안에 끼워 넣어 장식하는 은입사기법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정병♣
정병은 금속기뿐만 아니라 도자기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이 청자 정병은 보물 제 344호인 물가풍경 무늬정병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늦어도 7세기 말경에는 우리나라에 정병이 전해진 것으로 생각되지만,
가장 오래된 정병은 8세기 중엽 만들어진 석굴암에 남아 있습니다.
몇 점을 제외하면 현존하는 대부분의 정병들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금속 정병은 대부분 표면을 장식하는 문양이 없으며, 문양이 있는 경우에는 입사 기법으로 물가의 풍경을 묘사한
‘포류수금문’이 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 문양은 금속제 정병과 향완은 물론 청자 정병과 대접에도 보여 고려시대에 매우 유행한 문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금속기뿐만 아니라 도자기로도 정병이 만들어졌는데,
청자에는 다양한 문양이 여러 가지 기법으로 장식되어 있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청자 정병은 음각, 양각, 상감 기법 등으로 문양을 새겼으며, 포류수금문을 비롯하여 연꽃, 국화, 모란, 넝쿨무늬 등
장식된 문양도 다양합니다.
왼쪽의 보물 344호 청자 정병은 물가 풍경 중 일부를 문양 소재로 삼았는데,
갈대나 버드나무에 비해 기러기와 원앙이 크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도자기에서는 문양이 공예적인 도안으로 변화되어 있어 금속기의 문양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선화봉사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에서는 귀족과 관리들뿐 아니라 사찰과 도관, 민가에서도 물을 담을 때 정병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계율을 지키는 승려처럼 물을 걸러서 정병에 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찰 밖의 모든 계층에서 불교 의식구인 정병을 사용할 만큼 정병이 보편화되었다는 점은 매우 특이합니다.
아마도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는 일상적인 생활에도 불교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불화이야기=고려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역사박물관 (0) | 2015.02.28 |
---|---|
서울역사박물관 = 야외 전시물과 탑골에서 부는 바람 일부 (0) | 2015.02.28 |
국립고궁박물관 = 특별전, 류큐왕국의 보물전, 고국으로 돌아온 데라우치문고 (0) | 2015.01.24 |
국립고궁박물관 = 특별전 관람하고서 일반실 관람함 (0) | 2015.01.24 |
국립중앙박물관 = 특별전시 "東洋"을 수집하다.& 테마전 개암사 괘불전 (0) | 2014.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