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의 문을 열며
역사적 전통과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세계 도시인 서울을 조명하는 박물관의 건립은 서울 시민의 오랜 숙원이었으며,
이러한 요구를 부응하고자 1985년 부터 "시민의 손으로 만든 박물관" 이라는 슬로건 아래 건립의 대역사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유물 기증은 서업 추진에 큰 원동력이 되었으며, 최신 전시기법의 도입은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문화유산을 통해 시민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할 것을 다짐한다.
2002년 5. 21.
서울역사발물관장
외교사절단의 선물들
범선 = 주한카타르대사
팔찌
주전자 = 터키 앙카라 시장
화병 = 터키 앙카라 시장, 이브라힘 멜리 괵책
자유의 탑 [주한 쿠웨이트 대사 자이드 알 쉐리다] 나라 = 쿠웨이트
화병 : 이집트 총리 아티프 모아메드 이베이드. 나라 = 이집트
사자
청마
화병
은화 = 헝가리 헝가리 총리
은화 = 헝가리 헝가리 총리
자전거 마차(인력거)
자전거 마차(인력거)
화병
지혜의 칼을 들고 있는 문수보살
코끼리
은주전자와 잔
은주전자와 잔
부분도
자카르타 독립기념탑 : 나라 = 인도네시아. 문화관광부 예술, 문화, 영화국 국장 체첸 수파만
고종 가마(輦 = 손수레 연)
명성황후 가마
대원위 교자(轎子)
부대부인덕응(德應)
명성황후 가마
牡丹屛風(모란병풍)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며 꽃 중에 제일가는 모란 그림을 병풍으로 만들어 각종 행사에 사용하였다.
翟衣(적의), 霞帔(하피)
황후적의(皇后翟衣)는 순종의 황후인 윤황후가 영친왕의 가례 때 입었던 옷이다.
심청색 적의는 황후와 황태자비의 대례복으로서 가례 때에는 책비의·친영의·동뢰연에 입고, 종묘사직에 참배할 때 입는다.
1897년 이왕직 예식과에서 발표한 예복에는 9룡 4봉관 적의,
이 유물은 동궁비 적의로 지정되었으나, 《가례도감의궤 嘉禮都監儀軌》에 의하면 왕세자·왕세손빈의 적의는 아청색,
황후·황태자비의 적의는 심청색으로 있다.
霞帔(하피) 이것은 중국 여자 복식의 하나인데 ≪삼재도회 三才圖會≫의 설명에 의하면, “하(夏)·은(殷)·주(周)시대에는 피가 없었는데
진(秦)나라에는 겸백(兼帛)으로 만든 피백(帔帛)이 있었다고 한다.
또 한(漢)나라에서는 나(羅)로 만들었고, 진(晉)나라 말엽에는 휘(翬)를 수놓았다.
당나라에서는 삼비 이하가 통복하였는데, 사서(士庶)의 여자들은 집에서는 피백을 걸치고 밖에 나갈 때는 풀어 헤쳐, 나가고 들어옴을 구별하였다.
송나라에는 피에 3등이 있었는데 하피는 임금이 하사한 것이나 쓸 수 있었고 명부복(命婦服)으로 삼았으며 직피(直帔)는 민간에서 통용되었다.
명나라에서는 명부복 하피를 심청색 단필(緞匹)로 만들었는데 여기에 공후(公侯) 및 2품은 운하적문(雲霞翟文)을 금수(金繡)하였다.
3·4품은 운하공작문(雲霞孔雀文)을 금수하였으며, 5품은 운하원앙문(雲霞鴛鴦文), 6·7품은 운하연작문(雲霞練鵲文)을 수 놓았다.”라 되어 있다.
우리 나라 ≪사례편람≫에서는, “피는 색겸(色縑)으로 만들고, 그 모양은 대금(對衿)에 소매가 개방(開旁)되어 있다.
길이는 치마길이에 닿고 가에 선을 둘렀다. 몽두의(蒙頭衣)와 같이 소매가 없는 배자의 종류이다.
중국 부인은 옷 위에 걸쳐 입었고 하피라 하여 명부복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삼재도회≫의 그림을 보면 한 폭으로 길게 되어 있어 이것을 목에 걸치되, 등뒤에서는 흉배 위치 아래까지 반원으로 늘이고,
가슴 앞에서는 가지런히 치마 끝까지 드리워 두 폭이 겹치지 않게 추자(墜子)로 맺게 되어 있다.
≪국조속오례의보 國朝續五禮儀補≫ 서례(序例)에서 왕비 예복에 나타난 하피를 보면, 겉은 흑단(黑緞), 안은 홍초(紅綃)로 만들고
운하적문을 금회(金繪)하되 운하문을 28개, 적문을 26개 금회하였다. 세자빈의 경우도 같았다.
翟衣(적의), 霞帔(하피)
唐衣(당의)와 스란치마
唐衣(당의)는 간이예복 또는 소례복(小禮服)으로 평복 위에 입었으며 궁중에서는 평상복으로 입었다.
조선 초기 명나라에서 전래된 단배자(短背子)가 배자저고리로 변하였다가 다시 숙종 이후 조선 말기의 당의와 같은 제도가 이루어진 것 같다.
당의에 영향을 준 반비(半臂)· 배자 등은 당나라의 유속(遺俗)으로 명나라를 거쳐 전래되었으므로,
이 옷의 명칭에도 ‘당’자를 붙여 당의라 부르게 된 것이라 본다.
당의는 반비 또는 소매가 없는 단배자와 비슷하면서도 좁은 소매가 달려 있다. 길이는 무릎까지인데 옆이 트였고, 두 앞자락이 서로 겹쳐지는 교임(交袵) 형태로 초록색 비단 거죽에 다홍색 안을 받치고, 자주색 겉고름과 안고름을 달았다. 소매 끝에는 창호지 속을 넣은 흰 천의 거들지를 달았고 어깨에서 소매 끝까지, 앞길과 뒷길, 겉고름과 안고름 등에는 화문(花文)과 박쥐 또는 壽(수)·福(복) 등의 글자를 금직(金織) 또는 금박(金箔)하였는데, 직금과 부금(付金)은 민간에는 허용되지 않았다. 이 당의는 조선시대에 있어 예(禮)를 갖추어야 할 때 입는 여자용 예복(禮服)이 되었다. ≪병와집 甁窩集≫에 보이듯이 초록당의(草綠唐衣)를 외명부(外命婦)· 사녀(士女)의 진현시(進見時) 상복(上服)으로 삼게 되었다. 법도가 엄하였던 궁중에서는 평상복이 되어, 계절에 따라 옷감과 색상을 다양하게 선택하여 입었다. ≪사절복색자장요람 四節服色自藏要覽≫에도 동지 전후에는 녹색 직금수복자당의(織金壽福字唐衣), 정월 망일 전후에는 공단당의를 입었다. 삼월 망일에는 녹색 항라당의(亢羅唐衣), 오월단오에는 초록 광사(光紗) 깨끼당의, 오월 십일에는 백광사당의(白光紗唐衣)를 입었다. 유월 순망간(旬望間)에 날이 몹시 더울 때는 저포당의(紵布唐衣), 팔월 십일에는 초록 깨끼당의, 팔월 이후에는 초록 광사당의를 입었다. 구월 초하루부터는 항라당의, 구월 망일에는 공단당의, 시월 초하루에는 겹당의를 입는다고 하였다. 또한, 오월단오 전날 왕비가 흰 당적삼(홑당의)으로 갈아입으면, 단옷날부터 궁중에서는 모두 당적삼으로 갈아입었다. 또 추석 전날 왕비가 다시 당의로 갈아입으면, 추석날부터 궁중에서는 다시 당의로 갈아입었다. 겨울철에는 자색당의(紫色唐衣)를 입기도 하였다. 조선 말엽에 이르러 당의가 왕실 소례복이 되면서부터는 여기에 흉배(胸背)를 달기도 하였다. 왕비는 오조룡원보(五爪龍圓補)를 달고, 다른 이들은 봉황을 수놓은 원형 또는 사각형의 흉배를 달았다. 스란치마는 단에 스란단을 단 긴 치마이다. 입으면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폭이 넓고 길다. 조선 시대에 궁중이나 사대부 집에서 예복으로 입었다. 스란단을 한 층 붙인 것을 스란치마, 무릎 정도에 한 층 더 붙인 것을 대란치마라고 하며 스란치마는 소례복으로, 대란치마는 대례복으로 입었다. 스란단의 무늬는 계급에 따라 달랐는데, 왕비는 용무늬, 공주와 옹주는 봉황무늬, 사대부 여자는 글자와 꽃무늬를 넣어 입었다.
해신(日神)과 달신(月神)
石虎(석호)
석호는 돌을 조각하여 만들 호랑이로 무덤을 수호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석호는 경기도 남양주 이준용(1870년~1917년, 흥선대원군의 손자) 묘역에 있던 것으로
2005년 운현궁가에서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족두리 = 여성들의 장식품
족두리
위 거문고와 아래 가야금
트릭아트
石庭 李埈鎔 印章(석정 이준용 인장)과 念石 李釪印章(염석 이우 인장) : 시대 = 20세기
靜齋先生文集木板(정재선생문집목판)
이담명(李聃命)의 문집을 인쇄할 때 제작한 목한이다.
望柱石(망주석) :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돌기둥 기둥에 몸은 다람쥐인데 얼굴은 아니다.
望柱石(망주석) :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돌기둥
望柱石(망주석) :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돌기둥 기둥에는 다양한 설치류가 조각되어있다.
望柱石(망주석) 받침돌
장명등(長明燈)
무덤에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쫓는 등인 장명등長明燈
望柱石(망주석)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돌기둥인 망주석(望柱石)
오층석탑
고려시대에 제작된 석탑으로 이전 시기에 비해 하층기단에 새겨진 안상 무늬와 층수는 늘고 옥개석 받침수는 줄었다.
수평을 이루는 옥개석 처마 등을 통해 통일신라 석탑의 전통을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전시된 석탑은 결실된 부분과 손상된 부위를 보존처리하여 전시한 것이다.
서쪽 방향을 보고 있음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하층기단에 새겨진 안상(眼象)무늬와 이전 시기에 비해 층수가 늘어나고 옥개석의 받침수가 줄어든 형테에서
고려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또한 수평을 이루는 옥개석의 처마 등에서 통일신라 석탑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결실되었던 부분을 보존처리하여 원형을 복원하였다.
서남쪽을 향해
떨어져 나간부분이 옥개석 받침 하층기단에 있는 무늬를 안상이라고 함
남쪽
안상(眼象)과 하층기단석
동쪽
탑신석과 옥개석 기단부 = 상층가단갑석과 안상, 하층기단
동남쪽
북쪽
우물(井)과 망주석들
망주석(望柱石)
文人石(문인석)
능陵이나 무덤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 형상의 석물
'불화이야기=고려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립중앙박물관 = 특별전 2 : 빛의 예술 보헤미아 유리 (0) | 2015.04.09 |
---|---|
국립중앙박물관 = 기획전인 폼페이 전시보고, 특별전 : 빛의 예술 보헤미아 유리 (0) | 2015.04.09 |
서울역사박물관 = 야외 전시물과 탑골에서 부는 바람 일부 (0) | 2015.02.28 |
경천사 십층석탑. 물가풍경 무늬 정병 (0) | 2015.02.10 |
국립고궁박물관 = 특별전, 류큐왕국의 보물전, 고국으로 돌아온 데라우치문고 (0) | 2015.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