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이야기=고려외

신라 금관이야기 = 경주 황남동의 신라 황남대총 금관(新羅 皇南大塚 金冠)

백련암 2015. 5. 6. 20:58

지금까지 세계 각지에서 알려진 고대사회의 금관은 합해서 10점밖에 안되며, 그 중 신라금관 6점과 가야 금관 1점을, 그것도 가장 완벽한 것을

우리가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나올 것으로 예견한다면, 우리나라는 글자 그대로 "금관의 종주국"이라 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학계는 금관과 전혀 상관없는 19세기 시베리아 샤먼의 철제 巫冠(무관)에서 금관이 기원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일 신라 금관이 시베리아 무관에서 기원했다면, 시베리아 샤먼의 모자가 번쩍거리는 5세기의 금제 왕관이든지,  신라 금관이 19세기 이후의

소박한 철제 무관이든지 둘 가운데 하나는 참이어야 하는데도, 어느 것도 참일 수 없는것이 분명한데 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거듭하고 있고,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답니다.

 

최근에는 금관이 왕관이 아니라 조잡하게 만들어진 부장품으로서 주검의 얼굴을 가리는 데드마스크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금관이 머리에 쓰는 관모인지, 얼굴을 가리는 가면인지 구분조차 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결국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시베리아 무관을 본받은 것으로 해석하여 민족적 창조력을 부정할 뿐 아니라, 금관을 왕관으로 인정하지 않고

한갖 조잡한 부장품으로 격하시키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더 기막힌 것은 이러한 두 주장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의 견해들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신라 금관

1921년 9월 어느 날, 경주 노동리 봉황대 주변에서 자그마한 주막을 운영하던 박씨는 장사가 무척 잘되자 주박을 늘리기로 작정하고

뒤뜰의 나지막한 언덕을 파기 시작하자 고색창연한 황금빛 금관이 나왔는데, 이것이 1500여 년의 긴 잠에서 깨어난 금관총 금관으로,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를 몰라서 그저 金冠塚(금관총)이라 하였으며,

 

3년 뒤 역시 봉황대 아래의 민가 사이에 있는 무덤을 조사하다가 두 번째 금관이 발견되었는데 금관에 매달려있는 특이한 한 쌍의 금방울을

보고 무덤 이름을 金鈴塚(금령총)이라 지었으며,

 

그로부터 다시 1년이 지난 어느 날, 역시 봉황대 서편 얼마 떨어지지 않은 무덤에서 세 번째 금관이 나왔으며, 당시 스웨덴 왕세자의 신분으로

아시아 지역을 탐방하고 있던 고고학자 아돌프 6세가 마침 발굴 현장에 함께하였으며, 그의 이 뜻 깊은 발굴동참을 기념하기 위해

스웨덴의 한자 표기인 瑞典(서전)의 첫 글자와 鳳凰(봉황)의 첫 글자를 따서 무덤을 瑞鳳塚(서봉총) 이라 이름 하였답니다.

 

그 후 1973년에 天馬塚(천마총) 및 1년 뒤 皇南大塚(황남대총) 북분에서도 금관이 출토되었으며,  그밖에 도굴되었다가

압수된 경주시 교동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금관도 한 점 더 있습니다. 모두가 왕릉 급 무덤에서 나온 것이어서 더욱 주목되고 있으며,

학계의 추산으로는 경주 일원에 150여기의 큰 무덤이 있는데, 그 중 이미 발굴된 것은 약 30기에 불과 하므로,

앞으로 또 어떤 무덤에서 얼마만큼의 금관이 더 쏟아져 나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답니다.

 

 

◈경주 황남동의 新羅 皇南大塚 金冠(신라 황남대총 금관)◈

 

황남대총 금관(新羅 金冠)  :  國寶 제 191호    시대 = 신라(경주 황남동) 

황남대총 = 진덕여왕릉으로 추정 - 마지막 금관

 

그 후 1973년에 1년 뒤 皇南大塚(황남대총) 북분에서도 금관이 출토되었으며,  그밖에 도굴되었다가 압수된 경주시 교동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금관도 한 점 더 있습니다.

 

경주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금관이다. 신라 금관으 대표하는 것으로

높이 27.5cm, 아래로 늘어뜨린 드리개(수식) 길이는 13~30.3cm이다.

이마에 닿는 머리띠 앞쪽에는 山자형을 연속해서 3단으로 쌓아올린 장식을 3곳에 두었고, 뒤쪽 양끝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을 2곳에 세웠다.

푸른 빛을 내는 굽은 옥을 山자형에는 16개, 사슴뿔 모양에는 9개, 머리띠 부분에 11개를 달았다.

또한 원형의 금장식을 균형있게 배치시켜 금관의 화려함을 돋보이게 하였다.

아래로 내려뜨린 드리개는 좌 · 우 각각 3개씩 대칭으로 굵은 고리에 매달아 길게 늘어뜨렸다. 바깥의 것이 가장 길고

안쪽으로 가면서 짧아진다. 장식 끝부분 안쪽에는 머리띠 부분과 같은 푸른색 굽은 옥을 달았고,

바깥쪽에는 나뭇잎 모양의 금판을 매달았다. 발견 당시 금관과 아래로 내려뜨린 드리개들이 분리되어 있었다.

 

※이 금관은 신라 금관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어느 것보다도 굽은 옥을 많이 달아 화려함이 돋보이고 있다.

 

♧♣♧

금관(金冠)에는 나무, 사슴뿔, 그리고 새 등의 요소가 담겨져 있는데, 나무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것으로 왕을 상징한다.

사슴뿔의 형태는 시베리아 지역 샤먼(Shaman)이 사용하는 모자에 등장하는 주요한 요소이다.

나무와 사슴뿔모양의 세움 장식에는 비취의 열매와 황금잎이 달린 듯 곱은 옥과 달개가 달려있어 신라의 아름다움을 한껏 보여준다.

금관은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들었기 때문에 머리에 쓰고 활동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 금관(新羅 金冠)  國寶 제 191호

신라 금관은 관대의 중앙과 그 양 옆에 출(出)자형 입식(立飾)이 있고, 뒷면에는 양쪽에 나뭇가지 모양의 입식(立飾 = 꾸밀 식)이 세워져 있다.

이들 입식(立飾)의 표면에는 달개(瑛珞[영락] : 옥빛 구슬목걸이)와 굽은 옥(곡옥, 曲玉)을 매달아 장식했다.

 

 

 

♣황남대총 북분 출토 : 금관<국보 제 191호> 상세설명♣

신라에서 우월한 통치자가 나타나고 고대국가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때는 4세기 중반 마립간(麻立干)의 등장부터입니다.

마립간(麻立干)시기의 물적 증거는 신라의  고유한 무덤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은 나무로 짠 덧널을 돌무지로 감싸고 그 주위로 흙을 높이 쌓아 올린 무덤입니다.

땅 위로 드러난 거대한 봉토를 지닌 이 무덤에는 이승과 저승이 이어져 있다는 관념에 따라 많은 부장품이 넣어졌습니다.

주마 마립간시기에 만들어졌으며, 그 끝은 6세기 중반의 신라 중고기(中古期)까지 이어집니다. 

신라의 금관은 마립간시기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등장하고 변화하였습니다.

 

마립간(麻立干)이란

신라시대에 임금을 의미하던 칭호.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제19대 눌지(訥祗), 20대 자비(慈悲), 21대 소지(炤知), 22대 지증(智證) 등

4대의 임금을 마립간이라 하였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제17대 내물(奈勿)에서 22대 지증까지 6대의 임금을 마립간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 실린 김대문(金大問)의 해석에 의하면, ‘마립은 국어의 말뚝 즉 궐(橛)로서 함조(諴操)를 의미하며, 함조는 자리를 정하여 둔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왕궐(王橛)은 주(主)가 되고, 신궐(臣橛)은 그 아래에 있으므로 임금을 마립간이라고 한다’하였다.

 

마립간이라는 칭호의 사용은 신라의 왕권이 신장됨에 따라 왕이 화백회의의 사회자로 군림하게 되고, 왕위의 세습화가 이루어지게 된 5세기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17대 내물왕, ≪삼국사기≫에서는 19대 눌지왕부터 마립간 칭호가 사용되었다고 하여 시대적 차이가 있다.

내물왕 때 고구려의 지원하에 사로국이 진한(辰韓) 여러 나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백제와 가야 및 왜의 세력을 격파하면서 지배질서를 확립해

갔다는 점에서는 내물왕대설이 타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고구려의 간섭을 벗어나고 왕위의 부자상속 원칙이 확립된 것은 눌지왕대에 이르러서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드러난 차이는 신라의 왕권성장과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

 

진덕여왕릉으로 추정 - 마지막 금관

 

황남대총은 1973년년부터 1975년까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현재의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하였습니다.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에 속하며, 귀금속 장신구와 희귀한 수입품 그리고 엄청난 양의 철제품과

질그릇이 부장된 점에서 학자들은 이 무덤을 왕릉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왕의 능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므로, 1976년에

문화재위원회는 이 무덤을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큰 무덤’이란 뜻으로 ‘황남대총’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두 개의 무덤을 잇댄 쌍무덤입니다. 먼저 만든 남쪽 무덤[南墳]은 왕의 능이었고,

북쪽 무덤[北墳]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나중에 잇댄 왕비의 능이었음이 발굴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남쪽과 북쪽의 무덤 모두는 돌무지덧널무덤이란 점에서 같으나, 내부구조에서 남쪽 무덤은 시신을 모신 주곽(主槨)과 더불어

부장품을 가득 채운 부곽(副槨)을 따로 둔 점에서 차이를 보였습니다.

북쪽이 왕비의 능이었다는 결정적 증거는 은제 허리띠 꾸미개에 ‘夫人帶’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인데, 이 ‘부인’이란 표현이

당시에 왕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夫人帶’는 왕비의 허리띠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황남대총 북분에 안장된 왕비는 금관과 금으로 꾸민 허리띠 이외에도 금팔찌, 금반지, 금목걸이, 가슴꾸미개 등으로 치장하였습니다.

비록 비단옷과 장신구에 덧댄 직물이 거의 모두 썩어 없어졌으나, 남아있는 귀한 장신구는 생전에 누렸던 가장 화려한 복장을 입혀 장례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왕비의 금관은 신라에서 유행한 나뭇가지모양 금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개의 맞가지[對生枝]와 두 개의 엇가지[互生枝]로 조합된 세움장식[立飾(입식)]은 좁고 긴 머리띠에 높이 솟아오르도록 부착되었습니다.

맞가지는 정면과 좌우 측면에 세웠고, 엇가지는 뒤쪽으로 비스듬하도록 후면의 좌우측에 붙였습니다.

표면에는 무늬를 새기고 곱은옥과 달개를 촘촘히 매달아 한층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비취라고도 부르는 경옥으로 만든 곱은옥과

금판을 둥글게 오린 달개는 하나하나씩 금실로 매달았습니다.

머리띠 아래에는 굵은 고리에 사슬로 달개를 엮은 금제 드리개를 좌우에 세 개씩 늘어뜨렸습니다. 머리띠는 유기질로 된 끈으로

양끝을 묶었던 듯합니다. 굵은 고리의 금제 드리개는 착용한 사람이 여성이었을 수 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대체로 남성의 귀걸이와 드리개는 가는 고리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금관은 신라의 나뭇가지모양 금관에서 맞가지와 엇가지가 조합된 최초의 것입니다.

 

황남대총에서 가장 의아한 수수께끼는 왕과 왕비가 지녔던 관(冠)을 둘러싼 문제입니다. 일반적인 생각과 전혀 다르게,

왕은 금동관을 지녔고, 왕비는 금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구리판에 도금을 한 금동관과 순수한 금관은 재질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비록 왕의 관은 유일하게 곱은옥을 단 금동관임에도 불구하고, 재질이 금동인 점에서 금관에 비해 결코 우월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의 금동관은 세움장식이 세 개의 맞가지 뿐입니다.

이러한 왕과 왕비의 관은 신라의 ‘나뭇가지모양 관’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황남대총 금관의  옆모습

 

신라의 ‘나뭇가지모양 관’은 세움 장식의 모양에 따라 변화를 3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머리띠에 세 개의 맞가지만을 세웠습니다.

맞가지의 모양은 자연스런 나뭇가지처럼 가지가 밖으로 벌어진 것에서 점차 직각으로 꺾이는 것으로 변화합니다.

자연의 나무를 형상화한 듯하며, 초기 형태이므로 ‘시원형식(始原型式)’으로 분류하는데, 경주 교동에서 발견된 금관이 대표적입니다.

이 형식의 마지막은 황남대총 남분에서 왕이 착용한 금동관입니다.

세움 장식은 맞가지 뿐이지만, 그 형태가 직각에 가깝게 꺾여 있어 뒤이은 형식과도 이어집니다.

‘나뭇가지모양 관’의 전형은 세 개의 맞가지에 더해 두 개의 엇가지를 조합한 것인데, 가장 다듬어진 형태이므로 ‘표준형식(標準型式)’으로 분류 합니다.

새로 조합된 엇가지는 사슴뿔을 본떴다고도 합니다.  엇가지는 뒤늦게 더해졌으므로 이를 굳이 사슴뿔을 형상화했다고 볼 여지가 적습니다. 

다만 상징 측면에서 나무와 사슴뿔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매개라는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이 단계 이후의 맞가지는 한결같이 모두 직각으로 꺾인 형태입니다. 표준형식은 황남대총 북분 금관에서 처음으로 완성되며,

금관총(金冠塚) 및 서봉총(瑞鳳塚)의 금관과 더불어 표준형식이 성립하는 단계에 속합니다.

 

표준형식 성립단계의 금관은 맞가지의 마디가 3단인 점이 특징입니다. 이후에 만들어진 천마총(天馬塚) 및 금령총(金鈴塚)의 금관은 표준형식

발전단계에 속하며, 맞가지의 마디가 4단인 특징을 지닙니다. 즉 ‘나뭇가지모양 관’의 표준형식은 맞가지의 마디가 3단인 것에서 4단인 것으로 바뀌었고,

전체적으로 점점 빽빽해지고 화려해지는 모습으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인 ‘퇴화형식(退化型式)’은 추측하건데 더 이상 금관이 만들어지지 않는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관에 내포된 정치적 권위가 사라진 단계이므로 필요 이상으로 꾸밈이 많아지거나 오히려 급격하게 간단해지는 방향으로 변화합니다.

 

퇴화형식에서도 가장 마지막은 구리판을 적당히 잘라 만든 동관(銅冠)입니다.

동관의 착용자는 함께 부장된 방울 등으로 볼 때 이전 단계의 정치적 권위가 사라진 무당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상은 ‘나뭇가지모양 관’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신라의 왕과 왕족은 기록에 따르면 한때 제사장이었으며, 마립간시기(麻立干時期)까지 꾸준히

국가의 제의를 주관하였습니다. 황금으로 만든 ‘나뭇가지모양 관’은 신성한 나무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이는 통치자이자 국가의 제의를 주관하는 신라의 마립간과 그 일족의 성격에 부합하는 도안이라고 해석됩니다.

 

마립간시기 직후인 중고기의 법흥왕(法興王)은 전통제의의 중심이었던 신궁(神宮)을 대신하여 불교를 공인하였고

더불어 국왕의 세속적 권위를 월등히 강화시켰습니다.

이로써 신라의 왕에게는 전통제의와 관련된 황금으로 만든 ‘나뭇가지모양 관’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듯합니다.

다만 나뭇가지모양 관이 지니고 있던 제의적 상징은 그대로 민간에 전승되어 정치적 권위가 사라진 채 무당의 신물로 남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허리띠 = 金製腰帶,[금제요대])

허리띠(腰帶) = 120cm,  무게 919g     출토지 = 경주 황남대총(慶州 皇南大塚)

 

 

   

허리띠(腰帶)는 가죽허리띠를 장식하였던 금속의 띠꾸미개만 남아있다. 드리개에는 물고기모양, 주머니모양, 쪽집게, 곱은 옥 등이 달려있는데,

고대 북방 유목민족들이 생활에 필요한 작은 도구들을 허리에 찼던 풍습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금제화식(金製華飾) 금제 드리개  : 시대 =  삼국시대 중 신라 5세기(三國時代 新羅 5世紀)

 출토지 = 경북 경주 황남대총(慶北 慶州 皇南大塚)  

 

 

금제화식(金製華飾) 금제 드리개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 (皇南大塚南墳 金製冠飾) : 보물  제630호     시대 = 삼국시대(신라) 5세기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皇南大塚南墳 金製冠飾)은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되었다.

황남대총은 2개의 봉분이 남 · 북으로 표주박 모양으로 붙어 있다.

이 관식은 황남대총 남쪽 무덤에서 발견되었으며, 높이 45㎝, 날개 끝 너비 59㎝의 크기이다.

3매의 금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운데 금판은 위에 3개의 돌출된 부분이 있어서 전체가 山자 모양을 하고 있다.

아랫부분은 차츰 좁아져서 V자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이 가운데 금판 좌우에 새 날개 모양의 금판을 작은 못으로 연결하였다.

전면에 작은 원형 장식을 달았으나 가운데 금판 밑의 관(冠)에 꽂게 된 부분에는 장식이 없다. 관 장식의 가장자리에는 작은 점을 찍어 처리하였다.

가운데 금판은 세로 중심선에서 안으로 약간 접은 상태여서, 밑의 뾰족한 부분을 무엇인가에 꽂았으리라 생각되지만,

평소에 썼던 관의 일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문화재청의 글.>

 

관모에 끼워 장식하는 것으로, 새날개의 모양을 본떠 만든 것이다. 양쪽 날개에는 수많은 달개가 달려 있어 화려하게 날아갈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글>

 

금동관(金銅冠)  :  시대 = 삼국시대(三國時代). 신라(新羅)   변종화(卞鍾夏) 기증 문화재

 

변종하(卞鍾夏, 1926年~ 2000年)선생은 광복 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을 한 서양화가였다.

1955년 당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며,  이는 선생의 예술세계에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대학에서 후진양성을 하다 1960년 프랑스로 건너가 그림을 공부하였다.

선생은 한국적 이미지에 대한 탐구를 통해 담백하고 세련된 작품 세계를 구축하여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문화탐구는 우리 문화재의 사랑으로 이어져 1998년에 애장해 오던 금동관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金銅冠(금동관) 옆면 = 금동관(金銅冠)  :  시대 = 삼국시대(三國時代). 신라(新羅)   변종화(卞鍾夏) 기증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