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이야기=고려외

신라 금관 이야기 = 경주 노서동의 신라 금관총과 이사지왕 (新羅 金冠塚 · 尒斯智王)

백련암 2015. 5. 8. 11:18

지금까지 세계 각지에서 알려진 고대사회의 금관은 합해서 10점밖에 안되며, 그 중 신라금관 6점과 가야 금관 1점을, 그것도 가장 완벽한 것을

우리가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나올 것으로 예견한다면, 우리나라는 글자 그대로 "금관의 종주국"이라 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학계는 금관과 전혀 상관없는 19세기 시베리아 샤먼의 철제 巫冠(무관)에서 금관이 기원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일 신라 금관이 시베리아 무관에서 기원했다면, 시베리아 샤먼의 모자가 번쩍거리는 5세기의 금제 왕관이든지,  신라 금관이 19세기 이후의

소박한 철제 무관이든지 둘 가운데 하나는 참이어야 하는데도, 어느 것도 참일 수 없는것이 분명한데 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거듭하고 있고,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답니다.

 

최근에는 금관이 왕관이 아니라 조잡하게 만들어진 부장품으로서 주검의 얼굴을 가리는 데드마스크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금관이 머리에 쓰는 관모인지, 얼굴을 가리는 가면인지 구분조차 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결국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시베리아 무관을 본받은 것으로 해석하여 민족적 창조력을 부정할 뿐 아니라, 금관을 왕관으로 인정하지 않고

한갖 조잡한 부장품으로 격하시키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더 기막힌 것은 이러한 두 주장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의 견해들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금관이 출토된 신라 고분의 전체적인 표시도

 

 

금관이 출토된 신라 고분의 부분 표시도

 

신라 금관

1921년 9월 어느 날, 경주 노동리 봉황대 주변에서 자그마한 주막을 운영하던 박씨는 장사가 무척 잘되자 주박을 늘리기로 작정하고

뒤뜰의 나지막한 언덕을 파기 시작하자 고색창연한 황금빛 금관이 나왔는데, 이것이 1500여 년의 긴 잠에서 깨어난 금관총 금관으로,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를 몰라서 그저 金冠塚(금관총)이라 하였으며,

 

3년 뒤 역시 봉황대 아래의 민가 사이에 있는 무덤을 조사하다가 두 번째 금관이 발견되었는데 금관에 매달려있는 특이한 한 쌍의 금방울을

보고 무덤 이름을 金鈴塚(금령총)이라 지었으며,

 

그로부터 다시 1년이 지난 어느 날, 역시 봉황대 서편 얼마 떨어지지 않은 무덤에서 세 번째 금관이 나왔으며, 당시 스웨덴 왕세자의 신분으로

아시아 지역을 탐방하고 있던 고고학자 아돌프 6세가 마침 발굴 현장에 함께하였으며, 그의 이 뜻 깊은 발굴동참을 기념하기 위해

스웨덴의 한자 표기인 瑞典(서전)의 첫 글자와 鳳凰(봉황)의 첫 글자를 따서 무덤을 瑞鳳塚(서봉총) 이라 이름 하였답니다.

 

그 후 1973년에 天馬塚(천마총) 및 1년 뒤 皇南大塚(황남대총) 북분에서도 금관이 출토되었으며,  그밖에 도굴되었다가

압수된 경주시 교동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금관도 한 점 더 있습니다. 모두가 왕릉 급 무덤에서 나온 것이어서 더욱 주목되고 있으며,

학계의 추산으로는 경주 일원에 150여기의 큰 무덤이 있는데, 그 중 이미 발굴된 것은 약 30기에 불과 하므로,

앞으로 또 어떤 무덤에서 얼마만큼의 금관이 더 쏟아져 나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답니다.

 

◈경주 노서동의 新羅 金冠塚 · 尒斯智王(신라 금관총과 이사지왕)◈

금관을 비롯한 황금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된 곳은 신라 1000년 역사 중에서도 김알지의 후예들이 김씨 마립간들이 통치하던

5~7세기 중반의 적석목곽분에서 입이다.

 

金冠塚(금관총)

1921년 9월 어느 날, 경주 노동리 봉황대 주변에서 자그마한 주막을 운영하던 박씨는 장사가 무척 잘되자 주박을 늘리기로 작정하고

뒤뜰의 나지막한 언덕을 파기 시작하자 고색창연한 황금빛 금관이 나왔는데, 이것이 1500여 년의 긴 잠에서 깨어난 금관총 금관으로,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를 몰라서 그저 金冠塚(금관총)이라 하였다.

 

1921년 무덤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금관은 황금의 나라 신라의 존재를 알리는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금관총"이라 이름 붙여진 이 무덤이 조사된 이래 92년이 지난 2013년, 국립중앙박물관은 금관과 함께 발견된 고리자루 큰칼을 보존

처리하는 과정에서 尒斯智王(이사지왕)이라는 왕의 이름을 확인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고신라 무덤에서 왕의 이름이 확인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금관의 발견 및 조사 과정을 소개하고 왕의 이름이 새겨진 고리자루 큰칼을 발굴 이래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입니다. 이 전시를 통해 금관총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다시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금관총 금관 : 국보 제 87호

금관총 금관은 신라 금관 중 가장 먼저 발견된 것이다. 금관에는 띠 모양의 관테에 나뭇가지 모양과 사슴뿔 모양의 장식이

세워져 있는데, 장식의 앞면에는 133개의 달개와 57개의 곱은옥이 달려 있다.

세움 장식의 가장자리에는 한 줄의 연속 점무늬, 관테에는 파도무늬가 새겨져 있다. 관테에는 한 쌍의 드리개가 달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금관총의 금관 정면 : 국보 제 87호

 

금관총과 이사지왕, 여전히 남은 과제들

 

남성인가? 여성인가?

금관총 보고서를 집필한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빈전경작]) 교수는 주인공을 왕(마립간)으로 생각했는데 남성으로 본 셈이다.

그런데 현재 신라 고분 연구에서는 가는고리 귀걸이(細環耳飾[세환이식])를 하고 큰칼을 직접 허리에 찬 사람은 남성,

굵은고리 귀걸이(太環耳飾[태환이식])를 하고  큰칼을 직접 차지 않은 사람은 여성으로 주장하는 견해가 많다.

보고서에 따르면 금관총의 주인공은 큰칼을 직접 차지 않고 굵은고리 귀걸이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덤의 주인공은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 과연 여성일까?

 

최고지배자인 마립간, 즉 왕일까?

이사지왕이라는 왕은 현재까지 확인된 금석문이나『三國史記[삼국사기]』『三國遺事[삼국유사]』등 역사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사지왕은 신라 냉수리비(443년 또는 503년 건립)에 나오는 "此七王等[차칠왕등]"을  "이 7명의 왕들"로 해석하여

당시 신라에 여러 명의 왕이 있었다고 하는 견해를 뒷바침하는 것일까? 아니면 신라 최고지배자인왕(마립간)의 또 다른 이름일까?

 

 

금관총 금관 : 국보 제 87호  = 비스듬한 옆면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금관총에서 발견된 신라의 금관으로, 높이 44.4㎝, 머리띠 지름 19㎝이다.

금관은 내관(內冠)과 외관(外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금관은 외관으로 신라금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원형의 머리띠 정면에 3단으로 ‘출(出)’자 모양의 장식 3개를 두고, 뒤쪽 좌우에 2개의 사슴뿔모양 장식이 세워져 있다.

머리띠와 ‘출(出)’자 장식 주위에는 점이 찍혀 있고, 많은 비취색 옥과 구슬모양의 장식들이 규칙적으로 금실에 매달려 있다.

양 끝에는 가는 고리에 금으로 된 사슬이 늘어진 두 줄의 장식이 달려 있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달았으며, 줄 끝에는 비취색 옥이 달려 있다.

이 같은 외관(外冠)에 대하여 내관으로 생각되는 관모(冠帽)가 관(棺) 밖에서 발견되었다.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든 세모꼴 모자로 위에 두 갈래로 된 긴 새날개 모양 장식을 꽂아 놓았다.

새날개 모양을 관모의 장식으로 꽂은 것은 삼국시대 사람들의 신앙을 반영한 것으로 샤머니즘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금관은 기본 형태나 기술적인 면에서 볼 때 신라 금관 양식을 대표할 만한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청의 글.>

 

 

금관총 금관 뒷면 = 국보 제 87호

금관은 내관(內冠)과 외관(外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금관은 외관으로 신라 금관의 전형이다.

1921년에 발견된 이 금관은 원형의 머리띠 정면에 3단으로 "出(출)"자 모양의 대생지(對生枝 : 마디마다 두개씩 마주 붙어서 나는 가지)

수목형(樹木形) 입식(立飾) 세 개와, 뒤쪽 좌우에 두개의 사슴뿔모양(鹿角形[녹각형]) 장식이 세워져 있다.

금관의 높이는 44.4cm 이고, 머리띠 지름 19cm 이며, 국보 제 87호이다.

<문화재청의 글>

 

 

금관총 금관 드리개

 

금관총의 발견과 신라 고분 조사

우리나라에서 근대 고고학 조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여구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일본인 연구자는 신라 고분을 여러 번 조사하였으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의 복잡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해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다.

그들은 공사도중 우연히 발견된 금관총으로 인해 신라 고분에는 화려한 유물이 묻혀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연속해서

금령총(1924년) 식리총(1924년) 서봉총(1926년)등을 발굴하였다. 이러한 조사와 연구는 조선총독부가 주관하였고 일본인이 담당했다.

당시 금관총의 조사와 연구는 교토제국대학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빈전경작]) 교수가 주도하고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매원말치]),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소천현부]), 사와 슌이치(澤俊一[택준일])등이 참여했다.

현재 일본 교토대학에 보관 중인 보고서 원고와 사진 자료는 당시 금관총에 대한 관심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국립중앙 박물관 특별전의 글>

 

 

금관총 금제 허리띠 (金冠塚 金製銙帶) : 국보  제88호   시대 = 신라시대 <과대 및 요패>

 

과대는 직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붙여 만든 허리띠를 말하며, 요패는 허리띠에 늘어뜨린 장식품을 말한다.

옛날 사람들은 허리띠에 옥(玉)같은 장식품과 작은칼, 약상자, 숫돌, 부싯돌, 족집게 등 일상도구를 매달았는데, 이를 관복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나 신라에서는 관직이나 신분에 따라 재료, 색, 수를 달리하여 그 등급을 상징하였다.

경북 경주시 노서동 소재 금관총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금제 과대 및 요패는 과대길이 109㎝, 요패길이 54.4㎝이다.

과대는 39개의 순금제 판으로 이루어져 있고, 양끝에 허리띠을 연결시켜 주는 고리인 교구를 달았으며,

과판에는 금실을 이용하여 원형장식을 달았다. 과대에 늘어뜨린 장식인 요패는 17줄로 길게 늘어뜨리고 끝에 여러 가지 장식물을 달았다.

장식물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지만, 크고 긴 것을 가장자리에 달았다.

금관총 과대 및 요패는 무늬를 뚫어서 조각한 수법이 매우 정교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금관총 과대 및 요패의 부분

 

 

요패 일부분

 

 

국보 제 88호 금관총 금제 허리띠

과대는 39개의 순금제 판으로 이루어져 있고, 양끝에 허리띠을 연결시켜 주는 고리인 교구를 달았으며,

과판에는 금실을 이용하여 원형장식을 달았다. 과대에 늘어뜨린 장식인 요패는 17줄로 길게 늘어뜨리고 끝에 여러 가지 장식물을 달았다.

장식물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지만, 크고 긴 것을 가장자리에 달았다.


   

요패중 일부

 

 

금관 국보 제 87호 안에 관모가 들어가 있다. <사진 출처 문화재청>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관모) (金冠塚 金冠 및 金製冠飾)

 

 

冠帽(관모)  절풍 양식의 속관  : 국보 제 87호 = 좌측면

신라 금관은 세움 장식을 갖춘 겉관과 절풍 양식인 속관의 이중구조로, 절풍양식의 속관은 고조선 이래 우리 관모사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

세움 장식의 겉관은 단군신화의 신단수(신단수)와 같은 성수(성수)인 신라초기 김알지 신화에 등장하는 鷄林(계림)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창조된 것 입니다.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관모) (金冠塚 金冠 및 金製冠飾)  : 국보  제87호    시대 = 신라시대

정면과 우측면

 

 

 

 

 

 

 

 

   

 

 

 

 

금동유개각배(金銅製角形溶器[금동제각형용기]) : 시대 = 신라 5-6세기 출토지 = 경주 금관총

 

 

   

금동유개각배(金銅製角形溶器[금동제각형용기]) : 시대 = 신라 5-6세기 출토지 = 경주 금관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