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이야기=고려외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 발원(發願) 간절한 바람을 담다.

백련암 2015. 5. 30. 14:24

발원(發願)의 의미

발원(發願)이란 불사를 일으켜 공덕을 쌓으며 부처에게 소원을 비는 것을 의미합니다.

프롤로그에서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불교미술을 통해 발원의 의미를 살펴보고 고대 국가에서 사찰 건립을 비롯한

불사의 가장 큰 후원자가 국가와 왕실이었음을 살펴봅니다.

대표 전시품인 <황복사지 삼층석탑 출토 사리구>, <황룡사 찰주본기(보물 1870호)> 등이 있습니다.

 

불사(佛事)란 사찰을 세워 탑을 건립하고, 법당에 불상과 불화를 봉안하거나 경전을 간행하는 일을 뜻한다.

불사를 후원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을 널리 알려 큰 공덕을 쌓는 것이며, 발원(發願)이란 이처럼 공덕을 쌓으며 부처에게 소원을 비는 것이다.

후원자들의 소원은 국가가 평안하고, 살아서는 건강하며 죽어서는 극락왕생하는 것이었다.

고대 국가에서 불교는 중앙집권적 국가 성립의 정신적 기반이었다.

사찰 건립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고, 탑에 봉안한 화려한 사리기는 사찰의 최대 후원자가 왕실이었음을 보여준다.

왕실에서는 탑을 세우면서 국가의 안녕과 선대의 명복을 기원하였지만,

더불어 국력을 과시하고 국왕의 권위를 보여주려는 정치적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통일신라시대 말부터는 승려나 일반신도들도 석탑을 세우고 소박한 형태의 사리기를 봉안하였으나

여전히 국왕의 명복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발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 신도 아엄이 발원한 불상의 광배 :  시대 = 고구려 596년, 금동,  출토지 =  충북 청주 노은면에서 발견됨

「建興五年」銘 釋迦三尊佛 光背[「건흥오년」명 석가삼존불 광배]

 

고구려의 여성 신도가 발원한 삼존불상으로, 본존불상은 전해지지 않고 협시보살상이 함께 주조된 광배가 남아 있다.

광배 뒷면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청신녀(淸信女) 아엄(兒奄)이 석가모니불상을  만들며, 내세에는 부처를 만나 법을 듣기 바라고

모든 중생이 이를 함께 하기를 기원하였다.

이 처럼 죽은 사람의 명복과 극락왕생을 바라는 것은 불교 신도들의 보편적인 바람이었다.

<박물관에 표시된 해설문에서>

 

 

「建興五年」銘 釋迦三尊佛 光背[「건흥오년」명 석가삼존불 광배]

광배 뒷면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청신녀(淸信女) 아엄(兒奄)이 석가모니불상을  만들며, 내세에는 부처를 만나 법을 듣기 바라고

모든 중생이 이를 함께 하기를 기원하였다.

 

   

승려 40인이 발원한 불상  : 국보 제 119호,   시대 = 고구려 539년, 금동

「延嘉七年」銘 佛立像[「연가칠년」명 불입상] =  출토지 = 경남 의령 대의면에서 발견 

 

불상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 제작 연도, 그리고 제작목적을 기록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광배 뒷면의 명문에 의하면 이 불상은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있는 동사(東寺)에서 승려 40인이 발원한 것으로,

천불(千佛) 중 스물 아홉 번째 인현의불(因現義佛)을 만들어 승려 법영(法穎)이 공양하였다,

부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한 발원의 목적이 기록되어 있다.

<박물관에 표시된 해설문에서>

 

 

명문 = 延嘉七年  歲在 己未 高麗國樂良 東寺 主敬第子 僧演師徒四十人 共造賢劫 千佛流布第 卄九 因現義 比丘 法穎 所 供養

         <연가칠년  세재 기미 고려국락량 동사 주경제자 승연사도사십인 공조현겁 천불류포 제 입구 인현의불 비구 법영 소 공양>   *卄九<29> 

 

= 연가 7년인  기미년 高麗國(고구려) 낙랑(평양)에 있던 동사(東寺)의 주지이며 부처님을 공경하는 제자인 승연을 비롯한 사도(師徒)

40인이 함께 현겁천불을 만들어 세상에 유포한 제 29번째 인현의불(因現義佛)로 비구 법영이 공양한다.

 

승려 40인이 발원한 불상  : 국보 제 119호,   시대 = 고구려 539년, 금동

 

고구려와 관련된 글이 새겨져 있는 불상으로, 옛 신라 지역인 경상남도 의령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광배(光背) 뒷면에 남아있는 글에 따르면 평양 동사(東寺)의 승려들이 천불(千佛)을 만들어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만들었던 불상 가운데

 29번째 것으로, 전체 높이는 16.2㎝이다. 
머리는 삼국시대 불상으로는 유례가 드물게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큼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다.

얼굴은 비교적 작은데, 살이 빠져 길쭉한 가운데 미소를 풍기고 있다.
오른손은 앞으로 들어 손바닥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허리 부분에서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게 하여 아래로 내리고 있다.

왼손의 세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는 모습은 삼국시대 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유난히 두꺼운 옷에 싸인 신체는 굴곡의 표현이 없지만, 전체적인 체구와 약간 보이는 어깨의 골격 등에서 강인한 힘을 느끼게 한다.

 새의 날개깃 모양의 옷자락은 좌우로 힘차게 뻗쳐 있는데, 날카롭고 힘있는 모습이 중국 북위 이래의 양식을 보여준다.

불상과 함께 붙여서 만든 광배는 앞면에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듯한 불꽃무늬가 선으로 새겨져 있다.
광배의 일부분이 손상되었으나 도금까지도 완전히 남아 있는 희귀한 불상으로, 광배 뒷면에 남아있는 글과 강렬한 느낌을 주는 표현 방법 등으로

볼 때 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고구려 불상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의 상세 해설문>

 

백제 유민이 조성한 불비상  :  국보 제 106호,   통일신라 673년,    재질 = 석재

출토지 = 세종특별자치시 碑巖寺[비암사]발견  「癸酉 阿彌陀佛碑像(「계유」명 아미타불비상)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이 새겨진 비석 모양의 조각상이다.

정면에는 전씨(全氏)를 비롯한 주요 발원자들의 이름과 나라를 위해 발원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면에는 50명의 후원자들이 모든 중생을 위해 발원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에는 백제의 성씨와 관등, 신라의 관등을 가진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어 옛 백제 유민들이 주요 발원자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측면의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天人) 8구와 뒷면 불상 20구 옆에 후원자들의 직함과 이름을 하나씩 새겨놓았다.

<박물관에 표시된 해설문에서>

 

 

 

 

뒷면 불상 20구 옆에 후원자들의 직함과 이름을 하나씩 새겨놓았다.

 

 

   

측면의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天人) 8구

 

충청남도 연기군 비암사에서 발견된 이 삼존석상은 4각의 긴 돌 각 면에 불상과 글씨를 조각한 비상(碑像) 형태이다.
정면은 가장자리를 따라 테두리를 새기고, 그 안쪽을 한 단 낮게하여 아미타삼존상을 조각하였다.

커다란 연꽃 위의 사각형 대좌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얼굴 부분이 갸름한 모습이며, 신체는 건장하면서 안정된 자세를 이루고 있다.

부처가 설법할 때의 손모양을 하고 있는 손은 비교적 크게 표현되어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사각형의 대좌(臺座)를 거의 덮고 있으며, 대좌 밑의 좌우에는 사자상을 배치하였다.

둥근 머리광배는 3줄의 동심원 안에 연꽃을 장식하고 있다.
사자 등위의 연꽃무늬 대좌 위에 서 있는 협시보살상은 본존불 쪽으로 몸을 약간 튼 자세로, 얼굴은 훼손이 심하여 알아볼 수 없으나

연꽃이 새겨진 둥근 머리광배가 남아 있다. 본존불과 협시보살의 어깨 사이에는 나한상이 얼굴만 내밀고 있으며,

협시보살상의 양 옆에는 인왕상이 서 있다. 불상 위로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광배가 이중으로 있으며,

안쪽의 광배에는 5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광배 밖의 좌우 공간은 한층 더 낮추어 비천상을 새겼다.
양 측면의 하단에는 정면을 향하고 있는 용머리를 조각하고, 그 위로는 연꽃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표현하였다.

뒷면은 4단으로 나누어 각 단마다 5구씩의 작은 부처가 앉아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으며, 불상 사이사이에 사람의 이름과 관직을 새겨 넣었다.

조각이 정교하면서도 장엄하고, 세부 양식에 있어서도 옛 형식을 남기고 있는 점이 계유명삼존천불비상(국보 제108호)과 비슷하며,

만든 연대는 삼국통일 직후인 문무왕 13년(673)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의 상세 해설문>

 

神穆太后(신목태후)와 孝昭王(효소왕), 聖德王(성덕왕)이 봉안한 舍利具(사리구) :  통일신라 692년 · 706년 경

皇福寺址 三層石塔 舍利具[황복사지 삼층석탑 사리구]  :  경북 경주 구황동 삼층석탑 출토

 

경주 구황동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구이다. 금동사리외함의 뚜껑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신문왕(神文王)의 명복을 위해

신목태후(神穆太后)와 효소왕(孝昭王)이 692년에 석탑을 세웠으며,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나자 706년 성덕왕(聖德王)이 시리구를 추가로 봉안하였다고 한다.

 

신문왕의 왕비였던 신목태후는 692년 아들 효소앙이 6살의 어린나이에 즉위하자 효소왕을 대신하여 불안한 왕권을 안정시키고

정권을 잡은 인물이다.  선왕(先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석탑에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알리는 정치적 목적도 담겨 있다.

석탑 2층 옥개석의 석제 뚜껑 안에 금동사리외함이 들어 있었고 그 안에 차례로 은합, 금합이 있었으며

순금으로 만든 불상 2점, 금과 은으로 만든 받침이 달린 잔, 유리옥과 유리판 등이 발견되었다.

<박물관에 표시된 해설문에서>

 

 

 

 

금제불입상과 금제아미타불좌상  :  국보 제 80호 · 79호

불입상은 신목태후와 효소왕이 692년 석탑을 세울 당시에 봉안한 것이며,

 아미타불좌상은 706년 성덕왕이『무구정광대다리니경』과 함께 봉안했다는 불상으로 추정된다. 

사리구로 봉안한 불상의 사례 중 이른 시기의 것으로, 순금으로 제작된 왕실 발원 불상의 세련된 미감과 섬세한 주조 기술을 보여준다.

아미타불좌상은 풍만한 신체와 얇고 자연스러운 옷주름에서 새롭게 등장한 통일신라 양식을 볼 수 있다.

<박물관에 표시된 해설문에서>

 

 

   

금제아미타불좌상 국보 제 79호.                                                                    금제불입상과  :  국보 제 80호

 

금제아미타불좌상 국보 제 79호. =  통일신라

1942년 착수된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 해체수리 공사시 나온 사리함에서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과 함께 발견되었다.

사리함에 새겨진 글에 의하면 통일신라 성덕왕 5년(706)에 사리함 속에 순금으로 된 아미타상을 넣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크기가 6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불상은 12.2㎝로 4치도 되지 않아 의문이 간다.
광배(光背)와 불신(佛身), 연꽃무늬 대좌(臺座)의 3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각 부분은 분리되도록 만들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으며, 둥근 얼굴은 원만하다. 눈 · 코 · 입은 뚜렷하고 균형이 잡혀 있어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이상적인 모습에 접근하고 있다. 어깨는 넓고 당당하며, 양어깨를 덮은 대의는 가슴을 크게 열었고,

그 안에 대각선으로 내의를 걸쳐 입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에 흘러내린 옷자락은 좌우대칭으로 정돈되어 길게 늘어져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고, 무릎 위의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여 손등을 보이고 있다.
머리광배에는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인동초 · 당초무늬 · 덩쿨무늬와 그 가장자리에 불꽃 무늬가 뚫을새김되어 있고,

몸광배에는 인동초 · 당초무늬와 덩쿨무늬를 이중으로 뚫을새김하였다. 대좌는 원형이며 엎어 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미소 띤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와 균형잡힌 몸매를 지녀 더욱 위엄있게 보이는 이 불상은 손모양이나 옷주름,

양감이 강조된 표현 등에서 8세기 초 불상의 양식과 성격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제불입상과  :  국보 제 80호 = 통일신라

경주구황리금제여래좌상(국보 제79호)과 함께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에 안치된 사리함 속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전체 높이 14㎝의 순금으로 만든 불상이며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고, 갸름한 얼굴은 양감이 있고 자비롭다.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콧날은 날카롭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다.
약간 좁은 어깨에는 두껍게 표현된 옷을 걸치고 있는데, 앞면에는 U자형의 옷주름을 새기고 있다.

치마는 발목 부분에서 양쪽으로 약간 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삼국시대의 불상 양식이 아직 남아 있는 모습이다.

오른손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옷자락을 잡고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는 머리 뒤에 원형으로 표현하였는데, 불꽃무늬에 둘러싸여 전체적으로 보주형(寶珠形)을 띤다.

원 안의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빛이 뻗어나가는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가장자리의 불꽃무늬는 섬세하게 뚫을새김하였다.

대좌는 따로 만들어 끼운 것으로 12각의 받침 위에 엎어 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새겼다.
머리와 신체의 적당한 비례, 옷주름의 형태 등을 볼 때, 삼국시대 후기의 불상에서 좀 더 발전한 통일신라 초기 새로운 양식의 불상으로 보인다.

사리함에 새겨진 글을 통해 692년에 탑을 건립할 때 넣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만든 연대가 거의 확실하여

통일신라시대 불상 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문화재청의 상세 해설문>

 

 

金銅舍利外函(금동사리외함)

사리구를 담았던 힘으로, 뚜껑의 명문에는 석탑을 조상한 경위와 발원 내용, 석탑 건립을 담당한 승려와 관인의 이름,

그리고 계생(季生)과 알온(閼溫)이라는 장인(匠人)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작은 탑 99기를 탑 안에 봉안하고 다라니를 외우면 성불할 수 있다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에 따라 금동사리 외함 네 면에 99기의 소탑(小塔)을 새겼다.

<박물관에 표시된 해설문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에 따라 금동사리 외함 네 면에 99기의 소탑(小塔)을 새겼다.

 

 

국가가 세운 황룡사 목탑 사리구

皇龍寺址 九層木塔 舍利具(황룡사지 구층목탑 사리구)  :  시대 =  통일신라 7세기 · 9세기

출토지 =  慶北 慶州市 皇龍寺址 출토[경북 경주시 황룡사지 출토]

 

황룡사는 645년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년- 647년) 때, 중국 유학을 다녀온 자장법사(慈藏法師)가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해동(海東)의 여러 나라가 항복할 것이다." 라는 당나라 원향선사(圓香禪師)의 말을 전하면서 건립되었다.

강력한 왕권의 확립과 국력의 결집이 필요했던 신라는 국가적 차원에서 황룡사 목탑을 건립하고 삼국통일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황룡사 목탑 터 심초석(心礎石) 아래에서 창건 당시의 백자호와 공야구가 발견되었다.

심초석 사리공 안에서는 금제합과 은제합등 창건할 때 봉안한 사리구와「찰주본기[刹柱本記]」를 새긴 사리함 금동판,

팔각형 집 모양 사리기 등 중수할 때 납입한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박물관에 표시된 해설문에서>

 

 

   

심초석 사리공 안에서는 金製盒(금제합)과 銀製盒(은제합)

 

 

念珠(염주)

 

팔각형사리기, 은합, 사리함, 사리호함

 

 

집모양인 청동팔각사리 소탑

 

 

銀盒(은합)

 

 

   

舍利函(사리함)                                                                      舍利函(사리함)

 

 

皇龍寺 刹柱本記(황룡사 찰주본기)  :  보물 제 1870호  시대 = 신라

황룡사 구층목탑(皇龍寺 九層 木塔)의 건립과 871년부터 872년까지의 중수 과정을 금동내함 3면의 앞뒷면에 기록한 글이다.

나머지 한면에는 인왕상이 새겨져 있다.

탑지의 안쪽 면에 "황룡사 찰주본기[皇龍寺 刹柱本記]"라는 제목과 지은이인 박거물(朴居勿)의 이름,

황룡사 구층 목탑의 조성 이유와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년 - 875년)의 중수 과정을 기록하였다.

목탑을 중수하는 것 역시 국가적인 대역사였기에 탑지의 외면에는 왕의 친동생인 김위홍(金魏弘)등 중수를 주도한 관리들과

여러 승려, 글을 새긴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다.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皇龍寺 刹柱本記(황룡사 찰주본기)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 (慶州 皇龍寺 九層木塔 金銅刹柱本記)

황룡사찰주본기는 통일신라 경문왕 11년에 왕의 명에 의해 중심사찰이자 성전사원인 황룡사의 구층목탑을 중수하면서 기록한 실물자료로서,

구층목탑의 건립 과정과 중수 과정을 후대의 역사서(歷史書)가 아닌 중수 당시에 제작된 유물을 통해 생생히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본기는 박거물이 찬하고 요극일이 썼으며 이를 승려인 총혜와 조박사 연전이 전각한 것이다.

특히 황룡사 목탑 건립과 관련하여『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 후대의 史書 기록과 상호 비교 검토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찰주본기의 역사적 · 기록사적 위치는 중대하다고 하겠다. 금동사리함의 내외면에 쌍구체(雙鉤體)로 쓴 찰주본기는 9세기대에 주로 쓰였던

서체로 염거화상탑지(廉巨和尙塔誌)(844년), 창림사 무구정탑원기(昌林寺 無垢淨塔願記)(855년), 중화3년명사리기(中和 3年銘 舍利器)(883년)등과

 더불어 이 시기 유행했던 탑지(塔誌)의 서술체계는 물론 서체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외에도 사리장치 품목과 안치장소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 탑파의 사리장엄 의식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사리함의 문비 내․외면에 선각된 신장상은 절대연대(872년)를 가진 유품으로 불교조각사 연구에 기준이 된다.

따라서 이 황룡사 금동사리함은 신라시대의 시대상을 오롯하게 담고 있는 역사적 유물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 · 보호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문화재청의 상세 해설문>

 

 

민애대왕의 명복을 기원한 사리구  :  시대 =  통일신라 863년

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 舍利具(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사리구)  :  출토지 =  대구 광역시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출토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구이다.

사리호 명문에 따르면 경문왕(景文王)이 민애대왕(閔哀大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탑을 조성하였다.

9세기에는 명복을 기원하는 왕실의 원당(願堂) 또는 원탑(願塔) 건립이 유행하였으며 탑의 조성에 참여했던 관리와 승려들의 이름도 함께 기록하였다.

방형의 함 안에 납석제 사리호가 봉안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함을 이루었던 4개의 금동판 각 면에는 삼존불을 입체적으로 표현하였다.

동쪽에는 약사삼존불, 서쪽에는 아미타삼존불, 남쪽에는 석가삼존불, 북쪽에는 비로자나 삼존불이 배치되어 있다.

<박물관에 표시된 해설문에서>

 

 

북쪽에는 毘盧遮那 三尊佛(비로자나 삼존불)

 

 

남쪽에는 釋迦牟尼 三尊佛(석가모니 삼존불)

 

 

서쪽에는 阿彌陀 三尊佛(아미타 삼존불)

 

 

동쪽에는 藥師如來 三尊佛(약사 삼존불)

 

 

사리호 명문에 따르면 경문왕(景文王)이 민애대왕(閔哀大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탑을 조성하였다.

 

 

사리호 명문에 따르면 경문왕(景文王)이 민애대왕(閔哀大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탑을 조성하였다.

 

 

   

 

김유신을 위해 건립한 석탑 사리기 =  경전은 넣었던 경통(經筒)으로 추정된다.

仲和三年銘 舍利器(중화삼년명 사리기)  : 시대 = 통일신라 883년 금동

 

김유신(金庾信)을 위해 세운 석탑의 사리기와 경전은 넣었던 경통(經筒)으로 추정된다.

사리기 명문에 따르면 대업(大業)을 이루어 나라의 보배가 된 김유신을 위해 영탑(靈塔)을 건립하였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은 사후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정되었고 무덤이 왕릉에 버금갈 정도로 높이 추앙받았다.

883년 보문사(普門寺)의 승려 현여(玄如)가 탑을 증수할 때『무구정광대다라니』에 따라 소형 탑 77기와 다라니 77벌을 함께 봉안하였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이처럼 승려와 신도 중심으로 석탑을 건립하고 사리기를 봉안하며 중수한 사례가 늘어난다.

그러나 명복을 비는 대상은 여전히 국가와 왕실 또는 그에 준하는 인물이었다.

<박물관에 표시된 해설문에서>

 

♣♣♣↓↓

국왕과 귀족, 경전을 간행하다.

고려시대에는 왕과 귀족, 고위 관료의 후원을 바탕으로 화려한 불교 문화가 꽃피었다.

그 중에서도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경전 제작은 최고 계층의 후원이 가장 두드러진 분야였다.

대장경은 거란, 몽고와의 전쟁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내몰렸던 고려 왕실이 국력을 결집시켜 부처의 힘으로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간절한 바람의 산물이었다. 국토 수호라는 국왕의 발원에 따라 국가적 사업으로 대장경 조성을 추진하였다.

무신정권 시절 팔만대장경은 최고 권력자들의 아낌없는 후원과 백성의 참여로 완성될 수 있었다.

푸른색이나 붉은색으로 물들인 종이네 금이나 은으로 경전의 내용을 옮겨쓰는 사경(寫經) 또한 주로 신분이 높은 왕과 귀족,

고위 관료가 후원하였다. 소수의 후원자가 참여하였기 때문에 개인적 신상이나 소원이 발원문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조선 초기에는 주로 간경도감(刊經都監)과 같은 국가기관이나 왕실에서 경전을 간행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사찰에서 민간의 후원으로 경전을 간행하는 일이 늘어났다.

 

거란을 물리치고자 새긴 대장경

初雕本 大寶積經 券 59(초조본 대보적경 권 59)  : 국보 제 246호,  시대 = 고려 11 세기, 목판본

 

1010년 거날이 침공하자 고려 현종(顯宗)은 불법(佛法)을 유포하여, 공덕을 쌓고 부처의 힘으로 국가적위기를 극복하고자 대장경 조성을 발원하였다.

"대장경[대장경]"이란 경(經) · 율(律) · 론(論)의 삼장(三藏)을 집대성한 것으로, 강력한 통치력과 경제력, 문화적 역량이 있어야  제작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국력의 표상이었다.  국가의 지속적인 후원으로 1087년에 고려의 첫 대장경 570함(函) 6,000여권이 조성되었다.

이후 대구 부인사(符仁寺)로 옮겨 보관하였으나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박물관에 표시된 해설문>

 

대보적경은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을 한데 묶어 정리한 것으로, 보살이 여러가지 수행방법을 통해서 불법을 터득하고 깨달음을 얻어

마침내 부처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고려 현종 때(재위 1011∼1031) 부처님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극복하고자 만든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로,

당나라 보리유지(菩提流志) 등 17인이 번역한 120권 가운데 권 제59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종이를 길게 이어붙여 두루마리처럼 말아서 보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세로 30㎝, 가로 47㎝의 종이를 23장 이어붙인 것이다.
초조대장경은 이후에 만들어진 해인사대장경(재조대장경 또는 고려대장경)과 비교해 볼 때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목판의 새김이 정교한 반면에 해인사대장경과 글자수가 다르고 간행연도를 적은 기록은 없으며,  군데군데 피휘(避諱 : 문장에 선왕의 이름자가 나타나는

 경우 공경과 삼가의 뜻으로 글자의 한 획을 생략하거나 뜻이 통하는 다른 글자가 대치하는 것)와 약자(略字)가 나타난다.

또 초조대장경은 책의 장수를 표시하는데 있어서 대체로 ‘장(丈)’자나 ‘폭(幅)’자를 쓰는 데 비해 해인사대장경은 ‘장(張)’자로 통일되어 있다.

이 책도 장수를 표시하는데 있어 ‘장(丈)’자를 사용하며, ‘경(竟)’자의 마지막 한 획이 생략되는 등 초조대장경의 특징이 나타나고

종이질과 인쇄상태로 볼 때 11세기경에 찍어낸 것으로 생각된다.

<문화재청의 상세 해설문>

 

 

몽고를 물리치고자 새긴 대장경

再雕本 經律異相 券 8 (재보본 경률이상 권 8)  :  보물 1156호   시대 =  고려 1243년,  목판본

1232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자, 고려 왕실이 몽고군을 물리치기를 기원하며 조성한 두 번째 고려대장경이다.

1237년부터 1248년까지 11년간 대장경을 판각하였으며 1251년에 조성을 완료하였다.

경판의 수 때문에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남해(남해)의 분사대장도감(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경판을 후대에 인쇄한 것이다.

권 끝의 간기를 통해 대장경 조성이 국왕의 명으로 이루어진 국가적인 사업임을 알 수 있다.

실질적으로는 각계각층이 동참하여 제작 경비를 마련하였는데, 상당 부분은 무신정권의 최우(崔瑀 ?- 1249년)와 그의 친인척이 부담하였다.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원하옵건대 모든 부처님과 성인과 현인, 그리고 천신께서는 저희의 간곡한 바람을 살피셔서 신통한 힘으로 사악한 오랑캐를 멀리 내 쫓아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하여 주소서,

전쟁이 그치고 나라가 평안하며, 모후(모후)와 태자가 만수무강을 누리고 나라의 국운이 오래도록 이어지게 해주신다면,

저희들은 마땅히 노력하여 더욱 부처의 가르침을 지키고 부처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으려고 합니다.

이규보(李奎報),『大藏刻板君臣祈告文[대장각판군신기고문]』, 고려 12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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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경(經)과 율(律)에서 요점을 각 주제별로 뽑아 출전을 표시하여 학습하는데 편리하게 엮은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고려 고종 30년(1243)에 남해의 분사대장도감에서 목판을 새기고,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전체 50권중 제8권에 해당되는데 『고려대장경』을 제본한 것이다.

또한 새긴 사람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는데, 새긴 사람의 솜씨에 따라 정교하고 조밀함의 차이를 보인다.

이 책은 고려시대 대장경을 연구하는데 상호 보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문화재청의 상세 해설문>

 

 

최충헌 삼부자를 위한 경전

佛頂心觀世音菩薩大陀羅尼經 · 經匣(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과 경갑)  :  보물 제 691호  시대 = 고려 1206년 - 1219년 목판본

 

고려 최씨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인 최충헌(崔忠獻, 1149년-1219년)과 그 두 아들인 최우(崔瑀, ?- 1249년)와 최향(崔珦, ?-1230년)을 위해

발원한『佛頂心觀世音菩薩大陀羅尼經(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과 경전을 넣었던 경갑이다.

경전 끝에는 최충헌 삼부자가 재난이 소멸되고 복을 누리며 오래 살기를 기원한다는 발원문이 있다. 은으로 만든 경갑은 도금되어 있고,

한 면에는 인왕상이, 다른 한 면에는  칠층탑이 새겨져 있으며 위에는 끈을 맬 수 있는 고리가 있다.

당시에는『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을 읽거나 가지고 다니면 온갖 재앙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佛頂心觀世音菩薩大陀羅尼經)는 고려 중기에 펴낸 것으로 권 상 · 중 · 하 3권이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되어있으며, 펼쳤을 때의 크기는 세로 5.3㎝, 가로 275㎝이다. 권 상 · 중 · 하 뒤에는『일자정륜왕다라니』,『

자재왕치온독다라니』, 『관세음보살보문품』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은에다 금을 입혀 만든 세로 5.3㎝, 가로 3.5㎝, 두께 0.5㎝의 상자에 책을 넣고 이를 다시 세로 13.8㎝, 가로 12.8㎝, 두께 6㎝의

나무상자에 넣어 보관하였다. 은합 윗부분에 고리가 좌우에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들고 다니기 위한 일종의 장신구였음을 알 수 있다.
책의 끝부분에 적혀 있는 기록을 보면 최충헌과 최우, 최향 3부자가 당시 겪고있던 어려운 난을 빨리 해소하고

장수를 누리기 위해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윗부분이 약간 잘려지고 새겨진 글자들과 면이 깨끗하지 못하여 읽기 어려운 것으로 보아 나중에 다시 찍은 판본으로 여겨진다.


고려 중기 최씨 무신정권의 중심인물을 위하여 호신용(護身用)으로 간행된 목판본으로 당시 신앙의 한 유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의 상세 해설문>

 

 

국왕이 발원한 사경(감지에 은니(銀泥, 경문)와 금니(金, 변상)

不空羂索紳變眞言經 卷十三(불공견삭신변진언경) : 국보 제 210호   시대 =  고려 1275년

 

고려 국왕이 발원하여 만든 사경(寫經)이다. 사경이란 불교 경전의 내용을 옮겨쓰면 공덕을 쌓는 행위 또는 옮겨 쓴 경전을 의미한다.

고려시대에는 푸른색이나 붉은색으로 물들인 종이에 금과 은으로 글과 그림을 쓰고 그리는 화려한 사경이 많이 제작되었다.

사경의 경위 등을 적은 사성기(寫成記)에 따르면 1275년 고려 충렬왕의 발원으로 은자대장(銀字大藏)을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경 첫머리에는 금으로 신장(神將)을 그리고, 은으로『불공견삭신변진언경』권 13의 경문(經文)을 옮겨 썼다.

권 끝의 뒷면에는 사경승(寫經僧)인 삼중대사(三重大師) 안체(安諦)가 썼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감지은니불공견삭신변진언경 권13 (紺紙銀泥不空羂索紳變眞言經 卷十三)

이 책은 검푸른 색의 종이에 은가루를 사용해서 직접 불경의 내용을 옮겨 적은 것으로, 두루마리처럼 말아서 보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전체 30권 중 권13에 해당하는 것으로 크기는 세로 30.4㎝, 가로 905㎝이며,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것을 되찾아온 것이다.
책 앞의 제목 끝에는 천자문의 한 글자인 ‘모(慕)’자가 표시되어 있어 천자함(千字函: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책의 번호를 매기는 방법)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으며, 더불어 이 책이 대장경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책의 첫머리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상을 금색의 가는 선으로 그렸고,

이어 경전의 내용을 은색글씨로 썼다. 책 끝에는 고려 충렬왕 1년(1275)에 왕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경전이며,

삼중대사(三重大師) 안체(安諦)가 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시대 왕에 의해 만들어진 이런 종류의 경전이 여러 종 전래되고 있지만 이 책이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신장상을 갖추고 만들어진 기록까지 모두 갖추고 있는 점도 높게 평가되며, 정교한 그림과 정성어린 글씨는 이 책의 품위를 한층 더 높여준다.

<문화제청의 상세 해설문>

 

 

새도가 염승익이 발원한 묘법연화경(감지에 은니(銀泥, 경문)와 금니(金, 변상)

妙法蓮華經 券 7 (묘법연화경 권 7)  :  시대 = 고려 1283년

 

고려 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염승익(廉承益)이 발원한 사경이다. 염승익은 국왕과 궁주(宮主)의 안녕과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고,

자신은 죽어서 아미타불을 만나 극락왕생하는 것과 가족들의 평안한 삶을 기원하였다.

개인이 발원한 사경임에도 불구하고, 1행에 14자를 쓰는 형식과 표지화에 이어 신장상을 그리는 점은 고려시대 국왕이 발원한

사경의 특징과 일치한다.  금으로 신장상을 그리고 은으로『妙法蓮華經(묘법연화경)』의 글을 적었다.

 

 

봉상대부 허사청 부부가 발원한 묘법연화경 : 상지에 은니 묘법연화경(橡紙銀泥妙法蓮華經)

妙法蓮華經 券1- 7 (묘법연화경 권1- 7)  :  국보 제 185호    시대 = 고려 1373년

 

봉상대부(奉常大夫) 지옥주사(知沃州事) 허사청(許士淸)과 그의 부인 안동군부인 권씨가 발원 및 시주하여 조성한『묘법연화경』이다.

봉상대부는 정 4품에 해당하는 관직이며 옥주는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이다. 이들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발원문에는『화엄경[華嚴經]』과 『금강경[金剛經]』등 여러 경전을 금으로 사경하였고,『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銀으로 사경하였다는

내용이 있어 금니와 은니를 사용할 정도의 경재력을 갖춘 발원자였음을 알 수 있다.

갈색으로 물들인 동이에 금니로 테두리를 기르고 경문은 은니로 썼다.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나라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엄경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의 확립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삼국시대 이래 가장 많이 유통된 불교경전이다.
이 책은 후진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 7권을 고려 공민왕 22년(1373)에 은색 글씨로 정성들여 옮겨 쓴 것이다.

각 권은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세로 31.4㎝, 가로 11.7㎝이다.
책 끝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봉상대부 허칠청의 시주로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뒷면에 ‘영암도갑사유전(靈巖道岬寺留傳)’

또는‘당사유전(當司留傳)’이라고 먹으로 쓴 기록이 몇 군데에 보이고 있어 원래 전라남도 영암의 도갑사 소장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경의 내용을 요약하여 그린 변상도(變相圖)는 없으나, 정성들여 만들었고 보존이 잘 된 편이다.

특히 이 책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가 최근에 되찾아온 것으로서 더욱 중요하게 평가된다.

<문화제청의 상세 해설문>

 

 

우왕과 원자의 장수를 위해 간행한 경전 

大方廣佛華嚴經 普賢行願品 別行疏(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 별행소)  :  보물 제 1126호   시대 = 고려 1387년   목판본

 

중국 당나라 반야(般若)가 한역(漢譯)한 40권본『화엄경[華嚴經]』가운데 마지막인 권 40에 해당되는「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

대하여 당나라 승려 징관(澄觀)이 해석한 책이다. 1256년 무신정권의 권력자 최우(崔瑀)의 장수와 안녕을 빌기 위하여 간행했던 책을

1387년에 다시 새긴 것이다. 이색(李穡)이 지은 발문(跋文)에 의하면, 우왕(禑王)의 부인 근비(謹妃)가 우왕과 원자(元子, 창왕[昌王])를

위한 경전 간행을 명하였는데, 정공권(鄭公權)의 부인 한씨(韓氏)가 이를 알고, 죽은 남편이「보현행원품소」를 간행하려고 준비했던 목판을

제공하고 재정적인 후원을 하였다. 또한 중앙의 고위 관료들이 같이 발원하였다.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은 해탈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보현보살의 실천과 염원을 담고 있으며,

화엄경 중에서도 판각이 제일 성행하였던 부분이다.
당나라 반야(般若)가 한문으로 번역한『화엄경』정원본 40권 가운데 마지막 권으로 징관(澄觀)이 풀이한 책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세로 26.7㎝, 가로15.6㎝이며 불상 안에서 나온 듯 얼룩진 자국이 있으나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책 끝부분에 고려 고종 43년(1256)에 최우의 명복을 빌기 위해 펴낸 책을 원본으로 삼아 고려 우왕 13년(1387)에 다시 새긴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색(李穡)이 쓴 기록을 보면 왕비가 왕과 원자의 복을 빌기 위해 고려말 승려인 환암(幻庵) 혼수(混修)의 소장본을 가지고 책을 만들려고

강인부에게 그 뜻을 전하였는데, 이 사실을 정공권의 부인이 듣고 죽은 남편이 만들려고 준비한 판본과 경비를 내어 간행하는데 협력하였다고 한다.

화엄경의 마지막 대단원을 구성하는 부분인 만큼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불교 경전 가운데도 많이 읽혀져 왔다.

<문화제청의 상세 해설문>

 

 

원나라 황제와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며 발원한 화엄경 = 감지에 금니  호림박물관 소장

   大方廣佛華嚴經 普賢行願品(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 : 보물 제 752호   시대 = 고려 1334년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인물인 안새한(安賽罕)이 발원한 사경으로 그는 원나라와 가깝게 지냈던 인물이었다.

사성기에는 부모의 은혜와 원나라 황제와 황태후, 태자 등의 덕으로 위계(位階) 2품을 받은 것에 감사하며 좋은 금으로 화엄경을 옮겨 썼다고 기록하였다.

이 처럼 개인이 발원한 사경은 대붕적인 경전인「묘법연화경」이나「화엄경」이 많고 발원의 내용이나 목적도 개인적인 것이 특징이다.

중국 원나라 사경의 형태나 그림 양식의 영향을 받은 사경으로 친원 세력이었던 후원자의 성향을 보여준다.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입불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 (紺紙金泥大方廣佛華嚴經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입불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紺紙金泥大方廣佛華嚴經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은 당나라 반야(般若)가 번역한

『화엄경』정원본 40권 가운데 권34에 해당하며, 보현보살이 선재동자에게 부처의 공덕을 얻기 위해 닦아야 할 10가지 계율을 설법한

보현행원품의 내용이 들어있다. 검푸른 종이에 금가루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썼으며,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되어 있고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34㎝, 가로 11.5㎝이다.
권의 첫머리에는 고려 충숙왕 복위 3년(1334)에 원나라의 안새한이 부모의 훌륭한 가르침을 기리기 위하여 만들었음을 알 수 있는 간행기록이 있다.

이어 설법한 내용을 요약하여 그린 변상도(變相圖)가 금색으로 세밀하게 그려져 있으며, 그 뒤에는 본문이 역시 금색으로 쓰여져 있다.

개인의 뜻에 의해 만든 것이기는 하나 그 품격이 정교하고, 고려시대 불경의 격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문화제청의 상세 해설문>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입불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 (紺紙金泥大方廣佛華嚴經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

 

이어 설법한 내용을 요약하여 그린 변상도(變相圖)가 금색으로 세밀하게 그려져 있으며, 그 뒤에는 본문이 역시 금색으로 쓰여져 있다.

 

세조가 죽은 아들을 위해 간행한 월인석보

月印釋譜 券 11 · 12(월인석보 권 11 · 12)  :  보물 제 935호    시대 = 조선 1459년  목판본

 

세조가 간행한『월인석보[月印釋譜』는 세종이 간행한『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세조가 수양대군(首陽大君) 시절에 간행한

『석보상절[釋普詳節]』을 합쳐서 만든 것으로, 부처의 생애를 기록한 책이다.

1455년 조카인 단종을 멀리 유배 보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아버지와 죽은 아들 도원군(덕종[德宗])의 명복을 빌고자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釋普詳節[석보상절]』을 수정 · 보완하여『월인석보[月印釋譜』를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의 뜻과 널리 불법을 알리고자 했던 세조의 바람이 모두 담겨 있다.  

세조는 이를 통해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대외적으로 알리며 왕권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경언해서이다.

『석보상절』은 1447년 왕명에 따라 수양대군이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석가의 일대기를 한글로 쓴 불경서이고,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은 것이다.
『월인석보』권 11, 12는 그 동안 알려진 10권 8책에는 없는 부분에 해당되는 것으로 세조 5년(1459)에 간행된 초판본이다.

권 11에는 『월인천강지곡』 제272부터 275까지 실렸고 『석보상절』은 「법화경」 권1의 내용이 실려 있다.

권 12에는 『월인천강지곡』 제276부터 278까지 실렸고 『석보상절』은 「법화경」 권2의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책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제일 먼저 나온 한글불교대장경으로, 조선 전기의 훈민정음 연구와 불교학 및 서지학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문화제청의 상세 해설문>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원각경 언해본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諺解本(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언해본) : 보물 제 970호   시대 = 조선 1465년   목판본

 

세조는 1461년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불교 경전을 한글로 간행하는 사업을 추진하였다.『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은

석가모니부처와 열 두 보살의 문답이 주된 내용으로 언해본은 세조가 직접 토를 달고, 승려 신미(信眉) 효령대군(孝寧大君), 한계희(韓繼禧) 등이

번역한 것을 간경도감에서 간행하였다.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불교 경전은 대부분 선왕, 왕비, 세자의 추복을 기원하고 한글경전의 경우 훈민정음의 확산,

불법의 유포, 불교 교리의 보급을 목적으로 하였다. 세조의 사후 1471년 간경도감은 폐지되었다.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은 줄여서 ‘대방광원각경’, ‘원각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의 지눌이 깊이 신봉하여

‘요의경’이라고 한 뒤 널리 유통되었다.  이 책은 세조 7년(1461) 불경을 한글로 풀어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세조 11년(1465)에 목판에 새기고 닥종이에 찍어 낸 것이다. 현재는 서(序), 권 상1-1, 권 상2-1∼3, 권 하1-1∼2, 권 하2-1∼2가 전하고 있으며,

크기는 세로 32.7㎝, 가로 23.7㎝이다. 인쇄상태가 정교한 것으로 보아 목판에 새기고 나서 처음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책의 첫머리에는 판각에 관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고, ‘校正(교정)’의 도장이 찍혀있다. 책 끝에 모두 3차례에 걸쳐 잘못된 부분을 교정했다고

적고 있는데, 그만큼 본문의 내용에 정확도를 기했음을 알 수 있다.

간경도감에서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한 경전 중 원각경은 전하는 예가 드물기 때문에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으며,

특히 ‘校正(교정)’의 도장이 찍힌 초간본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제청의 상세 해설문>

 

 

정희 대왕대비가 발원한 예념미타도량참법

예념미타도량참법 (禮念彌陀道場懺法)  : 보물  제949호   시대 =  조선 1474년  목판본

 

예념미타도량참법 (禮念彌陀道場懺法) 은  아미타불을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하면서 온갖 악업과 죄업을 참회하고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미타참법(彌陀懺法)을 설한 의식집이다.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발문(跋文)에 의하면, 세조의 비인 정희대왕대비(貞熹大王大妃)가

성종비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간행하였으며, 인수대비(仁粹大妃)를 비롯한 내명부(內命婦)와 종친, 그리고 당대 고승들이

후원하였다. 후원자 및 간행에 관여한 관원들의 명단에는 백종린(白終麟)과 이장손(李長孫)등 화원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과거칠불과 서방아미타불, 미륵불 등의 도상을 판각하기 위한 그림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참법이란 경전을 읽으면서 죄를 참회하는 불교 의식을 말하며, 서방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대상으로 삼는 것을 미타참법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서방 극락정토에서 왕생하는 것을 바라는 신앙인들이 많아 삼국시대부터 크게 성행하였다.
이 책은 나무판에 새긴 다음 닥종이에 찍은 것으로 권1에서 권5까지를 1책으로, 권6에서 권10까지를 1책으로 묶었다.

크기는 세로 37㎝, 가로 24㎝ 이고, 연두색의 천으로 싸인 표지에는 ‘淨土文(정토문)’이라는 제목이 적혀있다.
책머리에 과거 · 현재  ·미래 삼세불(三世佛)의 모습을 이름과 함께 묘사하고, 이어서 본문의 내용이 실려 있다.

책 끝에는 1474년에 김수온이 쓴 글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판각에 참여한 당시의 유명한 승려와 왕실 종친, 간행에 참여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서 왕실에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치밀하게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왕실에서 주관하였기 때문에 일반 사찰에 널리 퍼지지는 않았는데,

1503년에 해인사에서 다시 간행하여 현재 해인사 대장경판(국보 제32호)에 포함되어 있다.

왕실에서 주관하였기 때문에 글을 쓴 사람, 그림을 그린 사람은 물론이고 목판에 새기는 작업을 한 사람도 모두 일류기술자들로 이루어진 조

선 전기 최고 수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제청의 상세 해설문>

 

 

용주사 목판으로 간행한 부모은중경 =  佛說大報父母恩重經(불설대보부모은중경) :  시대 = 조선 1796년  목판본

 

정조의 어명으로 간행된 용주사본『불설대보부모은중경』의 인쇄본이다. 각 장면의 구도와 건물이 지극히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화면의 구성이 짜임새 있다. 인물들의 자세나 표정 등은 유려하고 활달한 선으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왕실기관인 규장각에서 간행하여 배포한 관판본(官版本)서적의 특징이다.

용주사 판본은 문예군주라 일컬어지는 정조의 후원과 규장각의 축적된 판화 제작기술이 뒷받침되어 완성된 것이다.

또한 복각(覆刻)의 예가 없는 유일한 목판으로, 이는 제작 배경과 간행처, 간행 주체의 성격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박물관에 표시된 해설문에서>

 

 

정조가 용주사에 하사한 부모은중경 목판

佛說大報父母恩重經 木版(불설대보부모은중경 목판)  : 보물 제 1754호   시대 = 조선 1796년

 

부모의 크고 깊은 은혜에 보답하도록 가르친『佛說大報父母恩重經(불설대보부모은중경)』의 내용을 새긴 목판으로 정조의 어명으로

제작되었다. 정조가 우연히 대보부모은중경(大報父母恩重經)를 읽고 감동하여『부모은중경』의 간행을 직접 명하였다.

정조는 백성교화의 명분으로 경전 간행을 지시했지만,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정조는 목판, 동판, 석판을 만들게 하여 용주사에 하사했다. 목판은 모두 42판으로 한문, 한글, 변상도를 양면에 양각했다.

변상도 중<주요수미도[周遶須彌圖]>는 자식이 부모를 업고 수미산을 백번 천번 돌더라도 부모의 깊은 은혜를 다 갚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복장물을 넣은 관음보살상

觀音菩薩坐像 · 服藏物(관음보살좌상과 복장물)  :  시대 = 고려 13세기,  목조

관음보살(觀音菩薩)은 세상의 소리를 살펴 고난에 처한 사람의 외침을 듣고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고려시대 관음보살상은 갸름한 얼굴에 입체적인 이목구비가 특징으로 자비로운 보살의 이미지를 부드럽고 우아한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높은 보관과화려한 장신구는 섬세하고 귀족적인 고려시대 불교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오른쪽 다리는 올리고 왼쪽 다리는 아래로 늘어뜨린 유희좌(遊희坐) 자세는『화엄경[華嚴經]』『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의 바위 위에 앉은 관음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눈에는 수정을 감입하고 총 15개의 부재를 못으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자연스러운 자세를 표현하였다.

<박물관에 표시된 해설문에서>

 

 

觀音菩薩坐像 · 服藏物(관음보살좌상과 복장물)  상체

 

 

觀音菩薩坐像 · 服藏物(관음보살좌상과 복장물)   뒷면 모습

 

 

觀音菩薩坐像 머리 안에 봉안한 복장물

관음보살상 머리 안에서『大隨求陀羅尼經[대수구다라니경]』판본으로 싼 원통형 물체와 오색실이 발견되었다.

원통형 물체는 관음보살상 머리 정중앙에 있었고 은과 납의 합금에 금도금을 했다. 원래 방울 형태였던 후령(喉鈴)이 원통형으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진한 적갈색, 미색, 연주황색, 연두색 실도 함께 발견되었다.

『大隨求陀羅尼經[대수구다라니경]』판본은 원래의 경전에서 주문(呪文)을 발취하여 한자와 산스크리트어로 인쇄한 것이다.

다라니를 탑이나 불상 안에 넣으면 부처가 따라와 신통함과 영험함이 다해지며 재앙이나 화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

관세음보살의 복장물

여러 부재를 연결하여 만든 관음보살상 내부에는 자연히 빈 공간이 생겼는데, 이 안에 여러 가지 물품을 넣었다.

불상 안에 넣는 이러한 물품 또는 물목(物目)을 복장물(腹藏物)이라고 하며 불상에 신성함과 영험함을 부여한다.

관음보살상은 머리와 몸체 부분에서 복장물이 발견되었다. 머리에서 발견된 다라니 경전 판본과 오색실 등은 13세기 경에 납입하였고

몸체에서 발견된 후령통(喉鈴筒)과 경전 판본은 조선 전기에 넣은 것이다. 제작 시기나 후원자를 기록한 발원문은 남아 있지 않지만,

관음보살상의 복장물을 여러 물품을 마련해야 하는 새로운 불상 봉안 방식이 등장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여러 물품을 마련하기 위한 후원계층의 확대로 이어졌다.

 

 

   

         동쪽 보병 "훔" 자 삼베조각                                                                중앙에 있는 오보병<금박을 입힘>

 

觀音菩薩坐像 몸 안에 납입한 오보병 과 봉안한 복장물

관음보살의 몸 안에서는 나무로 만든 다섯개의 병이 여러 직물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병을 보배로 만든 병이라는 의미로

 "오보병(五寶甁)"이라고 하며 중앙과 동남서북의 다섯 방향을 상징한다.

오보병은 나무로 병 모양의 형태를 만들고 옻칠을 한 후 색을 칠했으며 중앙 보병은 금박을 입혔다. 병 안에는 곡물이 담겨 있고

명주 풀솜으로 병목을 감거나 입구를 막았다.

조선시대에는 보통 곡물을 직물로 싼 것을 오보병이라고 불렀는데 이와 달리 이 오보병은 병 모양을 충실히 재현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인 15세기 경 불상을 수리하거나 새로 금칠을 하면서, 새로운 복장물과 함께 원래의 오보병을 넣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복장물로 납입한 경전 판본

보살상에서 발견된 복장물 중에는 1399년 간행한『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견보탑품[見寶塔品]』과 15세기 간행된『묘법연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판본이 있다. 이 경전의 판본들에 오색실을 싸서 보살상 안에 넣었다.

1399년 판본은 구마라집(鳩摩羅什, 344년 - 413년)이 한역하고 1126년 송나라 계환(戒環)이 해석한「묘법연화경요해[妙法蓮華經要解]」이다.

인쇄된 글씨가 긁고 일부 결획이 있으며 판각이 마모된 흔적이 보여 초간본이 아니라 조선 초기의 목판을 15세기 무렵에 인쇄한 것으로 보인다.

 

 

 

 

 

 

 

 

산원(散員)  김정(金靖)이 새긴 밀교대장 : 密敎大藏 券 61(밀교대장 권 61)   :  시대 =  고려 13세기 목판본   소장 = 호림박물관

 

밀교대장(密敎大藏)은 경전 중에서 주문만을 모아 한자와 산스크리트어로 새긴 경전이다. 

관세음보살의 머리에서 나온『大隨求陀羅尼經[대수구다라니경]』과 유사한 형식의 판본이다.

권 끝에는 종 8품 무관직인 산원(散員) 김정(金靖)이 새겼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김정(金靖)은 무신정권의 중심에 있던

김준(金俊, ? - 1268년)의 아들이다. 김정(金靖)이 산원(散員)일 때이므로 판각한 시점은 1259년 - 1265년으로 추정된다.

밀교대장은 조선초기까지 있었으나 세종 때 일본에 밀교대장경판을 보낸 이후 소실되었다.

 

 

宋英 發願 陀羅尼 板本(송영이 발원한 다라니 판본)  :  시대 = 고려 1313년, 목판본

 

1313년 통헌대부 검교펑리(檢校評理) 송영(宋英, ? - 1322년)이 중국의 황제와 고려 임금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일체중생이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하며 판각한 다라니 판본이다. 

1293년 송영은 원(元)에 사신으로 가서 국왕의 입조(入朝)를 청하고 일본 정벌 상황을 전했으며

1300년에는 元의 황제가 고려의 노래를 청하자 쌍연곡(雙燕曲)을 부른 일화가 있다.

송영(宋英)은 1310년 검교평리(檢校評理)  제주목사가 되었으므로 판각을 한 1313년의 관직명과 일치한다.

1318년에는 제주 반란을 제압하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으며 1322년 사망하였다.

 

 

宋英 發願 陀羅尼 板本(송영이 발원한 다라니 판본)  :  시대 = 고려 1313년, 목판본

 

 

부호장이 후원한 청동은입사 향완 「己丑 香琓  :  국보 제 214호   시대 = 고려 1229년,

청동에 은입사,  소장 = 삼성미술관 리움   * 입을 다문 용

 

표면에 홈을 새기고 은실을 끼워 문양을 표현하는 은입사(銀入絲) 기법으로 용과 봉황을 정교하게 표현한 향완이다.

고려의 화려한 귀족문화를 대표하는 은입사 기술은 귀한 재료인 은을 쓸 뿐만 아니라 뛰어난 솜씨의 장인이 제작하므로 후원자의 경제력이

뒷바침되어야 제작이 가능하다. 이 향완은 진례군(進礼郡)의 부호장 김부(金孚)가 후원한 것이다.

부호장은 보통 중앙의 귀족이나 관료에 비해 정치력이나 경제력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일부 호장은 중앙으로 진출하거나,

중앙 관료와 비등한 재력을 갖기도 했다. 이들의 후원 규모에 따라 향완의 완성도도 달라졌는데, 

이 향완은 최고의 장인이 제작한 걸작일 뿐만 아니라 용과 봉황으로 장식하여 고귀함을 갖추고 있다.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부호장이 후원한 청동은입사 향완 「己丑 香琓  :  국보 제 214호   시대 = 고려 1229년,  청동에 은입사, 

소장 = 삼성미술관 리움 또 다른 이름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 (興王寺銘 靑銅 銀入絲 香垸)

 

향로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는다는 의미의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도구이다.

이 향로는 높이 40.1㎝, 입 지름 30㎝의 크기로 받침, 몸체, 입 3부분으로 되어있다. 입은 수평으로 넓게 퍼진 테를 가진 전이 있으며,

그 전을 구슬 무늬로 장식하고 연꽃과 덩굴 무늬를 새기고 은을 입혔다. 몸체에는 대칭되는 위치에 꽃으로 창을 만들고

그 안에 용과 봉황을 세밀하게 은입사하였다. 남은 공간에는 갈대와 연꽃을 새기고 위에는 기러기를 새기고, 밑에 오리를 새겨 은을 입혔다.
나팔형 받침은 위의 가장자리를 쌍선으로 굵게 표시하고, 위로 오르면서 덩굴무늬를, 하단에는 풀무늬를, 굽에는 꽃무늬를 은입사하였다.

은입사 문양은 모두 뛰어난 솜씨를 보여줄 뿐아니라 회화적 가치도 아주 높다.

받침 굽에는 34자의 글씨가 남아 있어, 이 향로가 충렬왕 15년(1289)에 제작되어 개풍군 흥왕사에 있었던 것임을 알려준다.

세련된 은입사 기법과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과 잘 사용하지 않던 용과 봉황을 문양으로 사용한 점은 이 향로의 가치를 높여 준다.

<문화제청의 상세 해설문>

  

 

부호장이 후원한 청동은입사 향완 「己丑 香琓  :  국보 제 214호   시대 = 고려 1229년,  청동에 은입사, 

소장 = 삼성미술관 리움 또 다른 이름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 (興王寺銘 靑銅 銀入絲 香垸)  *여의주를 문 용

 

 

은퇴한 호장이 발원한 「大惠院 鐘(대혜원 명 종) 靑銅  :  보물 제 1781호   시대 =  고려,  소장= 우학문화재단, 용인대학교

 

예불이나 공양에 앞서 울리는 종이나 쇠북은 사찰에서 매일 사용되는 필수적인 불교공예품으로 지역 사회 신도들의 후원으로 제작된 예가 많다.

이 종은 옛 경기도 안성 지역인 죽주(竹州)의 대혜원(大惠院)이라는 사찰에서 조성하였다.

상호장(上戶長)을 지내고 은퇴한 안일호장(安逸戶長) 최(崔)가 주요 발원자였고, 승려 현감(賢堪)이 종의 제작을 주관하였다.

이들은 종을 주조하면서 국왕의 만수무강과 국토의 평안함, 그리고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하였다.

고려시대 호장은 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향리(鄕吏)의 수장으로 사찰의 주요 후원자였다.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명문 = 奉 佛第子 南贍副州 高麗國  竹州 大惠院 金鍾 造成(봉 불제자 남섬부주 고려국  죽주 대혜원 금종 조성)

特爲,  聖窮萬歲國土太平法界   生亡共增菩提之愿以   前上戶長同心爲金鍾入重   壹百陸十三斤印   時癸未  八月 二十八日   安逸戶長  崔  

특위, 성궁만세국토태평법계  생망공증보제지원이   전상호장동심위김종입중   일백육십삼근인   시계미  팔월 이십팔일   안일호장  최

棟梁道人賢堪   院主大師智成   南日月寺依芙希素

 동량도인현감   원주대사지성   남일월사의부희소

 

= 불제자(佛第子)가 남섬부주(南贍副州) 죽주(竹州) 고려국(高麗國) 대혜원(大惠院)의 금종(金鍾)을 만들어 바치는 것은

특히 임금님의 장수와 국토의 태평과 법계(法界)의 죽거나 산자들이 모두 보리(菩提)를 이루기를 기원한 것으로써

전() 상호장(上戶長)이 한마음으로 금종을 만들었으니 무게는 163근이다.

때는 계미년 8월 28일.  안일호장(安逸戶長) 최()   동량(棟梁) 도인(道人) 현감(賢堪)   원주(院主) 대사(大師) 지성(智成)

남일월사(南日月寺) 의부(依芙) 희소(希素)

 

「大惠院 鐘(대혜원 명 종)의 용뉴

 

 

반대편인 명문이 안 써 있는 쪽

대혜원명 동종 (大惠院銘 銅鍾)

대혜원명 동종은 전체적으로 푸른 녹이 슬어있으나 주조상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종신에 음각된 명문에 의하면

1223년에 죽주(경기도 안성 부근) 대혜원 종으로 주성된 것이다.
형태는 음통이 있는 종뉴 아래 입상화문대가 장식된 불룩한 종신이 연결된 모양인데, 종뉴와 종신의 외형, 상 · 하대의 위치,

Ω식의 종유는 신라종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입상화문대의 배치는 고려후기 종의 특징이다.

현재 알려진 고려종 가운데 포항 오어사 동종이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을사명 동종(乙巳銘 銅鍾)과

전체적인 형태와 구성, 문양 등에서 매우 유사해 비교된다.


먼저 종뉴를 보면 사조룡(四爪龍)은 이례적으로 전보(錢寶) 모양의 여의주를 물고서 S자 형으로 몸을 구부린 채 서기(瑞氣)로써 음통을 싸고 있다.

비록 왼쪽 다리는 결실되었지만 부리부리한 눈, 섬세한 지느러미와 비늘이 표현된 신체나 동세(動勢)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5단으로 구성된 음통은 1, 2단은 복련과 앙련이, 3단은 연화문, 4단, 5단은 앙련이 고부조(高浮彫)되었고

그 끝에는 작은 구슬이 장식되었으나 1개만 남았고 3~4개는 결실되었다.
상대 문양은 오어사 동종은 분명한 모란당초문인데 비해 이 종은 작약에 가까운데, 모란과 작약은 둘 다 불교의식에 상단화(上壇花)로 장엄되는 꽃이다.

하대문양은 상대와 같은 모란당초문으로 가는 줄기에 풍성한 화판의 큰 꽃과 작은 잎들이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유곽과 유곽사이의 아랫쪽 종복에는 원문범자(圓文梵字)로 된 당좌와 보살좌상이 교대로 배치되었다. 특히 삼면관을 쓴 보살상은 구름위에 무릎을 꿇고서

합장한 자세로 앉아 있는데, 보살의 자세와 구름모양은 오어사 동종, 을사명 동종의 보살좌상과 흡사하다.

범문이 장식된 당좌는 유일한 예로서 윤곽은 뇌문을 돌리고 외연은 연판문을 양감있게 조각한 것이다.

명문은 계미년 8월28일에 죽주(竹州) 대혜원(大惠院) 종을 전(前) 상호장(上戶長)이 중량 113근을 들여 발원하였고,

70세가 넘어 퇴직한 최호장, 동량도인 현담, 원주 지성, 남일월사 승려 등이 주성에 동참하였다는 내용이다.

이종은 입상화문대와 보살좌상이 있어 고려 후기에 속하는데, 계미년은 1163년, 1223년, 1283년 중 13세기 전반에 제작된 오어사 동종이나

을사명 동종과 전체적인 형태, 보살상 모양, 유곽대 문양이 매우 유사하고,

 각 부분의 표현수법을 볼 때 오어사 동종보다는 다소 덜 수려하고 을사명 동종보다는 섬세해서 122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제청의 상세 해설문>

 

 

 

 

관료들이 신앙 결사를 위해 후원한 쇠북  「壬子」銘 飯子(임자명 반자) 靑銅  : 보물 제 495호   시대 = 고려 1252년   소장 = 옥천사

 

고위 관료와 군부인(郡夫人), 승려 등이 주요 후원자가 되어 1252년에 제작한 쇠북이다.

지리산 안양사(安養寺)에 봉현하기 위해 만들었는데,  안양사는 고려시대 성행했던 불교 신앙 결사 중의 하나이다.

쇠북을 만든 장인은 별장동정(別將同正) 한중서(韓仲叙)로 개경에서 활동하였다.

중앙의 관료 집단이 후원하고 당대 최고의 장인이 만들었다는  위용에 걸맞게 쇠북의 무게는 60근에 달한다.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명문 = 高麗 二十三王  環甲 之年 壬子 四月十二日 在於  京師 工人 家中 鑄成 智異山 安養社 之 飯子 入重 六十  餘斤 同願  施主者

고려 이십삼 왕 환갑 지년  임자 사월십이일 재어 경사 공인 가중  주성  지리산  안양사 지 반자 입중 육십 여근  동원  시주자

樞密院 右副承宣 孫挺烈 尙書 皇甫琦 檢校尙書 兪承錫 華嚴業 三重 勝壽 大選 景興 知識 正之 故 上將軍 奇弼宣 之 嘉偶 珍原郡夫人 吳氏

추밀원 우부승선 손정열 상서 황보기 검교상서 유승석 화엄업 삼중 승수 대선 경흥 지식 정지 고 상장군 기필선 지 가우 진원군부인 오씨

郞將 金伯龍 之 嘉偶 樂浪郡夫人 崔氏  同文院錄事  鄭常 之 嘉偶 海陽郡君 金氏 學錄 朱竩 之 嘉偶 金氏 比丘尼 淸惠 等 此 根幹 外

랑장 금백용 지 가우 락랑군부인 최씨 동장원록사 정상 지 가우 해양군군 김씨 학녹 주의 지 가우 김씨 비구니 청혜 등 차 근간 외

錙銖 之 單심■ 多故       不具錄 = 工人 別將同正 韓仲叙   棟梁 道人 宗一  負擔人 上座 普心 使用長存

치수 지 단심■ 다고       불구록 =  공인 별장동정 한중서  동량 도인 종일 부담인 상좌 보심 사용장존

 

=  고려 23대왕(고종)의 환갑(環甲)이 되는 해인 임자년(壬子 1252年) 4월 12일 개경(京師)에 있는 공인(工人)의 집에서

지리산(智異山) 안양사(安養社)의 반자(飯子)를  주조하여 만드니, 무게가 60여 근이었다.

함께 발원한 시주(施主)는 추밀원(樞密院) 우부승선(右副承宣) 손정열(孫挺烈). 상서(尙書) 황보기(皇甫琦), 검교상서(檢校尙書),

유승석(兪承錫), 화엄종(華嚴宗) 삼중대사(三重大師) 승수(勝壽), 대선(大選)인 경흥(景興), 지식(知識), 정지(正之),

돌아가신 상장군(上將軍) 기필선(奇弼宣)의 처인 진원군부인(珍原郡夫人) 오씨(吳氏),

낭장(郞將) 김백룡(金伯龍)의 처인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 최씨(崔氏), 동문원 녹사(同文院 錄事), 정상(鄭常)의 처인 해양군군(海陽郡君) 김씨(金氏),

학록(學錄) 주의(朱竩)의 처인 김씨(金氏).  비구니(比丘尼) 청혜(淸惠) 등입니다.

이들 근간(根幹) 외에 약간 시주한 사람도 매우 많기 때문에 모두 기록하지 않습니다. 공인(工人)은 별장동정(別將同正) 한중서(韓仲叙)이며,

동량(棟梁) 도인(道人)은 종일(宗一)이고, 책임자(負擔人[부담인])는 상좌(上座) 보심(普心)이니, 영원토록 사용하십니오.

 

경남 고성 옥천사 청동북 (固城 玉泉寺 靑銅金鼓)  :  보물 제 495호

 

고성 옥천사 청동북(固城 玉泉寺 靑銅金鼓)은 반자란 절에서 사용하는 금속으로 만든 일종의 타악기이다.

금고 또는 금구라고도 하며 절에서 대중을 불러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데 사용한 도구이다.
이 반자는 지름 55㎝, 너비 14㎝로, 표면에 굵고 가는 선으로 4개의 테두리를 둘러 4개의 원을 만들었다.

중심원에는 6개의 둥근 연꽃열매가 돌출 되어 있으며, 그 다음 원에는 연꽃잎이 겹쳐서 도드라지게 새겨있다.

가장 바깥 원에는 덩굴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고, 그 안쪽의 원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다.
옆면은 중앙에 굵게 돌출된 선이 있어 위 아래로 구분되고, 선 위로 둥근 모양의 고리가 3개 있어 매달 수 있게 되어 있다.

옆면 위쪽에 쓰인 글로 미루어 보아 고려 고종 39년(1252)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반자는 처음부터 옥천사에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지리산 안양사의 것이었는데, 언제부터 옥천사에 보관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반자는 무늬가 뚜렷하고 손상이 없으며, 옆면의 글을 통해 만든 시기와 유래, 관계자의 성명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문화제청의 상세 해설문>